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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황후 01

1화

一章. 서문휘연(西門輝姸)


“오늘은 여기까지다. 집에 돌아가서도 책을 보는 것에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궁촌벽지(窮村僻地). 30채도 되지 않는 허름한 가옥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 초라한 정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눈을 반짝이는 어린아이들에게 기본적인 글부터 기예를 가르치는 앳된 모습의 소년.
과연 소년이 맞는 것인지, 길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반을 묶어 늘어트렸고,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는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백옥 같다.
반듯한 이마와 넓은 양미간, 가지런하고 깨끗한 눈썹. 음영을 드리울 만큼 숱이 많은 속눈썹 밑으로 흑백이 조화를 이룬 올곧은 눈동자가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곧은 콧날을 지나 홍해화(紅瀣花)를 머금은 듯 붉은 입술이 탐스럽고 윤택하며, 조심스럽게 열릴 때면 가지런한 하얀 치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목소리는 청량하니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케 했고, 길게 뻗은 목선을 지나 곧고 여린 허리,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 하나도 칭찬을 아니할 수 없을 만큼 그 미색이 빼어났다.
마치 소녀라고 칭해도 과하지 않을 모습. 외모뿐만이 아니라 작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도 기품이 묻어나는 소년이었지만, 그 몸을 감싸고 있는 의복에는 군데군데 기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후…….”
어린아이들을 보낸 후 해가 산 너머로 기울어져 갈 때야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이 황혼 빛에 물들어 더욱 단아한 빛을 내뿜는다. 그런 소년 앞으로 마을 촌장이 다가왔다.
“공자님, 매번 감사드립니다. 공자님 덕분에 우리 같은 놈들도 글귀나 읽고 살지, 안 그랬음 여전히 촌무지렁이로 살아갈 뻔했습니다.”
“도움받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우리 같은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아! 내 정신 좀 보게! 이거, 가져가셔서 어르신이랑 같이 드십시오. 올해 수확한 옥수수입니다.”
“아닙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신세를 질 수는 없습니다.”
“신세라니요? 아무리 못 배운 놈들이라도 두 분께 받은 은혜를 이렇게라도 갚지 않으면 속이 편치 않아서 그럽니다. 그러니 보잘것없더라도 꼭 좀 받아 주십시오.”
한참이나 까마득한 어린 소년을 향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는 촌장의 주름진 손에 들린 작은 바구니 안에는 막 수확한 옥수수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고 싶은 촌장의 마음이었으나, 고작 옥수수 다섯 개로 치부하기에는 이곳 생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소년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사코 사양하는 소년의 손에 촌장이 바구니를 강제로 쥐여 주다시피 했다. 그 탓에 잠시 당황하던 소년이 더 이상 거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깊숙이 예를 다해 허리를 숙였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대신 다음에 밭일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미약한 힘이나마 돕겠습니다.”
“아이고! 제발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 그러시네. 공자님 부렸다간 우리 마을에서 쫓겨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불러 주세요. 고된 일은 못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이거 참, 고집이 워낙 세시니 자꾸 뭐라 할 수도 없고. 공자님 고집을 제가 어찌 꺾겠습니까요? 다음에 도와주시고 피곤하실 테니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청량한 목소리 끝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마지막까지 예를 다해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소년의 뒷모습에서 마을 촌장은 멍하니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허어, 안타깝구먼. 이런 곳에 계실 분들이 아니신데. 쯧쯧…….”
무원촌(無願村). 이름도 없었던 작은 마을이지만, 서문세가(西門勢家)가 이곳에 터를 잡은 후 무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바라지도, 구하지도 않는다는 뜻.
마을 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지을 만큼의 머리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농작하는 방법부터 예의를 가르치고, 글을 가르친 사람이 소년의 선조였다.
그때부터 이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로 살아오면서 집안의 마지막 가산을 털어 마을의 재난을 바로 잡았고, 소년 또한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거나 밭일을 도와 끼니를 해결해 온 것이다.
그 생활은 참으로 궁핍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지만, 타고난 기품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욕심조차 없어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덕을 베풂에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제아무리 무지한 인간들이라고 해도 진심으로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 이제 오세요?”
“그래. 아소, 이걸로 저녁 찬을 하자꾸나.”
“와! 옥수수네? 예! 곧 준비하겠습니다.”
촌장과 헤어지고 소년이 향한 곳은 마을 제일 안쪽에 위치한 세 칸 남짓한 초라한 집. 소년이 나무를 엮어 만든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소년보다 더 작은 소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뼈가 드러날 정도로 여윈 몸이 안쓰러운지 아소라 불리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 소년의 얼굴에 보기 드물게 그늘이 졌다. 그러다, 옥수수에 반색하며 또다시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소년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어려운 처지에도 이렇다 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소년이지만,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까지는 막지 못하는 듯 한참을 석양빛에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기척을 고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들어가겠습니다.”
방 안에는 남루한 행색이지만 기품이 넘치는 중년이 서책을 읽고 있었고, 그는 자신 앞에 마주해 앉는 소년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소년의 아버지이자 현 서문세가의 가주였다.
“아버님, 소자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너라.”
서문호협, 호는 공진(恭進). 올해 42세로 서문세가의 가주. 일찍이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학문이나 약초 효능에 대한 재주가 뛰어났지만,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떨친 적이 없는 초야의 문인이라고 평할 수 있다.
서문휘연, 호는 공희(供犧). 올해 나이 17세로 서문세가 외동아들로. 학문뿐 아니라 의술, 기예에 능해 다재다예(多才多藝)했고, 올바른 성품이나 효(孝)는 이미 인근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오늘은 늦었구나. 요즘 들어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것 같고, 혹여 마음이 심란한 것이냐?”
“아닙니다. 단지 뜻 모를 꿈에 조금 난처하던 중입니다.”
“꿈이라. 그런가. 때가 가까워졌음인가.”
호협의 시선이 그늘진 휘연의 얼굴에 머무르고, 근심을 담아 묻는 말에 휘연이 화급히 굳힌 얼굴을 풀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계속해서 같은 꿈을 꾸고 깊은 잠이 들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 휘연은 이만저만 난감한 게 아니었다.
더구나 천문을 비롯해 천기에 대한 지식을 쌓았음에도 왜인지 한낱 꿈이 뜻하는 바가 휘연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섣불리 알려고 들지도 않았었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풀 수도 없고 풀리지도 않는 의문.
결국, 이대로 묻어 두느니 호협에게라도 말을 해서 그 꿈이 뜻하는 걸 알고 싶은 휘연이 넌지시 꿈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는 꿈이라는 말에 안색을 굳히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라도 빠진 듯 알게 모르게 중얼거릴 뿐 의문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
“후우, 너에게 비단옷 한 번 입혀 주지 못하고, 배불리 먹여 주지도 못하는 이 아비가 원망스럽지는 않느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버님답지 않으십니다. 옷이야 몸을 가릴 수만 있다면 족할진대 허름하면 어떻고 누더기면 또 어떻습니까. 하물며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하루 세 끼를 챙기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휘연은 오늘따라 아픈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호협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넉넉한 생활을 해 보지는 못해도 이 생활에 굳이 억울하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걸 호협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학문을 닦는 몸으로 마을 일을 돕고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 대가를 바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호협은 여느 때와 확실히 다르다. 무엇인가 긴히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면서도 정작 휘연과 눈이 마주치면 작게 한숨만 내쉴 뿐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찰나의 침묵이 흐른 후 호협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휘연아, 호를 공희라 정한 연유를 아느냐?”
“깊은 뜻은 모르나 공양하고 희생하라는 것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 선조께서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 이름을 무원이라 지은 것도 모든 욕심을 버리고자 함이니라. 무릇 인간이란 탐욕이 강하고, 권세를 틀어쥘수록 그 탐욕 또한 커진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한도, 끝도 없듯이 한 번의 욕심으로 세 번의 재화를 당한다고 했다. 반면 자기 것을 버려 다른 이에게 베풀 줄 안다면, 세 번의 재화를 오히려 복으로 바꿀 수도 있음이다. 그 깊은 뜻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어렵게 말문을 열기에 처음엔 꿈에 대한 말인 줄 알고 내심 긴장했던 휘연은 난데없이 자신의 호를 들먹이는 호협을 보며 찰나의 뜸을 들인 후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공희, 자신을 희생해 이바지하라는 뜻.
다른 말로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의 희생을 뜻하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호협이 아들인 자신의 호를 이렇게 지었는지는 모르나 휘연은 자신이 희생함으로 만인이 편안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해서 그 속뜻을 알고도 휘연은 자신의 호가 마음에 들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유서 깊은 서문세가의 후손. 비록 지금은 가세가 기울어 간신히 명맥만 이어 간다고 해도 그 근본인 뿌리까지 잘라 낼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선조 때부터 이어져 왔듯이 덕을 베풀며 학문을 닦을 수만 있다면 휘연은 그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준비가 돼 있을 만큼 타고난 천품이 바르고 정대했으며 성격 또한 온순하고 착하기가 따를 자가 없었다.
“후우, 네게 해 줄 말이 있다. 이건 오래전 일로…….”
얼마간 또다시 침묵이 흐른 후,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호협이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미처 서두를 꺼내기도 전에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아소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르신! 공자님!”
“무슨 일이냐?”
“아소,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야?”
살포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두 사람이 방을 나가자 다소 흥분에 들떠 안절부절못하는 아소와 마당 한가운데 관복을 입고 있는 한 사내가 방을 나오는 두 사람을 멍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순간 호협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찰나에 기묘한 정적이 흐르고 사내는 찌푸려진 미간을 풀지 않는 호협과 그 옆에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휘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한 감탄을 쏟아 내고 있었다.
서문호협, 서문휘연. 지금껏 황궁에서 아름다운 걸 따지자면 수도 없이 본 사내였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의 외모는 초라한 행색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치장한 그 누구보다도 심장을 울릴 만큼 빛이 났다.
여자도 아니고 어찌 사내가 이렇게 단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 사실에 진충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채 굳어진 줄도 모르고 호협이 묻자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사내는 본연의 임무를 꺼냈다.
“황궁에서 나오신 거요?”
“크흠! 전 황궁태복 진충이라 합니다. 서문세가 가주 되십니까?”
“그렇소.”
“흠, 다름이 아니라, 이번 황후 후보로 서문 공자가 선택되셨습니다. 달포 안에 시험장에 도착해야 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출발할 수 있게 미리 여장을 준비해 주십시오.”
황궁태복(皇宮太僕). 황명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관직이자 황궁 종사관(從事官) 소속. 진충이라는 사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휘연과는 달리 이미 예상했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는 호협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다 무슨…….”
“결국, 흐르는 운명이라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휘연이 의문을 품기도 전에 호협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그런 호협을 휘연이 다급하게 부축했다.
“아버님!”
“아, 괜찮다. 아소, 손님께 식사를 대접하고 잠자리를 봐 드려라.”
“예, 어르신. 나리, 이쪽으로 오십시오.”
평소 서두름이 없고 작은 행동 하나에도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연스러운 품위를 지키던 호협이다. 그런 호협이 오늘은 어찌 이리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당황한 마음에 평소에는 생각조차 못 할 모습으로 걱정을 담아 언성을 높였지만, 그 순간 휘연은 이상하게 불안하고 거칠게 심장이 뛰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꾸었던 이상한 꿈이 불시에 떠올랐다. 알 수 없는 호협의 태도도, 지금 진충이라는 자가 전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휘연은 이 모든 게 그 꿈과 연관이 있다는 것과 그 끝이 하나로 귀결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 불안했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흔들어 까마득한 어딘가로 떠밀어 버리는 것 같이, 두려움을 넘어서 막연하게 다가오는 듯한 공포가 그랬다.
그게 무엇이든 휘연은 할 수만 있다면 듣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보다 더 깊숙이 묻어두고 싶었다.
“들어가자. 네게 해 줄 말이 있다.”
“……예.”
휘연은 못내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진충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내키지 않은 몸을 돌려 호협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진충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술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 평상시 같으면 글을 읽는 휘연의 청량한 목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나왔겠지만, 아소만이 저녁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낼 뿐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기묘한 침묵만이 무겁게 맴돌고 있었다.
“나리, 저녁상입니다.”
“이건…… 죽이 아니냐?”
“예, 오늘 공자님께서 옥수수를 가져오셔서 다행히 죽을 끓일 수 있었습니다.”
“허! 죽이라니. 거참, 행색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명색이 유서 깊은 서문세가에서 죽으로 끼니를 때운다? 이거 놀랄 일이구먼.”
“예? 하지만 다른 날은 약초 뿌리로 근근이 연명했는걸요. 어르신도, 공자님도 이만하면 호강에 겨운 것이라 하셨는데.”
“쩝, 그런가. 알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아소가 자랑스럽게 작은 상 위에 올려놓은 옥수수 죽을 보고 진충은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직책이 아무리 하급 전령이라고 해도 명색이 황궁에서 나온 이상 일반 관료보다 오히려 더 높은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런 데다 다른 세도가를 맡은 이들처럼 호위까지 대동한 것도 아니고, 단신으로 떠밀리다시피 찾아올 때만 해도 아무리 잊힌 가문이지만 유서 깊은 서문세가다 보니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마차도 들어오지 못하는 산간벽지(山間僻地)를 찾아오느라, 물어물어 줄곧 열흘간이나 걸어온 자신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진수성찬을 대접받지는 못할망정 옥수수 죽 하나가 전부인 상차림을 받을 거라고는 진충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인지 진충의 찌푸려진 눈살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걸 역력히 보여 주고 있었지만, 곧 진충의 혼잣말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흘러나오는 아소의 말에 짐짓 멋쩍은 듯 굳어진 인상을 풀 수밖에 없었다.
아소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면, 자신은 지금 최고의 대접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두 사람의 행색이 떠오르자 진충은 더 이상 의심조차 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유서 깊은 서문세가가 이렇게 살아갈 줄이야.
아무리 오래전에 쫓겨나다시피 낙향했다지만, 지금도 서문세가라는 이름만 나와도 언제 또다시 그 좋은 머리를 내세워 역심을 품을지 모른다며 간신배들 사이에서는 성토(聲討)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고 있다니. 허어,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세상이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줄도 모르고 틈만 나면 물어뜯으려는 무리를 떠올리고 진충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미 황제에게 버림받고 잊힌 가문. 한낱 태복 따위가 이러쿵저러쿵할 수도 없는 게 정치다.
하지만 이번 황후 간택으로 인해 어쩌면 황궁은 또 한 번 소란스러워질지도 모른다. 더구나 저런 미색이라니. 생각할수록 심장이 쿵쿵거리는 느낌에 진충은 마치 역심이라도 품은 듯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굳이 황후 후보라서가 아니라, 아무리 버림받은 가문이라 해도 자신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 신분이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듯 씁쓸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진충이 수저를 들어 멀건 국물뿐인 옥수수 죽을 떠먹었다.
그러면서 갸웃거리는 진충의 얼굴에 옅은 실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오랜 여정으로 인해 허기진 상태였다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황궁에서 먹던 성찬보다 오히려 더 맛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진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저히 잊히지 않는 휘연의 얼굴이 떠올라 진충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달빛이 단 한 사람만을 비추는 것 같았다.
또다시 떠오르는 얼굴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

이제나저제나 호협이 말을 꺼내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와중에도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바닥 안에는 촉촉한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는 목이 칼칼하게 아파져 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는지,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 정작 휘연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 단지 한동안 말없이 자신을 보는 호협의 시선에 휘연은 자꾸만 입안이 바싹 말라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휘연아, 너는 우리 서문세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상세히는 모르나 우리 가문은 수나라가 건국 당시부터 총군사로 황제 폐하를 보필하였고, 그 이후로는 정성의 반열에 오르신 분들이 계시며 대학사로 학문의 근원(根源)이 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후우, 그 모든 게 허명자루(虛名自累)이거늘.”
“헛된 이름을 구하자고 스스로 재난을 초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그저 생각할수록 씁쓸해지는구나.”
수나라 건국 당시부터 대대로 학문을 닦아 온 서문세가는 그 머리가 뛰어남에 황제의 군사로 그 역할을 톡톡히 했고, 그 이후부터는 대학사로 위로는 제자인 황제를 가르쳤으며 아래로는 문인들의 선두가 되었다.
그러나 성공지하불가구처(成功之下不可久處)라는 말이 있듯이, 성공한 곳에서 오래 머물러 있으면 자연히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많아 화를 당하게 된다고 했듯이 오랜 세월 위세를 떨치던 서문세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대대손손 그 어떤 핍박과 모략에도 굳건히 권세를 누려 왔으나 제13대 소정황제(昭政皇帝)에 이르면서부터 그 강도가 심해져 결국 역모에까지 휘말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참화를 당하는 대신 모든 권세를 놓고 황도를 떠나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낙향하고도 서문세가라는 이름이 가진 위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백성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학자가 앞다투어 찾아와 서문세가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황제에게 서문세가의 황도 입성을 구했지만, 그 간청은 황제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문세가를 위하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서문세가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제16대 소장황제(昭章皇帝)에 의해 서문세가의 줄기라 할 수 있는 방계가족이 모조리 참수를 당하며 재산까지 몰수당하는 참변이 벌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