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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본능 8화
2. 진강우(8)
시간은 회귀 전보다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진강우를 평범했을 때 찾게 되었던 결과라고 생각했다. 식물인간이었지만, 그나마 수명이 남아 있던 친동생도 원래보다 빠르게 흐른 과거 때문에 생명까지 끝나 버린 것인가 하는 추측이 들었다. 게다가 가이드 프로젝트 또한 내가 알던 시기보다 앞당겨 진행되고 있었다.
설마…… 또 무엇인가 잘못되어 다시 한번 진강우를 잃지는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뭐가 있는데?
돌아누운 등 뒤로 사락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여태껏 그랬듯이 그가 책을 읽는 것 같았다.
지금은 깨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현재의 몸 상태로 미루어 봤을 때, 기절하면서 바로 가이드로 발현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는 건.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회귀 전에는 내가 가이드가 된 시점부터 조금 시기가 지난 후 가이드 프로젝트가 공표되었던 점. 동생이 사고 난 시점도 알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 빨랐고, 그 때문에 내가 가이드로 각성한 시기도 너무 이른 상황이었다. 종합해 볼 때 진강우가 에스퍼로 발현되는 조건이나 시기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바꼈을지도 몰라.’
회귀 전 진강우가 에스퍼로 발현되어 폭주했던 시기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뉴스로 크게 보도되었을 정도이니 그의 파트너였던 내가 모를 리는 없으니까. 내가 차라리 이대로 진강우한테 멀어지게 된다면 원래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을까? 그냥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낸다면 괜찮을 수도 있어.
답답한 마음에 응어리가 진 것 같았다. 꽉 막힌 심장에 피조차도 돌지 않는 기분이었다. 나는 현재 살아 있고,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아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동생을 잃은 죄책감에 몸져누웠던 상태가 진강우 하나만 떠올린 것으로 싹 사라져 버렸다.
“강우 씨.”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기에 잠을 자기 힘들었다. 지금 곁에 자리한 사람은 내가 잘 알고 있던 진강우가 아니다. 파트너의 의도가 어떻든지 간에 이미 회귀해 버린 이상 현재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미 가이드가 되었고, 조만간 기관으로 들어갈 수순을 밟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그와 헤어지게 되겠지.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에게 다시 한번 운을 떼려고 할 때였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갑자기 스킨십이라니. 치사하잖아, 진강우.
“혹시 잠 안 와요? 그럴 만도 한데.”
“…….”
무뚝뚝함이 배어 나온 말투에서 상냥함이 느껴졌다.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커다랗고 차가운 손길과 함께 묵묵히 건네는 말 한마디. 그건 나와 파트너였을 때의 진강우가 자주 했던 행동이었다. 그리운 감각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러모로 힘들고 지쳐서 다 놓아 버리고 싶었지만, 이 또한 참았다.
멋대로 나만 살려 버린 진강우가 너무 밉다. 그런데도 그를 포기할 수가 없는 내가 더 미웠다.
“아, 의사들이 그러던데…. 심차연 씨가 가이드로 각성했다고요.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오래 깨어나지 않았던 거라고 했습니다.”
“…….”
“그래서 어디 더 불편한 곳은 없어요? 있으면 말만 해요. 다 들어줄 거니까.”
불편한 곳이야 많았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찌 됐든 간에 내 앞에 있는 너 또한 진강우니까.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절대로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괜찮아요. 놀라게 해 드려서 정말 뭐라고 드릴 말이…….”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묵묵하게 하지만 입매에는 아주 약간의 호선만 그린 채로.
“일주일 정도 입원한 뒤에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심차연 씨 옆에 있을 생각입니다.”
“네? 강우 씨, 일은 어쩌고요?”
걱정되어 물으니 그는 당연하게 답했다.
“사람이 아픈데 일이 중요한가요. 음… 실은 심차연 씨가 편의점에 찾아오지 않으면 이젠 제가 허전해서요. 그러니까 저 좋자고 이곳에 있는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말고요.”
“아…… 네, 고마워요.”
거짓말. 저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진심이라면 저렇게 귀가 빨개질 리가 없어. 미래나 현재나 진강우는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곤 사건이 일어나고 흐르는 순서만 변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자. 원래의 목적대로 진강우와 내가 둘 다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물색해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눈앞에 있는 진강우와 이별을 택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아프더라도 그 또한 따를 생각이었다. 그가 살아서 호흡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깍지 껴 맞잡았다. 에스퍼가 아닌 그는 피부를 접촉해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색했지만, 오히려 피를 뒤집어쓴 그의 끔찍하고 슬픈 모습보다는 참을 만했다. 동생의 일은 냉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원래 비인간적인 사람밖에 안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진심으로 역겨웠으나 질긴 연을 끊어 내었다고 생각하며 정신 승리라도 할 참이었다. 그래야지 내가 편해진다. 그래야지 내 앞에 있는 진강우만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아픈 것은 나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이게 그에게 강제로 회귀 된 내가 택한 현재였다.
병원에서 보내는 밤은 무섭도록 길고 추웠다. 혼자 남겨졌다면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다행히도 지금 내 옆에는 진강우가 있어서 견딜 만은 했다. 그는 여러 번 추위에 떠는 나를 뒤에서 안아 주기도 하고 심적으로도 안심이 될 수 있게 말도 걸어 주었다. 어느새 맨살끼리 쓸려 따뜻해지자 뒤늦은 평온함이 찾아왔다.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한 가지만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점차 나아졌다. 잔인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는 나를 발견할 때면 구역질이 나는 것만 빼곤 다 괜찮았다.
그는 내가 몸이 식지 않도록 따뜻한 물을 마시도록 권유했고, 나는 고분고분 그의 말과 행동에 따랐다. 동생도 곁을 완전히 떠났으니 이제 내게 남은 사람이라곤 진강우뿐이었다. 동생의 납골당은 찾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예전부터 동생이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했는데, 잔인하게도 몽땅 내 뜻대로 되어 버린 셈이었다. 하, 미치겠다. 그냥 다 지워 버리고 싶어.
병실 안은 분명히 따뜻했다. 나도 이 몰려오는 추위가 심적인 부분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진강우 앞에서는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런 나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이별했을 때를 떠올려 보더라도 나는 멍청하게 그의 이름만 울부짖었을 뿐,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
“힘들면 뭐든 말해요. 자잘한 것도 상관없으니까 필요하면 다 들어주겠습니다. 여러 차례 말하긴 했는데, 저는 심차연 씨가 안정되고 회복할 때까지 도와줄 거니까. 믿으세요.”
“…….”
나는 묵묵하게 말하는 그를 쳐다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서로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이 정도까지 보살펴 주려 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회귀자여서 많은 걸 알고 있던 나와는 달리, 그는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드러운 눈빛과는 다르게 무뚝뚝한 목소리는 확신에 찼고 힘이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감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당당함이 눈길을 끌었다.
과거의 일이 몽땅 달라져 버린 이 상황 때문에 날이 갈수록 한숨만 터져 나왔다. 적막한 병실 안에 오로지 나와 진강우만 자리했고, 우리의 대화는 제3자가 들으면 재미없고 지루한 내용들뿐이었다. 둘 다 개그 센스는 최악 중의 최악인 데다가, 말주변도 없어서 한 명은 감정 없는 로봇이라는 말을 듣고, 또 다른 한 명은 주장 없는 반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우리는.
나와 진강우는 남이 보기에 재미없고 진중한. 그런 삶을 살았었다.
나는 불안함에 그의 커다란 손을 여러 번이고 부여잡고 매만졌다. 단단한 손 위로 잘게 부서지듯 마디마다 자리한 굳은살은 제법 거칠었다. 여태까지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손이었다. 아프고 힘든 것은 나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더 위로하고 싶게 만들었다.
나를 혼자 회귀시킨 진강우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악몽 같던 이별의 순간, 파트너였던 그의 저릿한 감정은 아직도 뼛속 깊이 자리했다.
“저기요, 강우 씨.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면서 이래도 정말 괜찮아요?”
그에게 불편하고 걱정하던 감정들을 쏟아 냈다.
“어떻게 쉽게 곁에 있어 준다고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한 자씩 내뱉는 말에 무게감을 실었다.
“강우 씨는……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현재 그가 나를 잘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욱신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진강우에게 끊임없는 욕심이 들어서 삐뚤어질 것만 같았다.
“귀찮을 거예요. 떼를 쓸 수도 있고, 히스테리 부리면서 물건을 집어 던질 수도 있고. 내가 강우 씨를 힘들다고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할지도 모르는데, 왜.”
“글쎄요. 심차연 씨가? 아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단번에 마음에도 없는 내 말을 잘라 버린 그가 참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고약하게도 조금 더 위로받고 싶어서 모진 말을 다시금 쏟아 냈다.
“여태까지 내가 의도적으로 강우 씨한테 접근했다면요? 그냥 편하고 행복하려고 무작정 강우 씨의 인생에 끼어들었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괜찮지 않다고 해. 솔직하게 힘들다고 해. 원래 그였다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벽을 치고 나를 밀어 냈으니까. 나와 진강우의 첫 시작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됐던 감정이었으니까. 당당히 싫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이러하니 괜찮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고, 얼굴 역시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듯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더 마음이 아파서 몸 어딘가가 고장 난 것처럼 무거워졌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봐 오고 판단했던 심차연 씨는 가볍게 저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괜찮고요. 심차연 씨가 힘들어서 그랬다면 당신이라는 사람에겐 충분히 이용당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마세요.”
“……혹시 평소에 바보 같다는 말 많이 듣죠?”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귀가 빨개지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똑똑하다는 말을 더 듣는 편이죠. 제가 어딜 봐서 바보처럼 보입니까? 안 그래요?”
“…….”
2. 진강우(8)
시간은 회귀 전보다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진강우를 평범했을 때 찾게 되었던 결과라고 생각했다. 식물인간이었지만, 그나마 수명이 남아 있던 친동생도 원래보다 빠르게 흐른 과거 때문에 생명까지 끝나 버린 것인가 하는 추측이 들었다. 게다가 가이드 프로젝트 또한 내가 알던 시기보다 앞당겨 진행되고 있었다.
설마…… 또 무엇인가 잘못되어 다시 한번 진강우를 잃지는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뭐가 있는데?
돌아누운 등 뒤로 사락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여태껏 그랬듯이 그가 책을 읽는 것 같았다.
지금은 깨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현재의 몸 상태로 미루어 봤을 때, 기절하면서 바로 가이드로 발현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는 건.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회귀 전에는 내가 가이드가 된 시점부터 조금 시기가 지난 후 가이드 프로젝트가 공표되었던 점. 동생이 사고 난 시점도 알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 빨랐고, 그 때문에 내가 가이드로 각성한 시기도 너무 이른 상황이었다. 종합해 볼 때 진강우가 에스퍼로 발현되는 조건이나 시기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바꼈을지도 몰라.’
회귀 전 진강우가 에스퍼로 발현되어 폭주했던 시기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뉴스로 크게 보도되었을 정도이니 그의 파트너였던 내가 모를 리는 없으니까. 내가 차라리 이대로 진강우한테 멀어지게 된다면 원래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을까? 그냥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낸다면 괜찮을 수도 있어.
답답한 마음에 응어리가 진 것 같았다. 꽉 막힌 심장에 피조차도 돌지 않는 기분이었다. 나는 현재 살아 있고,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아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동생을 잃은 죄책감에 몸져누웠던 상태가 진강우 하나만 떠올린 것으로 싹 사라져 버렸다.
“강우 씨.”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기에 잠을 자기 힘들었다. 지금 곁에 자리한 사람은 내가 잘 알고 있던 진강우가 아니다. 파트너의 의도가 어떻든지 간에 이미 회귀해 버린 이상 현재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미 가이드가 되었고, 조만간 기관으로 들어갈 수순을 밟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그와 헤어지게 되겠지.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에게 다시 한번 운을 떼려고 할 때였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갑자기 스킨십이라니. 치사하잖아, 진강우.
“혹시 잠 안 와요? 그럴 만도 한데.”
“…….”
무뚝뚝함이 배어 나온 말투에서 상냥함이 느껴졌다.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커다랗고 차가운 손길과 함께 묵묵히 건네는 말 한마디. 그건 나와 파트너였을 때의 진강우가 자주 했던 행동이었다. 그리운 감각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러모로 힘들고 지쳐서 다 놓아 버리고 싶었지만, 이 또한 참았다.
멋대로 나만 살려 버린 진강우가 너무 밉다. 그런데도 그를 포기할 수가 없는 내가 더 미웠다.
“아, 의사들이 그러던데…. 심차연 씨가 가이드로 각성했다고요.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오래 깨어나지 않았던 거라고 했습니다.”
“…….”
“그래서 어디 더 불편한 곳은 없어요? 있으면 말만 해요. 다 들어줄 거니까.”
불편한 곳이야 많았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찌 됐든 간에 내 앞에 있는 너 또한 진강우니까.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절대로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괜찮아요. 놀라게 해 드려서 정말 뭐라고 드릴 말이…….”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묵묵하게 하지만 입매에는 아주 약간의 호선만 그린 채로.
“일주일 정도 입원한 뒤에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심차연 씨 옆에 있을 생각입니다.”
“네? 강우 씨, 일은 어쩌고요?”
걱정되어 물으니 그는 당연하게 답했다.
“사람이 아픈데 일이 중요한가요. 음… 실은 심차연 씨가 편의점에 찾아오지 않으면 이젠 제가 허전해서요. 그러니까 저 좋자고 이곳에 있는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말고요.”
“아…… 네, 고마워요.”
거짓말. 저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진심이라면 저렇게 귀가 빨개질 리가 없어. 미래나 현재나 진강우는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라곤 사건이 일어나고 흐르는 순서만 변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자. 원래의 목적대로 진강우와 내가 둘 다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물색해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눈앞에 있는 진강우와 이별을 택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아프더라도 그 또한 따를 생각이었다. 그가 살아서 호흡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깍지 껴 맞잡았다. 에스퍼가 아닌 그는 피부를 접촉해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색했지만, 오히려 피를 뒤집어쓴 그의 끔찍하고 슬픈 모습보다는 참을 만했다. 동생의 일은 냉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원래 비인간적인 사람밖에 안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진심으로 역겨웠으나 질긴 연을 끊어 내었다고 생각하며 정신 승리라도 할 참이었다. 그래야지 내가 편해진다. 그래야지 내 앞에 있는 진강우만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아픈 것은 나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이게 그에게 강제로 회귀 된 내가 택한 현재였다.
병원에서 보내는 밤은 무섭도록 길고 추웠다. 혼자 남겨졌다면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다행히도 지금 내 옆에는 진강우가 있어서 견딜 만은 했다. 그는 여러 번 추위에 떠는 나를 뒤에서 안아 주기도 하고 심적으로도 안심이 될 수 있게 말도 걸어 주었다. 어느새 맨살끼리 쓸려 따뜻해지자 뒤늦은 평온함이 찾아왔다.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한 가지만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점차 나아졌다. 잔인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는 나를 발견할 때면 구역질이 나는 것만 빼곤 다 괜찮았다.
그는 내가 몸이 식지 않도록 따뜻한 물을 마시도록 권유했고, 나는 고분고분 그의 말과 행동에 따랐다. 동생도 곁을 완전히 떠났으니 이제 내게 남은 사람이라곤 진강우뿐이었다. 동생의 납골당은 찾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예전부터 동생이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했는데, 잔인하게도 몽땅 내 뜻대로 되어 버린 셈이었다. 하, 미치겠다. 그냥 다 지워 버리고 싶어.
병실 안은 분명히 따뜻했다. 나도 이 몰려오는 추위가 심적인 부분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진강우 앞에서는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런 나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이별했을 때를 떠올려 보더라도 나는 멍청하게 그의 이름만 울부짖었을 뿐,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
“힘들면 뭐든 말해요. 자잘한 것도 상관없으니까 필요하면 다 들어주겠습니다. 여러 차례 말하긴 했는데, 저는 심차연 씨가 안정되고 회복할 때까지 도와줄 거니까. 믿으세요.”
“…….”
나는 묵묵하게 말하는 그를 쳐다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서로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이 정도까지 보살펴 주려 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회귀자여서 많은 걸 알고 있던 나와는 달리, 그는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드러운 눈빛과는 다르게 무뚝뚝한 목소리는 확신에 찼고 힘이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감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당당함이 눈길을 끌었다.
과거의 일이 몽땅 달라져 버린 이 상황 때문에 날이 갈수록 한숨만 터져 나왔다. 적막한 병실 안에 오로지 나와 진강우만 자리했고, 우리의 대화는 제3자가 들으면 재미없고 지루한 내용들뿐이었다. 둘 다 개그 센스는 최악 중의 최악인 데다가, 말주변도 없어서 한 명은 감정 없는 로봇이라는 말을 듣고, 또 다른 한 명은 주장 없는 반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우리는.
나와 진강우는 남이 보기에 재미없고 진중한. 그런 삶을 살았었다.
나는 불안함에 그의 커다란 손을 여러 번이고 부여잡고 매만졌다. 단단한 손 위로 잘게 부서지듯 마디마다 자리한 굳은살은 제법 거칠었다. 여태까지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손이었다. 아프고 힘든 것은 나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더 위로하고 싶게 만들었다.
나를 혼자 회귀시킨 진강우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악몽 같던 이별의 순간, 파트너였던 그의 저릿한 감정은 아직도 뼛속 깊이 자리했다.
“저기요, 강우 씨. 저에 대해서 잘 모르시면서 이래도 정말 괜찮아요?”
그에게 불편하고 걱정하던 감정들을 쏟아 냈다.
“어떻게 쉽게 곁에 있어 준다고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한 자씩 내뱉는 말에 무게감을 실었다.
“강우 씨는……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현재 그가 나를 잘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욱신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진강우에게 끊임없는 욕심이 들어서 삐뚤어질 것만 같았다.
“귀찮을 거예요. 떼를 쓸 수도 있고, 히스테리 부리면서 물건을 집어 던질 수도 있고. 내가 강우 씨를 힘들다고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할지도 모르는데, 왜.”
“글쎄요. 심차연 씨가? 아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단번에 마음에도 없는 내 말을 잘라 버린 그가 참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고약하게도 조금 더 위로받고 싶어서 모진 말을 다시금 쏟아 냈다.
“여태까지 내가 의도적으로 강우 씨한테 접근했다면요? 그냥 편하고 행복하려고 무작정 강우 씨의 인생에 끼어들었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괜찮지 않다고 해. 솔직하게 힘들다고 해. 원래 그였다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벽을 치고 나를 밀어 냈으니까. 나와 진강우의 첫 시작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됐던 감정이었으니까. 당당히 싫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이러하니 괜찮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고, 얼굴 역시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듯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더 마음이 아파서 몸 어딘가가 고장 난 것처럼 무거워졌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봐 오고 판단했던 심차연 씨는 가볍게 저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괜찮고요. 심차연 씨가 힘들어서 그랬다면 당신이라는 사람에겐 충분히 이용당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마세요.”
“……혹시 평소에 바보 같다는 말 많이 듣죠?”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귀가 빨개지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똑똑하다는 말을 더 듣는 편이죠. 제가 어딜 봐서 바보처럼 보입니까? 안 그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