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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 *



눈을 떴을 때는 어두워진 방 안만큼이나 바깥도 고요했다.

탕탕탕. 도마 위에서 조심스레 움직이는 칼날의 소리와 코끝을 파고드는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에 저절로 배가 반응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나서자 집 안을 가득 채운 싱그러운 초록의 화분들 속, 익숙한 엄마의 뒷모습이 그녀를 반겼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행여 딸이 깰까 봐 조용히 그러나 바삐 움직이는 몸놀림이라든가,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에서 평소보다 조금 들뜬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에 그녀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살금살금 텔레비전 쪽으로 다가가 엄마가 한껏 줄여 놓은 것이 분명한 드라마 볼륨을 살짝 높였다.

그 바람에 뭐 더 만들어 줄 것 없나, 냉장고를 뒤지다가 설희를 발견한 지선이 잔뜩 미안한 얼굴을 했다.

“일어났어? 더 자야 하는데 내가 시끄러웠지?”

“아냐. 잘 잤어.”

설희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없는 사이 한 사람 밥 먹을 공간만 간신히 놔두고 식탁을 온통 점령한 화분과 꽃병들을 조심스레 한쪽으로 옮겼다.

엄마를 닮지 않아 선인장도 죽여 버리는 놀라운 똥손의 소유자인 그녀가 보기에 죽어 가는 식물도 살려 내는 엄마의 손길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설희의 시선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다육 식물에 닿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 근처 사는 지인이 버리려는 걸 갖고 왔다던 말라 죽은 게 의심스럽던 화분도 다육이 옆에서 싱그러움을 뽐냈다.

내가 없는 동안 너희들이 우리 엄마 친구가 되어 줬구나. 그녀는 까칠한 잎사귀들을 쓰다듬어 준 뒤 수저를 놓고 밥을 퍼 담았다.

겨우 반만 담으려는 그녀를 보고 지선이 혀를 끌끌 차며 밥그릇을 빼앗아 가득 채웠다.

“한창 클 나이에 이거 먹고 무슨 힘을 써.”

‘이렇게 먹으면 배불러 잠 안 와.’ 같은 말은 어차피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설희는 ‘딱 한 숟가락만.’ 하고 엄마의 밥그릇에 밥을 덜었다.

식탁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된장찌개에 임연수구이, 계란말이, 그리고 뼈가 튼튼해야 한다며 절대 빼놓지 않는 멸치볶음 반찬까지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자리에 앉아 크게 한 숟갈을 뜨자 그제야 설희의 얼굴을 제대로 본 지선이 잔뜩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볼을 쓸었다.

“언제 왔어. 온다고 말하지. 그러면 맛있는 것 좀 차려 놨을 텐데. 어휴, 얼굴 마른 것 좀 봐.”

원래 살이 잘 찌는 체질도 아니었지만, 여름에는 입맛도 떨어져 매번 살이 쭉쭉 빠졌다. 그런데도 지선은 항상 여름마다 처음 본다는 듯이 안쓰러워했다.

“이제 맨날 볼 텐데 뭘. 신경 쓰지 마.”

방학 동안 엄마가 많이 챙겨 먹이면 또 금방 살이 붙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시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의외의 포인트에서 지선의 얼굴이 굳었다.

“너 석진이랑 무슨 일 있니?”

역시 엄마의 감이란, 귀신같다.

저 짧은 문장에서 평상시와는 달리 금방 학교 기숙사로 가지 않고 방학내 집에서 머무를 것이라는 사실과 평상시와 다른 결정의 뒤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이유가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아니. 별일 없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고 ‘된장찌개 맛있네. 된장도 엄마가 담근 거야?’ 하며 화제를 돌렸다.

지난겨울 방학 무렵 스터디에서 만난 석진이 집에 간다고 하니 억지로 데려다준 적이 있다. 그게 실수였다.

괜히 한번 내어 준 빌미로 석진은 그날 이후 계속 집 주변을 서성였고, 그만 엄마와 함께 시장을 보고 오다가 마주쳐 버린 것이다.

대문 앞까지 따라오며 살갑게 군 탓에 엄마의 호기심을 자극해 버렸다. 그날 밤 엄마에게 붙잡혀서는 아무 사이 아니라는 말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석진이 학교에서도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사이라고, 사귀는 사이처럼 소문을 내고, 스터디 뒤풀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고백을 하자 주변 사람들도 부추긴 탓에 어영부영하다 보니 사귀는 사이가 돼 버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 내버려 두었다. 과연 다른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수 있는지.

지금 넌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언젠간 나를 꼭 좋아하게 만들 거라는 당당한 석진의 선언을 설희 역시 믿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석진에 대해 말해 줬다. 사귄다고.

그게 실수였다. 집에 들를 때마다 그에 관해 묻던 엄마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를 미래의 사윗감으로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일이 터지고 석진과는 헤어졌다.

“헤어졌어?”

말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엄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혹시 석진이네 집에서 우리 집 사정 알아?”

무심하게 된장찌개를 뜨던 설희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것 때문에 헤어진 거 아냐. 그냥,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

“으응.”

영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시험에 집중하고 싶어서. 나 이제 3차만 남은 거 알지? 이거 붙으면 어차피 한동안 연수받느라 바쁘고 나중에는 한국 떠날 텐데. 게다가 엄마가 소원하던 외국 사위 얻기 더 좋지 뭐.”

석진을 만나기 전에는 우스갯소리로 한국에서 결혼하지 말고 아예 외국 나가서 외국 놈 만나 결혼하라고 응원해 주던 엄마였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떨떠름하지만 차라리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설희의 밥그릇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무렵 지선은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먹고 그냥 싱크대에 둬. 엄마가 갔다 와서 설거지할 테니까 좀 쉬어.”

“알아서 할게. 근데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서하도 오고 고성댁이 김치랑 밑반찬 몇 개 만든다고 하니까 가서 도와주려고.”

“이 시간에?”

벌써 9시가 넘은 시계를 확인하고 놀라 물었다.

“고성댁이 요즘 갱년기잖아. 속이 답답해서 누워 있으면 잠도 안 온대. 드라마 보면서 같이 말동무나 해 주면서 노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의 앞치마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강 회장이 집에 있을 때야 밤늦게 주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지 않지만 1년에 반절 이상은 외국에 나가 있는 분이었다. 때문에 집안일하는 사람들도 강 회장이 집에 없을 때는 조금 자유롭게 행동을 했다.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마. 무거운 것도 들지 말고.”

문 앞까지 지선을 배웅하며 설희는 재작년 빙판길에서 넘어질 때 살짝 다쳤던 엄마의 허리를 쓸었다.

“무거울 게 뭐가 있어. 대신 밑반찬 몇 개 얻어 오면 횡재지. 너랑 서하랑 입맛이 똑같잖아. 열무김치, 간장게장, 오이소박이 좋아하는 거. 내일 아침은 열무김치에 국수 말아 줄 테니까 기대해.”

“걔가 아직도 그런 거 좋아한대?”

외국에서 지낸 지가 몇 년인데. 괜히 딸 먹일 생각에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만 줄줄 읊는 엄마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났다.

“걔가 원래 외골수잖니. 지금도 방에 올라가면 어릴 때 갖고 놀던 장난감들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 아 참, 넌 서하 방 안 올라가 봤지?”

내가 거기 올라갈 일이 뭐가 있다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지자 설희가 엄마의 등을 살며시 떠밀었다.

“아줌마 기다리시겠다. 얼른 갔다가 빨리 와.”



* * *



지선을 보내고 설거지를 마친 후 다시 방에 누워 잠이 든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지선이 돌아와 부스럭대는 소리에 설희는 설핏 든 잠이 깨 버렸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와 누워 밤새 수다를 떨고 싶다가도 또 행여 쓸데없는 소리가 제 입에서 나올까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짹. 각. 짹. 각. 분명 무소음이라고 해서 산 건데도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크다. 귀마개를 끼고 자던 버릇 때문인지 작은 소음에도 귀가 더 예민했다.

달달달달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와 고롱고롱한 엄마의 코 고는 소리. 에어컨 없이 선풍기 하나로 버텨야 하는 열대야. 이 모든 것들이 불면증을 유발했다.

이런 식이면 오늘 하루도 멍한 기분일 텐데. 그러면 공부라고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차라리 산책이라도 좀 하고 잠들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지대가 꽤 높은 편이라 다른 곳보다도 항상 서늘한 공기를 머금은 집이었다. 예전이라면 한여름이라도 꽤 시원했을 새벽바람이 연이은 열대야로 미지근했다.

문득 낮에 사람들이 시원하게 즐기던 수영장이 떠올랐다.

어릴 때는 서하랑 수영장에서 꽤 놀았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였는지 그녀에게 수영장은 금단의 장소였다.

아무도 없는 밤, 발을 담근다고 해도 누구 하나 보는 이 없을 것이다. 한번 생각이 물꼬를 틀자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시원한 물을 상상하며 수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그러다 뚝, 설희의 발걸음이 속도를 잃었다.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건 혼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 한쪽에 한서하가 앉아 발을 담근 채 앉아 있었으니까.

대충 걷어 올린 바지와 단추 몇 개가 풀린 셔츠. 잠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그의 옷차림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둘둘 말아 올린 소매 아래 드러난 팔뚝과 넓은 어깨가 남자다워 보였지만, 은은한 달빛 때문이었을까? 예전엔 느껴지지 못했던 깊은 외로움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간간이 병째 위스키를 마시는 그의 시선이 잔잔한 수영장을 향했다. 하지만 그 눈에는 수영장이 담기지 않았다. 그는 깊은 상념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 중일까? 홍가영?

그 애를 생각하건 말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괜한 후회에 조용히 뒤돌아 가려는 설희의 발목은 잡은 건 그의 목소리였다.

“밤잠 없는 건 여전하네.”

분명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건가.

말을 마친 후 누군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서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앉아.”

서하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돌아서 집에 갈까, 아니면 그의 옆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하나.

그대로 뒤돌아 가는 건 그를 피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와 단둘이 있기에는 부담스럽다.

“우리 공주님 모시러 가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몸을 일으킨 그가 비틀거리며 설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두어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그의 얼굴이 유난히 힘겨워 보였다.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리 설희도 안 돼, 공주님도 안 돼. 그러면 널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한쪽만 삐딱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