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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우르르 다시 한번 다른 집으로의 투어를 나섰다. 그 아이의 집은 확실히 달랐다. 아니, 입에서 계속해서 ‘우와, 우와.’ 하는 감탄사만 연발로 나올 뿐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집을 비우는 저의 부모님과는 달리 그 아이의 집엔 엄마가 함께 몰려간 아이들을 맞이했고 출출하지 않도록 간식과 음료를 챙겨 주기도 했다. 난생처음이었다. 그렇게 좋은 집, 그렇게 좋은 장난감, 그렇게 좋은 음식은.
‘엄마. 햇님이 집은 방이 딱 하나야. 햇님이 방이 따로 없어.’
순수를 가장한 의문이었다. 설마하니 그 나이에 새까만 의도가 있다고 여기고 싶진 않았다. 딸애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던 엄마는 잠깐 사이 제 매무새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고서는 퍽 자상하고 고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햇님이 사는 동네가 어디야?’
여덟 살에 주소를 번지수까지 완벽하게 외운다는 건 저만의 큰 자랑이었다. 때문에 어디 사느냐고 간혹 물어 오는 질문에 저는 활짝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신 있게.
‘두회동 산 21번지에 살아요!’
‘……아, 그렇구나.’
떨떠름한 얼굴.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선동을 하듯 제 물건을 더럽다 평하고 저를 멸시하며 조롱했던 그 아이는 어쩌면 제 엄마를 똑 닮아서, 집안 교육을 그렇게 교양 없이 받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이후 학교에서는 그 아이를 필두로 햇님이 집엔 장난감이 많이 없다, 인형이 더럽다, 산골짜기에 산다 등등. 온갖 짓궂은 놀림이 이어졌다. 그런 것들이 부끄러운 점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퍽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저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친구들을 제 집에 초대한다거나 제가 사는 동네를 정확하게 알리기를 내켜 하지 않았다. 놀림이 두려워서? 아니, 제 집의 꼬락서니가 진심으로 쪽팔려서.
“다녀왔습니다.”
“너 왜 이렇게 늦게 다녀? 학교는 한참 전에 마쳤던 거 아니야?”
이번엔 또 어떤 부업을 새로 얻어 왔는지 집 안 꼴이 다른 쪽으로 엉망이었다. 발로 그것들을 치워 가며 겨우 공간을 만든 후에야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생각한 그대로를 여과 없이 뱉어 낸 말이었다. 햇님의 말에 제 어머니는 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한껏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뭐? 너 점점 정말……. 넌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 그러면 학생이 제 역할에나 좀 충실해야 할 거 아니야. 숙제는 제대로 해? 학교는 나가는 거 맞아, 너? 말 나온 김에 성적표 가져와 봐. 방학 전에 성적표 이미 나눠 줬을 텐데 넌 그런 거 어째서 한 번도 가져오는 법이 없어?”
“아, 성적표 같은 거 봐서 뭐 하게. 학교야 그냥 결석 없이 대충 다니면 되는 거지.”
“봐서 뭐 하게? 그냥 대충 다녀? 잔말 말고 가져와 봐.”
“숙제는 하고 싶을 때만 하고 학교는 꼬박꼬박 매일 나가. 중간고사, 기말고사 이런 거 공부하는 거 귀찮아서 성적은 바닥이야. 이러면 굳이 안 가져다줘도 되지? 안 봐도 빤할 거 아냐.”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정말 단 한 번도 성적표 같은 걸 꼬박꼬박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제 부모는 저에게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나마 꼴찌를 면하는 수준의 성적표는 어차피 보든 안 보든 형편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딱히 성적이나 등수 같은 것에 욕심도 없었고 그렇다고 대단한 공부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한번 다녀 본 적도 없으니 교과 공부에 착실할 이유 같은 게 제겐 단 하나도 없었다.
“너 그걸 지금 뚫린 입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어?”
버르장머리는 약에 쓰려도 없는 것이었다. 밖을 나서서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느니, 하는 말이 안 나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니, 상식적으로 이딴 데서 내가 공부를 한다는 게 말이나 돼?”
“모햇님!”
“학원이나 한번 보내 주고 성적 소리를 하든가.”
“이 계집애가 정말!”
“그냥 난 내가 알아서 해! 엄마나 좀 이런 것 관둘 수 없어? 매일 먼지 뭉텅이 들이마시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해서 번 돈, 그마저도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아빠가 죄 날려 먹는 거 알면서도 반복, 무한 반복!”
“어떻게든 살자고 하는 거잖아. 엄마가 나 하나 좋기 위해서 이래? 다 너―”
“그만! 내 핑계 대지 마! 엄만 그냥 이 시궁창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거야!”
모난 말에 모진 말이었다. 일순 상처를 받은 듯 옅게 떨리는 어머니의 동공이었지만 당장 씨근덕거리고 있는 철없는 눈에 그런 게 들어올 리 만무했다. 죄 엉망처럼 보이는 집구석에 틈만 나면 저렇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발로 꼭 보라는 듯이 바닥을 쿵쾅쿵쾅 내디디며 금방 벗어 놓았던 신발을 다시 꿰어 신었다.
“어딜 나가, 또!”
“…….”
“모햇님!”
안에서 무어라 하건 문을 쾅 닫고 나와 버렸다. 집으로 들어가도 할 것이 없었고 막상 밖으로 나와도 할 게 없었다.
“……짜증 나, 진짜.”
해진 운동화 끝으로 땅을 몇 번 툭, 툭 치며 있을 때쯤인가. 저 밑에서부터 들리는 작은 소란에 시선이 옮겨졌다.
“……헉, 헉. 야…… 야, 인마. 대체 얼마나 더 가?”
두 사람 모두 다 지쳐 보였는데 그중 먼저 목소리를 낸 사람이 유독 지쳐 보였다.
“진짜 다 왔어.”
“너 아까부터…… 저 밑에서부터 그 말 했어.”
아무래도 이 동네를 올라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는 저는 제법 익숙해서 동네의 경사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보통은 저런 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퍽 흥미 없는 표정으로 교복 둘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보니 학교도 알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있는 은성고등학교.
“진짜로 다 왔어. 여기서 꺾기만 하면 돼.”
“아까는 저기서 꺾기만 하면 된다며.”
“아, 진짜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 왜 꾸역꾸역 이 동네로 친구를 끌고 와서는 저 개고생을 시킬까. 보여 줄 게 뭐가 있다고. 저였더라면 부끄러워서 발끝도 못 들이게 했을 텐데.
햇님은 심드렁한 얼굴로 경사를 가로질렀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밭은 숨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그런 그들을 보란 듯이 가볍게 타다닥, 타다닥 스쳐 내려갔다. 둘 중에 하나가 그런 저를 유심히 보았다는 건 전혀 알지 못한 채.
2.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 유니버스
“우와, 땀 나는 것 봐. 이제 얼마나 남았어?”
“한두 번만 다녀오면 끝날 것 같아.”
짐을 나르며 도와주는 아저씨들도 모두 다 혀를 내둘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에 이사를 했음에도 골목골목까지 차가 오를 수 없는 탓에 모두들 짐을 하나씩 이고, 지고 옮겼다. 금세 등허리가 축축하게 땀으로 젖었고 저마다 헉헉 밭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짐을 모두 옮기고 부모님이 마련한 작은 저녁 찬들과 술상 파티에 그 고단함이 절로 가시는 듯 대충 욱여넣은 짐은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신나게 저무는 하루를 맞이했었다.
“솔우야, 거기 뭐가 그렇게 신기한 게 있기에 한참이고 서 있어?”
이사를 도와주신 아버지의 친구분들 중 하나가 약간의 술 냄새를 풍기며 제게 다가와 물었다. 그 말에 다시 한 번 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낮은 담벼락 아래를 내려다보면 집집마다 들어와 있는 불 덕택에 층층이 반짝이는 풍경이 자리했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예쁜 야경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꼭 맞닿아 있는 듯 가까이 펼쳐진 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긴 야경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계속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오, 그래? 나도 어디 한번 보자.”
솔우의 말에 아저씨도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솔우가 동의를 구하는 양으로 눈을 반짝이며 그런 그를 보았다.
“이야, 정말 멋지네. 어?”
“이사 오게 돼서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진짜? 집은 저번 집이 더 좋지 않았어? 짐 옮길 때 보니까 여기 다니는 길도 많이 힘들겠던데.”
갑작스레 기운 가세 때문에 선택한 이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우는 좋았다. 이런 황홀한 야경을 선물해 줄 동네가 어디 또 있을까, 싶어서. 당장이라도 친구들을 불러 모아 평상에 둘러앉아 이 멋짐을 함께 누리고 싶을 정도였다.
“괜찮아요, 그런 건. 어차피 저 밑에까지는 버스도 오잖아요.”
“참, 누구 닮아서 진짜 잘 컸다, 너. 아파트 살다 동네 옮겨 와서 불평불만 한 번쯤 할 법한데도 녀석이 기특하게.”
“그러엄. 우리 아들이 얼마나 바른데. 내가 사시사철 푸르고 바르라고 지어 준 이름 아니냐, 솔우.”
어느 틈에 대화를 듣고 있었던 건지 걸쭉하게 취한 솔우의 아버지가 솔우에게로 어깨동무를 하며 그의 친구에게 받아쳤다. 솔우는 두 사람의 대화가 어쩌고, 저쩌고 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진짜 얼른 누구에게라도 이 장관을 소개하고 싶어 그저 안달이 날 뿐이었다.
이사를 한 동네에서의 적응은 빨랐다. 타고난 방향치인 어머니는 한두 달 헤매기도 했지만 이제는 좀 익숙해진 듯 곧잘 길을 찾았다. 다행히 길눈이 밝은 아버지 쪽을 닮은 탓에 저는 적응을 넘어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다녔다. 새 학교, 새 동네, 새 친구들. 모든 것이 좋았다. 그렇게 벌써 3년 차였다.
“야, 차솔우. 이건 좀…….”
우리 사전에 협의된 내용이 아니지 않냐.
산꼭대기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큼 올라와 주는 마을버스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여겼다. 어쨌든 중턱까지라도 차를 타고 올라왔으니 나머지를 걸어 올라가는 건 당연히 팔팔한 두 다리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온 친구는 저와 생각이 꽤 다른 모양이었다. 버스를 내려서 언덕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곧장 정색을 하며 제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외려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왜?”
“왜? 너 지금…… 왜냐고 그랬냐? 아오, 그따위 순진한 표정 집어치워라. 어딘데, 여기서 너희 집이.”
“저어기.”
원근감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꼴불견인 모양새라도 눈을 조금 새침하게 만들었다. 그러고서는 검지를 들어 언덕 어귀를 가리켰다. 저로서는 제 집의 위치를 짚는 건 매우 정확했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가리킴이었다.
“저어기가 어딘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뚫어져라 보지도 않고 친구는 그저 턱 끝으로만 대충 어딘지를 짚으며 물었다.
“자, 봐. 이거.”
“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검지를 똑바로 녀석의 코 앞 가까이 보여 주고서 천천히, 천천히 팔을 뻗어 다시금 위치를 조정했다.
“저기 파란색 지붕 보이지?”
“어.”
“그 집 옆에, 옆에 또 파란색 지붕 보여?”
“어디, 아…… 저기 회색 지붕 바로 위?”
“아니, 거기 말고. 세 번째 회색 지붕 거기보다 더 위에.”
“세 번째 회색 지붕? 어디, 혹시 저기 난간 보이는 쪽?”
“아니, 거기도 말고. 더 위에, 더. 딱 보이잖아.”
“…….”
“왜?”
여기서 위치를 궁금해하는 것 같기에 나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설명해 줬더니 친구 녀석은 무언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별안간 더운 콧김을 뿜뿜 뿜어 댔다.
“지금 나랑 장난해? 여기고, 저기고, 이 집이고, 저 집이고 다 비슷비슷하잖아! 지붕 색깔도 다 똑같고!”
“워, 워. 진정해. 지붕 색깔이 어떻게 다 똑같아? 참, 이래서 네가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야 한다, 이거야. 다 이유가 있었어, 내가.”
우르르 다시 한번 다른 집으로의 투어를 나섰다. 그 아이의 집은 확실히 달랐다. 아니, 입에서 계속해서 ‘우와, 우와.’ 하는 감탄사만 연발로 나올 뿐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집을 비우는 저의 부모님과는 달리 그 아이의 집엔 엄마가 함께 몰려간 아이들을 맞이했고 출출하지 않도록 간식과 음료를 챙겨 주기도 했다. 난생처음이었다. 그렇게 좋은 집, 그렇게 좋은 장난감, 그렇게 좋은 음식은.
‘엄마. 햇님이 집은 방이 딱 하나야. 햇님이 방이 따로 없어.’
순수를 가장한 의문이었다. 설마하니 그 나이에 새까만 의도가 있다고 여기고 싶진 않았다. 딸애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던 엄마는 잠깐 사이 제 매무새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고서는 퍽 자상하고 고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햇님이 사는 동네가 어디야?’
여덟 살에 주소를 번지수까지 완벽하게 외운다는 건 저만의 큰 자랑이었다. 때문에 어디 사느냐고 간혹 물어 오는 질문에 저는 활짝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신 있게.
‘두회동 산 21번지에 살아요!’
‘……아, 그렇구나.’
떨떠름한 얼굴.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선동을 하듯 제 물건을 더럽다 평하고 저를 멸시하며 조롱했던 그 아이는 어쩌면 제 엄마를 똑 닮아서, 집안 교육을 그렇게 교양 없이 받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이후 학교에서는 그 아이를 필두로 햇님이 집엔 장난감이 많이 없다, 인형이 더럽다, 산골짜기에 산다 등등. 온갖 짓궂은 놀림이 이어졌다. 그런 것들이 부끄러운 점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퍽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저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친구들을 제 집에 초대한다거나 제가 사는 동네를 정확하게 알리기를 내켜 하지 않았다. 놀림이 두려워서? 아니, 제 집의 꼬락서니가 진심으로 쪽팔려서.
“다녀왔습니다.”
“너 왜 이렇게 늦게 다녀? 학교는 한참 전에 마쳤던 거 아니야?”
이번엔 또 어떤 부업을 새로 얻어 왔는지 집 안 꼴이 다른 쪽으로 엉망이었다. 발로 그것들을 치워 가며 겨우 공간을 만든 후에야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집에 들어오기 싫어서.”
생각한 그대로를 여과 없이 뱉어 낸 말이었다. 햇님의 말에 제 어머니는 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한껏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뭐? 너 점점 정말……. 넌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 그러면 학생이 제 역할에나 좀 충실해야 할 거 아니야. 숙제는 제대로 해? 학교는 나가는 거 맞아, 너? 말 나온 김에 성적표 가져와 봐. 방학 전에 성적표 이미 나눠 줬을 텐데 넌 그런 거 어째서 한 번도 가져오는 법이 없어?”
“아, 성적표 같은 거 봐서 뭐 하게. 학교야 그냥 결석 없이 대충 다니면 되는 거지.”
“봐서 뭐 하게? 그냥 대충 다녀? 잔말 말고 가져와 봐.”
“숙제는 하고 싶을 때만 하고 학교는 꼬박꼬박 매일 나가. 중간고사, 기말고사 이런 거 공부하는 거 귀찮아서 성적은 바닥이야. 이러면 굳이 안 가져다줘도 되지? 안 봐도 빤할 거 아냐.”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정말 단 한 번도 성적표 같은 걸 꼬박꼬박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제 부모는 저에게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나마 꼴찌를 면하는 수준의 성적표는 어차피 보든 안 보든 형편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딱히 성적이나 등수 같은 것에 욕심도 없었고 그렇다고 대단한 공부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한번 다녀 본 적도 없으니 교과 공부에 착실할 이유 같은 게 제겐 단 하나도 없었다.
“너 그걸 지금 뚫린 입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어?”
버르장머리는 약에 쓰려도 없는 것이었다. 밖을 나서서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느니, 하는 말이 안 나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니, 상식적으로 이딴 데서 내가 공부를 한다는 게 말이나 돼?”
“모햇님!”
“학원이나 한번 보내 주고 성적 소리를 하든가.”
“이 계집애가 정말!”
“그냥 난 내가 알아서 해! 엄마나 좀 이런 것 관둘 수 없어? 매일 먼지 뭉텅이 들이마시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해서 번 돈, 그마저도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아빠가 죄 날려 먹는 거 알면서도 반복, 무한 반복!”
“어떻게든 살자고 하는 거잖아. 엄마가 나 하나 좋기 위해서 이래? 다 너―”
“그만! 내 핑계 대지 마! 엄만 그냥 이 시궁창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거야!”
모난 말에 모진 말이었다. 일순 상처를 받은 듯 옅게 떨리는 어머니의 동공이었지만 당장 씨근덕거리고 있는 철없는 눈에 그런 게 들어올 리 만무했다. 죄 엉망처럼 보이는 집구석에 틈만 나면 저렇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발로 꼭 보라는 듯이 바닥을 쿵쾅쿵쾅 내디디며 금방 벗어 놓았던 신발을 다시 꿰어 신었다.
“어딜 나가, 또!”
“…….”
“모햇님!”
안에서 무어라 하건 문을 쾅 닫고 나와 버렸다. 집으로 들어가도 할 것이 없었고 막상 밖으로 나와도 할 게 없었다.
“……짜증 나, 진짜.”
해진 운동화 끝으로 땅을 몇 번 툭, 툭 치며 있을 때쯤인가. 저 밑에서부터 들리는 작은 소란에 시선이 옮겨졌다.
“……헉, 헉. 야…… 야, 인마. 대체 얼마나 더 가?”
두 사람 모두 다 지쳐 보였는데 그중 먼저 목소리를 낸 사람이 유독 지쳐 보였다.
“진짜 다 왔어.”
“너 아까부터…… 저 밑에서부터 그 말 했어.”
아무래도 이 동네를 올라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는 저는 제법 익숙해서 동네의 경사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보통은 저런 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퍽 흥미 없는 표정으로 교복 둘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보니 학교도 알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있는 은성고등학교.
“진짜로 다 왔어. 여기서 꺾기만 하면 돼.”
“아까는 저기서 꺾기만 하면 된다며.”
“아, 진짜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 왜 꾸역꾸역 이 동네로 친구를 끌고 와서는 저 개고생을 시킬까. 보여 줄 게 뭐가 있다고. 저였더라면 부끄러워서 발끝도 못 들이게 했을 텐데.
햇님은 심드렁한 얼굴로 경사를 가로질렀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밭은 숨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그런 그들을 보란 듯이 가볍게 타다닥, 타다닥 스쳐 내려갔다. 둘 중에 하나가 그런 저를 유심히 보았다는 건 전혀 알지 못한 채.
2.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 유니버스
“우와, 땀 나는 것 봐. 이제 얼마나 남았어?”
“한두 번만 다녀오면 끝날 것 같아.”
짐을 나르며 도와주는 아저씨들도 모두 다 혀를 내둘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에 이사를 했음에도 골목골목까지 차가 오를 수 없는 탓에 모두들 짐을 하나씩 이고, 지고 옮겼다. 금세 등허리가 축축하게 땀으로 젖었고 저마다 헉헉 밭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짐을 모두 옮기고 부모님이 마련한 작은 저녁 찬들과 술상 파티에 그 고단함이 절로 가시는 듯 대충 욱여넣은 짐은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신나게 저무는 하루를 맞이했었다.
“솔우야, 거기 뭐가 그렇게 신기한 게 있기에 한참이고 서 있어?”
이사를 도와주신 아버지의 친구분들 중 하나가 약간의 술 냄새를 풍기며 제게 다가와 물었다. 그 말에 다시 한 번 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낮은 담벼락 아래를 내려다보면 집집마다 들어와 있는 불 덕택에 층층이 반짝이는 풍경이 자리했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예쁜 야경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꼭 맞닿아 있는 듯 가까이 펼쳐진 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긴 야경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계속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오, 그래? 나도 어디 한번 보자.”
솔우의 말에 아저씨도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솔우가 동의를 구하는 양으로 눈을 반짝이며 그런 그를 보았다.
“이야, 정말 멋지네. 어?”
“이사 오게 돼서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진짜? 집은 저번 집이 더 좋지 않았어? 짐 옮길 때 보니까 여기 다니는 길도 많이 힘들겠던데.”
갑작스레 기운 가세 때문에 선택한 이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우는 좋았다. 이런 황홀한 야경을 선물해 줄 동네가 어디 또 있을까, 싶어서. 당장이라도 친구들을 불러 모아 평상에 둘러앉아 이 멋짐을 함께 누리고 싶을 정도였다.
“괜찮아요, 그런 건. 어차피 저 밑에까지는 버스도 오잖아요.”
“참, 누구 닮아서 진짜 잘 컸다, 너. 아파트 살다 동네 옮겨 와서 불평불만 한 번쯤 할 법한데도 녀석이 기특하게.”
“그러엄. 우리 아들이 얼마나 바른데. 내가 사시사철 푸르고 바르라고 지어 준 이름 아니냐, 솔우.”
어느 틈에 대화를 듣고 있었던 건지 걸쭉하게 취한 솔우의 아버지가 솔우에게로 어깨동무를 하며 그의 친구에게 받아쳤다. 솔우는 두 사람의 대화가 어쩌고, 저쩌고 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진짜 얼른 누구에게라도 이 장관을 소개하고 싶어 그저 안달이 날 뿐이었다.
이사를 한 동네에서의 적응은 빨랐다. 타고난 방향치인 어머니는 한두 달 헤매기도 했지만 이제는 좀 익숙해진 듯 곧잘 길을 찾았다. 다행히 길눈이 밝은 아버지 쪽을 닮은 탓에 저는 적응을 넘어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다녔다. 새 학교, 새 동네, 새 친구들. 모든 것이 좋았다. 그렇게 벌써 3년 차였다.
“야, 차솔우. 이건 좀…….”
우리 사전에 협의된 내용이 아니지 않냐.
산꼭대기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큼 올라와 주는 마을버스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여겼다. 어쨌든 중턱까지라도 차를 타고 올라왔으니 나머지를 걸어 올라가는 건 당연히 팔팔한 두 다리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온 친구는 저와 생각이 꽤 다른 모양이었다. 버스를 내려서 언덕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곧장 정색을 하며 제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외려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왜?”
“왜? 너 지금…… 왜냐고 그랬냐? 아오, 그따위 순진한 표정 집어치워라. 어딘데, 여기서 너희 집이.”
“저어기.”
원근감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꼴불견인 모양새라도 눈을 조금 새침하게 만들었다. 그러고서는 검지를 들어 언덕 어귀를 가리켰다. 저로서는 제 집의 위치를 짚는 건 매우 정확했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가리킴이었다.
“저어기가 어딘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뚫어져라 보지도 않고 친구는 그저 턱 끝으로만 대충 어딘지를 짚으며 물었다.
“자, 봐. 이거.”
“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검지를 똑바로 녀석의 코 앞 가까이 보여 주고서 천천히, 천천히 팔을 뻗어 다시금 위치를 조정했다.
“저기 파란색 지붕 보이지?”
“어.”
“그 집 옆에, 옆에 또 파란색 지붕 보여?”
“어디, 아…… 저기 회색 지붕 바로 위?”
“아니, 거기 말고. 세 번째 회색 지붕 거기보다 더 위에.”
“세 번째 회색 지붕? 어디, 혹시 저기 난간 보이는 쪽?”
“아니, 거기도 말고. 더 위에, 더. 딱 보이잖아.”
“…….”
“왜?”
여기서 위치를 궁금해하는 것 같기에 나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설명해 줬더니 친구 녀석은 무언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별안간 더운 콧김을 뿜뿜 뿜어 댔다.
“지금 나랑 장난해? 여기고, 저기고, 이 집이고, 저 집이고 다 비슷비슷하잖아! 지붕 색깔도 다 똑같고!”
“워, 워. 진정해. 지붕 색깔이 어떻게 다 똑같아? 참, 이래서 네가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야 한다, 이거야. 다 이유가 있었어,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