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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혐오 1화

#1 (1)





그날따라 주차가 난관이었다.

재판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주차장 입구에 늘어선 차들의 행렬은 줄어들 생각을 않았다. 주헌은 10초에 한 번꼴로 시계를 봤다. 그런다고 시간이 천천히 갈 리도 없지만,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노려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제발, 빨리 좀 들어가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애꿎은 핸들만 손바닥으로 툭툭 치던 때였다.

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주헌은 발신인으로 뜬 이진우라는 이름을 한참 쳐다보았다. 1년 중 대화를 나누는 횟수를 한 손에 꼽을 만큼 데면데면한 이복형이, 무슨 좋은 일로 전화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받을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지금은 중요한 재판에 출석하러 가는 길이었고, 촉박한 시간 때문에 스트레스는 이미 받을 만큼 받고 있었다. 이 이상 신경 쓰이는 얘기를 들었다가 재판을 망치는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그래도 전화를 받은 것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르고 들어갔다가는 그것대로 내내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보세요.”

― 토요일에 시간 되냐?

이 사람의 통화 예절이란 늘 이런 식이다. 주헌은 한숨을 간신히 참았다.

“제가 지금 운전 중이라서요. 금방 재판 들어가야 하니까 나중에 일정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 다른 일 있으면 비워라.

“무슨 일인지부터 말씀을 해 주셔야죠.”

― 중요한 일이니까 비우라고 하지 말이 많네. 

이쯤 되니 싸우자는 건가 싶다. 묘하게 히죽히죽하는 듯한 뉘앙스도 거슬린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막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 니 상견례.

주헌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정지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귀가 의심스럽다. 충격에 휩싸인 침묵을 충분히 즐기고 나서, 진우가 뒤이어 말했다.

― 상견례를 하는데 본인이 빠지면 쓰나. 무슨 약속이 있어도 제치고 달려와야 예의지. 너 예의 좋아하잖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말투에 화를 낼 기운도 나지 않았다. 주헌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통화 중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건 그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일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상견례라고?

단어의 의미가 아주 느린 속도로 이해되면서 머릿속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간신히 주차를 하고 법정으로 달려가는 내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멍했다. 기억을 아무리 뒤져 봐도 결혼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가족들과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상견례라고? 원래대로라면 자다가 웬 남의 다리 긁는 소리인가 하고 무시해야 마땅한 소리다. 

하지만, 가족들의 면면을 떠올리자 영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이제껏 한두 번이었던가.

다행히 앞서 있던 재판이 지연된 덕분에 지각은 면했지만, 재판은 힘에 부쳤다. 

피고 측 대리인은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 변호사였는데 느물거리기가 거의 미꾸라지였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계속 늘어놓으며 이리저리 발뺌만 하는 것이, 사건을 질질 끌다가 어떻게든 조정으로 넘어가 보려는 속셈이 뻔했다. 말꼬리를 잡으러 쫓아다니느라 진땀을 뺀 주헌은 재판을 마치고 기일을 잡을 때쯤 되자 기진맥진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이럭저럭 상사 없이도 혼자 출석할 정도는 되었지만, 아직 그에게 재판은 부담스러운 업무였다. 법정을 나와 상대방 대리인이 악수를 청해올 때는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였다. 멱살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악수가 될까 했는데, 바닥에 남아 있던 인내심 부스러기를 긁어모으자 어떻게든 넘어가지긴 했다.

재판이 예상보다 늦게 끝나서 이미 퇴근 시간은 훌쩍 넘어가 있었다. 애매하게 시간이 남느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상사에게 곧장 퇴근하겠다는 연락을 보냈다. 부친인 배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바쁜지 연결은 되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서 만난 배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상견례? 누가 그런 소리를 했냐.”

“진우 형님이 전화 주셨는데요.”

“쌍놈 새끼가 주둥이만 가벼워선.”

거침없이 욕하면서도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주헌은 초조해졌다.

“상견례니 뭐니 그런 거창한 거 아니다. 그냥 밥이나 한 끼 하면서 만나 보자는 거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애비 체면 한번 세워 준다 생각하고 시간 비워라. 너도 어차피 혼사 자리 알아볼 때가 되지 않았냐.”

최대한 가볍게 말해서, 양가 부모님을 대동한 맞선 자리 정도 되는 모양이다. 결국 상견례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건 아니다.

상대는 미래 국민당 6선 의원인 조현구 의원의 막내아들이라고 한다. 막내아들 본인이 배우이기도 하지만, 뼈 굵은 정치가 집안에서 엔터 회사의 오너 집안과 손잡고 싶어 하는 이유야 어차피 돈일 게 뻔하다. 한편 배성 또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 한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만남이다.

주헌은 배성을 잘 알았다. 부친이 결정한 일은 언제나 그대로 실현됐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특히나 자식이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참아 넘길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래도 결혼을 하게 될 모양이다. 토요일에 만날 사람과.

황당했지만, 오메가로 발현했을 때부터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은 했었다. 

돈 좀 있다는 집안에서 알파나 오메가 형질을 가진 사람은 이런 식의 교환 쿠폰처럼 사용되는 일이 흔했다. 알파와 오메가의 결합에는 혼인신고라는 법적 공시 외에도, 각인이라는 동물적 약속이 있기 때문에 더 공고한 연합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여 주기식으로 결혼만 하고 정작 각인은 다른 사람과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도 통념이라는 게 그랬다.

그래서 유명인인 알파와 오메가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둘이 각인을 했니 안 했니 하는 얘기가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스캔들이 되고 가십이 되고 화제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알파와 오메가의 정략결혼은 그래서 더욱 유력한 집안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옵션이었다. 연합을 과시하기 위해 시키는 결혼인데 사람들이 알아서 관심을 가져 주니까.

하지만, 예상을 했다고 해서 황당하지 않은 건 물론 아니다.

그 주, 주헌은 남은 평일을 반쯤 꿈꾸는 듯한 상태로 보냈다. 여기서 꿈은 악몽이다. 제발 깨어나고 싶은데 이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이라 깨어날 곳이 없는. 서면을 찍어 올리라는 파트너 변호사들의 닦달이 오히려 반가웠다. 일에 파묻혀 있다 보면 오히려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서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순식간에 아득한 앞날 걱정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결혼을 순순히 한다면 하는 대로 걱정이고, 하지 않기로 한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집안을 돕는 일은 결국 자신을 돕는 일이 될 것이다. 주헌은 일을 하다 말고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하며 생각하곤 했다.

하긴 굳이 연애결혼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왕에 그렇다면야, 비싼 상품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



날짜는 차근차근 흘러 금요일이 되었다.

그날 주헌은 급한 일들을 최대한 쳐 내기 위해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일을 하다가 잠시 눈을 쉴 요량으로 창 쪽을 돌아보았는데, 어느덧 완전히 캄캄해진 밤하늘 탓에 자신의 모습이 창문에 거울처럼 비쳤다.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잘생겼다는 말 이상으로 싸늘해 보인다거나 화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냉랭한 인상 탓인지, 좋아한다는 고백보다 사실은 예전에 좋아했었는데 말을 못 했다는 고백을 더 많이 받아 봤다. 어느 쪽이든 타인의 감정이 다가오는 것은 항상 낯설고 어색한 일이었다. 같은 크기의 파장을 되돌려 주지 않으면 꼭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으니까.

친밀한 관계에는 자신이 없다. 

생각할수록 어쩌면 이 편이 더 나은, 혹은 유일한 엔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헌 씨, 퇴근 안 해?”

옆방을 쓰고 있는 현아가 불쑥 주헌의 방문 앞에서 말을 걸었다. 직원들이 이미 모두 퇴근을 해서, 사무실에 자신만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주헌은 약간 놀랐다. 현아는 이제 막 집에 가려는 듯 가방을 들고 외투까지 걸친 채였다. 아마 주헌처럼 그녀도 자신이 마지막인 줄 알고 있었던지 약간 놀란 듯한 얼굴이다.

“응, 하던 것만 마저 쳐 내고 가려고. 내일은 일정 때문에 못 나올 것 같아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 상견례.”

같이 입사한 인연으로 친하게 지내던 동료라, 넋을 놓은 채 대답하다가 무심코 지나치게 솔직한 정보를 털고 말았다. 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상견례라고? 주헌 씨 애인 있었니? 결혼해?”

“아니야, 아직 그런 거.”

사무실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서둘러 손을 내젓자, 현아는 섭섭한 듯한 얼굴을 했다.

“뭐야, 결혼 예정 같은 중요한 일이 있으면 말을 해 줘야지.”

“아직 아니래도. 뭐든 결정이 나면 알려 줄게.”

“진짜야? 주헌 씨는 결혼 같은 것도 왠지 소리 소문 없이 쓱싹 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긴 했는데. 축의금 낼 기회쯤은 주는 거지?”

“당연하지.”

소리 소문 없이 쓱싹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주헌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알려지라고 하는 결혼이다. 예식은 성대하게 올리고 부를 수 있는 하객도 모조리 불러 모을 것이다. 심지어 상대방은 연예인이다. 기자들이 모여들고 뉴스가 올라가는 소란스러움을 상상하자 벌써부터 현기증이 났다.

주헌은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사법 고시를 준비하느라 꽤 오래 보지 않았더니 아예 TV 콘텐츠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맥락이 끊겨 버렸다. 이제는 시간이 있어서 TV를 틀어 본들 뭐가 재미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프로그램들뿐이라, 배우니 아이돌이니 유명 예능인이니 하는 면면을 하나도 모른다. 곧 만나게 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고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진 사람인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모종의 고집이다. 미리 알든 모르든 결과는 똑같다. 지금 이 이상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니, 생각할 거리를 굳이 찾아낼 필요도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쳤다.

하지만 토요일 당일, 막상 식사 자리에 앉은 주헌은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