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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순간 시훈의 고운 미간이 확 구겨졌다.
세상엔 여자도 많고 술도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술을 마시고 자신의 앞에서 떡실신이 되어 저렇게 널브러진 여자는 단언컨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곯아떨어진 재경은 자리가 불편한지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치마가 말려 올라가 하얀 허벅지 속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어디로 갈까요?”
택시 기사의 물음에 시훈은 흐트러진 기억의 파편을 끌어모았다.
신도림? 영등포? 대충 그쪽 어디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
여전히 올라간 치마 때문에 하얀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따라가니, 택시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재경을 기분 나쁘게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재경의 다리를 덮어 주자 작은 체구가 쏙 들어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재경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신도림 역으로 가 주세요.”
대충 그쪽에 도착해서 데려다주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시훈은 노곤함에 젖은 눈을 감았다.
사실, 그는 재경과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았다.
집안 대대로 주량이 상당히 셌지만 술을 좋아하지 않는 시훈에게 회식은 근무의 연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재미도 없는 이야기에 까르르 웃으며 은근히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여직원들도 싫었고,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나치게 띄워 주며 좋아하는 상사들은 부담스러움을 넘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1분이라도 빨리 회식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던 찰나,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재경이 눈에 밟혔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책임지려 하지도 않았다.
다행이었다.
재경이 인기가 많았다면 이렇게 그녀를 핑계 삼아 회식 자리를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회식. 지루하고 진부하며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하는 자리.
말이 좋아 사원들 사기를 충족시킨다는 것이지 대체 누구를 위한 자리인가?
“음냐…….”
그때, 재경의 뒤척이는 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대리를…… 냠…… 달 수 있었던 건, 다 선배님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뉘다.”
어눌한 발음의 잠꼬대가 시훈의 귀에 와 닿았다.
피로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거두어 낸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선물까지 주실 필요는 없는데…… 잘 쓰겠습니다!”
허공에 두 팔을 벌리고 배시시 웃는 재경을 보던 시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 회식은 재경의 진급을 축하해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그녀는 모두가 즐거워하는 회식 분위기에 끼지 못했다.
자꾸만 누가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소주를 들이켜고 있던 재경의 모습을 떠올렸다.
살의가 느껴지는 눈빛이었고 도통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 시선에 대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재경은 시훈의 재킷을 덮은 채 입까지 헤 벌리고 세상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 *
눈꺼풀 위로 뜨겁고 환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더 자고 싶은 간절한 욕망은 재경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포근한 이불을 꼭 끌어안고 몸을 옆으로 눕히던 그때였다.
“그거 알아? 당신 유혹은 너무 달콤해.”
출처를 알 수 없는 환청이 재경의 귓가로 뜨겁게 스며들었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 깜짝이야! 진짜 이 수박씨 발라 먹을, 조카 신발 크레파스 18색아!”
재경은 호리호리한 몸매, 청초한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육두문자를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질러 대는 은지의 모습에도 오롯이 앞만 멍하니 바라봤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시훈의 모습에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이구, 위대하신 강시훈 님께서 저같이 미천한 여자가 유혹한다고 넘어오시겠습니까?”
“…….”
“네? 저 같은 게 유혹한다고 넘…….”
“넘어가 드리죠.”
시훈이 꿈에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입맞춤까지 하며.
재경은 자신의 입술에 닿은 시훈의 뜨거운 숨결이 떠오르자 몸이 금방이라도 홀연히 타 버릴 것처럼 달아오름을 느꼈다.
“아니, 뭔 놈의 꿈이 이렇게 생생해?”
나이 먹고 번번한 남자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꿈에서 풀게 되다니. 참, 별 지랄을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가 막혀 재경은 실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김재경?”
“풉.”
산발이 된 머리와 볼에 꾀죄죄하게 묻어 있는 구정물의 흔적, 허여멀건한 입술을 헤 벌리고 초점 잃은 눈동자로 피식피식 웃어 대고 있는 재경의 모습은 벌써 7년째 함께 살고 있지만 은지에겐 적응 안 되는 기막힌 것이었다.
“미친년이 따로 없네…….”
새끼발톱에 페디큐어를 바르던 은지가 이해 불가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재경에게로 처벅처벅 걸어가 베개를 집어 들곤 거침없이 머리를 퍽! 후려갈겼다.
일직선으로 때려 박힌 베개에 재경의 몸이 아무 저항 없이 침대 위로 패대기쳐졌다.
“정신 차려, 이년아! 어제 술 처먹고 낯선 남자 등짝에 업혀 오면서 고래고래 고함질러 동네 사람들한테 개망신 당하고 욕 처먹은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오늘은 나한테까지 욕 처먹고 싶냐?”
“낯선 남자!?”
눈곱이 묻어 있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경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이름이 강시훈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너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생명의 은인이다, 생각하고 살아라. 그 남자 아니었으면 나, 어제 너 밖에서 뭔 일이 나든지 말든지, 문 안 열어 줄려고 했어. 이년아.”
은지한테 ‘강시훈’이라는 이름을 듣자 거짓말처럼 흐트러졌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아졌다.
허리를 감쌌던 강인한 팔의 촉감, 옅은 숨결, 입술 위를 덮었던 보드라움과 따뜻함, 입안을 거침없이, 그러나 부드럽게 파고들던…….
재경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근데 그 남자하고 무슨 사이야? 여자 수십 명은 골로 보내기에 충분하던데……. 설마해서 묻는 거지만, 남자 친구는 아니겠지?”
엄청난 힘으로 재경의 머리를 내려쳤던 베개를 꽉 끌어안으며 은지가 물었다.
여전히 혼이 빠진 얼굴을 한 재경은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년이 한 대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은지가 베개를 다시 치켜든 순간, 재경이 두 팔을 쭉 내밀어 그것을 막았다.
폭신폭신한 베개지만 은지의 파워를 만나게 되면 웬만한 벽돌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에게서 몸을 멀리했다.
“남자 친구 아니야!”
“그럼? 혹시 썸 타는 중?”
“아니. 그냥 회사 동료야. 엄밀히 따지면 후배지만.”
말을 대충 얼버무린 재경은 자근자근 떠오르는 해괴망측한 꿈을 지우고자 머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렇게 대충 정신을 추스르니 갑작스럽게 갈증이 몰려왔다.
“아, 목말라.”
부엌으로 향하는 재경의 뒤를 은지가 졸래졸래 따라 나왔다.
“후배? 너한테 그런 후배가 다 있었어?”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그대로 물을 들이켜는 재경을 은지가 사나운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컵 꼭 쓰랬지?”
“이거 다 마실 거거든?”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재경이 궁상맞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 안 마시기만 해 봐. 아무튼, 너한테 그런 멋진 후배가 있었단 말이지?”
“어? 어…… 뭐. 후배지. 후배.”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 혼자서만 바락바락 우기는 후배.
“무슨 대답이 그렇게 애매하냐? 썸 타는 사이는 절대 아니라는 말이네?”
그때, 걱정이 뒤섞인 은지의 눈빛을 재경이 슬그머니 피했다.
“너, 내 눈 왜 피해?”
“내가?”
마시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으며 재경이 등을 보이자 은지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돌려세웠다.
“아서라. 너, 전의 회사에서 사귀었던 유 대리 벌써 잊은 거 아니지? 처음엔 좋다고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곤란해졌었어? 유 대리랑 사귀느라 다른 여사원들하고 못 친해져서 은근히 따돌림당하고 나중엔 그 새끼가 너랑 연애했던 이야기 퍼트리고 다녀서 소문도 안 좋게 나고……. 그 뒤로 너, 지금 회사 간신히 합격해서 들어간 거야.”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개만도 못한 유 대리를!
훨씬 어리고 예쁜 여자를 만나고 싶어 헤어지긴 해야 되는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회사에 쌓아 놓은 좋은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까 그것이 걱정됐던 모양이었다.
재경은 당시 남자 친구였던 유 대리를 두고 주말마다 나이트를 가지도, 원나잇을 해 본 적도, 명품을 사 달라며 등골을 빼 먹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유 대리가 뿌리고 다닌 소문에 재경은 놀기 좋아하는 헤프고 개념 없는 여자로 낙인 찍혀 버렸다.
직원들의 수군덕거림과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다닌 지 겨우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지경까지 다다랐었다.
“그 악몽을 또 반복하고 싶은 거야?”
“아니야. 그게 아니라…….”
“아니라?”
“난 강시훈 그 남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정말이야, 이런 걸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해 불가능한 사이야.”
단호하게 대답을 한 재경은 서랍에서 속옷을 꺼내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재경은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으아악!”
아릿한 비명과 함께 그녀는 영화 ‘나 홀로 집에’의 케빈처럼 뺨을 두 손으로 찰싹 감쌌다.
자고 일어나도 예쁜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현실은 스스로 보기조차 민망한 못생기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이러고 강시훈 등에 업혀서 온 거야? 이러고? 못 산다. 진짜. 내가 못 살아! 이 진상아!”
자신과 시훈의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기꺼이 영혼도 팔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울상을 짓던 그녀는 자신의 찌그러진 입술 위로 시선을 옮겼다.
“…….”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어루만진 그 순간, 꿈속에서 부드럽지만 저돌적으로 입술을 탐하던 시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경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욕조에 받은 뜨거운 물에 거울이 수증기로 뿌예지기 시작했다. 그 뿌연 거울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하얀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반항할 수조차 없이 그에게 녹아들었다. 시훈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느껴졌던 짜릿함은 잡다한 생각을 삽시간에 집어삼키기 충분할 정도로 황홀했다.
키스를 하고 난 후, 아쉬운 듯 자신의 입술에 입맞춤을 몇 번 더하다가 아프지 않게 앙, 깨물던 그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샤워를 하기 위해 벗은 몸이 순식간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붉은 꽃처럼 물들었다.
연애를 많이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생각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몸을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남자는 맹세코 시훈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 ‘처음’이라는 익숙지 못한 감정에 재경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쳤어. 그만. 그만!”
또다시 헷갈리기 시작한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그녀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얼굴에 찬물을 연신 끼얹었다.
chapter 02
주말 내내 재경은 차마 떠올리기조차 남사스러운 꿈이 계속 생각나는 바람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등에 업고 집까지 데려다준 시훈에게 어떻게 사의를 표해야 할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척하며 실수를 무마시키고 싶었지만 이미 은지에게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 지금 출근해서 강시훈 씨 어떻게 보나, 하고 고민하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
자신의 속을 훤히 다 꿰뚫어 보고 있는 은지의 소름 끼치는 예측에 재경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순간 시훈의 고운 미간이 확 구겨졌다.
세상엔 여자도 많고 술도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술을 마시고 자신의 앞에서 떡실신이 되어 저렇게 널브러진 여자는 단언컨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곯아떨어진 재경은 자리가 불편한지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치마가 말려 올라가 하얀 허벅지 속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어디로 갈까요?”
택시 기사의 물음에 시훈은 흐트러진 기억의 파편을 끌어모았다.
신도림? 영등포? 대충 그쪽 어디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
여전히 올라간 치마 때문에 하얀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따라가니, 택시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재경을 기분 나쁘게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재경의 다리를 덮어 주자 작은 체구가 쏙 들어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재경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신도림 역으로 가 주세요.”
대충 그쪽에 도착해서 데려다주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시훈은 노곤함에 젖은 눈을 감았다.
사실, 그는 재경과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았다.
집안 대대로 주량이 상당히 셌지만 술을 좋아하지 않는 시훈에게 회식은 근무의 연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재미도 없는 이야기에 까르르 웃으며 은근히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여직원들도 싫었고,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나치게 띄워 주며 좋아하는 상사들은 부담스러움을 넘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1분이라도 빨리 회식 자리를 빠져나오고 싶던 찰나,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재경이 눈에 밟혔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책임지려 하지도 않았다.
다행이었다.
재경이 인기가 많았다면 이렇게 그녀를 핑계 삼아 회식 자리를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회식. 지루하고 진부하며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하는 자리.
말이 좋아 사원들 사기를 충족시킨다는 것이지 대체 누구를 위한 자리인가?
“음냐…….”
그때, 재경의 뒤척이는 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대리를…… 냠…… 달 수 있었던 건, 다 선배님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뉘다.”
어눌한 발음의 잠꼬대가 시훈의 귀에 와 닿았다.
피로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거두어 낸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선물까지 주실 필요는 없는데…… 잘 쓰겠습니다!”
허공에 두 팔을 벌리고 배시시 웃는 재경을 보던 시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 회식은 재경의 진급을 축하해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그녀는 모두가 즐거워하는 회식 분위기에 끼지 못했다.
자꾸만 누가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소주를 들이켜고 있던 재경의 모습을 떠올렸다.
살의가 느껴지는 눈빛이었고 도통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 시선에 대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재경은 시훈의 재킷을 덮은 채 입까지 헤 벌리고 세상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 *
눈꺼풀 위로 뜨겁고 환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더 자고 싶은 간절한 욕망은 재경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포근한 이불을 꼭 끌어안고 몸을 옆으로 눕히던 그때였다.
“그거 알아? 당신 유혹은 너무 달콤해.”
출처를 알 수 없는 환청이 재경의 귓가로 뜨겁게 스며들었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 깜짝이야! 진짜 이 수박씨 발라 먹을, 조카 신발 크레파스 18색아!”
재경은 호리호리한 몸매, 청초한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육두문자를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질러 대는 은지의 모습에도 오롯이 앞만 멍하니 바라봤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시훈의 모습에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이구, 위대하신 강시훈 님께서 저같이 미천한 여자가 유혹한다고 넘어오시겠습니까?”
“…….”
“네? 저 같은 게 유혹한다고 넘…….”
“넘어가 드리죠.”
시훈이 꿈에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입맞춤까지 하며.
재경은 자신의 입술에 닿은 시훈의 뜨거운 숨결이 떠오르자 몸이 금방이라도 홀연히 타 버릴 것처럼 달아오름을 느꼈다.
“아니, 뭔 놈의 꿈이 이렇게 생생해?”
나이 먹고 번번한 남자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꿈에서 풀게 되다니. 참, 별 지랄을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가 막혀 재경은 실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김재경?”
“풉.”
산발이 된 머리와 볼에 꾀죄죄하게 묻어 있는 구정물의 흔적, 허여멀건한 입술을 헤 벌리고 초점 잃은 눈동자로 피식피식 웃어 대고 있는 재경의 모습은 벌써 7년째 함께 살고 있지만 은지에겐 적응 안 되는 기막힌 것이었다.
“미친년이 따로 없네…….”
새끼발톱에 페디큐어를 바르던 은지가 이해 불가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재경에게로 처벅처벅 걸어가 베개를 집어 들곤 거침없이 머리를 퍽! 후려갈겼다.
일직선으로 때려 박힌 베개에 재경의 몸이 아무 저항 없이 침대 위로 패대기쳐졌다.
“정신 차려, 이년아! 어제 술 처먹고 낯선 남자 등짝에 업혀 오면서 고래고래 고함질러 동네 사람들한테 개망신 당하고 욕 처먹은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오늘은 나한테까지 욕 처먹고 싶냐?”
“낯선 남자!?”
눈곱이 묻어 있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경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이름이 강시훈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너 그 남자가 죽을 때까지 생명의 은인이다, 생각하고 살아라. 그 남자 아니었으면 나, 어제 너 밖에서 뭔 일이 나든지 말든지, 문 안 열어 줄려고 했어. 이년아.”
은지한테 ‘강시훈’이라는 이름을 듣자 거짓말처럼 흐트러졌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아졌다.
허리를 감쌌던 강인한 팔의 촉감, 옅은 숨결, 입술 위를 덮었던 보드라움과 따뜻함, 입안을 거침없이, 그러나 부드럽게 파고들던…….
재경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근데 그 남자하고 무슨 사이야? 여자 수십 명은 골로 보내기에 충분하던데……. 설마해서 묻는 거지만, 남자 친구는 아니겠지?”
엄청난 힘으로 재경의 머리를 내려쳤던 베개를 꽉 끌어안으며 은지가 물었다.
여전히 혼이 빠진 얼굴을 한 재경은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년이 한 대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은지가 베개를 다시 치켜든 순간, 재경이 두 팔을 쭉 내밀어 그것을 막았다.
폭신폭신한 베개지만 은지의 파워를 만나게 되면 웬만한 벽돌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에게서 몸을 멀리했다.
“남자 친구 아니야!”
“그럼? 혹시 썸 타는 중?”
“아니. 그냥 회사 동료야. 엄밀히 따지면 후배지만.”
말을 대충 얼버무린 재경은 자근자근 떠오르는 해괴망측한 꿈을 지우고자 머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렇게 대충 정신을 추스르니 갑작스럽게 갈증이 몰려왔다.
“아, 목말라.”
부엌으로 향하는 재경의 뒤를 은지가 졸래졸래 따라 나왔다.
“후배? 너한테 그런 후배가 다 있었어?”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그대로 물을 들이켜는 재경을 은지가 사나운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컵 꼭 쓰랬지?”
“이거 다 마실 거거든?”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재경이 궁상맞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 안 마시기만 해 봐. 아무튼, 너한테 그런 멋진 후배가 있었단 말이지?”
“어? 어…… 뭐. 후배지. 후배.”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 혼자서만 바락바락 우기는 후배.
“무슨 대답이 그렇게 애매하냐? 썸 타는 사이는 절대 아니라는 말이네?”
그때, 걱정이 뒤섞인 은지의 눈빛을 재경이 슬그머니 피했다.
“너, 내 눈 왜 피해?”
“내가?”
마시고 있던 물통을 내려놓으며 재경이 등을 보이자 은지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돌려세웠다.
“아서라. 너, 전의 회사에서 사귀었던 유 대리 벌써 잊은 거 아니지? 처음엔 좋다고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곤란해졌었어? 유 대리랑 사귀느라 다른 여사원들하고 못 친해져서 은근히 따돌림당하고 나중엔 그 새끼가 너랑 연애했던 이야기 퍼트리고 다녀서 소문도 안 좋게 나고……. 그 뒤로 너, 지금 회사 간신히 합격해서 들어간 거야.”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개만도 못한 유 대리를!
훨씬 어리고 예쁜 여자를 만나고 싶어 헤어지긴 해야 되는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회사에 쌓아 놓은 좋은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까 그것이 걱정됐던 모양이었다.
재경은 당시 남자 친구였던 유 대리를 두고 주말마다 나이트를 가지도, 원나잇을 해 본 적도, 명품을 사 달라며 등골을 빼 먹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유 대리가 뿌리고 다닌 소문에 재경은 놀기 좋아하는 헤프고 개념 없는 여자로 낙인 찍혀 버렸다.
직원들의 수군덕거림과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다닌 지 겨우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지경까지 다다랐었다.
“그 악몽을 또 반복하고 싶은 거야?”
“아니야. 그게 아니라…….”
“아니라?”
“난 강시훈 그 남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정말이야, 이런 걸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해 불가능한 사이야.”
단호하게 대답을 한 재경은 서랍에서 속옷을 꺼내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재경은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으아악!”
아릿한 비명과 함께 그녀는 영화 ‘나 홀로 집에’의 케빈처럼 뺨을 두 손으로 찰싹 감쌌다.
자고 일어나도 예쁜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현실은 스스로 보기조차 민망한 못생기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이러고 강시훈 등에 업혀서 온 거야? 이러고? 못 산다. 진짜. 내가 못 살아! 이 진상아!”
자신과 시훈의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기꺼이 영혼도 팔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울상을 짓던 그녀는 자신의 찌그러진 입술 위로 시선을 옮겼다.
“…….”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어루만진 그 순간, 꿈속에서 부드럽지만 저돌적으로 입술을 탐하던 시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경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욕조에 받은 뜨거운 물에 거울이 수증기로 뿌예지기 시작했다. 그 뿌연 거울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하얀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반항할 수조차 없이 그에게 녹아들었다. 시훈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느껴졌던 짜릿함은 잡다한 생각을 삽시간에 집어삼키기 충분할 정도로 황홀했다.
키스를 하고 난 후, 아쉬운 듯 자신의 입술에 입맞춤을 몇 번 더하다가 아프지 않게 앙, 깨물던 그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샤워를 하기 위해 벗은 몸이 순식간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붉은 꽃처럼 물들었다.
연애를 많이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생각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몸을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남자는 맹세코 시훈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 ‘처음’이라는 익숙지 못한 감정에 재경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쳤어. 그만. 그만!”
또다시 헷갈리기 시작한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그녀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얼굴에 찬물을 연신 끼얹었다.
chapter 02
주말 내내 재경은 차마 떠올리기조차 남사스러운 꿈이 계속 생각나는 바람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등에 업고 집까지 데려다준 시훈에게 어떻게 사의를 표해야 할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척하며 실수를 무마시키고 싶었지만 이미 은지에게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 지금 출근해서 강시훈 씨 어떻게 보나, 하고 고민하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
자신의 속을 훤히 다 꿰뚫어 보고 있는 은지의 소름 끼치는 예측에 재경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