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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야구의 정석 (1)
준혁은 자신의 발아래 떨어져 있는 야구 교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이게?”
텔레비전에서 책이 떨어지다니.
너무나 황당했다.
덕분에 자신이 조금 전까지 겁에 질려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는 서책.
그것은 마치 자신을 유혹하듯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야구라니?
준혁은 야구에 별로 관심도 없고, 운동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선천적으로 약한 신체는 준혁의 행동에 제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심한 성격이 형성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학업 성적은 꽤 우수한 것 정도?
밖에 나가 뛰어놀지 못하는 만큼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것에 취미를 붙인 덕분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내용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책.
분명 조금 전까지 보던 영화 속의 비급이 왜 준혁의 눈앞에 나타난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번개가 동시에 쳐서 그런가?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지만, 솔직히 말해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혁은 고민에 빠졌다.
왜 무림인들은 비급도 아닌 야구 교본을 들고 싸운 걸까?
게다가 제목도 야구의 정석.
저런 촌스러운 제목은 대체 누가 지은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일단 무슨 내용인지 살펴는 봐야지.”
혹시나 싶어 책 주변을 훑어봤지만, 별다른 위험은 없어 보였다.
이윽고 각오를 다잡은 준혁은 책을 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준혁의 손이 책에 닿는 순간.
촤아악!
환한 빛이 쏟아지며 준혁은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혁이 이놈, 또 여기서 이러고 있네.”
“아가, 어서 일어나 방에 가서 자야지. 감기 걸리겠다.”
준혁은 누군가가 몸을 흔드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아가라고?
이건 엄마가 날 부를 때 하는 말인데…….
준혁은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어, 어?”
눈을 뜬 준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다시 전기가 들어온 것인지,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환해진 집 안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준혁을 보며 웃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 또한.
“엄마, 아빠, 언제 왔어?”
“방금. 우리가 좀 늦었지? 저녁은?”
역시나 보자마자 아들이 밥을 먹었는지 걱정부터 하시는 엄마였다.
“응. 아까 짜장면 시켜 먹었어.”
“오구~ 우리 아들, 잘했네. 그런데 졸리면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그러다가 또 아프면 큰일이야.”
엄마는 준혁을 한번 다독여 준 다음, 자연스레 부엌 쪽으로 가셨다.
그나저나, 내가 언제 잠이 든 거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준혁은 문득 아까 본 책이 생각났다.
“아, 비급이 어디 갔지?”
텔레비전 앞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식장 안이나 테이블에도 없고, 소파 위에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부엌 식탁과 쓰레기통까지 뒤져 봤다.
“아들, 뭐 찾니?”
“아니, 여기 아까 책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에 아빠가 묻자, 준혁은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무슨 책? 우리 올 때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니야. 무공 비급 같은 건데, 야구 책인 것 같았어.”
“하하, 그게 무슨 말이야? 무공 비급이란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어?”
“텔레비전에서 봤지. 암튼 그게 무공 비급인데, 사실은 야구의 정석이야.”
응?
뭔가 연관성이 없는 두 단어의 조합에 아빠가 크게 웃었다.
“허허, 수학의 정석도 아니고, 야구의 정석이라……. 우리 준혁이, 또 꿈을 꿨나 보네. 소싯적에 무협지 좀 읽은 이 아빠도 그런 무공 비급은 들어 본 적이 없단다.”
“진짠데…….”
“그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왜 우리 집에 있어?”
“그게… 아까 번개가 치면서 정전이 됐는데, 텔레비전에서…….”
튀어나왔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자신도 믿지 못할 일인데, 하물며 아빠는 더욱 믿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자신을 노심초사 보살펴 주는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꿈꿨나 봐, 아빠. 히히.”
준혁은 멋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아빠도 함께 웃었다.
“그러니까, 텔레비전을 보다가 천둥소리에 놀라 정신을 잃고 꿈을 꿨는데, 거기서 야구를 알려 주는 무공 비급을 본 거네.”
오, 뭔가 정리가 됐다는 느낌!
준혁은 일이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맞겠지.
사실 텔레비전에서 책이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맞았어, 아빠! 이건 다 꿈이었어. 헤헤.”
준혁은 그냥 납득해 버렸다.
“좋아, 우리 아들. 이제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졸리면 자자. 아빠도 씻어야겠다.”
상황이 정리됐는지, 기분 좋게 웃으며 씻으러 가는 아빠.
그런 아빠를 바라보던 준혁은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자신에게 짜증 한 번 안 내고 항상 따듯하게 잘 돌봐 주는 아빠였다.
물론 엄마도 마찬가지였고.
비록 몸은 약하지만 좋은 부모님을 만나 구김살 없이 잘 자란 것을 새삼 느끼는 준혁이었다.
…물론 약간의 과잉보호만 빼면 최고였다.
그래. 개꿈은 훌훌 털어 버리고, 이만 자야겠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아빠와의 대화를 걱정스레 듣고 있던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 마, 엄마. 아무래도 번개 때문에 놀라서 이상한 꿈을 꾼 건가 봐.”
“…그래. 안 그래도 할머니가 한약 한 재 해 주셔서 가져왔으니, 내일부터 먹자. 몸이 허해졌나 봐.”
윽, 또 보약인가 보다.
써서 싫긴 한데,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준혁은 착한 아이였다.
“응, 그럼 잘게. 안녕히 주무세요.”
***
쌔근쌔근.
방으로 돌아온 준혁은 침대에 눕자마자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데…….
툭, 툭.
“아? 뭐야, 또?”
오늘 왜 이렇게 깨우는 사람이 많지?
게다가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 어딘가 거칠고 불량스러웠다.
분명 부모님의 손길은 아니다.
잠결이지만 살짝 짜증이 올라온 준혁.
“뭐야…요?”
억지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커다란 어른의 그림자였다.
게다가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준혁을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깼냐? 깼으면 일단 좀 일어나 봐라.”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그게 아니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커다란 목소리가 준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가뜩이나 비몽사몽인데, 목소리까지 울려 대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어른이 불렀으면 일어나야지.
어른 말을 잘 듣는, 착한 준혁은 일단 누워 있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거한을 바라봤다.
“어? 어?”
순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준혁의 입에서 자연스레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남자… 아는 사람이다.
“서, 설마…….”
준혁의 말에 흥미를 보이는 남자.
특히나 처음 보는 꼬마가 자신을 아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니 신기해하는 기색이었다.
“이, 이공자?”
“뭐? 이공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님! 이공자님이요.”
준혁은 남자가 인상을 쓰자, 빠르게 ‘님’ 자를 붙였다.
꿈인가?
뜬금없이 이 아저씨가 왜 여기서 나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푸른 장포에 거대한 덩치.
불량스럽고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인상.
성격 급해 보이고 시끄러운 목소리까지.
텔레비전에서 본 그대로였다.
이 아저씨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다.
‘이건 꿈이다!’
준혁은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영화 한 편 잘못 봤다가 계속 이상한 꿈만 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멍하게 있는 준혁을 바라보던 이공자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넌 누군데 나를 아는 것이냐? 그리고 대체 여긴 어디냐?”
다짜고짜 묻는 이공자의 말에 준혁은 의아했다.
길지 않은 13년 인생 동안 많은 꿈을 꾸었다고 자신하지만, 꿈속의 등장인물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은 단연코 없었기 때문이다.
황당하군.
이 아저씨한테 냉엄한 현실을 알려 줘야겠다.
“그야 당연히 제 꿈속이죠. 이공자님은 아까 텔레비전에서 봐서 알고 있고요.”
“테, 텔… 뭐라고? 그게 뭐냐? 아니, 그리고 이게 꿈속이라고?”
이공자는 준혁의 대답에 크게 당황했다.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이 공간에 갇혀 있었는데 고작 누군가의 꿈속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결코 말이 되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내가 어떻게 이것을 얻었는데!”
그러면서 이공자는 품에서 비급을 꺼냈다.
『야구의 정석』
“엇? 비급이다!”
그걸 본 준혁은 당황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비급이 이공자의 품에서 나타나다니!
그러자 이공자 또한 동그래진 눈으로 소리쳤다.
“아니, 네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 것이냐!”
그나저나 이 아저씨, 계속 나를 닦달한다.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마음 착한 준혁이 중얼거리듯 대답해 주었다.
“텔레비전에서 봤다니까요. 이 아저씨,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듣지?”
꿈이라고 생각하자 이공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생각한 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꿈속에서 두려울 것이 어디 있나.
하지만 이공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읽지도 못하는 비급 때문에 이런 곳에 갇혀서 열이 받는데, 이런 꼬맹이까지 내게 대들다니.”
언뜻 이공자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사실 원래의 이공자 성격대로였다면 사단이 나도 벌써 나야 했다.
다만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지내다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 반가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이라 참고 있었을 뿐이다.
“내 궁금한 것이 있어 참고 있었는데, 더는 못 봐주겠군. 가만두지 않겠다.”
준혁에게 위협적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는 이공자.
어느새 허리춤에서 검까지 뽑고 있었다.
“으헉!”
확연하게 느껴지는 살기와 악의에 준혁은 당황했다.
설령 이것이 꿈이라도 무서웠다.
더군다나 여태껏 살아오면서 저런 도검을 실제로 본 것도 처음이 아닌가.
그러다 문득 이공자가 방금 내뱉은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 잠깐만요! 그 비급, 제가 읽을 수 있어요!”
멈칫.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이공자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나, 꼬마?”
“그 책, 제가 읽을 수 있다고요.”
이공자의 물음에 준혁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비록 꿈이라지만 한순간 오줌을 지릴 만큼 이공자의 기세는 무서웠다.
“아, 꿈이지만 정말 무섭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준혁.
그러나 이공자는 그런 것 따윈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할 말만 했다.
“분명, 지금 이 비급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겠다?”
“네. 읽을 수 있어요.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준혁은 이공자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한글을 배운 지 10년이나 됐고, 영어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으니,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좋다. 그럼 이 겉표지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한번 읽어 봐라.”
“야구의 정석이라고 쓰여 있어요.”
“야구의 정석?”
“네.”
준혁은 자신만만하게 책 표지에 쓰여 있는 글자를 말했다.
“흠흠, 좋아. 야구의 정석이라……. 왠지 강해 보이는 이름이군.”
“네?”
준혁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참았다.
야구의 정석이 대체 뭐가 강해 보인다는 거지?
“그런데 꼬마야.”
“네?”
“야구가 대체 뭐냐?”
“아, 네. 야구는요…….”
웃으며 대답을 하려던 준혁의 등줄기에서 순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남자는 비급에 미친놈인데, 만약 아홉 명씩 편먹고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운동이라고 대답을 한다면 저 검이 다시 뽑혀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 야구가 뭐냐니까?!”
참다못한 이공자의 닦달에 준혁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유명한 격언을 뱉어 냈다.
“아, 야구 몰라요. 야구 모릅니다.”
준혁은 자신의 발아래 떨어져 있는 야구 교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이게?”
텔레비전에서 책이 떨어지다니.
너무나 황당했다.
덕분에 자신이 조금 전까지 겁에 질려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는 서책.
그것은 마치 자신을 유혹하듯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야구라니?
준혁은 야구에 별로 관심도 없고, 운동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선천적으로 약한 신체는 준혁의 행동에 제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심한 성격이 형성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학업 성적은 꽤 우수한 것 정도?
밖에 나가 뛰어놀지 못하는 만큼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것에 취미를 붙인 덕분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내용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책.
분명 조금 전까지 보던 영화 속의 비급이 왜 준혁의 눈앞에 나타난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번개가 동시에 쳐서 그런가?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지만, 솔직히 말해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혁은 고민에 빠졌다.
왜 무림인들은 비급도 아닌 야구 교본을 들고 싸운 걸까?
게다가 제목도 야구의 정석.
저런 촌스러운 제목은 대체 누가 지은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일단 무슨 내용인지 살펴는 봐야지.”
혹시나 싶어 책 주변을 훑어봤지만, 별다른 위험은 없어 보였다.
이윽고 각오를 다잡은 준혁은 책을 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준혁의 손이 책에 닿는 순간.
촤아악!
환한 빛이 쏟아지며 준혁은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혁이 이놈, 또 여기서 이러고 있네.”
“아가, 어서 일어나 방에 가서 자야지. 감기 걸리겠다.”
준혁은 누군가가 몸을 흔드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아가라고?
이건 엄마가 날 부를 때 하는 말인데…….
준혁은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어, 어?”
눈을 뜬 준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다시 전기가 들어온 것인지,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환해진 집 안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준혁을 보며 웃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 또한.
“엄마, 아빠, 언제 왔어?”
“방금. 우리가 좀 늦었지? 저녁은?”
역시나 보자마자 아들이 밥을 먹었는지 걱정부터 하시는 엄마였다.
“응. 아까 짜장면 시켜 먹었어.”
“오구~ 우리 아들, 잘했네. 그런데 졸리면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그러다가 또 아프면 큰일이야.”
엄마는 준혁을 한번 다독여 준 다음, 자연스레 부엌 쪽으로 가셨다.
그나저나, 내가 언제 잠이 든 거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준혁은 문득 아까 본 책이 생각났다.
“아, 비급이 어디 갔지?”
텔레비전 앞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식장 안이나 테이블에도 없고, 소파 위에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부엌 식탁과 쓰레기통까지 뒤져 봤다.
“아들, 뭐 찾니?”
“아니, 여기 아까 책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에 아빠가 묻자, 준혁은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무슨 책? 우리 올 때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니야. 무공 비급 같은 건데, 야구 책인 것 같았어.”
“하하, 그게 무슨 말이야? 무공 비급이란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어?”
“텔레비전에서 봤지. 암튼 그게 무공 비급인데, 사실은 야구의 정석이야.”
응?
뭔가 연관성이 없는 두 단어의 조합에 아빠가 크게 웃었다.
“허허, 수학의 정석도 아니고, 야구의 정석이라……. 우리 준혁이, 또 꿈을 꿨나 보네. 소싯적에 무협지 좀 읽은 이 아빠도 그런 무공 비급은 들어 본 적이 없단다.”
“진짠데…….”
“그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왜 우리 집에 있어?”
“그게… 아까 번개가 치면서 정전이 됐는데, 텔레비전에서…….”
튀어나왔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자신도 믿지 못할 일인데, 하물며 아빠는 더욱 믿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자신을 노심초사 보살펴 주는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꿈꿨나 봐, 아빠. 히히.”
준혁은 멋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아빠도 함께 웃었다.
“그러니까, 텔레비전을 보다가 천둥소리에 놀라 정신을 잃고 꿈을 꿨는데, 거기서 야구를 알려 주는 무공 비급을 본 거네.”
오, 뭔가 정리가 됐다는 느낌!
준혁은 일이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맞겠지.
사실 텔레비전에서 책이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맞았어, 아빠! 이건 다 꿈이었어. 헤헤.”
준혁은 그냥 납득해 버렸다.
“좋아, 우리 아들. 이제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졸리면 자자. 아빠도 씻어야겠다.”
상황이 정리됐는지, 기분 좋게 웃으며 씻으러 가는 아빠.
그런 아빠를 바라보던 준혁은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자신에게 짜증 한 번 안 내고 항상 따듯하게 잘 돌봐 주는 아빠였다.
물론 엄마도 마찬가지였고.
비록 몸은 약하지만 좋은 부모님을 만나 구김살 없이 잘 자란 것을 새삼 느끼는 준혁이었다.
…물론 약간의 과잉보호만 빼면 최고였다.
그래. 개꿈은 훌훌 털어 버리고, 이만 자야겠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아빠와의 대화를 걱정스레 듣고 있던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 마, 엄마. 아무래도 번개 때문에 놀라서 이상한 꿈을 꾼 건가 봐.”
“…그래. 안 그래도 할머니가 한약 한 재 해 주셔서 가져왔으니, 내일부터 먹자. 몸이 허해졌나 봐.”
윽, 또 보약인가 보다.
써서 싫긴 한데, 부모님 말을 잘 듣는 준혁은 착한 아이였다.
“응, 그럼 잘게. 안녕히 주무세요.”
***
쌔근쌔근.
방으로 돌아온 준혁은 침대에 눕자마자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데…….
툭, 툭.
“아? 뭐야, 또?”
오늘 왜 이렇게 깨우는 사람이 많지?
게다가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 어딘가 거칠고 불량스러웠다.
분명 부모님의 손길은 아니다.
잠결이지만 살짝 짜증이 올라온 준혁.
“뭐야…요?”
억지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커다란 어른의 그림자였다.
게다가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준혁을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깼냐? 깼으면 일단 좀 일어나 봐라.”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그게 아니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커다란 목소리가 준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가뜩이나 비몽사몽인데, 목소리까지 울려 대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어른이 불렀으면 일어나야지.
어른 말을 잘 듣는, 착한 준혁은 일단 누워 있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거한을 바라봤다.
“어? 어?”
순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준혁의 입에서 자연스레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남자… 아는 사람이다.
“서, 설마…….”
준혁의 말에 흥미를 보이는 남자.
특히나 처음 보는 꼬마가 자신을 아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니 신기해하는 기색이었다.
“이, 이공자?”
“뭐? 이공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님! 이공자님이요.”
준혁은 남자가 인상을 쓰자, 빠르게 ‘님’ 자를 붙였다.
꿈인가?
뜬금없이 이 아저씨가 왜 여기서 나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푸른 장포에 거대한 덩치.
불량스럽고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인상.
성격 급해 보이고 시끄러운 목소리까지.
텔레비전에서 본 그대로였다.
이 아저씨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다.
‘이건 꿈이다!’
준혁은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영화 한 편 잘못 봤다가 계속 이상한 꿈만 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멍하게 있는 준혁을 바라보던 이공자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넌 누군데 나를 아는 것이냐? 그리고 대체 여긴 어디냐?”
다짜고짜 묻는 이공자의 말에 준혁은 의아했다.
길지 않은 13년 인생 동안 많은 꿈을 꾸었다고 자신하지만, 꿈속의 등장인물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은 단연코 없었기 때문이다.
황당하군.
이 아저씨한테 냉엄한 현실을 알려 줘야겠다.
“그야 당연히 제 꿈속이죠. 이공자님은 아까 텔레비전에서 봐서 알고 있고요.”
“테, 텔… 뭐라고? 그게 뭐냐? 아니, 그리고 이게 꿈속이라고?”
이공자는 준혁의 대답에 크게 당황했다.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이 공간에 갇혀 있었는데 고작 누군가의 꿈속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결코 말이 되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내가 어떻게 이것을 얻었는데!”
그러면서 이공자는 품에서 비급을 꺼냈다.
『야구의 정석』
“엇? 비급이다!”
그걸 본 준혁은 당황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비급이 이공자의 품에서 나타나다니!
그러자 이공자 또한 동그래진 눈으로 소리쳤다.
“아니, 네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 것이냐!”
그나저나 이 아저씨, 계속 나를 닦달한다.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마음 착한 준혁이 중얼거리듯 대답해 주었다.
“텔레비전에서 봤다니까요. 이 아저씨,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듣지?”
꿈이라고 생각하자 이공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생각한 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꿈속에서 두려울 것이 어디 있나.
하지만 이공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읽지도 못하는 비급 때문에 이런 곳에 갇혀서 열이 받는데, 이런 꼬맹이까지 내게 대들다니.”
언뜻 이공자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사실 원래의 이공자 성격대로였다면 사단이 나도 벌써 나야 했다.
다만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지내다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 반가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이라 참고 있었을 뿐이다.
“내 궁금한 것이 있어 참고 있었는데, 더는 못 봐주겠군. 가만두지 않겠다.”
준혁에게 위협적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는 이공자.
어느새 허리춤에서 검까지 뽑고 있었다.
“으헉!”
확연하게 느껴지는 살기와 악의에 준혁은 당황했다.
설령 이것이 꿈이라도 무서웠다.
더군다나 여태껏 살아오면서 저런 도검을 실제로 본 것도 처음이 아닌가.
그러다 문득 이공자가 방금 내뱉은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 잠깐만요! 그 비급, 제가 읽을 수 있어요!”
멈칫.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이공자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나, 꼬마?”
“그 책, 제가 읽을 수 있다고요.”
이공자의 물음에 준혁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비록 꿈이라지만 한순간 오줌을 지릴 만큼 이공자의 기세는 무서웠다.
“아, 꿈이지만 정말 무섭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준혁.
그러나 이공자는 그런 것 따윈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할 말만 했다.
“분명, 지금 이 비급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겠다?”
“네. 읽을 수 있어요.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준혁은 이공자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한글을 배운 지 10년이나 됐고, 영어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으니,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좋다. 그럼 이 겉표지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한번 읽어 봐라.”
“야구의 정석이라고 쓰여 있어요.”
“야구의 정석?”
“네.”
준혁은 자신만만하게 책 표지에 쓰여 있는 글자를 말했다.
“흠흠, 좋아. 야구의 정석이라……. 왠지 강해 보이는 이름이군.”
“네?”
준혁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참았다.
야구의 정석이 대체 뭐가 강해 보인다는 거지?
“그런데 꼬마야.”
“네?”
“야구가 대체 뭐냐?”
“아, 네. 야구는요…….”
웃으며 대답을 하려던 준혁의 등줄기에서 순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남자는 비급에 미친놈인데, 만약 아홉 명씩 편먹고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운동이라고 대답을 한다면 저 검이 다시 뽑혀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 야구가 뭐냐니까?!”
참다못한 이공자의 닦달에 준혁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유명한 격언을 뱉어 냈다.
“아, 야구 몰라요. 야구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