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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다음 날까지도 해성은 믿지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 어제 유독 기분이 저조했는데 하필 눈에 띈 사람이 자신이라 운 나쁘게 불똥이 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어이, 이해성이. 무슨 일 있어? 얼굴 봐라.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죽을상이야.”
박건우 경사가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해성의 자리로 다가왔다.
“아, 박 경사님. 잘 쉬셨어요?”
“어. 근데 오늘 팀 분위기 왜 이이래? 살인이라도 터졌나?”
어제 연가 사용으로 휴무였던 그는 아직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
“나 없는 사이에 뭐 있었어?”
많은 일이 있었고, 달라진 건 없었다. 해성은 회사에 첫 출근 한 신입 사원처럼 자리에 앉아 멍하니 빈 책상만 바라봤다. 그게 다였다.
“왜 다들 말이 없어.”
회의 참석은커녕, 사건 배당에서 완벽히 배제됐다. 분명 이 사달을 만든 것은 강현이었지만, 일이 많아져 투덜거리는 형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건 해성의 몫이었다.
최악이다. 예고에 없던 그의 등장으로 하여금, 이곳에 온 목적이 무의미해졌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뭐가 됐든 사건 배당에서 제외하겠단 통보는 그 어떤 이유로든 명백히 부당한 사안이었다.
“무슨 일? 있었지. 아주 많았지.”
비어 있는 팀장 자리를 힐긋거리며, 조형운 경위가 코웃음을 쳤다.
“이해성, 차 팀장한테 제대로 찍혔다. 사건 배당도 받지 말고 출동도 하지 말란다. 덕분에 우리만 죽어 나가게 생겼고.”
“왜요?”
“나라고 알겠냐? 하, 지금 이해성 몫까지 사건 받아서 해결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안 그래도 인력은 부족한데 사건은 넘쳐 나서 언제 제대로 쉬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판국에, 씨발. 이게 대체 뭔 경우냐? 이해성뿐 아니라, 팀원 전체를 엿 먹인 거야. 차강현 그 자식이!”
조형운 경위는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하고 출력해 둔 보고서를 거칠게 내던지며 분통을 터트렸다.
“경위님. 워워. 릴렉스, 릴렉스.”
혹시라도 강현이 들어올까 싶었는지, 세찬은 바닥에 흐트러진 서류 종이를 서둘러 주워 들며 수습했다.
“이해성. 너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꿀 빨려고 강력계 지원했어?”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다.
“……아닙니다.”
“그럼 청문감사실이든 형사과장실이든 찾아가서 부당하다 말하고 해결하려는 척이라도 보여야 할 거 아니야! 자리에 접착제 붙여 놨어? 너 때문에 고생하는 다른 팀원들 안 보여? 눈 없냐고, 이 자식아!”
울컥한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라 해성은 눈을 꽉 감아 버렸다.
복장이 터진다며 주먹으로 연신 가슴팍을 퍽퍽 내리치는 조형운 형사를 한 번, 푹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해성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던 박건우 경사가 상황 파악을 마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강력계 들어온 지 한 달 된 친구잖아요, 경위님. 살살 하세요.”
“뭐야?”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되게 정중하시던데. 인사도 잘 받아 주시고.”
“인사를 받아 줘? 누가. 차강현, 그 인간이?”
“네. 아까 화장실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거든요. 형사과장실에서 과장님이랑 같이 나오고 계셨어요. 지금쯤이면 아마 과장님이랑 서장실에 계시겠네요. 전입 신고 할 겸.”
“걔가 뭔데 과장님이랑 서장실을 같이 가. 서장님이랑 뭐 있어?”
“모르셨어요? 차 팀장님 아버지가 대법원장님이신데.”
대법원장이면, 장관급이다. 사법부의 수장. 비록 영역은 다르지만 굳이 따지자면 법무부장관, 검찰총장보다 높은 위치였다. 차관급인 경찰청장은 감히 비빌 수준도 못 되는 위치였다.
건우의 말 한마디에 강력 2팀 형사 직원 전부가 굳었다. 특히, 조형운 경위는 입을 떡 벌린 채 소리 없이 경악하며 눈을 껌뻑거렸다.
“무, 뭐? 이 새끼가…….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제가 상사 가족사로 장난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조형운 경위는 못내 의심을 지우지 못했지만, 경찰청에서 근무한 이력으로 보아 건우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경찰청보다 입소문 빠른 곳이 또 있나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다들 모르는 척 암묵적으로 쉬쉬하는 것뿐이지.”
이로써 해성은 더 막막해졌다. 수칙 원칙 할 것 없이 막무가내로 굴던 차강현을 멈출 방법이, 없다.
“하여튼, 그렇다고 너무 티 내진 마십시오. 차 경감님 아버지 덕 보는 거, 죽기보다 싫어하신답니다.”
“아, 미치겠네. 대법원장 아들이 왜 여기에서 경찰 일을 하고 있대? 조신하게 판검사나 할 것이지.”
“왜요. 전 멋있기만 한데.”
“넌 대체 누구 편이야? 뒈질래?”
“경위님 지금 좀 유치하십니다.”
건우는 해성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해성은 간신히 입술을 당겼지만, 억지로 만들어 낸 작위적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했던가. 덜컥, 사무실 문이 열리며 강현이 등장했다. 건우와 세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팀장님.”
건우에게 팀장의 가족사를 전해 듣게 된 조형운 경위는 버선발로 달려 나가 강현을 반겼다. 양손을 싹싹 비비는 모양새가 봐 줄 만했는지 건우와 세찬은 터지려는 웃음을 악착같이 참아 냈다.
“오늘 날씨가 차암 좋습니다, 팀장님. 그렇지요?”
“……뭡니까.”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조형운 경위의 태도가 거슬렸는지, 강현은 미간을 좁히며 못마땅하게 조 경위를 훑었다.
마침 팀장 책상 위에 놓인 지령실 전용 무전기에서 치직, 치직 거칠게 찢기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곧 사건이 떨어진단 신호였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 강력 2팀 형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무전기를 바라봤다.
― 신고 접수 번호 6203번. 강남역 11번 출구 앞 노상에서 흉기를 든 40대 추정 남성이 행인을 위협하고 있다는 신고. 말리던 20대 남성 흉기에 긁혀 찰과상 피해. 성도지구대 순마 66, 65호 긴급 종발 하여 현장 초동 조치 바랍니다. 아울러 강력팀 형사 차량 02호 함께 종발합니다. 흉기를 들고 있는 만큼, 직원분들은 방검복, 방검장갑, 테이저 건 등 반드시 안전 장구를 착용하여 안전에 유의하십시오.
지령실의 안내가 끝나기 무섭게 강력 2팀 형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사들은 팀장의 최종 지시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강현의 입만 바라보았다.
새 팀장과의 첫 근무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던 차강현의 실력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에이스란 수식어에 걸맞게 사건을 처리할 것인지, 아니면 이름만 거창한 허울이었을지. 직접 판단할 수 있는 자리인 만큼 강력 2팀 팀원들은 강현의 입에서 함께 출동할 형사의 이름으로 자신이 호명되길 바랐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인데, 정작 강현은 여유로웠다. 팀원의 얼굴을 느리게 훑던 어둑한 눈동자가 해성에게서 멈추었다.
“이번 사건 출동은 조형운 경위. 그리고 내가 갑니다.”
그의 맥락 없고 노골적인 군림은 더없이 무례했지만 묘하게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꾸며 낸 것이 아니다. 타고난 능력이었다.
조형운 경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좋은 인상으로 기억됐을 리가 없는데. 당연히 모범생인 건우가 선택될 것이라 생각했다. 에라, 그게 뭐가 대수냐. 형운은 반색하며 활짝 웃었다.
“굉장히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강현은 조형운 경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어 말했다.
“박건우 경사, 김세찬 순경은 사무실에 남아서 배당받은 사건 마저 처리하시고.”
“네.”
“예. 알겠습니다.”
건우와 세찬이 차례로 대답했다. 형운은 구석에 처박아 둔 방검조끼를 꺼내어 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성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병신 머저리같이 가만히 있으란 말에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조형운 경위의 말처럼 세월 좋게 꿀이나 빨려고 강력계를 지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해성은 굳게 마음을 다잡고 얼굴을 들었다. 뜻하지 않게 그와 눈이 마주쳐 잠시 주춤거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팀장님.”
해성은 목소리를 겨우 쥐어짰다.
“저는.”
“이해성 씨는 계속 대기하세요. 아까처럼, 하던 대로.”
강현은 이제 와 다시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예상한 것과 단 한 글자 오차도 없는 말이었다. 덩.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소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었다. 경찰 조직은.
홀로 살아남아 그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배제당한 이유를 알 수 없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부당하다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배웠다.
조직에서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복종하거나, 옷을 벗거나. 둘 중 하나만 존재할 뿐이다.
“출발합시다.”
전할 말을 끝낸 강현은 슬쩍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조형운 경위가 바짝 그의 뒤를 쫓았다. 툭, 부딪친 어깨가 아렸다.
* * *
“어이, 이해성이. 괜찮아?”
“선배. 너무 상심하지 마요.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건우와 세찬의 위로가 멀게 느껴졌다. 우울해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해성이 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뭐 찾는데?”
건우의 말을 뒤로하며 해성은 성큼성큼 강현의 자리로 다가갔다. 뜻밖의 횡재다. 입구에 서 있던 차강현은 당연히 조형운 경위가 챙길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평소 급한 성격 탓에 덤벙거리는 조형운 경위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생각해 낼 수 있던 것이다.
형사 차량 키.
해성은 차량 키를 덥석 집어 들고 그대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경찰서 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이끌리듯 주차장으로 향했다. 익숙한 경찰 마크가 새겨진 출동용 하얀색 스타렉스 차량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중엔, ‘형사 02호’ 스티커가 부착된 스타렉스 차량도 있었다. 다행히 형운과 강현은 이제 막 차량 근처에 도착한 참이었다.
“잠시만요!”
“이해성. 너 미쳤어?”
해성이 앞을 가로막자 적잖게 당황한 조형운 경위가 강현의 눈치를 살피며 눈짓을 보였다. 일 나기 전에 얼른 돌아가란 뜻이다.
해성은 형운의 경고를 무시하고 냅다 허리를 푹 숙였다.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팀장님. 잘할 수 있습니다.”
해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그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돌아가요.”
강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단호히 몸을 돌렸다.
“못 갑니다. 아니, 안 갑니다.”
“왜?”
“저도 형사입니다. 팀장님.”
“그러니까 왜.”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시면 하지 않겠습니다. 옆에 떨어져서 구경만 하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장에 따라갈 수 있게만 허락해 주세요. 7년 무사고였어요. 운전, 잘합니다. 저.”
강현이 픽, 웃음을 터트리며 반쯤 돌아섰다.
“이해성 씨.”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얼굴 들어요.”
역시나, 묵묵부답.
“시간 없으니까 얼굴 들라고.”
그제야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해성은 입술을 꾹 감쳐물고서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강현은 천천히 해성을 훑어 내렸다.
“볼수록 마음에 안 드네.”
“……네?”
“방검복 미착용. 상사 명령 불복종. 하다못해 건방진 그 성격까지.”
강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단숨에 거리가 좁혀지자 해성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묵직한 압도감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강현이 난데없이 팔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따라 해성의 불안한 눈길이 느리게 움직였다. 뜻을 알아차린 해성은 재빠르게 차량 키를 등 뒤로 숨겼다.
“제가 하겠습니다. 운전.”
짜증 섞인 한숨이 흘렀다.
“말고, 누르라고. 차 타게.”
다음 날까지도 해성은 믿지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 어제 유독 기분이 저조했는데 하필 눈에 띈 사람이 자신이라 운 나쁘게 불똥이 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어이, 이해성이. 무슨 일 있어? 얼굴 봐라.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죽을상이야.”
박건우 경사가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해성의 자리로 다가왔다.
“아, 박 경사님. 잘 쉬셨어요?”
“어. 근데 오늘 팀 분위기 왜 이이래? 살인이라도 터졌나?”
어제 연가 사용으로 휴무였던 그는 아직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
“나 없는 사이에 뭐 있었어?”
많은 일이 있었고, 달라진 건 없었다. 해성은 회사에 첫 출근 한 신입 사원처럼 자리에 앉아 멍하니 빈 책상만 바라봤다. 그게 다였다.
“왜 다들 말이 없어.”
회의 참석은커녕, 사건 배당에서 완벽히 배제됐다. 분명 이 사달을 만든 것은 강현이었지만, 일이 많아져 투덜거리는 형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건 해성의 몫이었다.
최악이다. 예고에 없던 그의 등장으로 하여금, 이곳에 온 목적이 무의미해졌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뭐가 됐든 사건 배당에서 제외하겠단 통보는 그 어떤 이유로든 명백히 부당한 사안이었다.
“무슨 일? 있었지. 아주 많았지.”
비어 있는 팀장 자리를 힐긋거리며, 조형운 경위가 코웃음을 쳤다.
“이해성, 차 팀장한테 제대로 찍혔다. 사건 배당도 받지 말고 출동도 하지 말란다. 덕분에 우리만 죽어 나가게 생겼고.”
“왜요?”
“나라고 알겠냐? 하, 지금 이해성 몫까지 사건 받아서 해결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안 그래도 인력은 부족한데 사건은 넘쳐 나서 언제 제대로 쉬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판국에, 씨발. 이게 대체 뭔 경우냐? 이해성뿐 아니라, 팀원 전체를 엿 먹인 거야. 차강현 그 자식이!”
조형운 경위는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하고 출력해 둔 보고서를 거칠게 내던지며 분통을 터트렸다.
“경위님. 워워. 릴렉스, 릴렉스.”
혹시라도 강현이 들어올까 싶었는지, 세찬은 바닥에 흐트러진 서류 종이를 서둘러 주워 들며 수습했다.
“이해성. 너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꿀 빨려고 강력계 지원했어?”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다.
“……아닙니다.”
“그럼 청문감사실이든 형사과장실이든 찾아가서 부당하다 말하고 해결하려는 척이라도 보여야 할 거 아니야! 자리에 접착제 붙여 놨어? 너 때문에 고생하는 다른 팀원들 안 보여? 눈 없냐고, 이 자식아!”
울컥한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라 해성은 눈을 꽉 감아 버렸다.
복장이 터진다며 주먹으로 연신 가슴팍을 퍽퍽 내리치는 조형운 형사를 한 번, 푹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해성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던 박건우 경사가 상황 파악을 마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강력계 들어온 지 한 달 된 친구잖아요, 경위님. 살살 하세요.”
“뭐야?”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되게 정중하시던데. 인사도 잘 받아 주시고.”
“인사를 받아 줘? 누가. 차강현, 그 인간이?”
“네. 아까 화장실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거든요. 형사과장실에서 과장님이랑 같이 나오고 계셨어요. 지금쯤이면 아마 과장님이랑 서장실에 계시겠네요. 전입 신고 할 겸.”
“걔가 뭔데 과장님이랑 서장실을 같이 가. 서장님이랑 뭐 있어?”
“모르셨어요? 차 팀장님 아버지가 대법원장님이신데.”
대법원장이면, 장관급이다. 사법부의 수장. 비록 영역은 다르지만 굳이 따지자면 법무부장관, 검찰총장보다 높은 위치였다. 차관급인 경찰청장은 감히 비빌 수준도 못 되는 위치였다.
건우의 말 한마디에 강력 2팀 형사 직원 전부가 굳었다. 특히, 조형운 경위는 입을 떡 벌린 채 소리 없이 경악하며 눈을 껌뻑거렸다.
“무, 뭐? 이 새끼가…….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제가 상사 가족사로 장난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조형운 경위는 못내 의심을 지우지 못했지만, 경찰청에서 근무한 이력으로 보아 건우의 말은 신빙성이 있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경찰청보다 입소문 빠른 곳이 또 있나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다들 모르는 척 암묵적으로 쉬쉬하는 것뿐이지.”
이로써 해성은 더 막막해졌다. 수칙 원칙 할 것 없이 막무가내로 굴던 차강현을 멈출 방법이, 없다.
“하여튼, 그렇다고 너무 티 내진 마십시오. 차 경감님 아버지 덕 보는 거, 죽기보다 싫어하신답니다.”
“아, 미치겠네. 대법원장 아들이 왜 여기에서 경찰 일을 하고 있대? 조신하게 판검사나 할 것이지.”
“왜요. 전 멋있기만 한데.”
“넌 대체 누구 편이야? 뒈질래?”
“경위님 지금 좀 유치하십니다.”
건우는 해성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해성은 간신히 입술을 당겼지만, 억지로 만들어 낸 작위적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했던가. 덜컥, 사무실 문이 열리며 강현이 등장했다. 건우와 세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팀장님.”
건우에게 팀장의 가족사를 전해 듣게 된 조형운 경위는 버선발로 달려 나가 강현을 반겼다. 양손을 싹싹 비비는 모양새가 봐 줄 만했는지 건우와 세찬은 터지려는 웃음을 악착같이 참아 냈다.
“오늘 날씨가 차암 좋습니다, 팀장님. 그렇지요?”
“……뭡니까.”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조형운 경위의 태도가 거슬렸는지, 강현은 미간을 좁히며 못마땅하게 조 경위를 훑었다.
마침 팀장 책상 위에 놓인 지령실 전용 무전기에서 치직, 치직 거칠게 찢기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곧 사건이 떨어진단 신호였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 강력 2팀 형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무전기를 바라봤다.
― 신고 접수 번호 6203번. 강남역 11번 출구 앞 노상에서 흉기를 든 40대 추정 남성이 행인을 위협하고 있다는 신고. 말리던 20대 남성 흉기에 긁혀 찰과상 피해. 성도지구대 순마 66, 65호 긴급 종발 하여 현장 초동 조치 바랍니다. 아울러 강력팀 형사 차량 02호 함께 종발합니다. 흉기를 들고 있는 만큼, 직원분들은 방검복, 방검장갑, 테이저 건 등 반드시 안전 장구를 착용하여 안전에 유의하십시오.
지령실의 안내가 끝나기 무섭게 강력 2팀 형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사들은 팀장의 최종 지시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강현의 입만 바라보았다.
새 팀장과의 첫 근무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던 차강현의 실력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에이스란 수식어에 걸맞게 사건을 처리할 것인지, 아니면 이름만 거창한 허울이었을지. 직접 판단할 수 있는 자리인 만큼 강력 2팀 팀원들은 강현의 입에서 함께 출동할 형사의 이름으로 자신이 호명되길 바랐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인데, 정작 강현은 여유로웠다. 팀원의 얼굴을 느리게 훑던 어둑한 눈동자가 해성에게서 멈추었다.
“이번 사건 출동은 조형운 경위. 그리고 내가 갑니다.”
그의 맥락 없고 노골적인 군림은 더없이 무례했지만 묘하게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꾸며 낸 것이 아니다. 타고난 능력이었다.
조형운 경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좋은 인상으로 기억됐을 리가 없는데. 당연히 모범생인 건우가 선택될 것이라 생각했다. 에라, 그게 뭐가 대수냐. 형운은 반색하며 활짝 웃었다.
“굉장히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강현은 조형운 경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어 말했다.
“박건우 경사, 김세찬 순경은 사무실에 남아서 배당받은 사건 마저 처리하시고.”
“네.”
“예. 알겠습니다.”
건우와 세찬이 차례로 대답했다. 형운은 구석에 처박아 둔 방검조끼를 꺼내어 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성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병신 머저리같이 가만히 있으란 말에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조형운 경위의 말처럼 세월 좋게 꿀이나 빨려고 강력계를 지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해성은 굳게 마음을 다잡고 얼굴을 들었다. 뜻하지 않게 그와 눈이 마주쳐 잠시 주춤거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팀장님.”
해성은 목소리를 겨우 쥐어짰다.
“저는.”
“이해성 씨는 계속 대기하세요. 아까처럼, 하던 대로.”
강현은 이제 와 다시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예상한 것과 단 한 글자 오차도 없는 말이었다. 덩.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소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었다. 경찰 조직은.
홀로 살아남아 그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배제당한 이유를 알 수 없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부당하다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배웠다.
조직에서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복종하거나, 옷을 벗거나. 둘 중 하나만 존재할 뿐이다.
“출발합시다.”
전할 말을 끝낸 강현은 슬쩍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조형운 경위가 바짝 그의 뒤를 쫓았다. 툭, 부딪친 어깨가 아렸다.
* * *
“어이, 이해성이. 괜찮아?”
“선배. 너무 상심하지 마요.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건우와 세찬의 위로가 멀게 느껴졌다. 우울해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해성이 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뭐 찾는데?”
건우의 말을 뒤로하며 해성은 성큼성큼 강현의 자리로 다가갔다. 뜻밖의 횡재다. 입구에 서 있던 차강현은 당연히 조형운 경위가 챙길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평소 급한 성격 탓에 덤벙거리는 조형운 경위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생각해 낼 수 있던 것이다.
형사 차량 키.
해성은 차량 키를 덥석 집어 들고 그대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경찰서 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이끌리듯 주차장으로 향했다. 익숙한 경찰 마크가 새겨진 출동용 하얀색 스타렉스 차량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중엔, ‘형사 02호’ 스티커가 부착된 스타렉스 차량도 있었다. 다행히 형운과 강현은 이제 막 차량 근처에 도착한 참이었다.
“잠시만요!”
“이해성. 너 미쳤어?”
해성이 앞을 가로막자 적잖게 당황한 조형운 경위가 강현의 눈치를 살피며 눈짓을 보였다. 일 나기 전에 얼른 돌아가란 뜻이다.
해성은 형운의 경고를 무시하고 냅다 허리를 푹 숙였다.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팀장님. 잘할 수 있습니다.”
해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그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돌아가요.”
강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단호히 몸을 돌렸다.
“못 갑니다. 아니, 안 갑니다.”
“왜?”
“저도 형사입니다. 팀장님.”
“그러니까 왜.”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시면 하지 않겠습니다. 옆에 떨어져서 구경만 하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장에 따라갈 수 있게만 허락해 주세요. 7년 무사고였어요. 운전, 잘합니다. 저.”
강현이 픽, 웃음을 터트리며 반쯤 돌아섰다.
“이해성 씨.”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얼굴 들어요.”
역시나, 묵묵부답.
“시간 없으니까 얼굴 들라고.”
그제야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해성은 입술을 꾹 감쳐물고서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강현은 천천히 해성을 훑어 내렸다.
“볼수록 마음에 안 드네.”
“……네?”
“방검복 미착용. 상사 명령 불복종. 하다못해 건방진 그 성격까지.”
강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단숨에 거리가 좁혀지자 해성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묵직한 압도감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강현이 난데없이 팔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따라 해성의 불안한 눈길이 느리게 움직였다. 뜻을 알아차린 해성은 재빠르게 차량 키를 등 뒤로 숨겼다.
“제가 하겠습니다. 운전.”
짜증 섞인 한숨이 흘렀다.
“말고, 누르라고. 차 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