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1화
제32장 같은 뜻을 지닌 그들(3)


“솔직히 말하자면 난 자네와 함께하고 싶었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지. 겁이 났었던 거야.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인간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는 것이 말이야. 그리고 자네와 나를 비교할 세간의 평가들도…….”
석기룡이 종리우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시기심은 버렸지만 그 때문인지 석기룡은 자신감을 잃었다. 그렇기에 그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석기룡은 종리우라는 그늘을 벗어나 홀로서기에 나선 것이었다.
무관에서는 단순히 시기심에 눈이 멀어 수련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욕심을 버리고 수련에 임하였다.
마음을 비웠기 때문일까.
폐관을 끝내고 다시 무림에 나온 석기룡은 단숨에 혈수왕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고 곧 종리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수의 반열에 들 수가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 아는가? 자네가 항상 투덜거리며 욕하던 제자 있잖은가! 철진. 그놈 말이야. 자네의 말로만 듣다가 내 실제로 만나보니 완전 자네의 어렸을 때와 판박이가 아닌가!”
철진의 얼굴을 떠올린 석기룡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정말로 철진은 종리우의 옛 모습을 빼다 박다시피 했다.
외모가 닮았다는 것이 아니었다.
하는 행동과 마음이 닮았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딱 그 짝이라는 걸세! 허허! 아무튼 그놈이 이제 자네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네. 그 끝이 참 궁금하지 않은가? 자네가 키운 제자가 어떻게 걸어갈지가 말이야.”
석기룡이 대답을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다시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일각. 다시 사도맹을 내려다본 석기룡이 말을 이었다.
“내 저번에는 자네의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한 번 지켜볼 생각이네. 기대해 보세나.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저놈 결코 흐지부지하게 생을 끝낼 놈이 아니야. 아마 자네보다도 더 큰 명성을 떨칠 것이야.”
“당연하지 않은가? 누가 키운 놈인데!”
“……!”
석기룡이 눈을 부릅뜨며 무덤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무덤은 산들바람으로 인해 잔디가 흔들릴 뿐이었다.
그 시각.
또 한 명의 인물이 사도맹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장포를 걸친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도맹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사마련을 떠난 지 벌써 삼 년의 시간이 훌쩍 흘러 사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땅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건물이었다.
“사부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지켜만 보시지요. 당신을 그렇게 보낸 자들의 말로를 제자가 어떻게 선사하는 지를!”
한광이 피어난 눈에 사도맹을 담은 무천의 주먹이 힘껏 쥐어졌다.

시간은 한순간에 흘러갔다.
연회 준비를 간신히 시간 맞춰 끝낸 하인들은 쉴 시간도 없이 손님을 받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사도맹의 전갈을 받아 출발한 무림 문파의 명숙들이 덩달아 속속 도착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고 경험이 찬 무인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새파랗게 젊은 무인들은 상기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비무대회가 무림에서의 첫 발자취였고 인생의 서막을 울리는 종소리였다.
그동안 갈고닦은 솜씨를 뽐낼 것이다.
절대 후회 없도록 말이다.
후기지수들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면서도 또래들을 살피며 실력을 가늠하기 바빴다.
그 시각 호연중은 만리유성을 독대하고 있었다.
여전히 금가면을 벗지 않은 만리유성이었지만 평소 마철강으로부터 그에 대한 말을 전해 들었던 호연중은 그러려니 하며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몰려온 듯싶습니다.”
만리유성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호연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덕분에 맹에서 준비한 물자들이 부족할 지경이라오.”
“하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지 않습니까? 그만큼 무인들에게 맹이 각인된다는 것이니까요.”
“물론 그렇소. 파리가 날리는 잔치보다야 인해가 넘치는 잔치가 좋은 법이지.”
“아, 그런데 흑천문이라는 곳이 멸문당했다고 들었습니다.”
“…….”
그 소식은 호연중도 들어 알고 있었다.
흑천문이라면 사파를 대표하는 문파 중 한 곳. 그런 곳이 단 하룻밤 만에 멸문당했다고 하였다. 문제는 누가 그랬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바로 정파였다.
정파와 사파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 같은 관계.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사이였다. 때문에 무슨 명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파와 사파의 다툼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흑천문이 정파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현 정파의 상황이었다.
무림맹을 필두로 뭉친 정파는 지금 무황성과 전쟁을 진행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흑천문을 쳐서 사파를 자극한다?
그것은 곧 무림맹이 파멸을 재촉하는 일 뿐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무황성과 균등한 힘을 이루고 있는 그들이 미치지 않는 이상 괜히 사파를 공격해 적을 늘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마교였다. 하지만 그 역시 제외였다.
몰래 천궁으로부터 마교가 봉문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 마교가 봉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분간 중원에 마교가 등장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 마교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어디일까.
‘설마…… 그가?’
호연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본래 사파의 주인이었던 기태천의 제자이자 버림받았다 알려진 사내.
수년간 내공을 잃어 사마련에서도 버림받았다고 알려진 사내. 그가 무황성에서 보인 신위는 호연중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 중원 어딘가에.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정말로 그가 돌아온 것인가.’
그때 만리유성이 호연중의 상념을 깨트렸다.
“본 궁에서 요구한 물건들은 모두 준비가 되었습니까?”
사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것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만큼 천궁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앞으로의 일정에서 중요한 사항이었고 큰 물길 중 하나였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소.”
대답한 호연중은 그간 몰래 준비해 온 산공독을 떠올렸다.
처음 그들이 계획한 일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예전에 사마련을 무너트린다는 그들의 계획에도 적잖게 고민하고 놀랐던 호연중이었다. 그 후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그였는데 이번 일은 그때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고독이라니.’
놀랍게도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고독이었다. 그것도 특정 다수를 중독 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
사파 대부분의 무인들을 중독시키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모인 무인들의 수만 해도 어림잡아 오만이 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중독시키느냐.
바로 연회로 나오는 음식들이었다.
첫날 나오는 음식은 아무런 이상도 없는 일반적인 음식이었다. 그리고 둘째 날 나오는 음식은 고독의 알이 들어 있는 음식이었다. 그것은 셋째 날 역시 같았다.
보다 확실히 중독시키기 위해 이틀에 걸쳐 알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넷째 날은 산공독을 음식에 풀 것이었다.
그날이 바로 비무대회가 시작하는 날이었지만 실상 비무대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무인들을 꼬셔 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무슨 조합으로 만든 고독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독은 산공독의 영향을 받아야만 부화한다고 했다. 더 무서운 사실은 그렇게 부화한 고독이 바로 숙주의 내기를 흡수하며 자란다는 사실이었다.
수많은 고독의 조합법이 있고 배합에 따라 고독의 효능도 달라지지만 설마 그러한 고독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호연중이었다.
내기를 먹고 자란다니.
그것만큼 무인에게 두려운 고독도 없을 것이다.
“이 일이 성공적으로 성사된다면 사도맹은 사파를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호연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천궁. 이러한 계획을 짠 천궁은 정말 호연중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두려운 곳이었다.
비록 사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호연중은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움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애린이는 어디에 있소?”
“아, 호연 소저 말입니까? 지금쯤 방에 있을 겁니다. 아마도 자극이 꽤나 컸나 봅니다.”
만리유성의 대답에 호연중은 쓴웃음을 지었다.
호연애린을 만난 그날 호연중은 떨리는 몸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애써 부정한다고 했지만 기억을 잃은 그녀를 보자 슬픔이 그의 마음을 가득 메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호연애린은 그런 호연중을 피해 자리를 벗어났다.
혼란스럽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후로 호연중은 호연애린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연회가 시작하는 공식석상 이외에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호연애린은 여전히 방 밖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만리유성의 말처럼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아버지를 만날지는 몰랐던 그녀였다.
사실 그녀도 호연중과 마찬가지로 그를 만났을 때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지만 맹주의 자리에 있는 이니 뭔가 특별한 느낌을 받았나 하고 넘겼었다.
호연중 때문에 심란한 마음이 커지자 이제는 만리유성의 정체에 대해서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분명 그는 자신에게 상당히 잘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호연애린은 무언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마치 마음 한구석이 사라진 느낌.
그 공허함은 무슨 생각을 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똑똑!
“소저. 들어가도 되겠소?”
그때 문 밖에서 만리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연애린은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예.”
“그럼 실례하겠소.”
비록 한낮이지만 혼례도 올리지 않은 사이에 남자가 여성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다.
만리유성 역시 말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는 당당함이 넘쳤다.
마치 누가 자신의 앞길을 막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런 모습조차 호감으로 느껴질 텐데 마음속에 피어난 이질감은 그런 그녀로 하여금 만리유성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호연애린의 마음을 알 길이 없던 만리유성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미소를 지었다.
“벌써 그날로부터 수일의 시간이 지났소. 그동안 방 안에만 있었다고 들었소. 답답하지 않소?”
“전 괜찮아요.”
대답하던 호연애린이 흠칫하고 놀랐다.
방금 내뱉은 목소리는 자신이 들어도 놀라울 정도로 싸늘했기 때문이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적잖게 놀란 만리유성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없어요.”
“그렇다면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이오?”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럼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그냥…… 그냥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러니 절 그냥 놔두세요.”
“…….”
만리유성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