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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살자 01
1화
01 공간이동 하는 남자
이름 이해진. 25세. 본인의 말에 따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학생이다. 하지만 여타 학생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한창 바빠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여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슬픔과 충격에 허우적거리다가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한 후 무엇에 홀린 것처럼 공부만 했다. 부모님 두 분 다 고아원 출신이라 친인척도 없고 외동인 덕에 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이니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는 의지로 인한 오기였다.
해진의 부모는 가난했지만 성실했기에 약간의 재산과 적금이 있었다. 그들이 겨우 마련했던 아파트 전셋집에서 나와 원룸으로 옮긴 해진은 국가장학금이며 학자금 대출도 받아 대학에 갔다. 이 악물고 공부한 게 헛된 짓은 아니었는지 그가 합격한 대학은 꽤나 상위권의 대학이었고, 별다른 취미도 없는 터라 그냥 선생님 조언으로 경제학과를 택했다. 장학금은 꼭 타자는 생각에 학기 중엔 죽어라 공부하고 방학엔 죽어라 알바하고. 다들 즐기는 미팅이나 술자리도 잘 안 나가서 누가 보면 뭐 저런 재미없는 인생이 다 있냐고 할 정도였다.
뭐, 무엇을 하든지 본인만 괜찮으면 상관없듯 해진은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혼자서도 잘하는 자신에게 뿌듯함까지 느끼면서. 그런데…… 그럭저럭 미래가 잘 닦이고 있다 생각했던 그의 삶이 틀어진 것은 신의 실수였다. 아니, 저승사자의 실수라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뭐요?”
“죄송…….”
“수명 빵빵하던 사람 죽여 놓고 죄송하다면 다냐.”
“…….”
본인은 딱히 질책하는 말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듣는 자의 입장에서는 냉담하기 그지없는 말에 해진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까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시큰둥하게 생각한 해진은 간단한 쿠키와 차가 세팅 돼 있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다가 상황 정리하듯 말해 보았다.
“음― 오늘따라 업무가 많아서 마지막쯤에 있던 수명이 다한 사람에게 대충 죽음의 인장을 뿌리다가, 옆에 지나가던 나까지 그걸 맞아 버렸다고?”
“네, 네…….”
거 참.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자신이 걸리다니, 재수도 더럽게 없다. 해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럼 이제 뭐해?”
“네?”
“실수로 죽인 건데 다시 돌아갈 순 없다며. 여기서 평생 놀아?”
온통 새하얀 공간에 있는 거라곤 테이블과 의자가 끝인 이곳에서 지내면 참 곱게 미치겠다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그에게 저승사자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직업이랑 안 어울리게 순진해 놀려 먹는 재미가 있는 남자였다. 겉은 멀쩡하니 잘생긴 놈인데 말이다.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 이해진 씨가 고를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는데요…….”
“응.”
“첫 번째는 환생입니다. 이건 말 안 해도 아실 테고……. 두 번째는 영혼이 타격을 받지 않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져 지금의 당신으로 계속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저 같은 영혼 인도자로 취직하는 것인데…….”
“그거 빼.”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오는 거부에 저승사자 역시 자신의 직업이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남들의 상황이 어떻든 귀찮은 일은 죽도록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일명 귀차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환생은 랜덤이야?”
“네. 하지만 제 실수로 일이 이렇게 된 만큼, 최대한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호오? 해진이 눈에 이채를 띠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런 것도 가능하다니, 저승사자는 특권도 있나 보네. 그래도 환생은 별로라고 생각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빡세게 살아왔던 인생이 아깝기도 하고 특혜를 준다지만 랜덤인 이상 도박인 것 같아 별로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세뇌 교육이 빛을 발해 살아생전 복권도 한 번 안 해 본 해진이었다.
“두 번째는, 뭐 딴 거 안 해 줘?”
“어…… 그, 그러니까…….”
떠오르는 것이 없어 말까지 더듬으며 고민하던 저승사자는 곧 손가락을 딱 부딪치며 밝게 외쳤다.
“이해진 씨가 원하는 능력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흐음?”
뭐 초능력 그런 거? 해진이 고개를 까딱하며 설명 좀 해 보라는 신호를 주니 그가 간결하게 덧붙였다.
“해진 씨 세계에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능력들 있잖아요. 내가 바라는 건 다 이뤄져라! 같은 터무니없는 것만 아니면 뭐든 괜찮아요.”
검은 눈이 흥미를 보이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에 해진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저승사자는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헤 웃었다.
“그럼 어느 것을…… 시간을 좀 드릴까요?”
“어. 공간이동.”
“……네?”
“못 들었냐? 공간이동.”
홀몸으로 돈 모으기 바빴던 해진은 군대에 갔다 오고 3학년이 된 25살에도 자신의 차를 마련하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가끔 장거리 이동 때 꾸역꾸역 대중교통 이용하던 게 얼마나 귀찮았던지, 그의 로망은 승용차였다. 물론 굉장히 멋진 능력을 골랐다는 해진의 뿌듯함과는 다르게, 예상보다 너무나 약한 요구에 저승사자는 오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정말…… 그거면 됩니까?”
“편하잖아. 가고 싶은 곳 맘대로 슉슉.”
농담이라고는 전혀 섞이지 않은 해진의 말에 “아, 예…….” 하고 싱겁게 대꾸한 그는 좀 멍하게 있더니 알아서 이것저것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더 편리하게, 직접 가 본 곳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조건에 맞는 곳으로의 이동으로 하죠.”
“뭔데?”
“예를 들어…… 제일 가까운 식당. 1km 이내의 아무도 없는 공터. 이런 식 말입니다.”
오, 그거 좋네. 해진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힐긋거리며 살핀 저승사자는 더욱 자세하게 말을 이었다.
“해진 씨의 의지에 따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죠. 참고로 ‘따듯한 곳, 넓은 곳’처럼 너무 광범위한 조건이나 ‘행복해질 수 있는 곳, 울기 좋은 곳’처럼 추상적인 조건은 안 됩니다. 그 정도는 해진 씨가 판단할 수 있을 거구요.”
“아아. 그래.”
말을 마친 남자가 멀뚱히 앉아서 해진을 쳐다봤다. 이런 실수가 처음인 탓도 있지만 해진의 반응이 자꾸만 예상을 빗나가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이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봐 온 인간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저승사자의 혼란을 알 리가 없는 해진은 “그럼―”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승사자도 엉겁결에 따라 일어났다.
“가자.”
“예?”
“다른 차원이라며. 어딘진 모르겠지만 후딱후딱 하자고.”
“…….”
뭐랄까, 저승사자가 보기에 해진은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예상을 벗어나는 그의 행동을 따라잡기 어려운 저승사자가 멀뚱히 서 있자 잠시 기다리던 해진은 이내 빠릿빠릿하게 못 움직이겠냐는 듯 심기 불편한 눈빛을 쏘았다.
그제야 헉 하며 움직이는 저승사자의 뒤에서 사내놈이 자꾸 되묻고 행동도 굼뜨다며 해진이 쯧 혀를 찼다.
어찌 되었든 그는 해진을 어느 문 앞으로 안내했고, 해진이 가게 될 차원에 대해서 주절주절 설명했다. 걱정이 태산인지 말이 끝나지 않는 저승사자를 쳐다보던 해진은 어차피 직접 겪을 일, 지루한 설명은 귀찮다며 벌컥 문을 열었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문 너머로 사라지는 해진의 뒤에서 손을 뻗은 저승사자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위치 지정 다 안 됐는데…….”
“끙…….”
아이고, 골이 띵하다. 문 그거 천천히 좀 열걸……. 찡하게 울리는 머리 때문에 눈을 꾹 감고 있던 해진은 좀 괜찮아졌다 싶을 때 느릿하게 눈을 떴다. 무턱대고 문을 열어 재끼긴 했는데 어디로 떨어졌으려나? 이왕이면 인심 좋은 시골 마을이 좋겠는데……. 그러나 이제껏 해진의 인생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뚜렷해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탐스러운 커피빛의 근육이 짱짱한 가슴팍이었다. 어떻게 봐도 사내놈의 것이 분명한.
“…….”
쳇. 속으로 혀를 찬 해진은 저승사자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다른 차원에 와서 처음 보는 기념적인 것인데 고작 같은 사내놈 가슴이라니. 누구나 계속 쳐다볼 만큼 멋진 몸이긴 하지만 같은 사내놈인 해진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뭐든지 첫 경험은 중요한 법인데 하필이면 저런 근육이나 보게 되다니. 그들의 주변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모른 척하면 언젠가는 먼저 말을 걸겠지 싶어 일부러 시선을 빗겨 내리고 있었던 해진은 결국 커피색 가슴의 주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해진이 툭 떨어져서 곱게 앉아 있는 초대형 침대에는 덤으로 웬 야수 같은 남자도 딸려 있었다. 선천적인 듯한 부드러운 커피색 피부에 목을 살짝 덮는 흰색에 가까운 색소 옅은 머리카락, 샛노란 눈동자. ……뭐지, 이놈. 사자가 둔갑한 것처럼 생겼다. 사람한테 동물 닮았다는 소리는 좀 그렇지만 외모보다는 뭐랄까, 풍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느긋하게 옆으로 드러누워서 낯선 사람이 떨어졌는데도 여유로운 저 자태하며, 왕 같은 분위기 하며.
커다란 침대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드러누운 남자를 그 옆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은 자세로 훑어보던 해진은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호화로운 방이다. 딱 봐도 사치의 끝을 달리는 최고급. 이 말 한마디면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방주인에게 인사는 해야 할 성싶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상식을 떠올린 해진은 다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여태 그를 보고 있었던 건지 은근히 집요한 시선이 열렬하다.
“안녕.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진 않은 것 같네. 하여튼 미안.”
해진은 만사 시큰둥하고 귀찮아해도 인사성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데 어째서인지 자꾸 친한 척 인사하던 같은 학교 학생들 말고, 예의를 갖춰야 할 어른들에게나 적용되던 인사성이지만. 지금은 해진 본인이 불청객이니 적어도 인사는 해 줘야겠다 생각한 거였다.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회화의 기본은 인사 아니냐. 내가 했으면 너도 해야지. 그런 의미로 해진은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한마디도 없이 빤히 해진을 응시하는 노란 눈은 맹수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래도 인간이니까 덜컥 물릴 일은 없겠지 생각한 해진은 남자가 영 미동이 없어서, 혹시 눈뜨고 자는 건가 하는 생각에 손을 들어 그 앞에서 팔랑거렸다. 그리고 덥석 붙잡혔다. 음. 자는 건 아니구나.
“이름이?”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면서 해진이 재차 묻자 그를 쳐다보던 남자의 섹시한 모양의 입술이 열렸다.
“세오 에르탄이다.”
“아아……. 난 이해진.”
“암살자인가?”
엉? 뭔 헛소리냐. 해진이 ‘암살자란 게 보편적으로 쓰이는 의미의 그 암살자가 맞는 건가’하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묘한 움직임으로 팔 안쪽의 여린 살을 쓰다듬었다.
“아니면…… 누군가 들여보낸 선물인가?”
못 알아들을 말을 한 남자는 날카로운 빛의 눈을 내리깔며 오만한 미소를 짓더니 칭찬해 줘야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해진을 잡은 손에 힘을 줘 당겼다. 뭔가 싶은 해진이 얌전히 끌려가니 갑자기 입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해진의 검은 눈이 멀뚱하게 깜빡였다.
이미 차원이동이라는 판타지를 겪은 해진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바로 앞의 샛노란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자 남자가 혀를 내밀고는 해진의 입술을 핥았다.
해진의 키는 딱 180cm다. 유전자의 승리로 다리가 꽤나 긴 편이라 원래의 키보다 더 커 보인다는 말도 많이 들어왔고 만에 하나라도 여자로 착각할 얼굴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정말 보는 눈이 이상해서 여자로 착각했다 해도 다짜고짜 입술 박치기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도 당연한 사실이다. 멋대로 턱을 잡아 살짝 들더니 입을 가르고 들어오려는 혀에, 해진은 얌전히 있던 손을 들어 남자의 양 볼에 올렸다. 그러자 다정하게 쓰다듬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지 남자의 눈이 씨익 휜다. 해진도 따라 웃었다.
―짜악!!
“큭……!”
갑작스러운 타격에 놀라서 훌쩍 떨어지는 남자를 힐긋 쳐다본 해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딘지 멍청한 표정의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그를 봤다. 해진도 같이 쳐다봐 주다가 재차 씨익 웃었다.
“날파리는 때려죽여야 제 맛이지.”
좋아. 명언이군.
갇혔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편안하게 앉은 채 해진은 뭐가 문제였는지 고민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역시 초면에 쌍 싸대기를 날린 것에 삐쳤나 보다. 근데 걔가 먼저 주둥이 들이댔잖아. 지극히 당연한 정당방위고만.
처음에 떨어졌던 방이나 감옥으로 향하는 길에 보이던 복도나 다 범상치 않게 반짝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해진은 그놈 부자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썩 뺨을 얻어맞고 황당한 표정으로 해진을 쳐다보던 남자는 문에 대고 ‘들어와.’라고 짧게 명령했고, 한껏 예의를 차리며 들어온 병사인지 기사인지 하는 사람들이 해진을 끌고 와 감옥에 가뒀다. 그 모습을 보아 하니 여긴 아무래도 계급사회인 듯했다.
그 저승사자는 하필 이런 구닥다리 시대로 날 보내냐. 하여튼 잘하는 일이 없어요, 없어.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현재 해진에게 있어 제일 큰 문제는 배가 고프다는 거였다. 돈 벌면서 공부하느라 바쁠 때도 사람은 건강한 게 최고라며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던 해진인데 이런 외지에서 감옥에 갇혀 강제 금식이나 당하고 있다니, 신세 한번 처량하다.
“배고프다…….”
해진은 아무것도 없는 휑한 바닥에 앉아 철창 밖을 멀뚱히 쳐다봤다. 사실 그가 저승사자에게 받은 공간이동 능력을 쓰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지만 일단 상황 파악을 해야 하고 딱 하나 있는 밑천을 그리 쉽게 보여 줄 순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자신을 어찌할 것 같지는 않으니 잠깐 두고 볼까 싶었다. 그저 축축하고 음산한 지하에 곱게 모셔 놓은 것 뿐이니까. 물론 감옥 복도의 벽에 걸려 있는 괴상한 기구들로 고문이라도 하겠다 덤비면 앞뒤 잴 것도 없이 튀려는 생각도 마친 뒤였다.
근데 가둬 놓으면 다냐. 밥 좀 주지.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얼굴이 불만스런 빛을 띠었다. 정직하게 울리는 배를 보니 분명 점심시간은 훌쩍 지났을 것이다.
―철컹.
아무것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 재미없어서 그냥 밖으로 나갈까 고민하는 해진의 귀에 마침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침없이 저벅저벅 울리는 걸음은 금방 해진이 갇혀 있는 철창 앞에 당도했다. 절도 있는 발소리가 끊기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위압감을 풍기는 장신의 남자가 해진을 내려다봤다.
“얌전히 있었군.”
“어. 아쉽냐? 깽판 좀 쳐 놓을 걸 그랬나.”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리는 해진에 남자가 픽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틀어 올리며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웃는 것임에도 남자의 얼굴에서는 후광이 비칠 지경이었다. 다짜고짜 같은 사내놈한테 키스한 변태 주제에 왜 잘생기고 난리야.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은 해진은 철창의 바로 앞에서 양반다리로 앉은 자세를 풀지 않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또 한 번 느끼는 건데 키 한번 더럽게 크다. 앉아서 쳐다보자니 벌써 목이 아플 정도로.
“여긴 밥 안 줘?”
“죄인에겐 물도 과분하지.”
“죄인?”
누가? 정말 모르겠어서 되물은 말에 남자가 해진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너, 하고 짧게 대답했다. 나름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 생각하는 해진은 그 대답에 눈썹을 삐뚜름하게 휘었다. 남자가 비틀린 미소를 유지하며 몸을 슥 숙였다.
“황제를 시해하려한 것은 극형 받아 마땅한 죄다.”
“……황제?”
설마 설마 했는데 여기 진짜 계급사회? 그리고 쟤 황제였어? 말도 안……. 뭐, 잘 어울리긴 하네.
의외의 단어에 잠시 놀란 해진이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데 몸을 숙인 그대로 손을 뻗어 철창 사이로 집어넣은 남자는 해진의 턱을 쥐더니 휙 들어 올렸다. 잔인한 빛을 띤 샛노란 눈동자가 빤히 해진을 응시했다. 저 불순한 눈을 콱 찔러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해진의 입술을 엄지로 꾸욱 짓누른 남자가 다정한 척 꾸며 낸 어조로 말했다.
“적당히 굶주리면 알아서 기겠지. 하루에 물 한 잔 정도는 넣어 줄 테니 먹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금수처럼 바닥에 용변을 보며 며칠 견뎌 보거라.”
“뭐 이 시발놈아?”
아. 내가 웬만하면 욕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짝퉁 사자가 뭐라고 지껄인다냐.
해진이 제 딴에는 살벌하게 노려봐 준다며 눈을 치떴으나 남자는 그저 우습다는 듯 큭큭 웃을 뿐이었다. 그 오만한 태도가 오히려 굉장히 잘 어울려서 더 기분이 나빴다.
“인간을 길들이는 건…… 의외로 쉽거든.”
해진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엄지가 예고 없이 쑥 입안을 침범했다. 그 무방비한 행동에 해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적진에 제 발로 쳐들어왔겠다. 멋대로 남의 혀를 갖고 놀려는 손가락을, 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콰득 깨물었다. 송곳니에 의해 찢긴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내려 해진의 입안에 고였다.
해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깨문 상태에서 잘근잘근 씹기까지 했다.
아프냐? 네 하는 짓이 영 맘에 안 들어서 기분이 좀 나쁘거든.
우위를 선점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물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싸악 굳었다. 그러고는 해진의 얼굴을 잡아 손가락을 빼내려는 건지 반대쪽 손을 철창 안으로 뻗자 해진은 그 손을 피해 뒤로 휙 물러났다.
에퉤퉤. 피라는 거 맛없구나. 와그작 인상을 쓰고 입에 고였던 피를 바닥에 뱉어 내는 해진에게 한기를 풀풀 날리는 남자가 차갑게 일갈했다.
“너.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기대 따윈 하지 마라.”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몸을 돌려 저벅저벅 왔던 길을 돌아나갔다. 그의 반듯하고 커다란 등에 대고 가볍게 중지를 추켜세워 준 해진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건방진 놈. 엿이나 먹어라. 남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손을 내린 해진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곳에 갇혀서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굉장한 오산이었다. 능력은 써 먹으라고 있는 것.
남자가 자신을 꺼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확신한 해진은 바닥에서 일어나 바지를 탈탈 털었다. 일단 배고프니까 밥부터 먹자. 저승사자가 말해 줬던 공간이동 사용법을 되새긴 해진은 성 내부의 조리실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죽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긴 하지만 어디 때 탄 곳 하나 없이 깨끗하니 거지로 오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 편하게 먹고 성 내부의 조리실 문 앞을 생각하자 잠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곧장 단단한 바닥이 해진의 몸을 받쳤다. 오, 이 능력 좋은데? 멀미도 안 나고 말이지. 저승사자가 유일하게 잘한 짓이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해진은 거침없이 조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쉽게도 번드르르하게 차려진 음식은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사람도 없어서 귀찮은 일은 없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역시 조리를 하는 곳이라 그런지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반나절 넘게 쫄쫄 굶었더니 자동으로 개코가 되어 버린 그는 곧 음식 냄새를 감지하고 넓은 조리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한쪽 벽에 놓인 식탁을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아래로 몸을 숙여 보니 바구니 안에 곱게 담겨 있는 빵 봉지가 보였다. 식량 획득이다. 제대로 된 밥이 아닌 게 아쉽긴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니까 뭐.
해진은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아 후딱 빵 포장을 벗겨 냈다. 얼마 전에 만들어 놓은 건지 수북하게 쌓인 빵에서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빵의 주인일 사람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하루 내내 쫄쫄 굶은 해진은 남의 사정까지 생각해 줄 정도로 인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한껏 부푼 마음으로 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겉은 조금 단단하면서도 속은 부드럽게 씹히는 게, 가히 최상의 맛이다. 뭐야, 이 빵 맛있어! 게다가 종류도 다양해.
마음껏 빵을 먹을 수 있다는 소소한 행복에 젖은 해진은 한 봉지, 두 봉지 빠르게 빵을 해치웠다. 마실 것이 없어 좀 퍽퍽하긴 했지만 워낙 배고팠던 탓인지 침샘이 활발해져서 별 문제없이 꿀꺽꿀꺽 잘도 넘겼다. 으, 으…… 멈출 수가 없어. 이건 빵으로 둔갑한 마약인가? 근데 황제인지 뭔지 그 개자식. 내가 공간이동 못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꼼짝없이 거기 갇혀서 쫄쫄 굶고 못 씻어서 기름기와 먼지에 떡 지고 바닥에 대소변까지 지리는 비참한 꼴 날 뻔했잖아. 나중에 뒤통수라도 한 대 갈겨 줘야겠다. 못된 놈 같으니.
먹느라 바쁘니 속으로만 남자의 욕을 한 해진은 배가 좀 차자 여유가 생겨서 뒤적뒤적 빵을 골랐다. 한국에서는 못 보던 종류가 많아 이름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맛있어 보이는 빵을 잡아 찌익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 조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
“…….”
젠장. 너무 대놓고 먹었네. 입 바로 앞에 대고 있던 빵을 슬쩍 뒤로 숨긴 해진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진작 이 바구니 들고 다른 데로 가서 몰래 먹을걸. 요리사인 듯 하얀색 요리모를 쓴 남자는 문 앞에 서서 멍청한 표정으로 해진이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안 들키게 조심하고, 너무 빨리 먹으면 체하니까 천천히 먹으면서 가!”
“네네. 알겠어.”
해진은 문턱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흔드는 요리사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 주며 앞으로 걸었다. 참 괜찮은 녀석이다. 처음에 그에게 빵 훔쳐 먹는 모습을 들켰을 땐 귀찮게 또 도망가야 하나 싶었는데, 해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곧장 소리치며 경비를 부르는 대신 경계를 하면서도 해진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대화를 좀 하다가 꽤 친해졌다.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이름 푸에르. 27세. 평민 출신이나 좋은 후견인을 만난 덕에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울 수 있었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황궁 요리사까지 되었다고 한다. 아직 보조 요리사일 뿐이라며 겸손 떨기는 했지만 그의 요리는 진짜 끝내줬다. 자신이 먹은 빵이 종종 빈민가 아이들에게 건네주기 위해 그가 만드는 빵이라는 걸 들은 해진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푸에르가 웃으며 너도 지금 그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집도 없어, 돈도 없어, 옷도 없어, 있는 거라곤 건강한 몸뚱이 하나뿐이네.
푸에르가 꽤나 큼직한 바구니에 가득 채워 준 빵과 말린 음식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해진은 휘적휘적 바구니를 흔들며 걸었다. 본인 명의의 집이 있었다면 한 명쯤은 같이 살아도 괜찮았을 거라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황궁 내에 따로 배정된 요리사 전용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해진이 괜찮다고 하는 데도 마음이 영 불편한가 보다.
비록 모르는 땅에 똑 떨어진 빈털터리지만 뭐,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사지 멀쩡한 몸 갖고 할 일쯤 하나라도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는 조리실을 나와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봤던 중세시대처럼 거대한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웅장한 복도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정원 같은 곳이 보이기에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문 정원사의 손을 탔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한가득 남아 있는 넓은 정원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1화
01 공간이동 하는 남자
이름 이해진. 25세. 본인의 말에 따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학생이다. 하지만 여타 학생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한창 바빠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여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슬픔과 충격에 허우적거리다가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한 후 무엇에 홀린 것처럼 공부만 했다. 부모님 두 분 다 고아원 출신이라 친인척도 없고 외동인 덕에 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이니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는 의지로 인한 오기였다.
해진의 부모는 가난했지만 성실했기에 약간의 재산과 적금이 있었다. 그들이 겨우 마련했던 아파트 전셋집에서 나와 원룸으로 옮긴 해진은 국가장학금이며 학자금 대출도 받아 대학에 갔다. 이 악물고 공부한 게 헛된 짓은 아니었는지 그가 합격한 대학은 꽤나 상위권의 대학이었고, 별다른 취미도 없는 터라 그냥 선생님 조언으로 경제학과를 택했다. 장학금은 꼭 타자는 생각에 학기 중엔 죽어라 공부하고 방학엔 죽어라 알바하고. 다들 즐기는 미팅이나 술자리도 잘 안 나가서 누가 보면 뭐 저런 재미없는 인생이 다 있냐고 할 정도였다.
뭐, 무엇을 하든지 본인만 괜찮으면 상관없듯 해진은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혼자서도 잘하는 자신에게 뿌듯함까지 느끼면서. 그런데…… 그럭저럭 미래가 잘 닦이고 있다 생각했던 그의 삶이 틀어진 것은 신의 실수였다. 아니, 저승사자의 실수라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뭐요?”
“죄송…….”
“수명 빵빵하던 사람 죽여 놓고 죄송하다면 다냐.”
“…….”
본인은 딱히 질책하는 말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듣는 자의 입장에서는 냉담하기 그지없는 말에 해진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까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시큰둥하게 생각한 해진은 간단한 쿠키와 차가 세팅 돼 있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다가 상황 정리하듯 말해 보았다.
“음― 오늘따라 업무가 많아서 마지막쯤에 있던 수명이 다한 사람에게 대충 죽음의 인장을 뿌리다가, 옆에 지나가던 나까지 그걸 맞아 버렸다고?”
“네, 네…….”
거 참.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자신이 걸리다니, 재수도 더럽게 없다. 해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럼 이제 뭐해?”
“네?”
“실수로 죽인 건데 다시 돌아갈 순 없다며. 여기서 평생 놀아?”
온통 새하얀 공간에 있는 거라곤 테이블과 의자가 끝인 이곳에서 지내면 참 곱게 미치겠다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그에게 저승사자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직업이랑 안 어울리게 순진해 놀려 먹는 재미가 있는 남자였다. 겉은 멀쩡하니 잘생긴 놈인데 말이다.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 이해진 씨가 고를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는데요…….”
“응.”
“첫 번째는 환생입니다. 이건 말 안 해도 아실 테고……. 두 번째는 영혼이 타격을 받지 않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져 지금의 당신으로 계속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저 같은 영혼 인도자로 취직하는 것인데…….”
“그거 빼.”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오는 거부에 저승사자 역시 자신의 직업이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남들의 상황이 어떻든 귀찮은 일은 죽도록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일명 귀차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환생은 랜덤이야?”
“네. 하지만 제 실수로 일이 이렇게 된 만큼, 최대한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호오? 해진이 눈에 이채를 띠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런 것도 가능하다니, 저승사자는 특권도 있나 보네. 그래도 환생은 별로라고 생각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빡세게 살아왔던 인생이 아깝기도 하고 특혜를 준다지만 랜덤인 이상 도박인 것 같아 별로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세뇌 교육이 빛을 발해 살아생전 복권도 한 번 안 해 본 해진이었다.
“두 번째는, 뭐 딴 거 안 해 줘?”
“어…… 그, 그러니까…….”
떠오르는 것이 없어 말까지 더듬으며 고민하던 저승사자는 곧 손가락을 딱 부딪치며 밝게 외쳤다.
“이해진 씨가 원하는 능력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흐음?”
뭐 초능력 그런 거? 해진이 고개를 까딱하며 설명 좀 해 보라는 신호를 주니 그가 간결하게 덧붙였다.
“해진 씨 세계에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능력들 있잖아요. 내가 바라는 건 다 이뤄져라! 같은 터무니없는 것만 아니면 뭐든 괜찮아요.”
검은 눈이 흥미를 보이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에 해진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저승사자는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헤 웃었다.
“그럼 어느 것을…… 시간을 좀 드릴까요?”
“어. 공간이동.”
“……네?”
“못 들었냐? 공간이동.”
홀몸으로 돈 모으기 바빴던 해진은 군대에 갔다 오고 3학년이 된 25살에도 자신의 차를 마련하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가끔 장거리 이동 때 꾸역꾸역 대중교통 이용하던 게 얼마나 귀찮았던지, 그의 로망은 승용차였다. 물론 굉장히 멋진 능력을 골랐다는 해진의 뿌듯함과는 다르게, 예상보다 너무나 약한 요구에 저승사자는 오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정말…… 그거면 됩니까?”
“편하잖아. 가고 싶은 곳 맘대로 슉슉.”
농담이라고는 전혀 섞이지 않은 해진의 말에 “아, 예…….” 하고 싱겁게 대꾸한 그는 좀 멍하게 있더니 알아서 이것저것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더 편리하게, 직접 가 본 곳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조건에 맞는 곳으로의 이동으로 하죠.”
“뭔데?”
“예를 들어…… 제일 가까운 식당. 1km 이내의 아무도 없는 공터. 이런 식 말입니다.”
오, 그거 좋네. 해진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힐긋거리며 살핀 저승사자는 더욱 자세하게 말을 이었다.
“해진 씨의 의지에 따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죠. 참고로 ‘따듯한 곳, 넓은 곳’처럼 너무 광범위한 조건이나 ‘행복해질 수 있는 곳, 울기 좋은 곳’처럼 추상적인 조건은 안 됩니다. 그 정도는 해진 씨가 판단할 수 있을 거구요.”
“아아. 그래.”
말을 마친 남자가 멀뚱히 앉아서 해진을 쳐다봤다. 이런 실수가 처음인 탓도 있지만 해진의 반응이 자꾸만 예상을 빗나가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이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봐 온 인간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저승사자의 혼란을 알 리가 없는 해진은 “그럼―”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승사자도 엉겁결에 따라 일어났다.
“가자.”
“예?”
“다른 차원이라며. 어딘진 모르겠지만 후딱후딱 하자고.”
“…….”
뭐랄까, 저승사자가 보기에 해진은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예상을 벗어나는 그의 행동을 따라잡기 어려운 저승사자가 멀뚱히 서 있자 잠시 기다리던 해진은 이내 빠릿빠릿하게 못 움직이겠냐는 듯 심기 불편한 눈빛을 쏘았다.
그제야 헉 하며 움직이는 저승사자의 뒤에서 사내놈이 자꾸 되묻고 행동도 굼뜨다며 해진이 쯧 혀를 찼다.
어찌 되었든 그는 해진을 어느 문 앞으로 안내했고, 해진이 가게 될 차원에 대해서 주절주절 설명했다. 걱정이 태산인지 말이 끝나지 않는 저승사자를 쳐다보던 해진은 어차피 직접 겪을 일, 지루한 설명은 귀찮다며 벌컥 문을 열었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문 너머로 사라지는 해진의 뒤에서 손을 뻗은 저승사자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위치 지정 다 안 됐는데…….”
“끙…….”
아이고, 골이 띵하다. 문 그거 천천히 좀 열걸……. 찡하게 울리는 머리 때문에 눈을 꾹 감고 있던 해진은 좀 괜찮아졌다 싶을 때 느릿하게 눈을 떴다. 무턱대고 문을 열어 재끼긴 했는데 어디로 떨어졌으려나? 이왕이면 인심 좋은 시골 마을이 좋겠는데……. 그러나 이제껏 해진의 인생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뚜렷해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탐스러운 커피빛의 근육이 짱짱한 가슴팍이었다. 어떻게 봐도 사내놈의 것이 분명한.
“…….”
쳇. 속으로 혀를 찬 해진은 저승사자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다른 차원에 와서 처음 보는 기념적인 것인데 고작 같은 사내놈 가슴이라니. 누구나 계속 쳐다볼 만큼 멋진 몸이긴 하지만 같은 사내놈인 해진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뭐든지 첫 경험은 중요한 법인데 하필이면 저런 근육이나 보게 되다니. 그들의 주변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모른 척하면 언젠가는 먼저 말을 걸겠지 싶어 일부러 시선을 빗겨 내리고 있었던 해진은 결국 커피색 가슴의 주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해진이 툭 떨어져서 곱게 앉아 있는 초대형 침대에는 덤으로 웬 야수 같은 남자도 딸려 있었다. 선천적인 듯한 부드러운 커피색 피부에 목을 살짝 덮는 흰색에 가까운 색소 옅은 머리카락, 샛노란 눈동자. ……뭐지, 이놈. 사자가 둔갑한 것처럼 생겼다. 사람한테 동물 닮았다는 소리는 좀 그렇지만 외모보다는 뭐랄까, 풍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느긋하게 옆으로 드러누워서 낯선 사람이 떨어졌는데도 여유로운 저 자태하며, 왕 같은 분위기 하며.
커다란 침대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드러누운 남자를 그 옆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은 자세로 훑어보던 해진은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호화로운 방이다. 딱 봐도 사치의 끝을 달리는 최고급. 이 말 한마디면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방주인에게 인사는 해야 할 성싶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상식을 떠올린 해진은 다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여태 그를 보고 있었던 건지 은근히 집요한 시선이 열렬하다.
“안녕.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진 않은 것 같네. 하여튼 미안.”
해진은 만사 시큰둥하고 귀찮아해도 인사성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데 어째서인지 자꾸 친한 척 인사하던 같은 학교 학생들 말고, 예의를 갖춰야 할 어른들에게나 적용되던 인사성이지만. 지금은 해진 본인이 불청객이니 적어도 인사는 해 줘야겠다 생각한 거였다.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회화의 기본은 인사 아니냐. 내가 했으면 너도 해야지. 그런 의미로 해진은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한마디도 없이 빤히 해진을 응시하는 노란 눈은 맹수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래도 인간이니까 덜컥 물릴 일은 없겠지 생각한 해진은 남자가 영 미동이 없어서, 혹시 눈뜨고 자는 건가 하는 생각에 손을 들어 그 앞에서 팔랑거렸다. 그리고 덥석 붙잡혔다. 음. 자는 건 아니구나.
“이름이?”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면서 해진이 재차 묻자 그를 쳐다보던 남자의 섹시한 모양의 입술이 열렸다.
“세오 에르탄이다.”
“아아……. 난 이해진.”
“암살자인가?”
엉? 뭔 헛소리냐. 해진이 ‘암살자란 게 보편적으로 쓰이는 의미의 그 암살자가 맞는 건가’하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묘한 움직임으로 팔 안쪽의 여린 살을 쓰다듬었다.
“아니면…… 누군가 들여보낸 선물인가?”
못 알아들을 말을 한 남자는 날카로운 빛의 눈을 내리깔며 오만한 미소를 짓더니 칭찬해 줘야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해진을 잡은 손에 힘을 줘 당겼다. 뭔가 싶은 해진이 얌전히 끌려가니 갑자기 입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해진의 검은 눈이 멀뚱하게 깜빡였다.
이미 차원이동이라는 판타지를 겪은 해진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바로 앞의 샛노란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자 남자가 혀를 내밀고는 해진의 입술을 핥았다.
해진의 키는 딱 180cm다. 유전자의 승리로 다리가 꽤나 긴 편이라 원래의 키보다 더 커 보인다는 말도 많이 들어왔고 만에 하나라도 여자로 착각할 얼굴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정말 보는 눈이 이상해서 여자로 착각했다 해도 다짜고짜 입술 박치기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도 당연한 사실이다. 멋대로 턱을 잡아 살짝 들더니 입을 가르고 들어오려는 혀에, 해진은 얌전히 있던 손을 들어 남자의 양 볼에 올렸다. 그러자 다정하게 쓰다듬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지 남자의 눈이 씨익 휜다. 해진도 따라 웃었다.
―짜악!!
“큭……!”
갑작스러운 타격에 놀라서 훌쩍 떨어지는 남자를 힐긋 쳐다본 해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딘지 멍청한 표정의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그를 봤다. 해진도 같이 쳐다봐 주다가 재차 씨익 웃었다.
“날파리는 때려죽여야 제 맛이지.”
좋아. 명언이군.
갇혔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편안하게 앉은 채 해진은 뭐가 문제였는지 고민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역시 초면에 쌍 싸대기를 날린 것에 삐쳤나 보다. 근데 걔가 먼저 주둥이 들이댔잖아. 지극히 당연한 정당방위고만.
처음에 떨어졌던 방이나 감옥으로 향하는 길에 보이던 복도나 다 범상치 않게 반짝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해진은 그놈 부자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썩 뺨을 얻어맞고 황당한 표정으로 해진을 쳐다보던 남자는 문에 대고 ‘들어와.’라고 짧게 명령했고, 한껏 예의를 차리며 들어온 병사인지 기사인지 하는 사람들이 해진을 끌고 와 감옥에 가뒀다. 그 모습을 보아 하니 여긴 아무래도 계급사회인 듯했다.
그 저승사자는 하필 이런 구닥다리 시대로 날 보내냐. 하여튼 잘하는 일이 없어요, 없어.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현재 해진에게 있어 제일 큰 문제는 배가 고프다는 거였다. 돈 벌면서 공부하느라 바쁠 때도 사람은 건강한 게 최고라며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던 해진인데 이런 외지에서 감옥에 갇혀 강제 금식이나 당하고 있다니, 신세 한번 처량하다.
“배고프다…….”
해진은 아무것도 없는 휑한 바닥에 앉아 철창 밖을 멀뚱히 쳐다봤다. 사실 그가 저승사자에게 받은 공간이동 능력을 쓰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지만 일단 상황 파악을 해야 하고 딱 하나 있는 밑천을 그리 쉽게 보여 줄 순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자신을 어찌할 것 같지는 않으니 잠깐 두고 볼까 싶었다. 그저 축축하고 음산한 지하에 곱게 모셔 놓은 것 뿐이니까. 물론 감옥 복도의 벽에 걸려 있는 괴상한 기구들로 고문이라도 하겠다 덤비면 앞뒤 잴 것도 없이 튀려는 생각도 마친 뒤였다.
근데 가둬 놓으면 다냐. 밥 좀 주지.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얼굴이 불만스런 빛을 띠었다. 정직하게 울리는 배를 보니 분명 점심시간은 훌쩍 지났을 것이다.
―철컹.
아무것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 재미없어서 그냥 밖으로 나갈까 고민하는 해진의 귀에 마침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침없이 저벅저벅 울리는 걸음은 금방 해진이 갇혀 있는 철창 앞에 당도했다. 절도 있는 발소리가 끊기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위압감을 풍기는 장신의 남자가 해진을 내려다봤다.
“얌전히 있었군.”
“어. 아쉽냐? 깽판 좀 쳐 놓을 걸 그랬나.”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리는 해진에 남자가 픽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틀어 올리며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웃는 것임에도 남자의 얼굴에서는 후광이 비칠 지경이었다. 다짜고짜 같은 사내놈한테 키스한 변태 주제에 왜 잘생기고 난리야.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은 해진은 철창의 바로 앞에서 양반다리로 앉은 자세를 풀지 않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또 한 번 느끼는 건데 키 한번 더럽게 크다. 앉아서 쳐다보자니 벌써 목이 아플 정도로.
“여긴 밥 안 줘?”
“죄인에겐 물도 과분하지.”
“죄인?”
누가? 정말 모르겠어서 되물은 말에 남자가 해진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너, 하고 짧게 대답했다. 나름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 생각하는 해진은 그 대답에 눈썹을 삐뚜름하게 휘었다. 남자가 비틀린 미소를 유지하며 몸을 슥 숙였다.
“황제를 시해하려한 것은 극형 받아 마땅한 죄다.”
“……황제?”
설마 설마 했는데 여기 진짜 계급사회? 그리고 쟤 황제였어? 말도 안……. 뭐, 잘 어울리긴 하네.
의외의 단어에 잠시 놀란 해진이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데 몸을 숙인 그대로 손을 뻗어 철창 사이로 집어넣은 남자는 해진의 턱을 쥐더니 휙 들어 올렸다. 잔인한 빛을 띤 샛노란 눈동자가 빤히 해진을 응시했다. 저 불순한 눈을 콱 찔러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해진의 입술을 엄지로 꾸욱 짓누른 남자가 다정한 척 꾸며 낸 어조로 말했다.
“적당히 굶주리면 알아서 기겠지. 하루에 물 한 잔 정도는 넣어 줄 테니 먹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금수처럼 바닥에 용변을 보며 며칠 견뎌 보거라.”
“뭐 이 시발놈아?”
아. 내가 웬만하면 욕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짝퉁 사자가 뭐라고 지껄인다냐.
해진이 제 딴에는 살벌하게 노려봐 준다며 눈을 치떴으나 남자는 그저 우습다는 듯 큭큭 웃을 뿐이었다. 그 오만한 태도가 오히려 굉장히 잘 어울려서 더 기분이 나빴다.
“인간을 길들이는 건…… 의외로 쉽거든.”
해진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엄지가 예고 없이 쑥 입안을 침범했다. 그 무방비한 행동에 해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적진에 제 발로 쳐들어왔겠다. 멋대로 남의 혀를 갖고 놀려는 손가락을, 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콰득 깨물었다. 송곳니에 의해 찢긴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내려 해진의 입안에 고였다.
해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깨문 상태에서 잘근잘근 씹기까지 했다.
아프냐? 네 하는 짓이 영 맘에 안 들어서 기분이 좀 나쁘거든.
우위를 선점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물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싸악 굳었다. 그러고는 해진의 얼굴을 잡아 손가락을 빼내려는 건지 반대쪽 손을 철창 안으로 뻗자 해진은 그 손을 피해 뒤로 휙 물러났다.
에퉤퉤. 피라는 거 맛없구나. 와그작 인상을 쓰고 입에 고였던 피를 바닥에 뱉어 내는 해진에게 한기를 풀풀 날리는 남자가 차갑게 일갈했다.
“너.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기대 따윈 하지 마라.”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몸을 돌려 저벅저벅 왔던 길을 돌아나갔다. 그의 반듯하고 커다란 등에 대고 가볍게 중지를 추켜세워 준 해진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건방진 놈. 엿이나 먹어라. 남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손을 내린 해진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곳에 갇혀서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굉장한 오산이었다. 능력은 써 먹으라고 있는 것.
남자가 자신을 꺼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확신한 해진은 바닥에서 일어나 바지를 탈탈 털었다. 일단 배고프니까 밥부터 먹자. 저승사자가 말해 줬던 공간이동 사용법을 되새긴 해진은 성 내부의 조리실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죽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긴 하지만 어디 때 탄 곳 하나 없이 깨끗하니 거지로 오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 편하게 먹고 성 내부의 조리실 문 앞을 생각하자 잠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곧장 단단한 바닥이 해진의 몸을 받쳤다. 오, 이 능력 좋은데? 멀미도 안 나고 말이지. 저승사자가 유일하게 잘한 짓이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해진은 거침없이 조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쉽게도 번드르르하게 차려진 음식은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사람도 없어서 귀찮은 일은 없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역시 조리를 하는 곳이라 그런지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반나절 넘게 쫄쫄 굶었더니 자동으로 개코가 되어 버린 그는 곧 음식 냄새를 감지하고 넓은 조리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한쪽 벽에 놓인 식탁을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아래로 몸을 숙여 보니 바구니 안에 곱게 담겨 있는 빵 봉지가 보였다. 식량 획득이다. 제대로 된 밥이 아닌 게 아쉽긴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니까 뭐.
해진은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아 후딱 빵 포장을 벗겨 냈다. 얼마 전에 만들어 놓은 건지 수북하게 쌓인 빵에서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빵의 주인일 사람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하루 내내 쫄쫄 굶은 해진은 남의 사정까지 생각해 줄 정도로 인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한껏 부푼 마음으로 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겉은 조금 단단하면서도 속은 부드럽게 씹히는 게, 가히 최상의 맛이다. 뭐야, 이 빵 맛있어! 게다가 종류도 다양해.
마음껏 빵을 먹을 수 있다는 소소한 행복에 젖은 해진은 한 봉지, 두 봉지 빠르게 빵을 해치웠다. 마실 것이 없어 좀 퍽퍽하긴 했지만 워낙 배고팠던 탓인지 침샘이 활발해져서 별 문제없이 꿀꺽꿀꺽 잘도 넘겼다. 으, 으…… 멈출 수가 없어. 이건 빵으로 둔갑한 마약인가? 근데 황제인지 뭔지 그 개자식. 내가 공간이동 못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꼼짝없이 거기 갇혀서 쫄쫄 굶고 못 씻어서 기름기와 먼지에 떡 지고 바닥에 대소변까지 지리는 비참한 꼴 날 뻔했잖아. 나중에 뒤통수라도 한 대 갈겨 줘야겠다. 못된 놈 같으니.
먹느라 바쁘니 속으로만 남자의 욕을 한 해진은 배가 좀 차자 여유가 생겨서 뒤적뒤적 빵을 골랐다. 한국에서는 못 보던 종류가 많아 이름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맛있어 보이는 빵을 잡아 찌익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 조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
“…….”
젠장. 너무 대놓고 먹었네. 입 바로 앞에 대고 있던 빵을 슬쩍 뒤로 숨긴 해진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진작 이 바구니 들고 다른 데로 가서 몰래 먹을걸. 요리사인 듯 하얀색 요리모를 쓴 남자는 문 앞에 서서 멍청한 표정으로 해진이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안 들키게 조심하고, 너무 빨리 먹으면 체하니까 천천히 먹으면서 가!”
“네네. 알겠어.”
해진은 문턱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흔드는 요리사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 주며 앞으로 걸었다. 참 괜찮은 녀석이다. 처음에 그에게 빵 훔쳐 먹는 모습을 들켰을 땐 귀찮게 또 도망가야 하나 싶었는데, 해진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곧장 소리치며 경비를 부르는 대신 경계를 하면서도 해진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대화를 좀 하다가 꽤 친해졌다.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이름 푸에르. 27세. 평민 출신이나 좋은 후견인을 만난 덕에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울 수 있었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황궁 요리사까지 되었다고 한다. 아직 보조 요리사일 뿐이라며 겸손 떨기는 했지만 그의 요리는 진짜 끝내줬다. 자신이 먹은 빵이 종종 빈민가 아이들에게 건네주기 위해 그가 만드는 빵이라는 걸 들은 해진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푸에르가 웃으며 너도 지금 그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집도 없어, 돈도 없어, 옷도 없어, 있는 거라곤 건강한 몸뚱이 하나뿐이네.
푸에르가 꽤나 큼직한 바구니에 가득 채워 준 빵과 말린 음식들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해진은 휘적휘적 바구니를 흔들며 걸었다. 본인 명의의 집이 있었다면 한 명쯤은 같이 살아도 괜찮았을 거라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황궁 내에 따로 배정된 요리사 전용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해진이 괜찮다고 하는 데도 마음이 영 불편한가 보다.
비록 모르는 땅에 똑 떨어진 빈털터리지만 뭐,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사지 멀쩡한 몸 갖고 할 일쯤 하나라도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는 조리실을 나와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봤던 중세시대처럼 거대한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웅장한 복도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정원 같은 곳이 보이기에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문 정원사의 손을 탔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한가득 남아 있는 넓은 정원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