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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에필로그
1. 시선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평소엔 시끄러운 것도 싫어하고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지 않던 내가 하필이면 그날, 왜 그곳에 가게 된 걸까.
“작가님! 여기요!”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남자는 모델 출신의 신인 배우, ‘한재경’이다. 저번 달에 마지막 회를 끝으로 유종의 미를 장식한 미니시리즈의 조연이기도 했다. 신인의 패기인지, 타고난 성격인지 살가움의 정석을 보여 주는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다.
처음 대본 리딩 때 전화번호를 가져가더니 드라마가 끝난 지 한 달이 넘도록 수시로 연락하고 있다. 아, 내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이 사람이 아니고 이 사람의 친구인 ‘김지원’이다. 늘 영화만 찍는 사람이라 특별히 만날 일은 없었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 남자를 모를 리 없었다.
남자다운 카리스마와 여성스러운 얼굴선이 제대로 조화를 이룬 그의 얼굴에 여자들은 열광했고, 흠잡을 것 없이 탄탄한 몸매는 못 남자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그는 화려하다는 연예계 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감의 스타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재경 씨,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요. 작가님이 좀 튕기셔야죠.”
넉살 좋은 재경의 투정에 나는 자연스럽게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내 성격을 모를 리 없는 재경은 늘 조용한 분위기에서 나를 찾았지만, 오늘만큼은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것이 영 적응하기 어려웠다.
“오늘 제 친구 생일이에요. 제가 작가님 초대한 건데 괜찮죠?”
“네?”
“지원이요, 김지원. 작가님도 아시죠?”
재경은 커다란 소파에 한껏 파묻혀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누가 오건 말건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표정의 그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나 주지. 재경이 그를 향해 날 소개시켰다.
“이번에 나 출연했던 미니시리즈의 ‘유현주’ 작가님이셔.”
“…….”
“아, 안녕하세요. 생일 축하드려요.”
그 짧은 타이밍에도 나는 그가 왜 사람들이 탐내지 못해 안달하는 인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는 분명 불쾌했지만 또한 매력적이기도 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아름다웠고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특유의 분위기는 묘하게 섹시했다.
나는 낯선 환경에 차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외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외국으로 떠나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거친 언사로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기가 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 역시 나를 동격의 사람으로 인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치는 시선은 무관심했고 그랬기에 더욱 몸은 빳빳해졌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걸러 내는 술래잡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작가님,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혼자 있을 수 있죠?”
“어, 저, 저기.”
설상가상으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던 재경도 자리를 뜨자 나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에 질 좋은 와인이 눈앞에 있다 해도 이런 자리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 가요?”
첫 인사를 제외하고는 내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던 지원이 물었다.
“아, 조금 피곤해서……. 먼저 일어날게요.”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내가 이 화려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역시 잘 만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소리는 그처럼 부드럽지 않았지만.
“앉아요.”
“네?”
“앉아요. 아직 내 생일파티 안 끝났어요.”
그는 어린아이 같은 깔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절부절 미운오리 새끼처럼 어색해하는 나와 달리 그는 주변의 모든 화려함을 더해도 밀리지 않을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아…… 저 술도 잘 못하고 이런 자리는 좀 불편해서요.”
내 말이 뱉어지기 무섭게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훅 하고 풍겨 오는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옆자리에 앉은 꼴이 되어 버렸다.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커다란 음악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말동무라도 해 줘요. 지루하단 말이야.”
“…….”
레스토랑의 vip라운지를 통째로 빌린 사람치고는 할 말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는 정말 지루해 보였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따분하다는 듯 대놓고 하품하는 건 기본이고, 누군가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을 내밀 때면 성의 없는 몸짓으로 받기 일쑤였다. 나는 그렇게 또 몇 분이란 시간을 민망함과 어색함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죄송해요. 저 내일 할 일도 있고 진짜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가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던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좀 전과 달리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라운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내 두 발목을 꽁꽁 동여매는 장면을 마주하고 말았다. 일 년 전, 내게 찬란함과 슬픔 모두를 선물했던 지난 연인이 다른 여자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높은 하이힐이 불안하도록 다리는 후들거렸고, 심장은 얼음처럼 빳빳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에 나는 다시 계단 위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대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안 갔어요?”
“으아악!”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서 있는 내게 누군가 속삭였다. 아까도 맡았던 향수 냄새, 김지원이었다. 내 비명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왜 이렇게 놀라요?”
“아, 아뇨. 그냥.”
“안 가요?”
“…….”
그의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기분이 들었다. 눈에 레이저라도 이식했는지 여간 끈덕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기분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확신하지만, 그는 내가 원하는 질문을 알고 있는 듯했다.
“들어갈래요?”
“……네.”
내가 대답하자 그는 씨익 웃으며 나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라운지에 다시 들어서고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몸이 보라색이 되도록 와인을 삼켰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행복한 듯 웃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연인이 생긴 그가 나쁘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와 나의 헤어짐에는 그의 탓보다 나의 탓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새로운 연인을 보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2. 순간
“작가님,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드세요!”
재경은 처음 보는 현주의 모습에 잔을 뺏어 들고 말했다. 손에서 와인 잔을 뺏긴 현주는 입술을 쭉 내밀고 칭얼거렸고, 곁에 있던 지원은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새 와인 잔을 다시 쥐여 주었다.
“야, 왜 계속 줘. 이러다 작가님 취하면 어떡해.”
재경의 잔소리에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새로운 여자가 궁금할 뿐이었다. 연예계 특성상 늘 보던 인물만 보며 자란 탓에 그는 평범한 사람에게 이상한 호기심이 일었다. 지원에게 있어서 현주는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나 새로웠다. 그녀는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지만 수줍음이 많았다.
새벽 네 시가 넘어가자 사람들은 하나둘 취했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파티의 주인공인 남자와 그의 어깨에 기댄 한 여자만 빼고 다들 이 모든 것이 즐거운 듯 보였다. 한껏 사람들과 웃고 떠들던 재경도 제 코트를 챙기며 지원에게 말했다.
“작가님 내가 데려다 드릴게. 주소는 아니까 매니저 시키면 돼.”
재경이 현주를 향해 손을 뻗자 지원은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재경이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주소 알려 줘. 나 아직 일어나기 싫어.”
일어나도 현주와 같이 일어나겠다는 뜻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제나 독특한 고집을 부리는 그였기에 재경은 순순히 주소를 넘겼다.
“잘 모셔다 드려. 나 잘 보여야 될 사람이야.”
지원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이 라운지 문 밖으로 벗어나자 그는 그녀의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을 곱게 접어 와인 잔 안으로 던졌다. 붉은빛의 와인이 잠식하듯 종이를 적셨다.
“나갈래요?”
“……아뇨.”
“더 마시고 싶어요?”
“아뇨.”
“그럼…….”
나가자는 지원의 말에 현주는 계속해서 싫다고 대답했다. 아까는 제 눈치를 보며 어색해하던 그녀가 지금은 제 품에 안기다시피 한 채 칭얼거리니 꽤 귀여웠다.
“밑에 그 사람 없어요?”
“네?”
“그 사람이요. 여전히 잘생기고 멋있어서 아쉬워 죽겠는 내 전 남친이요.”
지원은 그녀가 복도 끝에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퍼마신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아, 신파는 싫은데.”
그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열심히 속삭였다. 밑에는 그 사람이 없을 거라며, 그 사람은 이미 가고 없으니 어서 나가자고.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단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오랜 연예계 생활을 통해 터득한 음주의 법칙이었다.
‘보는 눈이 많을 땐 술을 먹지 않는다.’
사실 대중이 바라보는 제 이미지가 딱히 모범적이지는 않아서 상관없긴 했지만, 데뷔 17년 차, 서른두 살이 되도록 지키고 있는 생활의 규칙이었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차를 몰았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는지 그녀는 간간이 말을 걸었다.
“어디 가요?”
“내 집이요.”
“아아, 그렇구나아―”
진짜 알아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름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집 앞에 도착하고도 제 발로 차에서 내려 제 발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녀였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쥐고 번호 키를 누르자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디예요?”
“우리 집이요. 들어갈래요?”
그녀는 라운지 복도에서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나중에 발 빼지 마요.”
그는 그녀의 작은 귓바퀴에 속삭이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번호 키의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마치 장엄한 음악이라도 나와야 할 것처럼 무게감 있게 열린 문은 지원과 현주를 집어삼킨 후 다시 닫혔다.
그는 집 안에 들어서자 곧바로 등을 돌려 현주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여태 정신없이 헬렐레하던 그녀의 이성이 딩동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의 양손이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아, 신파는 싫다니까.”
그는 그녀의 반응에 짜증스럽다는 듯 손을 들어 머리를 헝클었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섹시함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주가 마찬가지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내 등과 문이 닿고 말았다. 취기로 오른 체온 때문인지 긴장 탓인지 모를 식은땀이 차가운 문과 닿아 소름이 끼쳤다.
소리라도 질러야 하건만 집 안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그의 분위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양손이 그녀를 가두고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싫어요?”
“…….”
그가 그녀의 목에 나른한 숨소리를 뱉으며 다시 물었다.
“싫어?”
키 차이 때문에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던 현주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차마 싫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입술 때문이었다. 작게 호선을 그린 그의 입술은 분명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를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뇨.”
그의 입술이 장난스럽게 말리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착하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던 그는 이내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정신은 분명 점점 뚜렷해졌다. 아니 감각이 뚜렷해졌다. 문 앞에서의 키스가 그녀의 술기운을 깨웠다면 지금의 키스는 다시 한 번 취기를 불어넣고 있는 듯했다.
현주는 원나잇은 안 된다는 조신한 마음가짐과 달리 그를 향해 몸을 점점 밀착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급하게 달려들자 지원은 푸스스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그녀의 귓바퀴를 깨물며 혀로 살짝살짝 간질였다.
“뭐가 이렇게 급해.”
“…….”
현주는 자신이 더 원하는 것 같은 상황에 민망해졌다. 어색함에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내리고 방어적인 형태를 취했다.
그는 잠시 물러나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지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입술이 쫀득한 소리를 내며 현주의 목에 닿았다. 길고 가는 그녀의 목이 간지러움에 옆으로 휘어지자 이번에도 그의 손은 그녀의 목을 잡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아 두었다.
그의 손길은 현주의 혼을 빼놓기 딱 좋았다. 부드럽게 허리를 간질이는 그의 손길에 절로 신음이 나오고 온몸의 힘이 풀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지원은 현주의 입술을 열렬히 탐하며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진하게도 건드리는 족족 달아오르는 이 여자의 몸을 조금이라도 빨리 탐하고 싶었다.
침대로 미끄러지듯 쓰러진 그녀는 생각보다 육감적인 몸매를 갖고 있었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하며 잘 익은 사과처럼 둥근 곡선을 자랑하는 엉덩이까지. 애초에 가졌던 흥미보다 더 큰 욕망이 생기자 그는 혀끝으로 천천히 입술을 적셨다.
입고 있던 검은색 니트를 벗어 던지자 그의 잘 만들어진 근육들이 드러났다. 지원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선을 쓸었다. 현주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긴장돼?”
“…….”
에필로그
1. 시선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평소엔 시끄러운 것도 싫어하고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지 않던 내가 하필이면 그날, 왜 그곳에 가게 된 걸까.
“작가님! 여기요!”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남자는 모델 출신의 신인 배우, ‘한재경’이다. 저번 달에 마지막 회를 끝으로 유종의 미를 장식한 미니시리즈의 조연이기도 했다. 신인의 패기인지, 타고난 성격인지 살가움의 정석을 보여 주는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다.
처음 대본 리딩 때 전화번호를 가져가더니 드라마가 끝난 지 한 달이 넘도록 수시로 연락하고 있다. 아, 내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이 사람이 아니고 이 사람의 친구인 ‘김지원’이다. 늘 영화만 찍는 사람이라 특별히 만날 일은 없었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 남자를 모를 리 없었다.
남자다운 카리스마와 여성스러운 얼굴선이 제대로 조화를 이룬 그의 얼굴에 여자들은 열광했고, 흠잡을 것 없이 탄탄한 몸매는 못 남자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그는 화려하다는 연예계 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감의 스타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재경 씨,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요. 작가님이 좀 튕기셔야죠.”
넉살 좋은 재경의 투정에 나는 자연스럽게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내 성격을 모를 리 없는 재경은 늘 조용한 분위기에서 나를 찾았지만, 오늘만큼은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것이 영 적응하기 어려웠다.
“오늘 제 친구 생일이에요. 제가 작가님 초대한 건데 괜찮죠?”
“네?”
“지원이요, 김지원. 작가님도 아시죠?”
재경은 커다란 소파에 한껏 파묻혀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누가 오건 말건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표정의 그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나 주지. 재경이 그를 향해 날 소개시켰다.
“이번에 나 출연했던 미니시리즈의 ‘유현주’ 작가님이셔.”
“…….”
“아, 안녕하세요. 생일 축하드려요.”
그 짧은 타이밍에도 나는 그가 왜 사람들이 탐내지 못해 안달하는 인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는 분명 불쾌했지만 또한 매력적이기도 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아름다웠고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특유의 분위기는 묘하게 섹시했다.
나는 낯선 환경에 차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외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외국으로 떠나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거친 언사로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기가 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 역시 나를 동격의 사람으로 인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치는 시선은 무관심했고 그랬기에 더욱 몸은 빳빳해졌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걸러 내는 술래잡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작가님,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혼자 있을 수 있죠?”
“어, 저, 저기.”
설상가상으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던 재경도 자리를 뜨자 나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에 질 좋은 와인이 눈앞에 있다 해도 이런 자리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 가요?”
첫 인사를 제외하고는 내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던 지원이 물었다.
“아, 조금 피곤해서……. 먼저 일어날게요.”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내가 이 화려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역시 잘 만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소리는 그처럼 부드럽지 않았지만.
“앉아요.”
“네?”
“앉아요. 아직 내 생일파티 안 끝났어요.”
그는 어린아이 같은 깔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절부절 미운오리 새끼처럼 어색해하는 나와 달리 그는 주변의 모든 화려함을 더해도 밀리지 않을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아…… 저 술도 잘 못하고 이런 자리는 좀 불편해서요.”
내 말이 뱉어지기 무섭게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훅 하고 풍겨 오는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옆자리에 앉은 꼴이 되어 버렸다.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커다란 음악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말동무라도 해 줘요. 지루하단 말이야.”
“…….”
레스토랑의 vip라운지를 통째로 빌린 사람치고는 할 말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는 정말 지루해 보였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따분하다는 듯 대놓고 하품하는 건 기본이고, 누군가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을 내밀 때면 성의 없는 몸짓으로 받기 일쑤였다. 나는 그렇게 또 몇 분이란 시간을 민망함과 어색함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죄송해요. 저 내일 할 일도 있고 진짜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가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던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좀 전과 달리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라운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내 두 발목을 꽁꽁 동여매는 장면을 마주하고 말았다. 일 년 전, 내게 찬란함과 슬픔 모두를 선물했던 지난 연인이 다른 여자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높은 하이힐이 불안하도록 다리는 후들거렸고, 심장은 얼음처럼 빳빳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에 나는 다시 계단 위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대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안 갔어요?”
“으아악!”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서 있는 내게 누군가 속삭였다. 아까도 맡았던 향수 냄새, 김지원이었다. 내 비명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왜 이렇게 놀라요?”
“아, 아뇨. 그냥.”
“안 가요?”
“…….”
그의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기분이 들었다. 눈에 레이저라도 이식했는지 여간 끈덕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기분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확신하지만, 그는 내가 원하는 질문을 알고 있는 듯했다.
“들어갈래요?”
“……네.”
내가 대답하자 그는 씨익 웃으며 나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라운지에 다시 들어서고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몸이 보라색이 되도록 와인을 삼켰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행복한 듯 웃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연인이 생긴 그가 나쁘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와 나의 헤어짐에는 그의 탓보다 나의 탓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새로운 연인을 보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2. 순간
“작가님,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드세요!”
재경은 처음 보는 현주의 모습에 잔을 뺏어 들고 말했다. 손에서 와인 잔을 뺏긴 현주는 입술을 쭉 내밀고 칭얼거렸고, 곁에 있던 지원은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새 와인 잔을 다시 쥐여 주었다.
“야, 왜 계속 줘. 이러다 작가님 취하면 어떡해.”
재경의 잔소리에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새로운 여자가 궁금할 뿐이었다. 연예계 특성상 늘 보던 인물만 보며 자란 탓에 그는 평범한 사람에게 이상한 호기심이 일었다. 지원에게 있어서 현주는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나 새로웠다. 그녀는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고,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지만 수줍음이 많았다.
새벽 네 시가 넘어가자 사람들은 하나둘 취했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파티의 주인공인 남자와 그의 어깨에 기댄 한 여자만 빼고 다들 이 모든 것이 즐거운 듯 보였다. 한껏 사람들과 웃고 떠들던 재경도 제 코트를 챙기며 지원에게 말했다.
“작가님 내가 데려다 드릴게. 주소는 아니까 매니저 시키면 돼.”
재경이 현주를 향해 손을 뻗자 지원은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재경이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주소 알려 줘. 나 아직 일어나기 싫어.”
일어나도 현주와 같이 일어나겠다는 뜻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제나 독특한 고집을 부리는 그였기에 재경은 순순히 주소를 넘겼다.
“잘 모셔다 드려. 나 잘 보여야 될 사람이야.”
지원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이 라운지 문 밖으로 벗어나자 그는 그녀의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을 곱게 접어 와인 잔 안으로 던졌다. 붉은빛의 와인이 잠식하듯 종이를 적셨다.
“나갈래요?”
“……아뇨.”
“더 마시고 싶어요?”
“아뇨.”
“그럼…….”
나가자는 지원의 말에 현주는 계속해서 싫다고 대답했다. 아까는 제 눈치를 보며 어색해하던 그녀가 지금은 제 품에 안기다시피 한 채 칭얼거리니 꽤 귀여웠다.
“밑에 그 사람 없어요?”
“네?”
“그 사람이요. 여전히 잘생기고 멋있어서 아쉬워 죽겠는 내 전 남친이요.”
지원은 그녀가 복도 끝에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퍼마신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아, 신파는 싫은데.”
그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열심히 속삭였다. 밑에는 그 사람이 없을 거라며, 그 사람은 이미 가고 없으니 어서 나가자고.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단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오랜 연예계 생활을 통해 터득한 음주의 법칙이었다.
‘보는 눈이 많을 땐 술을 먹지 않는다.’
사실 대중이 바라보는 제 이미지가 딱히 모범적이지는 않아서 상관없긴 했지만, 데뷔 17년 차, 서른두 살이 되도록 지키고 있는 생활의 규칙이었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차를 몰았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완전히 취한 건 아니었는지 그녀는 간간이 말을 걸었다.
“어디 가요?”
“내 집이요.”
“아아, 그렇구나아―”
진짜 알아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름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집 앞에 도착하고도 제 발로 차에서 내려 제 발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녀였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쥐고 번호 키를 누르자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디예요?”
“우리 집이요. 들어갈래요?”
그녀는 라운지 복도에서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나중에 발 빼지 마요.”
그는 그녀의 작은 귓바퀴에 속삭이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번호 키의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마치 장엄한 음악이라도 나와야 할 것처럼 무게감 있게 열린 문은 지원과 현주를 집어삼킨 후 다시 닫혔다.
그는 집 안에 들어서자 곧바로 등을 돌려 현주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여태 정신없이 헬렐레하던 그녀의 이성이 딩동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의 양손이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아, 신파는 싫다니까.”
그는 그녀의 반응에 짜증스럽다는 듯 손을 들어 머리를 헝클었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섹시함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주가 마찬가지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내 등과 문이 닿고 말았다. 취기로 오른 체온 때문인지 긴장 탓인지 모를 식은땀이 차가운 문과 닿아 소름이 끼쳤다.
소리라도 질러야 하건만 집 안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그의 분위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양손이 그녀를 가두고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싫어요?”
“…….”
그가 그녀의 목에 나른한 숨소리를 뱉으며 다시 물었다.
“싫어?”
키 차이 때문에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던 현주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차마 싫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입술 때문이었다. 작게 호선을 그린 그의 입술은 분명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를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뇨.”
그의 입술이 장난스럽게 말리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착하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던 그는 이내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정신은 분명 점점 뚜렷해졌다. 아니 감각이 뚜렷해졌다. 문 앞에서의 키스가 그녀의 술기운을 깨웠다면 지금의 키스는 다시 한 번 취기를 불어넣고 있는 듯했다.
현주는 원나잇은 안 된다는 조신한 마음가짐과 달리 그를 향해 몸을 점점 밀착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급하게 달려들자 지원은 푸스스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그녀의 귓바퀴를 깨물며 혀로 살짝살짝 간질였다.
“뭐가 이렇게 급해.”
“…….”
현주는 자신이 더 원하는 것 같은 상황에 민망해졌다. 어색함에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내리고 방어적인 형태를 취했다.
그는 잠시 물러나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지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입술이 쫀득한 소리를 내며 현주의 목에 닿았다. 길고 가는 그녀의 목이 간지러움에 옆으로 휘어지자 이번에도 그의 손은 그녀의 목을 잡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아 두었다.
그의 손길은 현주의 혼을 빼놓기 딱 좋았다. 부드럽게 허리를 간질이는 그의 손길에 절로 신음이 나오고 온몸의 힘이 풀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지원은 현주의 입술을 열렬히 탐하며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진하게도 건드리는 족족 달아오르는 이 여자의 몸을 조금이라도 빨리 탐하고 싶었다.
침대로 미끄러지듯 쓰러진 그녀는 생각보다 육감적인 몸매를 갖고 있었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하며 잘 익은 사과처럼 둥근 곡선을 자랑하는 엉덩이까지. 애초에 가졌던 흥미보다 더 큰 욕망이 생기자 그는 혀끝으로 천천히 입술을 적셨다.
입고 있던 검은색 니트를 벗어 던지자 그의 잘 만들어진 근육들이 드러났다. 지원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선을 쓸었다. 현주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긴장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