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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 *
의문의 남자가 한밤중에 찾아온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배가 고프면 밑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 전화가 오는 날이면 외출했다 돌아와 다시 꼼꼼히 몸을 씻고 잠들었다. 느리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밤의 기억도 서서히 지워져 갈 무렵이었다.
빌라 입구에 들어섰을 땐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우편함 속 고지서를 집어 들고 계단을 올랐다. 센서가 고장 나 캄캄한 현관문 앞에 검은 물체가 놓여 있었다.
쓰레기 불법 투기인가.
천천히 다가갔다. 쓰레기는 아니었다. 누군가 쪼그려 자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 최대한 몸을 구겼음에도 비죽이 튀어나온 기다란 팔다리.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지만 알 수 있었다. 집에 찾아왔던 그 남자였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온몸으로 나를 미워한다 말하던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더군다나 커다란 가방까지 옆에 두고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지만 남자를 깨우지 않고서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저기, 일어나세요.”
미동 없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너같이 더러운 쓰레기에게 손댈 마음 따윈 추호도 없어.’
머릿속을 맴도는 냉랭한 음성에 손을 거두었다.
“저기요.”
몇 번쯤 불렀을까.
“……뭐, 야.”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한 걸음 다가서자 남자도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무언의 허락에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럼.”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가방을 든 남자가 나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불 어딨어?”
신경질적인 음색에 서둘러 신발을 벗고 불을 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 단정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눈이 부신지 미간을 찌푸린 남자는 끝이 올라간 눈매 탓인지 서늘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남자가 입고 있는 새하얀 셔츠와 회색 바지였다. 이상했다. 분명 이상한데 그게 무엇인지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씨발, 뭘 봐?”
“실례지만…… 나이가?”
“보면 몰라? 교복 입고 있잖아, 교복!”
“아…….”
진심으로 당황했다. 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그런 내 반응은 남자, 아니 소년에게 더할 나위 없는 불쾌감을 준 듯했다.
“똑똑하게 머리에 박아 둬.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이니까.”
미성년자는 상대한 적이 없는데.
불현듯 편의점 앞에서 만났던 소년이 생각났다. 세차게 내리던 비 때문에 얼굴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큰 키도, 교복도, 비슷한 것 같았다. 어쩌면…….
생각에 잠긴 사이 거실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소년이 하나뿐인 방문을 열어젖혔다. 씨발, 완전 공주병이잖아. 소리 나게 문을 닫은 소년이 소름 끼친다는 듯 제 팔을 긁으며 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벽과 침구가 모두 분홍 일색인 건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문득 소년의 명찰에 박힌 ‘이진우’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하는 수 없지. 이불 내놔.”
잠시 망설였다. 말을 높여야 할까.
“……왜?”
숱 많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리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년은 눈썹으로 말을 하는 능력이 있었다.
“잘 거니까.”
“왜, 여기서?”
“앞으로 여기서 살 거야.”
팔짱을 낀 소년이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엄마, 아빠 모두 죽었으니까.”
‘그런 거 없어. 난, 그딴 거 없어.’
소년의 목소리가 기억 속 목소리와 겹쳐졌다.
“네 탓이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
* * *
“야, 일어나.”
자고 있는데 누군가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깨우는 사람이 누군지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밥 줘.”
서늘한 얼굴을 한참이나 보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학교 가야 하니까 십 분 안에 밥 차려.”
“몇 시?”
사위는 아직도 어두웠다.
“빨리 일어나기나 해. 학교 늦으면 책임질 거야?”
비몽사몽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들어가 밥통을 열었지만 밥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아홉 시에 일어나 하루에 먹을 만큼만 밥을 지었으니까.
“밥이 없어.”
“그럼 편의점 가서 햇반 사 와. 기다릴 테니까.”
잠옷 차림으로 현관 앞에 떠밀렸다. 지갑을 못 챙겼다는 얘기를 하려는데 소년이 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빌려줄 테니까 빨리 사 와. 내쫓기듯 밖으로 나가니 새벽의 찬 공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어서 오……세요.”
편의점에 들어서자 점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분홍색 잠옷 차림에 구두와 슬리퍼를 한 짝씩 신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편의점을 한 바퀴 빙 둘러본 후에야 햇반을 집을 수 있었다. 손에 꼭 쥐고 있던 만 원을 내놓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햇반을 품에 안고 걸음을 서둘렀다. 신발이 짝짝이라 자꾸만 몸이 휘청거렸다.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열쇠가 없어 머뭇거리다 손잡이를 돌리니 다행히 문이 열렸다.
너무 늦었나 봐.
소년은 없었다. 거실 한편에 커다란 짐 가방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에 간 것 같았다. 소파에서 밤을 지새운 건지 이불은 꺼내 준 모습 그대로였다.
추웠을 텐데.
경황이 없어 보일러를 켜는 것도 잊었다. 잔기침이 나왔다. 품에 안고 있던 햇반을 찬장에 넣어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에 파고들자 남은 온기가 몸을 감쌌다. 따뜻함에 노곤노곤 잠이 쏟아졌다.
해 질 무렵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예상대로 소년이었다.
“어디 가는데?”
대답을 망설이자 문가에 선 소년의 입꼬리가 삐뚜룸하게 올라갔다.
“아아, 몸 팔러? 근데 그렇게 차려입고 가 봤자 어차피 다 벗을 거 아냐?”
위아래로 몸을 훑는 시선에 조소가 가득했다.
“밥은.”
나를 밀친 소년이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넉넉히 밥을 해 둔 터라 있다고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열쇠 주고 가.”
“……왜?”
“내가 지금 안 왔으면 가 버렸을 거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만나지 못했으면 우유 투입구 안에 열쇠를 두고 갈 생각이었다 말하기도 전에 눈앞으로 손이 다가왔다.
“열쇠가 하나뿐이라서.”
“근데.”
“계속 집에 있을 거면 내가 들고 가는 게…….”
“이따 나갔다 올 거야. 문 열어 놓고 다녀도 되면 그냥 가든가.”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 내밀자마자 소년이 낚아채듯 가져갔다.
“가, 얼른.”
떠밀리듯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를 무릎 위에 앉혀 둔 남자의 손이 점차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흥분한 듯 딱딱해진 성기가 쿡, 쿡, 몸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요즘 애들은 시끄럽고, 요구 사항도 많고…… 몸 팔아 돈 버는 것들이 말야.”
그런 의미에서 넌 좋아. 얌전하니까.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 왔다.
절정에 이른 남자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씻기 위해 일어났지만 이내 거친 손길에 끌려갔다.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온몸을 얽어 왔다.
“가긴 어딜 가. 한 번 더 해야지.”
“이미 시간이…….”
남자의 손가락이 불쑥 안쪽을 파고들어 왔다. 봐 봐, 너도 이렇게 젖어 있잖아. 아직 부족해서 그런 거라구.
“우리 사이에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어. 응? 너도 좋잖아.”
말할 새도 없이 몸이 뒤집혔다. 좋으면서 튕기지 마. 얼굴이 베개에 짓눌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팔의 힘을 푼 남자가 중얼거렸다. 봐 봐, 얌전하니까 얼마나 좋아.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끼며 몸에서 힘을 뺐다.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벨은 고장 난 지 오래였고 밤이 깊어 큰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눈치를 살피며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주변은 고요했다.
불 꺼진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십 분째 문은 열리지 않았고 하나뿐인 열쇠는 소년에게 건넨 뒤였다.
여분의 열쇠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소년이 깊이 잠든 건지, 아니면 일부러 열어 주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소년을 손님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럼 어떻게 날 알고 이곳을 찾아왔을까. 일주일에 많으면 서너 번 전화를 받고 일을 나가지만 끝나면 곧장 귀가했다. 그 외에 가는 곳이라고는 편의점이나 마트, 도서관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따로 알고 지내는 이도 없었다.
‘엄마, 아빠 모두 죽었으니까.’
소년의 부모님은 정말 돌아가셨을까.
‘네 탓이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
정말 그것이 내 탓이라면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 걸까.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다리가 덜덜 떨려 와 팔로 감싸 안았지만 소용없었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지 않아 귀를 틀어막았지만 달큼한 설탕물을 듬뿍 삼킨 듯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쉬이, 괜찮아, 서유야.
다, 괜찮아.
* * *
작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눈을 떴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더니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콧물이 나와서 재빨리 들이마셨다. 삐거덕거리는 목을 풀다 마침 계단을 올라오던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아아. 맞다.”
소년이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 쳤다.
“열쇠가 없어서 여기서 밤샌 거야?”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서서 이죽거리는 소년의 몸에선 어째서인지 차고 마른 바람 냄새가 났다. 충혈된 눈과 피로한 얼굴이 한숨도 자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소년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새운 걸까. 왜 여기서 안 자고 밖에 있었던 거야? 목까지 차오른 물음을 삼켰다.
“……열쇠 있어?”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저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건네는 손길이 더없이 신경질적이었다. 문을 열기 무섭게 나를 밀친 소년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밥 차려. 배고프니까.”
짜증 나. 들릴 듯 말 듯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 *
의문의 남자가 한밤중에 찾아온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배가 고프면 밑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 전화가 오는 날이면 외출했다 돌아와 다시 꼼꼼히 몸을 씻고 잠들었다. 느리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밤의 기억도 서서히 지워져 갈 무렵이었다.
빌라 입구에 들어섰을 땐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우편함 속 고지서를 집어 들고 계단을 올랐다. 센서가 고장 나 캄캄한 현관문 앞에 검은 물체가 놓여 있었다.
쓰레기 불법 투기인가.
천천히 다가갔다. 쓰레기는 아니었다. 누군가 쪼그려 자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 최대한 몸을 구겼음에도 비죽이 튀어나온 기다란 팔다리.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지만 알 수 있었다. 집에 찾아왔던 그 남자였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온몸으로 나를 미워한다 말하던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더군다나 커다란 가방까지 옆에 두고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지만 남자를 깨우지 않고서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저기, 일어나세요.”
미동 없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너같이 더러운 쓰레기에게 손댈 마음 따윈 추호도 없어.’
머릿속을 맴도는 냉랭한 음성에 손을 거두었다.
“저기요.”
몇 번쯤 불렀을까.
“……뭐, 야.”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한 걸음 다가서자 남자도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무언의 허락에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럼.”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가방을 든 남자가 나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불 어딨어?”
신경질적인 음색에 서둘러 신발을 벗고 불을 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 단정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눈이 부신지 미간을 찌푸린 남자는 끝이 올라간 눈매 탓인지 서늘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남자가 입고 있는 새하얀 셔츠와 회색 바지였다. 이상했다. 분명 이상한데 그게 무엇인지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씨발, 뭘 봐?”
“실례지만…… 나이가?”
“보면 몰라? 교복 입고 있잖아, 교복!”
“아…….”
진심으로 당황했다. 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그런 내 반응은 남자, 아니 소년에게 더할 나위 없는 불쾌감을 준 듯했다.
“똑똑하게 머리에 박아 둬.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이니까.”
미성년자는 상대한 적이 없는데.
불현듯 편의점 앞에서 만났던 소년이 생각났다. 세차게 내리던 비 때문에 얼굴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큰 키도, 교복도, 비슷한 것 같았다. 어쩌면…….
생각에 잠긴 사이 거실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소년이 하나뿐인 방문을 열어젖혔다. 씨발, 완전 공주병이잖아. 소리 나게 문을 닫은 소년이 소름 끼친다는 듯 제 팔을 긁으며 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벽과 침구가 모두 분홍 일색인 건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문득 소년의 명찰에 박힌 ‘이진우’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하는 수 없지. 이불 내놔.”
잠시 망설였다. 말을 높여야 할까.
“……왜?”
숱 많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리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년은 눈썹으로 말을 하는 능력이 있었다.
“잘 거니까.”
“왜, 여기서?”
“앞으로 여기서 살 거야.”
팔짱을 낀 소년이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엄마, 아빠 모두 죽었으니까.”
‘그런 거 없어. 난, 그딴 거 없어.’
소년의 목소리가 기억 속 목소리와 겹쳐졌다.
“네 탓이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
* * *
“야, 일어나.”
자고 있는데 누군가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깨우는 사람이 누군지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밥 줘.”
서늘한 얼굴을 한참이나 보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학교 가야 하니까 십 분 안에 밥 차려.”
“몇 시?”
사위는 아직도 어두웠다.
“빨리 일어나기나 해. 학교 늦으면 책임질 거야?”
비몽사몽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들어가 밥통을 열었지만 밥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아홉 시에 일어나 하루에 먹을 만큼만 밥을 지었으니까.
“밥이 없어.”
“그럼 편의점 가서 햇반 사 와. 기다릴 테니까.”
잠옷 차림으로 현관 앞에 떠밀렸다. 지갑을 못 챙겼다는 얘기를 하려는데 소년이 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빌려줄 테니까 빨리 사 와. 내쫓기듯 밖으로 나가니 새벽의 찬 공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어서 오……세요.”
편의점에 들어서자 점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분홍색 잠옷 차림에 구두와 슬리퍼를 한 짝씩 신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편의점을 한 바퀴 빙 둘러본 후에야 햇반을 집을 수 있었다. 손에 꼭 쥐고 있던 만 원을 내놓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햇반을 품에 안고 걸음을 서둘렀다. 신발이 짝짝이라 자꾸만 몸이 휘청거렸다.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열쇠가 없어 머뭇거리다 손잡이를 돌리니 다행히 문이 열렸다.
너무 늦었나 봐.
소년은 없었다. 거실 한편에 커다란 짐 가방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에 간 것 같았다. 소파에서 밤을 지새운 건지 이불은 꺼내 준 모습 그대로였다.
추웠을 텐데.
경황이 없어 보일러를 켜는 것도 잊었다. 잔기침이 나왔다. 품에 안고 있던 햇반을 찬장에 넣어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에 파고들자 남은 온기가 몸을 감쌌다. 따뜻함에 노곤노곤 잠이 쏟아졌다.
해 질 무렵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예상대로 소년이었다.
“어디 가는데?”
대답을 망설이자 문가에 선 소년의 입꼬리가 삐뚜룸하게 올라갔다.
“아아, 몸 팔러? 근데 그렇게 차려입고 가 봤자 어차피 다 벗을 거 아냐?”
위아래로 몸을 훑는 시선에 조소가 가득했다.
“밥은.”
나를 밀친 소년이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넉넉히 밥을 해 둔 터라 있다고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열쇠 주고 가.”
“……왜?”
“내가 지금 안 왔으면 가 버렸을 거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만나지 못했으면 우유 투입구 안에 열쇠를 두고 갈 생각이었다 말하기도 전에 눈앞으로 손이 다가왔다.
“열쇠가 하나뿐이라서.”
“근데.”
“계속 집에 있을 거면 내가 들고 가는 게…….”
“이따 나갔다 올 거야. 문 열어 놓고 다녀도 되면 그냥 가든가.”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 내밀자마자 소년이 낚아채듯 가져갔다.
“가, 얼른.”
떠밀리듯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를 무릎 위에 앉혀 둔 남자의 손이 점차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흥분한 듯 딱딱해진 성기가 쿡, 쿡, 몸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요즘 애들은 시끄럽고, 요구 사항도 많고…… 몸 팔아 돈 버는 것들이 말야.”
그런 의미에서 넌 좋아. 얌전하니까.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 왔다.
절정에 이른 남자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씻기 위해 일어났지만 이내 거친 손길에 끌려갔다.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온몸을 얽어 왔다.
“가긴 어딜 가. 한 번 더 해야지.”
“이미 시간이…….”
남자의 손가락이 불쑥 안쪽을 파고들어 왔다. 봐 봐, 너도 이렇게 젖어 있잖아. 아직 부족해서 그런 거라구.
“우리 사이에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어. 응? 너도 좋잖아.”
말할 새도 없이 몸이 뒤집혔다. 좋으면서 튕기지 마. 얼굴이 베개에 짓눌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팔의 힘을 푼 남자가 중얼거렸다. 봐 봐, 얌전하니까 얼마나 좋아.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느끼며 몸에서 힘을 뺐다.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벨은 고장 난 지 오래였고 밤이 깊어 큰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눈치를 살피며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주변은 고요했다.
불 꺼진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십 분째 문은 열리지 않았고 하나뿐인 열쇠는 소년에게 건넨 뒤였다.
여분의 열쇠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소년이 깊이 잠든 건지, 아니면 일부러 열어 주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소년을 손님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럼 어떻게 날 알고 이곳을 찾아왔을까. 일주일에 많으면 서너 번 전화를 받고 일을 나가지만 끝나면 곧장 귀가했다. 그 외에 가는 곳이라고는 편의점이나 마트, 도서관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따로 알고 지내는 이도 없었다.
‘엄마, 아빠 모두 죽었으니까.’
소년의 부모님은 정말 돌아가셨을까.
‘네 탓이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
정말 그것이 내 탓이라면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 걸까.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다리가 덜덜 떨려 와 팔로 감싸 안았지만 소용없었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지 않아 귀를 틀어막았지만 달큼한 설탕물을 듬뿍 삼킨 듯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쉬이, 괜찮아, 서유야.
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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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눈을 떴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더니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콧물이 나와서 재빨리 들이마셨다. 삐거덕거리는 목을 풀다 마침 계단을 올라오던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아아. 맞다.”
소년이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 쳤다.
“열쇠가 없어서 여기서 밤샌 거야?”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서서 이죽거리는 소년의 몸에선 어째서인지 차고 마른 바람 냄새가 났다. 충혈된 눈과 피로한 얼굴이 한숨도 자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소년 역시 밖에서 밤을 지새운 걸까. 왜 여기서 안 자고 밖에 있었던 거야? 목까지 차오른 물음을 삼켰다.
“……열쇠 있어?”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저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건네는 손길이 더없이 신경질적이었다. 문을 열기 무섭게 나를 밀친 소년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밥 차려. 배고프니까.”
짜증 나. 들릴 듯 말 듯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