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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경이롭군.”
영화나 애니에서 보던 것과는 박력이 남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강조선이 잔뜩 들어간 만화가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고 말았다.
“뭐하십니까, 소대장님?”
내가 멍 때리며 기간트를 구경하고 있자니, 카트린이 불렀다.
고개를 돌려 카트린을 보니 그녀는 소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현대 과학 기술로도 못 만드는 로봇과 현대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갑옷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뭐하는 거지?”
“임무에 나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상황 종료가 안 됐습니다. 혹시 상황이 걸리신 거 아직 모르십니까?”
카트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모를 리가 있나.
마차로 오다가 중간에 내려야 했던 이유인데.
“마수가 출현했다던가?”
“예, 맞습니다.”
상의 포켓에서 장교수첩을 꺼냈다.
혹시나 장교수첩에 기간트나 마수에 관한 정보가 써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기간트와 마수는 따로 배워야 하는 개념이 아니라 기본 상식인 듯, 장교수첩에는 그와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기본 상식을 굳이 장교수첩에 적어 놓을리가 없을뿐더러 심화과정은 따로 교본에 적혀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교수첩을 끝까지 읽어 봤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그런데 잔뜩 실망한 채로 장교수첩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 노트를 닫으려고 할 때였다.
[플레이어 요청 감지하였습니다.]
[동기화 진행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67%)]
[플레이어 요청에 따라 도감메뉴가 선행 개방됩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차가운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방금 뭐라 했나?”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며 되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하지만 카트린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는 확연하게 달랐다.
카트린의 목소리가 비록 딱딱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홀리는 미성이라면, 방금 들은 목소리는 알게 모르게 불쾌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닐세.”
카트린은 갑옷을 착용하는 데 정신을 집중한 탓인지, 나에게 추가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혹시 신임 소대장을 골려 주려는 건가 싶어 병사들 쪽을 봤지만, 그들 역시 기간트 정비와 카트린 하사에게 갑옷을 입혀 주는 거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청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정확히 들렸다.
다시금 장교수첩으로 시선을 돌리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교수첩이 마치 스마트폰 같은 단말장치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표지 자체는 변한 게 없었지만, 안의 내용물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마치 종이에다가 빔프로젝트를 직통으로 쏜 것마냥 책 안에 3D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장으로 되어 있던 페이지는 오직 한 장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누가 보면 미친놈 취급할 게 빤하지만, 혹시 터치 기능을 지원하나 싶어서 한 번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봤다.
휘릭—
그러자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전자책마냥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 이름 : 아멜 루겐바인(송창수)
— 나이 : 23세
— 성별 : 남
— 가족관계
└ 부 : 진 루겐바인
└ 모 : 아이리 루겐바인
└ 남동생 : 케인 루겐바인
— 직업 : 군인(계급 : 소위)
└ 소속 : 서부 순회순찰대 본부 3소대
└ 직함 : 본부중대 3소대장
페이지를 넘기자, 나온 것은 나에 대한, 아니, 아멜에 대한 인적사항이었다.
특이하다 할 만한 점은 이름칸에 내 진짜 이름인 송창수가 적혀 있다는 것.
아무래도 내가 이 세계로 전생한 것은 무언가 뒷이야기가 있는 듯 보였다.
조심스레 책을 덮자, 스마트폰이나 PDA같은 모습을 띄고 있던 책이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닫힌 장교수첩은 어떻게 봐도 그냥 수첩에 불과해 보였다.
“소대장님, 준비 완료했습니다. 임무 나가시죠.”
병사들의 도움으로 갑옷을 갖춰 입은 카트린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갑옷을 입었다고 해서 완전히 중무장한 것은 아니었다.
투구는 착용하지 않은 채 견갑과 흉갑, 그리고 각반과 무릎 보호대 정도만 착용한 모양새였다.
건틀릿이나 부츠는 착용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경무장이면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카트린이 착용한 갑옷을 자세히 보니 기이한 점이 발견되었다.
본래 방어구라는 것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장비였다.
하지만 카트린이 착용한 갑옷은 온라인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키니 아머처럼 중요 부위가 다 노출되어 있는 그런 갑옷이었다.
관절을 압박하지 않기에 활동성은 늘어나지만, 그에 반해 갑옷 본연의 목적은 포기한 듯한 방어구.
혹시 방어는 방패를 이용해서 하는 건가 싶어 카트린의 양손을 살펴봤지만, 그녀의 두 손에는 그 어떠한 물건도 들려 있지 않았다.
애시당초 정황상 기간트를 타는 것 같은데, 갑옷은 왜 착용하는 거지 싶었다.
아, 혹시 저게 이 세계의 파일럿 슈트인가?
그러고 보니 도감메뉴가 선행 개방되었다고 했지?
손에 들려 있던 장교수첩을 다시 펼쳤다.
표지를 넘기자, 클래식한 종이책은 온데간데없고 다시금 스마트 단말기로 변해 있었다.
이거 참,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닫혀 있을 때는 그냥 종이책인데, 펼치면 E북이 된다니.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미 이곳에 전생한 시점에서 비현실적인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는 우습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없다고 서버실의 전원을 내렸다가 화재가 발생한다든가, 아니면 대외비 기밀이 든 파일을 집에 가서 작업하겠다고 USB에 담았다가 까페에서 잃어버리고 그대로 라이벌 기업에 유출시키는 무개념 주임이라든가, IT 업계에서 일하며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봤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니, 그래도 종이책이 E북으로 바뀐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인 것이 분명했다.
“…카트린 하사.”
“왜 그러십니까?”
“이거 어떻게 보이나?”
그렇게 말하며 카트린에게 장교수첩을 펼쳐 내용물을 보여 줬다.
“장교수첩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보이냐는 뜻이다.”
“장교수첩이 장교수첩이지… 별다른 게 있습니까?”
“예를 들어 글씨가 입체적으로 보인다든가…….”
“…혹시 이거 신종 성희롱입니까?”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대장님이시니까 하는 말이었습니다.”
서서히 내 안에서 아멜 루겐바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싫은 사람인 게 분명했다.
“아무튼 이거랑 이게 달라 보이지 않다는 거지?”
기간트의 발 앞에 있는 책상에 놓인 제원표를 장교수첩과 비교하며 물었다.
“어떤 의미로 말씀이십니까?”
“둘 다 종이에 글이 써져 있냐는 말이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소대장님, 소대장님은 부사관들이 바보로 보이십니까?”
심히 불쾌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는 카트린.
“아니, 미안하네. 잠깐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저, 이래 뵈도 부사관학교 차석 졸업생입니다. 진저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카트린이 눈빛이 지휘 막사에서 보여 줬던, 폐기물을 보는 듯한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장난칠 시간있으면 기간트에나 올라타십시오.”
카트린의 말에 주차되어 있는 기간트를 올려다 보았다.
도도하게 서 있는 기간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을 절로 두근거리게 하는 박력이 있었다.
내가 이것을 탄단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타야 하는 거지?
기간트 옆에는 사다리도 난간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 도통 감이 안 왔다.
아, 여기 마법이 있는 세계였지.
혹시 마법으로 타는 건가?
하지만 마법 쓸 줄 모르는데…….
아니야, 지금 이 몸은 본래의 내가 아니라 아멜이잖아.
혹시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고민을 하고 있던 사이, 카트린이 옆에 붙었다.
“뭐하십니까?”
“응? 타라고 하지 않았나?”
내 말에 카트린이 피식하고 웃었다.
아씨, 분명 비웃는 게 분명한데, 얼굴이 예뻐서 그런가.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 상황이었건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들떴다.
이래서 외모가 사기라고 하는 거구나.
“마갑도 착용 안 하시고 B급 기간트에 타시려고 하신 겁니까?”
마갑?
생소한 단어의 언급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러자 장교수첩이 갑자기 문자 메시지가 온 것마냥 진동하기 시작했다.
명백하게 이상한 상황.
하지만 이번에도 카트린은 장교수첩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카트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장교수첩을 열었다.
― 마갑.
└ 기간트 탑승시에 코어에서 파일럿에게 가해지는 압박(마압)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보호장비. 마갑을 활성화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마나연공법 숙련도가 필요하다. 마갑 활성화에 따른 필요 마나연공법 숙련도는 마갑마다 다르다.
호오.
진짜 도감 기능이네.
장교수첩이 왜 이런 기능을 가진 아티팩트로 변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사용한다.
그러한 내 지론에 따라 누가 준 것인지는 몰라도, 이 선물을 잘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카트린이 입고 있는 저게 그냥 갑옷이 아니라 일종의 파일럿 슈트였구나.
“여벌의 마갑은 없지?”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마갑이라는 것은 소대장님 가문처럼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게 아니라 철저히 주문생산으로 제작됩니다. 그러니 오늘은 D급 기간트에 타십시오.”
카트린이 그렇게 말한 후, 건틀릿을 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건틀릿에서 갈고리가 발사되어 기간트의 콕핏 부분에 걸렸고, 갈고리를 회수하자 카트린의 몸이 부상했다.
아, 어떻게 기간트에 타나 했더니 저런 식으로 타는 거였구나.
소대에 오기 바로 직전 연대장과 같이 탔던 마차에서 중사 하나가 갈고리를 이용해 마차에 붙었던 게 기억났다.
그게 특수장비가 아니라 기본장비였구나.
아무래도 이 세계의 군대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이 갈고리를 잘 사용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카트린이 기간트의 콕핏을 열고 안에 탔다.
이윽고 기간트에 안면부에 달린 두 눈에서 붉은색의 안광이 잠시 빛나는 듯 하더니, 그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트린이 탄 기체가 옆에 세워져 있던 기간트용 대검을 꺼낸 뒤, 고쳐 잡고는 병사들의 유도를 받으며 격납고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루퍼스, 소대장님 D급 기간트 태워 드려.]
기간트에 달린 확성장치를 통해 카트린의 목소리가 격납고에 울려 퍼졌다.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루퍼스 병장이 카트린이 탄 기간트를 올려다보며 목청을 높여 말했다.
[아무거나.]
“알겠습니다!”
루퍼스 병장이 다른 정비병 한 명만 대동한 채 내 쪽으로 왔다.
“단결. 소대장님, 어떤 거 타시겠습니까? 지금 출격 가능한 건 PH—7200과 MS—826입니다.”
…뭐라는 거야?
사전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대뜸 기체명만 언급하자 많이 당황스러웠다.
“정비 상태는 어느 게 더 좋지?”
하지만 일반 병사한테 장교가 얕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대충 얼버무리면서 역으로 질문을 가했다.
“정비가 완전히 끝난 것은 PH—7200입니다. 그러면 그거를 타시겠습니까?”
“MS—826의 상태는 어떻지?”
“말 그대로 출격만 할 수 있는 상태로 정비된 상황입니다.”
“그러면 PH—7200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루퍼스 병장이 수신호를 보내자, 같이 왔던 부사수가 허겁지겁 격납고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면 우선 마갑부터 착용해야 하나?”
내 질문에 루퍼스 병장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음, 설마 실수한 건가.
이런 젠장!
최대한 조심했는데, 설마 약점을 잡히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내 그런 우려와 다르게, 루퍼스 병장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장님은 고위 귀족이라 잘 모르셨겠지만, 세상에는 코어에 룬을 새기지 않은 기간트도 있습니다. 코어에 룬이 새겨져 있지 않으니 콕핏 내부에 마압이 가해질 리가 없지 말입니다. D급 기간트는 마갑 없이도 탈 수 있는 놈들입니다.”
아무래도 기간트의 급수에는 단순히 출력의 차이만이 아닌, 다른 요소들도 적용되어 있는 듯했다.
“천천히 오십시오. 먼저 가서 준비해 놓겠습니다.”
루퍼스 병장이 그렇게 말한 후, 먼저 안쪽 깊숙히 들어간 부사수를 따라 격납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루퍼스 병장을 따라가면서 장교수첩을 열어 도감을 확인했다.
― 모든 기간트에는 등급이 매겨져 있으며 상위 등급의 기간트일수록 강한 마압이 가해진다. 이에 따라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나 통상적으로 계급에 따라 급을 달리해서 기간트에 탄다.
도감을 보고 나서야 루퍼스 병장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말하자면 떡볶이를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다는 재벌 2세의 말에 수긍하는 서민의 태도와 비슷한 거였나 보다.
그러는 사이, 내가 탈 D급 기간트가 적재되어 있는 슬롯 앞에 도착했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타시면 됩니다.”
루퍼스 병장이 병기 출납 일지를 작성하며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루퍼스 병장, 나에게는 갈고리 건틀릿이 없는데.”
“갈고리 건틀릿? 아아, 페어리 클로 말씀이시군요.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여분의 페어리 클로가 있습니다.”
루퍼스 병장이 옆에 있던 박스를 열어 안을 뒤지더니 페어리 클로를 하나 꺼내 나에게 건넸다.
페어리 클로는 언뜻 보기에는 철로 만든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만져 보니 가죽 재질이었다.
‘응?’
더욱더 놀라운 것은 페어리 클로 안에 손을 끼워 넣자, 페어리 클로가 알아서 내 손에 맞게 조정이 되었다는 거였다.
역시 마법문명 세계.
페어리 클로를 낀 왼손에 힘을 주자, 클로에서 갈고리가 발사되었다.
그리고 힘을 다시 빼자 갈고리가 회수되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편한 장비였다.
숙달되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아, 그러면 사나이의 로망, 거대 로봇을 타러 가 볼까?
떨리는 마음과 함께 PH—7200이 주차되어 있는 슬롯의 문을 열었다.
“……어?”
PH—7200의 실물을 보자마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경이롭군.”
영화나 애니에서 보던 것과는 박력이 남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강조선이 잔뜩 들어간 만화가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고 말았다.
“뭐하십니까, 소대장님?”
내가 멍 때리며 기간트를 구경하고 있자니, 카트린이 불렀다.
고개를 돌려 카트린을 보니 그녀는 소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현대 과학 기술로도 못 만드는 로봇과 현대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갑옷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뭐하는 거지?”
“임무에 나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상황 종료가 안 됐습니다. 혹시 상황이 걸리신 거 아직 모르십니까?”
카트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모를 리가 있나.
마차로 오다가 중간에 내려야 했던 이유인데.
“마수가 출현했다던가?”
“예, 맞습니다.”
상의 포켓에서 장교수첩을 꺼냈다.
혹시나 장교수첩에 기간트나 마수에 관한 정보가 써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기간트와 마수는 따로 배워야 하는 개념이 아니라 기본 상식인 듯, 장교수첩에는 그와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기본 상식을 굳이 장교수첩에 적어 놓을리가 없을뿐더러 심화과정은 따로 교본에 적혀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교수첩을 끝까지 읽어 봤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그런데 잔뜩 실망한 채로 장교수첩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 노트를 닫으려고 할 때였다.
[플레이어 요청 감지하였습니다.]
[동기화 진행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67%)]
[플레이어 요청에 따라 도감메뉴가 선행 개방됩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차가운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방금 뭐라 했나?”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며 되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하지만 카트린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는 확연하게 달랐다.
카트린의 목소리가 비록 딱딱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홀리는 미성이라면, 방금 들은 목소리는 알게 모르게 불쾌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닐세.”
카트린은 갑옷을 착용하는 데 정신을 집중한 탓인지, 나에게 추가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혹시 신임 소대장을 골려 주려는 건가 싶어 병사들 쪽을 봤지만, 그들 역시 기간트 정비와 카트린 하사에게 갑옷을 입혀 주는 거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청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정확히 들렸다.
다시금 장교수첩으로 시선을 돌리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교수첩이 마치 스마트폰 같은 단말장치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표지 자체는 변한 게 없었지만, 안의 내용물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마치 종이에다가 빔프로젝트를 직통으로 쏜 것마냥 책 안에 3D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장으로 되어 있던 페이지는 오직 한 장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누가 보면 미친놈 취급할 게 빤하지만, 혹시 터치 기능을 지원하나 싶어서 한 번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봤다.
휘릭—
그러자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전자책마냥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 이름 : 아멜 루겐바인(송창수)
— 나이 : 23세
— 성별 : 남
— 가족관계
└ 부 : 진 루겐바인
└ 모 : 아이리 루겐바인
└ 남동생 : 케인 루겐바인
— 직업 : 군인(계급 : 소위)
└ 소속 : 서부 순회순찰대 본부 3소대
└ 직함 : 본부중대 3소대장
페이지를 넘기자, 나온 것은 나에 대한, 아니, 아멜에 대한 인적사항이었다.
특이하다 할 만한 점은 이름칸에 내 진짜 이름인 송창수가 적혀 있다는 것.
아무래도 내가 이 세계로 전생한 것은 무언가 뒷이야기가 있는 듯 보였다.
조심스레 책을 덮자, 스마트폰이나 PDA같은 모습을 띄고 있던 책이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닫힌 장교수첩은 어떻게 봐도 그냥 수첩에 불과해 보였다.
“소대장님, 준비 완료했습니다. 임무 나가시죠.”
병사들의 도움으로 갑옷을 갖춰 입은 카트린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갑옷을 입었다고 해서 완전히 중무장한 것은 아니었다.
투구는 착용하지 않은 채 견갑과 흉갑, 그리고 각반과 무릎 보호대 정도만 착용한 모양새였다.
건틀릿이나 부츠는 착용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경무장이면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카트린이 착용한 갑옷을 자세히 보니 기이한 점이 발견되었다.
본래 방어구라는 것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장비였다.
하지만 카트린이 착용한 갑옷은 온라인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키니 아머처럼 중요 부위가 다 노출되어 있는 그런 갑옷이었다.
관절을 압박하지 않기에 활동성은 늘어나지만, 그에 반해 갑옷 본연의 목적은 포기한 듯한 방어구.
혹시 방어는 방패를 이용해서 하는 건가 싶어 카트린의 양손을 살펴봤지만, 그녀의 두 손에는 그 어떠한 물건도 들려 있지 않았다.
애시당초 정황상 기간트를 타는 것 같은데, 갑옷은 왜 착용하는 거지 싶었다.
아, 혹시 저게 이 세계의 파일럿 슈트인가?
그러고 보니 도감메뉴가 선행 개방되었다고 했지?
손에 들려 있던 장교수첩을 다시 펼쳤다.
표지를 넘기자, 클래식한 종이책은 온데간데없고 다시금 스마트 단말기로 변해 있었다.
이거 참,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닫혀 있을 때는 그냥 종이책인데, 펼치면 E북이 된다니.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미 이곳에 전생한 시점에서 비현실적인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는 우습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없다고 서버실의 전원을 내렸다가 화재가 발생한다든가, 아니면 대외비 기밀이 든 파일을 집에 가서 작업하겠다고 USB에 담았다가 까페에서 잃어버리고 그대로 라이벌 기업에 유출시키는 무개념 주임이라든가, IT 업계에서 일하며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봤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니, 그래도 종이책이 E북으로 바뀐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인 것이 분명했다.
“…카트린 하사.”
“왜 그러십니까?”
“이거 어떻게 보이나?”
그렇게 말하며 카트린에게 장교수첩을 펼쳐 내용물을 보여 줬다.
“장교수첩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보이냐는 뜻이다.”
“장교수첩이 장교수첩이지… 별다른 게 있습니까?”
“예를 들어 글씨가 입체적으로 보인다든가…….”
“…혹시 이거 신종 성희롱입니까?”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대장님이시니까 하는 말이었습니다.”
서서히 내 안에서 아멜 루겐바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싫은 사람인 게 분명했다.
“아무튼 이거랑 이게 달라 보이지 않다는 거지?”
기간트의 발 앞에 있는 책상에 놓인 제원표를 장교수첩과 비교하며 물었다.
“어떤 의미로 말씀이십니까?”
“둘 다 종이에 글이 써져 있냐는 말이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소대장님, 소대장님은 부사관들이 바보로 보이십니까?”
심히 불쾌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는 카트린.
“아니, 미안하네. 잠깐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저, 이래 뵈도 부사관학교 차석 졸업생입니다. 진저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카트린이 눈빛이 지휘 막사에서 보여 줬던, 폐기물을 보는 듯한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장난칠 시간있으면 기간트에나 올라타십시오.”
카트린의 말에 주차되어 있는 기간트를 올려다 보았다.
도도하게 서 있는 기간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을 절로 두근거리게 하는 박력이 있었다.
내가 이것을 탄단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타야 하는 거지?
기간트 옆에는 사다리도 난간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 도통 감이 안 왔다.
아, 여기 마법이 있는 세계였지.
혹시 마법으로 타는 건가?
하지만 마법 쓸 줄 모르는데…….
아니야, 지금 이 몸은 본래의 내가 아니라 아멜이잖아.
혹시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고민을 하고 있던 사이, 카트린이 옆에 붙었다.
“뭐하십니까?”
“응? 타라고 하지 않았나?”
내 말에 카트린이 피식하고 웃었다.
아씨, 분명 비웃는 게 분명한데, 얼굴이 예뻐서 그런가.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 상황이었건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들떴다.
이래서 외모가 사기라고 하는 거구나.
“마갑도 착용 안 하시고 B급 기간트에 타시려고 하신 겁니까?”
마갑?
생소한 단어의 언급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러자 장교수첩이 갑자기 문자 메시지가 온 것마냥 진동하기 시작했다.
명백하게 이상한 상황.
하지만 이번에도 카트린은 장교수첩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카트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장교수첩을 열었다.
― 마갑.
└ 기간트 탑승시에 코어에서 파일럿에게 가해지는 압박(마압)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보호장비. 마갑을 활성화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마나연공법 숙련도가 필요하다. 마갑 활성화에 따른 필요 마나연공법 숙련도는 마갑마다 다르다.
호오.
진짜 도감 기능이네.
장교수첩이 왜 이런 기능을 가진 아티팩트로 변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용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사용한다.
그러한 내 지론에 따라 누가 준 것인지는 몰라도, 이 선물을 잘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카트린이 입고 있는 저게 그냥 갑옷이 아니라 일종의 파일럿 슈트였구나.
“여벌의 마갑은 없지?”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마갑이라는 것은 소대장님 가문처럼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게 아니라 철저히 주문생산으로 제작됩니다. 그러니 오늘은 D급 기간트에 타십시오.”
카트린이 그렇게 말한 후, 건틀릿을 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건틀릿에서 갈고리가 발사되어 기간트의 콕핏 부분에 걸렸고, 갈고리를 회수하자 카트린의 몸이 부상했다.
아, 어떻게 기간트에 타나 했더니 저런 식으로 타는 거였구나.
소대에 오기 바로 직전 연대장과 같이 탔던 마차에서 중사 하나가 갈고리를 이용해 마차에 붙었던 게 기억났다.
그게 특수장비가 아니라 기본장비였구나.
아무래도 이 세계의 군대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이 갈고리를 잘 사용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카트린이 기간트의 콕핏을 열고 안에 탔다.
이윽고 기간트에 안면부에 달린 두 눈에서 붉은색의 안광이 잠시 빛나는 듯 하더니, 그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트린이 탄 기체가 옆에 세워져 있던 기간트용 대검을 꺼낸 뒤, 고쳐 잡고는 병사들의 유도를 받으며 격납고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루퍼스, 소대장님 D급 기간트 태워 드려.]
기간트에 달린 확성장치를 통해 카트린의 목소리가 격납고에 울려 퍼졌다.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루퍼스 병장이 카트린이 탄 기간트를 올려다보며 목청을 높여 말했다.
[아무거나.]
“알겠습니다!”
루퍼스 병장이 다른 정비병 한 명만 대동한 채 내 쪽으로 왔다.
“단결. 소대장님, 어떤 거 타시겠습니까? 지금 출격 가능한 건 PH—7200과 MS—826입니다.”
…뭐라는 거야?
사전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대뜸 기체명만 언급하자 많이 당황스러웠다.
“정비 상태는 어느 게 더 좋지?”
하지만 일반 병사한테 장교가 얕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대충 얼버무리면서 역으로 질문을 가했다.
“정비가 완전히 끝난 것은 PH—7200입니다. 그러면 그거를 타시겠습니까?”
“MS—826의 상태는 어떻지?”
“말 그대로 출격만 할 수 있는 상태로 정비된 상황입니다.”
“그러면 PH—7200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루퍼스 병장이 수신호를 보내자, 같이 왔던 부사수가 허겁지겁 격납고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면 우선 마갑부터 착용해야 하나?”
내 질문에 루퍼스 병장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음, 설마 실수한 건가.
이런 젠장!
최대한 조심했는데, 설마 약점을 잡히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내 그런 우려와 다르게, 루퍼스 병장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장님은 고위 귀족이라 잘 모르셨겠지만, 세상에는 코어에 룬을 새기지 않은 기간트도 있습니다. 코어에 룬이 새겨져 있지 않으니 콕핏 내부에 마압이 가해질 리가 없지 말입니다. D급 기간트는 마갑 없이도 탈 수 있는 놈들입니다.”
아무래도 기간트의 급수에는 단순히 출력의 차이만이 아닌, 다른 요소들도 적용되어 있는 듯했다.
“천천히 오십시오. 먼저 가서 준비해 놓겠습니다.”
루퍼스 병장이 그렇게 말한 후, 먼저 안쪽 깊숙히 들어간 부사수를 따라 격납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루퍼스 병장을 따라가면서 장교수첩을 열어 도감을 확인했다.
― 모든 기간트에는 등급이 매겨져 있으며 상위 등급의 기간트일수록 강한 마압이 가해진다. 이에 따라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나 통상적으로 계급에 따라 급을 달리해서 기간트에 탄다.
도감을 보고 나서야 루퍼스 병장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말하자면 떡볶이를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다는 재벌 2세의 말에 수긍하는 서민의 태도와 비슷한 거였나 보다.
그러는 사이, 내가 탈 D급 기간트가 적재되어 있는 슬롯 앞에 도착했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타시면 됩니다.”
루퍼스 병장이 병기 출납 일지를 작성하며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루퍼스 병장, 나에게는 갈고리 건틀릿이 없는데.”
“갈고리 건틀릿? 아아, 페어리 클로 말씀이시군요.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여분의 페어리 클로가 있습니다.”
루퍼스 병장이 옆에 있던 박스를 열어 안을 뒤지더니 페어리 클로를 하나 꺼내 나에게 건넸다.
페어리 클로는 언뜻 보기에는 철로 만든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만져 보니 가죽 재질이었다.
‘응?’
더욱더 놀라운 것은 페어리 클로 안에 손을 끼워 넣자, 페어리 클로가 알아서 내 손에 맞게 조정이 되었다는 거였다.
역시 마법문명 세계.
페어리 클로를 낀 왼손에 힘을 주자, 클로에서 갈고리가 발사되었다.
그리고 힘을 다시 빼자 갈고리가 회수되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편한 장비였다.
숙달되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아, 그러면 사나이의 로망, 거대 로봇을 타러 가 볼까?
떨리는 마음과 함께 PH—7200이 주차되어 있는 슬롯의 문을 열었다.
“……어?”
PH—7200의 실물을 보자마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