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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지역 예선 (2)
마운드에 올라선 준혁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공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신을 보며 너무 반갑게 웃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손도 흔들었다.
“이놈, 내가 그리도 좋단 말이냐. 사내놈이.”
뭐, 사부한테 손을 흔드는 건방진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저 강아지 같은 모습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이공자도 준혁을 보고 근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의 싸움을 응원하기 위한 사부의 배려였다.
***
마운드에 올라선 준혁은 마침 포수 뒤의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을 보았다.
“아, 맞다. 오늘 시합이 방송에 나간다고 했지?”
문득 자신의 얼굴이 방송을 통해 대한민국 전국으로 나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혹시 날 아는 사람이 볼지도 몰라.’
치기 어린 마음에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야구를 하는 것도 모자라 큰 대회에 나와 마운드까지 서게 되다니.
너무나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일순 사부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제대로 못하면 혼날 줄 알아라! 가서 다 쓰러뜨리고 돌아와라!
이크.
준혁은 얼른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긴장을 해도 문제지만, 너무 풀어져도 문제가 될 것이다.
다행히 사부는 이 모습을 못 봤겠지.
‘정신 차리고 시합에 집중하자.’
준혁은 마운드 위에 놓인 로진백을 움켜쥐며 집중력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타석으로 들어서는 상대편 1번 타자.
물론 준혁보다는 크지만, 비교적 작은 키에 마른 체형이었다.
아무래도 1번으로서 달리기가 빠른 선수를 배치한 것 같았다.
시합 전까지 상대의 정보를 알기가 어려워 실전에서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 대회인데다가 리틀 야구이기에 그저 팀 성적이나 대략적인 정보만 얻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 대한민국의 수비로 경기가 재개됩니다.]
[선발 투수는 남준혁 선수군요. 시청자분들도 보셨겠지만, 오늘 첫 홈런을 친 주인공입니다.]
[네. 과연 투수로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되네요.]
[리틀 야구는, 특히 예선에서는 투구 수 제한이 엄격하기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던지는가도 중요합니다. 오늘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시청하시면 더욱 흥미로울 겁니다.]
곧 심판의 콜로 시합이 재개되었다.
준혁은 들고 있던 로진백을 발 옆에 던지고는 포수를 바라봤다.
몸 쪽 높은 스트라이크 존에 대어진 미트.
타자도 타격 자세를 취하며 준혁을 바라본다.
초구는 패스트볼.
시합에 들어서기 전, 미리 약속한 내용이었다.
첫 번째 공은 무조건 제일 빠른 패스트볼로 찔러 넣기로.
와인드업 자세로 왼발을 힘차게 들어 올린 준혁은 스트라이드를 최대한 뻗으며 오른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릴리즈 순간까지 완벽한 자세와 함께 준혁이 뿌린 공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퍼엉!
“스트라잌!”
심판의 우렁찬 선언과 함께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잠시 후, 관중석에서 열화와 같은 환성이 터져 나왔다.
[초구 스트라이크입니다. 공이 굉장히 빠른데요.]
[전광판에 표시된 공의 속도가… 아, 128㎞입니다.]
[지금 남준혁 선수가 만 12세, 중학교 1학년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예요.]
전광판에 속도가 찍히자 기자석과 관중석까지 술렁였다.
상대편 덕아웃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리틀 야구에서, 특히나 아시아 예선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속도였다.
어느새 타석에서 멀찌감치 물러난 타자는 공이 너무 빨라 겁에 질렸는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타자 위치로!”
심판의 재촉에 다시 타석에 들어섰지만,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준혁은 다시 최대한 강하게 패스트볼을 던졌다.
이번에도 역시 타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휘두르기라도 해야지! 뭐 하는 거야!”
“잘 보고 휘두르면 돼!”
상대팀 덕아웃에서 소리를 지르며 용기를 북돋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스윙은 공이 들어오고 나서야 휘둘러졌을 정도니까.
삼구 삼진.
시작이 좋았다.
힘없이 1번 타자가 물러난 후, 다음 타자가 들어섰다.
준혁은 로진백을 만지며 감독의 말을 기억해 냈다.
“첫 타자는 가장 빠른 공으로 삼진을 잡는 거야. 그러면 그다음 타자부터는 잔뜩 긴장을 하겠지.”
“네.”
“그때부터는 투심과 체인지업으로 맞춰 잡자. 투구 수를 줄여야 공을 더 길게 던질 수 있으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그럼 변화구는 없이 던져요?”
“응, 충분해. 몸에 무리가 가는 공을 굳이 던질 필요가 없지.”
“알겠습니다.”
포수를 보고 있던 민수도 감독의 주문을 기억해 내고는 사인을 냈다.
이번엔 초구 체인지업.
고개를 끄덕인 준혁은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바꿔 쥐었다.
체인지업 중에서 현재 준혁이 던지는 방식은 팜볼.
손이 아직 작은 준혁으로서는 손바닥 전체로 공을 잡는 이 방식이 가장 편했다.
기본적으로 팜볼은 다른 체인지업에 비해 움직임이 큰 편은 아니지만, 속도의 차이가 확연하여 타이밍을 뺏기 좋았다.
중요한 것은 패스트볼의 자세와 얼마나 동일하냐는 것.
그렇지 않다면 그저 공이 느린 배팅 볼과 다름없었겠지만, 준혁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현재는 어쩔 수 없이 이 방식으로 공을 던지지만, 몸이 더 성장한다면 다른 체인지업을 던질 예정이었다.
준혁은 다시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며 살짝 눈썹도 찌푸려 보았다.
그러고는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같은 호쾌한 폼으로 팔을 휘둘렀다.
대기 타석에서 타이밍을 잰 상대 타자는 공이 출발함과 동시에 잔뜩 긴장하며 타격 자세를 취했다.
부우웅.
조금 전에 봐 둔 패스트볼의 타이밍에 맞춰 앞으로 나오는 배트.
하지만 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 돼!’
그것을 깨달은 타자는 배트를 다급히 멈추려고 하였다.
팀 내에서 나름 타격 센스가 좋은 2번 타자는 겨우겨우 배트의 속도를 줄였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어정쩡한 타구가 만들어졌다.
깡!
알루미늄 특유의 반발력이 더해져 유격수 방향 땅볼이 되었다.
딱 잡아서 아웃시키기 좋은 속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을 어렵지 않게 잡아낸 유격수는 1루를 향해 가볍게 송구했다.
투 아웃.
[체인지업이었나요? 구속이 97㎞였네요.]
[다른 일반적인 선수들의 직구 구속이나 다름이 없죠?]
[그렇다면 오히려 치기 좋은 것 아닙니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아요. 지금 타자는 대기 타석에서 본 강속구에 타이밍을 맞췄을 텐데, 그것보다 훨씬 속도가 느리게 공이 날아오니까 당황한 것이죠. 근데 그 공이 몸에는 익숙한 빠르기이다 보니까 몸은 타격을 하려고 한 것이고요. 거기서 엇박자가 낫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타이밍을 완전히 뺏겼다는 말씀이시네요.]
[네. 여기서 정확히 볼 수는 없지만, 남준혁 선수의 직구와 체인지업 폼이 상당히 비슷한 것 같아요.]
***
방송을 보고 있던 이공자는 그 부분을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흠, 글러브에서 그립 잡는 속도가 다르잖아. 그렇게 강조했건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분하겠지만, 이공자의 기준에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리고 왜 저렇게 힘을 빼고 던지는 거야? 강속구로 꼼짝 못하게 눌러 버려야지. 에잉,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어.”
사실 이것은 이공자에게 투구 수 제한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아 생긴 오해였다.
첫 타자에게 공 세 개, 2번 타자에게 공 한 개로 아웃 카운트를 늘린 준혁은 3번 타자도 패스트볼 한 개와 체인지업 한 개로 요리했다.
준혁이 쓰리 아웃을 만드는 데는 공 여섯 개면 충분했다.
***
1회 수비를 간단히 마무리한 후, 다시 공수 교대가 이루어졌다.
1회의 기세를 살린 대한민국 팀은 2회에서도 4점을 추가했고, 준혁은 두 번째 홈런을 쳤다.
이어진 2회 수비 역시 무실점으로 마무리한 후, 마운드에서 내려와 교체됐다.
총 투구 수 16개.
아주 효율적인 투구였다.
준혁 다음으로 올라온 투수도 점수를 내주지 않은 채 대한민국은 3점을 더 추가했다.
결국 14대 0, 4회 콜드승을 거두고 기분 좋게 1승을 올렸다.
그리고 이날의 결과는 준혁의 선발에 약간이나마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부모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
“엄마! 아빠!”
첫 시합을 끝낸 선수단이 뒷정리를 하고 야구장 밖으로 나오자, 학부모들이 몰려왔다.
당연히 준혁의 부모님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오! 우리 준혁이, 수고했다. 오늘 정말 잘했어!”
일권이 큰 소리로 준혁을 반기자, 미래도 빙그레 웃으며 살포시 안아 줬다.
“우리 아들, 아픈 데 없어? 괜찮지?”
“응, 엄마. 아무데도 안 아파. 설마 아까 홈런 못 본 거야?”
“당연히 봤지. 엄마는 완전 깜짝 놀랐어.”
준혁이 씩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제 내 몸은 걱정 안 해도 돼.”
그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네가 준혁이구나. 아까 홈런 잘 봤다. 야구를 어디서 배웠는데, 이렇게 잘해?”
‘누구지?’
누군가의 학부모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초면이라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아, 내 소개를 안 했네. 안녕하세요, 준혁이 부모님. 저는 민수 엄마예요. 오늘 포수 봤던 아이 엄마.”
“아, 그러셨구나.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준혁이 엄마예요.”
같은 팀원 엄마라니 반갑기는 한데… 이 아줌마, 왠지 좀 시끄럽다.
“천수가 갑자기 야구를 그만둔다고 해서 이번 대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준혁이가 들어오고 오히려 전력이 올라간 것 같아요. 너무 다행이에요, 호호.”
“천수가 누구예요, 아줌마?”
처음 듣는 이름에 준혁이 물었다.
“아, 원래 에이스였던 아이인데, 갑자기 팀을 그만뒀거든. 이번 대회까지만이라도 같이 나가자고 모두가 말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네.”
준혁은 다른 애들이 별로 이야기를 안 하기에 사정을 몰랐다.
사실 별로 관심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준혁이가 오늘 홈런도 치고 공도 잘 던져서 너무 다행이에요.”
“뭘요. 민수도 리드가 좋던데요. 공도 잘 잡고요.”
일권이 인사치레로 말을 꺼내자, 민수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호호, 아직 부족해요. 그래도 준혁이 덕분에 한시름 놨어요.”
민수 엄마가 손사래까지 쳐 가며 호들갑을 떨 때, 민수가 다가왔다.
“엄마, 여기서 뭐 하세요?”
“호호, 준혁이네 가족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있었지.”
“아, 네. 감독님이 이제 해산해도 좋대요.”
“그래? 그럼 엄마는 먼저 갈 테니까, 민수는 버스 타고 와라. 감독님 옆에 딱 붙어 있고. 알았지?”
“네, 엄마.”
민수는 준혁의 부모님께도 공손히 인사하고는 다시 버스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너무 수다를 떨었나 봐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두 분은 내일도 오시나요?”
“네. 마침 일요일이라 나올 생각입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기로 하고, 전 이만 가 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바탕 폭풍 같은 대화가 몰아친 후, 민수 엄마도 주차장 쪽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준혁이 겨우 말을 꺼냈다.
“우와! 정신없어, 저 아줌마.”
“엄마도 그래.”
“그런데 준혁이는 어떻게 할래? 버스 타고 갈래, 아니면 우리랑 갈까?”
“당연히 엄마 아빠랑 가야지. 얼른 가요.”
감독에게 인사를 한 준혁의 가족은 집으로 출발했다.
***
다음 날.
약체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준혁은 4회 초에 잠시 등판하여 아웃 세 개를 잡고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대한민국팀은 역시 4회 9대 0 콜드승으로 무난하게 승수를 쌓아 나갔다.
다음 경기는 내일 오후 3시, 대만과의 경기였다.
대만은 한국, 홍콩과 함께 이번 대회 우승 후보로 꼽히며 최대의 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오전에 경기를 마친 대한민국 선발팀은 오후에 잠시 대응 훈련을 하고 일찍 해산했다.
그리고 지금 준혁은…….
“아, 쫌! 사부님, 내 연습 좀 봐달라고요! 텔레비전은 그만 좀 보고!”
휴게실 소파에 앉아 격투기를 보고 있는 이공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제 사부한테 소리까지 지르는 것이냐?”
“내일 경기가 제일 중요하대요.”
“너, 선발이냐?”
“네.”
“그럼 됐다. 난 이제 너를 믿는다. 그러니까… 거기서 때려! 네 주먹은 때리라고 있는 거야!”
시선이 텔레비전에 고정된 채 대답하는 이공자에게서는 전혀 믿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스포츠만 나오기에 망정이지, 드라마까지 나왔다면 아마 비급 수련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싸부.”
“왜 그러느냐? 아! 그렇게 때리면 당연히 막히지. 에잉, 답답해.”
“비급을 연마하는 것은 결국 자세나 방법 문제인 것 같은데, 왜 다른 아이들하고 차이가 나죠? 결국엔 똑같은 훈련인 것 같은데.”
“호오, 좋은 질문이다. 그렇지! 그렇게 피하고! 카운터!”
“그렇다면 답변은요?”
기대에 차서 물어보는 준혁에게 이공자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번 라운드가 끝이니까 1분만 기다려라. 날려 버려! 지금이 기회야!”
아니, 무슨 60초 뒤에도 아니고.
정말 너무하다.
마운드에 올라선 준혁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공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신을 보며 너무 반갑게 웃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손도 흔들었다.
“이놈, 내가 그리도 좋단 말이냐. 사내놈이.”
뭐, 사부한테 손을 흔드는 건방진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저 강아지 같은 모습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이공자도 준혁을 보고 근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의 싸움을 응원하기 위한 사부의 배려였다.
***
마운드에 올라선 준혁은 마침 포수 뒤의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을 보았다.
“아, 맞다. 오늘 시합이 방송에 나간다고 했지?”
문득 자신의 얼굴이 방송을 통해 대한민국 전국으로 나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혹시 날 아는 사람이 볼지도 몰라.’
치기 어린 마음에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야구를 하는 것도 모자라 큰 대회에 나와 마운드까지 서게 되다니.
너무나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일순 사부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제대로 못하면 혼날 줄 알아라! 가서 다 쓰러뜨리고 돌아와라!
이크.
준혁은 얼른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긴장을 해도 문제지만, 너무 풀어져도 문제가 될 것이다.
다행히 사부는 이 모습을 못 봤겠지.
‘정신 차리고 시합에 집중하자.’
준혁은 마운드 위에 놓인 로진백을 움켜쥐며 집중력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타석으로 들어서는 상대편 1번 타자.
물론 준혁보다는 크지만, 비교적 작은 키에 마른 체형이었다.
아무래도 1번으로서 달리기가 빠른 선수를 배치한 것 같았다.
시합 전까지 상대의 정보를 알기가 어려워 실전에서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 대회인데다가 리틀 야구이기에 그저 팀 성적이나 대략적인 정보만 얻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 대한민국의 수비로 경기가 재개됩니다.]
[선발 투수는 남준혁 선수군요. 시청자분들도 보셨겠지만, 오늘 첫 홈런을 친 주인공입니다.]
[네. 과연 투수로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되네요.]
[리틀 야구는, 특히 예선에서는 투구 수 제한이 엄격하기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던지는가도 중요합니다. 오늘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시청하시면 더욱 흥미로울 겁니다.]
곧 심판의 콜로 시합이 재개되었다.
준혁은 들고 있던 로진백을 발 옆에 던지고는 포수를 바라봤다.
몸 쪽 높은 스트라이크 존에 대어진 미트.
타자도 타격 자세를 취하며 준혁을 바라본다.
초구는 패스트볼.
시합에 들어서기 전, 미리 약속한 내용이었다.
첫 번째 공은 무조건 제일 빠른 패스트볼로 찔러 넣기로.
와인드업 자세로 왼발을 힘차게 들어 올린 준혁은 스트라이드를 최대한 뻗으며 오른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릴리즈 순간까지 완벽한 자세와 함께 준혁이 뿌린 공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퍼엉!
“스트라잌!”
심판의 우렁찬 선언과 함께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잠시 후, 관중석에서 열화와 같은 환성이 터져 나왔다.
[초구 스트라이크입니다. 공이 굉장히 빠른데요.]
[전광판에 표시된 공의 속도가… 아, 128㎞입니다.]
[지금 남준혁 선수가 만 12세, 중학교 1학년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예요.]
전광판에 속도가 찍히자 기자석과 관중석까지 술렁였다.
상대편 덕아웃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리틀 야구에서, 특히나 아시아 예선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속도였다.
어느새 타석에서 멀찌감치 물러난 타자는 공이 너무 빨라 겁에 질렸는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타자 위치로!”
심판의 재촉에 다시 타석에 들어섰지만,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준혁은 다시 최대한 강하게 패스트볼을 던졌다.
이번에도 역시 타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휘두르기라도 해야지! 뭐 하는 거야!”
“잘 보고 휘두르면 돼!”
상대팀 덕아웃에서 소리를 지르며 용기를 북돋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스윙은 공이 들어오고 나서야 휘둘러졌을 정도니까.
삼구 삼진.
시작이 좋았다.
힘없이 1번 타자가 물러난 후, 다음 타자가 들어섰다.
준혁은 로진백을 만지며 감독의 말을 기억해 냈다.
“첫 타자는 가장 빠른 공으로 삼진을 잡는 거야. 그러면 그다음 타자부터는 잔뜩 긴장을 하겠지.”
“네.”
“그때부터는 투심과 체인지업으로 맞춰 잡자. 투구 수를 줄여야 공을 더 길게 던질 수 있으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그럼 변화구는 없이 던져요?”
“응, 충분해. 몸에 무리가 가는 공을 굳이 던질 필요가 없지.”
“알겠습니다.”
포수를 보고 있던 민수도 감독의 주문을 기억해 내고는 사인을 냈다.
이번엔 초구 체인지업.
고개를 끄덕인 준혁은 글러브 안에서 그립을 바꿔 쥐었다.
체인지업 중에서 현재 준혁이 던지는 방식은 팜볼.
손이 아직 작은 준혁으로서는 손바닥 전체로 공을 잡는 이 방식이 가장 편했다.
기본적으로 팜볼은 다른 체인지업에 비해 움직임이 큰 편은 아니지만, 속도의 차이가 확연하여 타이밍을 뺏기 좋았다.
중요한 것은 패스트볼의 자세와 얼마나 동일하냐는 것.
그렇지 않다면 그저 공이 느린 배팅 볼과 다름없었겠지만, 준혁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현재는 어쩔 수 없이 이 방식으로 공을 던지지만, 몸이 더 성장한다면 다른 체인지업을 던질 예정이었다.
준혁은 다시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며 살짝 눈썹도 찌푸려 보았다.
그러고는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같은 호쾌한 폼으로 팔을 휘둘렀다.
대기 타석에서 타이밍을 잰 상대 타자는 공이 출발함과 동시에 잔뜩 긴장하며 타격 자세를 취했다.
부우웅.
조금 전에 봐 둔 패스트볼의 타이밍에 맞춰 앞으로 나오는 배트.
하지만 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 돼!’
그것을 깨달은 타자는 배트를 다급히 멈추려고 하였다.
팀 내에서 나름 타격 센스가 좋은 2번 타자는 겨우겨우 배트의 속도를 줄였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어정쩡한 타구가 만들어졌다.
깡!
알루미늄 특유의 반발력이 더해져 유격수 방향 땅볼이 되었다.
딱 잡아서 아웃시키기 좋은 속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을 어렵지 않게 잡아낸 유격수는 1루를 향해 가볍게 송구했다.
투 아웃.
[체인지업이었나요? 구속이 97㎞였네요.]
[다른 일반적인 선수들의 직구 구속이나 다름이 없죠?]
[그렇다면 오히려 치기 좋은 것 아닙니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아요. 지금 타자는 대기 타석에서 본 강속구에 타이밍을 맞췄을 텐데, 그것보다 훨씬 속도가 느리게 공이 날아오니까 당황한 것이죠. 근데 그 공이 몸에는 익숙한 빠르기이다 보니까 몸은 타격을 하려고 한 것이고요. 거기서 엇박자가 낫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타이밍을 완전히 뺏겼다는 말씀이시네요.]
[네. 여기서 정확히 볼 수는 없지만, 남준혁 선수의 직구와 체인지업 폼이 상당히 비슷한 것 같아요.]
***
방송을 보고 있던 이공자는 그 부분을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흠, 글러브에서 그립 잡는 속도가 다르잖아. 그렇게 강조했건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분하겠지만, 이공자의 기준에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리고 왜 저렇게 힘을 빼고 던지는 거야? 강속구로 꼼짝 못하게 눌러 버려야지. 에잉,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어.”
사실 이것은 이공자에게 투구 수 제한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아 생긴 오해였다.
첫 타자에게 공 세 개, 2번 타자에게 공 한 개로 아웃 카운트를 늘린 준혁은 3번 타자도 패스트볼 한 개와 체인지업 한 개로 요리했다.
준혁이 쓰리 아웃을 만드는 데는 공 여섯 개면 충분했다.
***
1회 수비를 간단히 마무리한 후, 다시 공수 교대가 이루어졌다.
1회의 기세를 살린 대한민국 팀은 2회에서도 4점을 추가했고, 준혁은 두 번째 홈런을 쳤다.
이어진 2회 수비 역시 무실점으로 마무리한 후, 마운드에서 내려와 교체됐다.
총 투구 수 16개.
아주 효율적인 투구였다.
준혁 다음으로 올라온 투수도 점수를 내주지 않은 채 대한민국은 3점을 더 추가했다.
결국 14대 0, 4회 콜드승을 거두고 기분 좋게 1승을 올렸다.
그리고 이날의 결과는 준혁의 선발에 약간이나마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부모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
“엄마! 아빠!”
첫 시합을 끝낸 선수단이 뒷정리를 하고 야구장 밖으로 나오자, 학부모들이 몰려왔다.
당연히 준혁의 부모님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오! 우리 준혁이, 수고했다. 오늘 정말 잘했어!”
일권이 큰 소리로 준혁을 반기자, 미래도 빙그레 웃으며 살포시 안아 줬다.
“우리 아들, 아픈 데 없어? 괜찮지?”
“응, 엄마. 아무데도 안 아파. 설마 아까 홈런 못 본 거야?”
“당연히 봤지. 엄마는 완전 깜짝 놀랐어.”
준혁이 씩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제 내 몸은 걱정 안 해도 돼.”
그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네가 준혁이구나. 아까 홈런 잘 봤다. 야구를 어디서 배웠는데, 이렇게 잘해?”
‘누구지?’
누군가의 학부모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초면이라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아, 내 소개를 안 했네. 안녕하세요, 준혁이 부모님. 저는 민수 엄마예요. 오늘 포수 봤던 아이 엄마.”
“아, 그러셨구나.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준혁이 엄마예요.”
같은 팀원 엄마라니 반갑기는 한데… 이 아줌마, 왠지 좀 시끄럽다.
“천수가 갑자기 야구를 그만둔다고 해서 이번 대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준혁이가 들어오고 오히려 전력이 올라간 것 같아요. 너무 다행이에요, 호호.”
“천수가 누구예요, 아줌마?”
처음 듣는 이름에 준혁이 물었다.
“아, 원래 에이스였던 아이인데, 갑자기 팀을 그만뒀거든. 이번 대회까지만이라도 같이 나가자고 모두가 말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네.”
준혁은 다른 애들이 별로 이야기를 안 하기에 사정을 몰랐다.
사실 별로 관심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준혁이가 오늘 홈런도 치고 공도 잘 던져서 너무 다행이에요.”
“뭘요. 민수도 리드가 좋던데요. 공도 잘 잡고요.”
일권이 인사치레로 말을 꺼내자, 민수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호호, 아직 부족해요. 그래도 준혁이 덕분에 한시름 놨어요.”
민수 엄마가 손사래까지 쳐 가며 호들갑을 떨 때, 민수가 다가왔다.
“엄마, 여기서 뭐 하세요?”
“호호, 준혁이네 가족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있었지.”
“아, 네. 감독님이 이제 해산해도 좋대요.”
“그래? 그럼 엄마는 먼저 갈 테니까, 민수는 버스 타고 와라. 감독님 옆에 딱 붙어 있고. 알았지?”
“네, 엄마.”
민수는 준혁의 부모님께도 공손히 인사하고는 다시 버스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너무 수다를 떨었나 봐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두 분은 내일도 오시나요?”
“네. 마침 일요일이라 나올 생각입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기로 하고, 전 이만 가 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바탕 폭풍 같은 대화가 몰아친 후, 민수 엄마도 주차장 쪽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준혁이 겨우 말을 꺼냈다.
“우와! 정신없어, 저 아줌마.”
“엄마도 그래.”
“그런데 준혁이는 어떻게 할래? 버스 타고 갈래, 아니면 우리랑 갈까?”
“당연히 엄마 아빠랑 가야지. 얼른 가요.”
감독에게 인사를 한 준혁의 가족은 집으로 출발했다.
***
다음 날.
약체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준혁은 4회 초에 잠시 등판하여 아웃 세 개를 잡고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대한민국팀은 역시 4회 9대 0 콜드승으로 무난하게 승수를 쌓아 나갔다.
다음 경기는 내일 오후 3시, 대만과의 경기였다.
대만은 한국, 홍콩과 함께 이번 대회 우승 후보로 꼽히며 최대의 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오전에 경기를 마친 대한민국 선발팀은 오후에 잠시 대응 훈련을 하고 일찍 해산했다.
그리고 지금 준혁은…….
“아, 쫌! 사부님, 내 연습 좀 봐달라고요! 텔레비전은 그만 좀 보고!”
휴게실 소파에 앉아 격투기를 보고 있는 이공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제 사부한테 소리까지 지르는 것이냐?”
“내일 경기가 제일 중요하대요.”
“너, 선발이냐?”
“네.”
“그럼 됐다. 난 이제 너를 믿는다. 그러니까… 거기서 때려! 네 주먹은 때리라고 있는 거야!”
시선이 텔레비전에 고정된 채 대답하는 이공자에게서는 전혀 믿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스포츠만 나오기에 망정이지, 드라마까지 나왔다면 아마 비급 수련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싸부.”
“왜 그러느냐? 아! 그렇게 때리면 당연히 막히지. 에잉, 답답해.”
“비급을 연마하는 것은 결국 자세나 방법 문제인 것 같은데, 왜 다른 아이들하고 차이가 나죠? 결국엔 똑같은 훈련인 것 같은데.”
“호오, 좋은 질문이다. 그렇지! 그렇게 피하고! 카운터!”
“그렇다면 답변은요?”
기대에 차서 물어보는 준혁에게 이공자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번 라운드가 끝이니까 1분만 기다려라. 날려 버려! 지금이 기회야!”
아니, 무슨 60초 뒤에도 아니고.
정말 너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