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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젖어들다





1화



서유의 이야기 1





2007년 그해 여름.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베란다 문턱에 걸터앉아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어둑한 하늘에서 이따금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조루야.”

어느샌가 입에 붙어 버린 이름을 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이렇게 어두워진 걸까. 시계는 이제 겨우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을 뿐인데.

냐아옹.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던 고양이가 도도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검은색과 밝은 갈색의 털로 이루어진 등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발목에 얼굴을 비빈 조루가 발라당 드러눕자 윤기 나는 흰 털로 덮인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만났을 땐 갈비뼈가 선명하게 도드라지던 몸이 제법 불었다.

“조루야.”

자꾸만 이름을 부르자 귀찮은 듯 가늘게 뜬 눈이 이쪽을 향했다. 동그란 머리를 매만지며 베란다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과 연신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집 안 가득 스며든 비릿한 물 냄새.

6월의 문턱을 넘어온 빗소리는 오래도록 그칠 줄 몰랐다.



― 오늘 만날 수 있어?

“네, 시간 돼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답하며 다리에 매달리는 조루를 안아 들었다. 한쪽 팔이 기울 정도로 묵직한 무게가 싫지 않았다.

― 그럼 아홉 시에, 808호에서 보자.

냐앙. 냐앙. 냐아앙.

허기진 조루가 날카로운 울음을 흘렸다. 세상살이에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조루지만 끼니를 챙기는 문제만큼은 예외였다.

“맛있어?”

밥그릇에 코를 박은 조루를 쓰다듬자 성가신 듯 꼬리를 바닥에 탁탁 내리쳤다. 더 귀찮게 굴다간 발톱에 긁힐 것 같아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펼쳤다. 잠시 후 배를 채운 조루가 발치에 다가와 몸을 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꼼꼼히, 오래도록 몸을 문질러 씻었다. 머리를 말리고 원피스에 얇은 카디건을 걸쳐 입었다. 화장은 보기 싫은 잡티를 가릴 정도로만 가볍게 했다.

“다녀올게.”

잠꾸러기 조루는 현관 앞으로 나와 배웅을 해 주는 일만큼은 잊지 않았다. 조루에게 인사한 뒤 밖을 나섰다. 사흘 만의 첫 외출이었다.



“오늘도 고마웠어.”

2주 만에 얼굴을 마주한 남자는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속옷을 입었다.

“오늘분은, 여기.”

“고맙습니다.”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바지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건넸다. 약속한 금액에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두 달 전 처음 만난 그때부터 네 번째 만남인 오늘까지 그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말없이 그가 건넨 돈을 받아 핸드백 속에 넣었다.

“곧장 집으로 가는 거지?”

“네.”

“쉬는 날엔 뭐 해? 친구도 만나고 시내도 놀러 가고 그래?”

몸을 대가로 돈을 받는 것, 그것이 내 일이었다. 그뿐인데 남자는 늘 묻고 싶은 게 많은 것 같았다.

이상한 사람.

“친구는 없어요. 사람 많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구요.”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건 지금 남자가 짓고 있는 표정과 같은 것이었다. 친구가 없다는 말에 안타까운 듯 흐려지는 얼굴. 왜일까. 인간관계에 서투른 나지만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특별하다는 것은 알았다.

“있잖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일 하는 거, 싫지 않아?”

대답 대신 빤히 바라보자 당황한 듯 그의 귓가가 붉어졌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닌 거 아는데 그냥, 너도 평범하게 누군가를 사귀고 결혼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가 해서.”

평범하게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을 한다.

보통의 여자라면 꿈꿔 볼 만한 삶이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내 기분이 상했을까 눈치를 살피는 남자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말을 골랐다.

“전 지금도 괜찮아요. 딱히 누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 일로 괴로워한 적도 없어요.”

“……그렇구나.”

“이제 가 볼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매번 밤늦게 불러내서 미안해.”

지난번처럼 밤길이 어둡다며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려 할까 걱정했지만 이번엔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을 느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와 막힌 숨을 토해 냈다.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은 빌라는 경사가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습관처럼 언덕길을 오르다 몇 주 동안 공사로 어수선하던 건물에 시선이 닿았다.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건지 오늘은 큼지막한 간판이 달려 있었다.

“행복 마트.”

행복. 입 안에 머무는 낯선 울림이 어쩐지 어색했다.

체력이 없어 얼마 가지 않아 금세 숨이 차올랐다. 멈춰 서서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는데 어쩐지 등 뒤가 서늘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텅 빈 거리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 * *



뻑뻑한 눈을 비비며 책을 덮었다. 거실은 온통 석양빛에 잠겨 있었다.

냐앙.

조루가 신경질적인 울음소리를 내며 박박 잠옷 바지를 긁었다.

“미안. 얼른 줄게.”

얼마나 가차 없이 긁었는지 바지 너머 속살이 따끔거렸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조루가 날렵한 움직임으로 뒤를 따라왔다. 사료를 채워 주고 밥상을 폈다. 빌라 1층에 버려져 있던 둥근 소반은 밥상으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입맛이 없어 남은 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부엌에서 바라본 하늘은 어느덧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배를 채운 조루는 유유히 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시계 초침 소리만 아니라면 세상이 멈춰 버린 것처럼 사방이 적막했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꼭꼭 씹어 삼키고 그릇까지 치우고 나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하루가 너무 길었다. 한 달은, 일 년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어째서 하루하루는 이토록 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김 부장 그 자식이 말이야.”

불룩한 배에 짓눌린 탓에 숨 쉬는 것이 버거웠다.

“제대로 듣고 있긴 한 거야?”

“죄송해요.”

“이따위로 해서 내가 돈을 줄 것 같아?”

가슴께에 난 덥수룩한 털을 긁으며 남자가 말했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금세 땀이 찬 겨드랑이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너 때문이야. 내 취향은 가슴이 빵빵한 년이라고.”

삼십 분이 넘도록 그의 성기는 발기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노력할게요.”

“김 사장 말만 믿고 왔는데 이거 원, 짜증 나게.”

무작정 상대를 찾아 거리를 서성이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손님으로 만난 술집 사장에게 남자들을 소개받았다. 그가 중개료라는 명목으로 절반을 가져갔지만 상관없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경찰의 단속을 피해 거리에서 손님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돈만 떼먹지 않고 제때 보내면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았다.

사람에 속아 업소에 끌려갈 뻔한 적도, 끌려갔다 나흘 만에 간신히 탈출한 적도 있었다. 하는 일은 다름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손님이든 장소든 익숙해진다고 생각하면 옮겨 다니는 생활을 반복해 왔다. 일 년이 넘도록 한곳에 머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가 다시 한번 해 볼게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나를 소개한 그가 피해를 보게 할 순 없었다. 침대 아래로 내려가 남자의 허벅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한껏 고양된 남자의 눈빛을 뒤로한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 *



조루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나른함에 취한 조루를 두고 홀로 산책을 나섰다. 비가 오는 낮의 거리는 한산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하염없이 텅 빈 골목길을 걸었다.

얇게 입고 나온 탓인지 금세 몸이 얼어 편의점에 들렀다. 뜨거운 캔 커피를 골라 계산대로 가다 유리창 너머 빗속에 선 누군가를 발견했다.

맞은편 보도블록 위에 짧게 머리를 자른, 키가 큰 남자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소년이었다. 소년은 빗물에 짙게 물든 교복을 입은 채였다. 착각인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섰다. 빗줄기가 한층 더 거세져 있었다. 퍼붓는 빗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맞은편의 소년을 바라봤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비 때문에 얼굴이 흐릿했다.

우는 걸까.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창백한 얼굴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때마침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굉음을 내며 앞을 지나갔다. 검은 구정물이 종아리에 튀었다.

우산을 펼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캔 커피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우산에 구멍을 낼 것처럼 세차게 떨어지는 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짙은 잿빛이었다.



“미안해. 사실 이런 건 불편하지?”

그가 미소 짓자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이 잡혔다. 말쑥하게 양복을 빼입은 남자는 사십 대 후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준수한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 오늘 저녁에 잠깐 시간 좀 내 줄 수 있을까.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무렵 연락을 받았다. 평소와 다른, 떨리고 억눌려 있는 듯한 목소리에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막상 마주한 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했지만.

“밥은 내가 살 거고 당연히 함께한 시간만큼 페이도 제대로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