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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10.(2)


달칵 달칵 달칵 달……칵.
리드미컬하게 키보드를 누르던 세린의 손이 느려졌다. 잠시 멍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던 세린이 정신을 차린 듯 다시 키보드를 누르기 시작했다.
‘아, 정말.’
조금만 방심해도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남자 때문에 세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야.”
순간 찌릿, 하고 올라오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습관적으로 잘근거렸더니 아랫입술에 상처가 패였다.
“대리님 은근 자학성 있으시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세린이 고개를 들었다. 동혁이 파티션 앞에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입술 다 상처 났잖아요. 뭐 맛있는 거라고 그런 걸 뜯어 먹어요? 손톱도 그러더니.”
동혁이 너스레를 떨며 비타민 캔디 한 통을 세린의 책상 위에 올렸다.
“입이 심심하면 입술 뜯지 말고 이거 먹어요. 몸에도 좋으니까.”
“아…… 고마워요.”
세린이 작은 통을 들어 올리며 웃자 동혁도 마주 웃었다.
“그럼 저 먼저 갑니다. 수고하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요.”
동혁이 싱글거리며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세린의 자리를 지나쳐 입구로 가는 그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기가 지워졌다. 짧은 한숨을 내쉰 동혁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자리에 남은 세린은 둥근 비타민 통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신 빠져 사는 게 남들 눈에도 훤히 보일 정도였나?’
씁쓸한 얼굴로 포장을 벗겨 동그란 비타민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새콤한 맛이 혀를 자극시키자 침이 샘솟았다. 꿀꺽 삼키니 목 안이 까끌하다. 입안에 비타민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앞에 켜진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모두 퇴근한 사무실엔 그녀 혼자 남은 상태였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그 남자 생각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을까 싶어 매일 야근을 감수하는 중인데 입술만 쓰릴 뿐 전혀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이게 맞아. 이게 맞는 거야.”
세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텅 빈 것 같지? 모든 시간이 그 남자와 헤어지던 그 시간에 고스란히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전화가 올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번호를 확인하고 난 뒤에는 맥이 탁 풀렸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렇게나 차갑고 냉정한 사람인데, 그렇게나 잔인한 사람인데 왜…… 왜 기다려. 바보같이.
그 남자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메이는 스스로가 너무나 싫었다. 그날 이후로 꼭 사춘기 소녀처럼 아무 이유 없이 수시로 콧등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꽉 막힌 듯 먹먹해지는 것도 싫었다.
“……안 되겠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으니까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린이 가방을 챙겼다. 서둘러 노트북의 종료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닫고 일어섰다.

회사에서 나오니 한여름의 습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늦은 밤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동안 술에 취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지나갔다. 오피스 빌딩이 모여 있는 곳이라 비슷비슷한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세린은 버스정류장에 선 채로 그 사람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거리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 남자와 비슷한 남자를 찾고 있었다.
대부분은 그보다 작거나, 그보다 뚱뚱하거나…….
어쨌든 그와는 달랐다.
박태수라는 남자는 아무리 많은 남자들 무리에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있는 남자였다. 190센티가 넘는 키도 그랬고, 딱 벌어진 어깨와 역삼각형의 균형 잡힌 상체와 쭉 뻗은 긴 다리가 언제든 시선을 사로잡았었다.
그리고 그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아우라……. 그 카리스마는 다른 사람과 혼동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언제나 강력하게 발산됐다.
그와는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계속 그와 비슷한 남자를 찾고 있던 세린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미쳤구나, 진짜.”
대체 내가 뭘 하는 건지…….
어느새 차오른 눈물로 눈앞이 자욱하게 흐려져 다가오는 버스의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세린이 버스정류장에서 몸을 돌렸다. 뒤쪽으로 비켜서서 벽을 향해 몸을 돌린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종일 시선은 그를 찾고 있었다. 그가 있을 리 없는 장소에서 내내.

버스에서 내린 세린의 눈은 아직 살짝 충혈된 상태였다. 이 상태로는 집에 들어가면 수민이 걱정할 것 같아 일부러 두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얼굴이 나아질 때까지 밤공기를 맞으며 집까지 천천히 걸어갈 생각이었다.
밤이라지만 울고 난 얼굴을 누가 볼까 싶어 일부러 좁은 골목으로 빙 둘러 걸어가고 있는데 으슥한 골목에 깊이 들어갈수록 환청 같은 발걸음 소리가 또 들려왔다.
“……?”
전부터 종종 느꼈던 소리라 무시하고 그냥 걸으려는데 오늘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낡은 가로등이 켜진 골목을 굽이굽이 들어설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또각, 또각.
저벅, 저벅.
천천히 걸으면 느려지고 빨리 걸으면 덩달아 빨라지는 발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에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소리가 불규칙하게 빨라졌다.
누군가가 뒷머리채를 잡아채는 듯한 소름 끼치는 불안감에 세린의 걸음이 뛰다시피 빨라졌다. 그때 타다다닥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달려왔다. 흠칫 놀란 세린이 몸을 홱 돌렸다.
‘……누구?’
눈앞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에 켜진 가로등 불빛이 남자의 풀린 듯한 동공과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비췄다.
세린은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에 주먹을 꽉 쥐고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겁내면 안 돼.’
본능적으로 태연함을 가장한 세린이 자신의 앞에 선 남자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그의 정확히 어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이 세린에게 향했다. 마취약을 맞은 동물처럼 커다래진 까만 동공이 번들거리며 자신을 향하는 순간 세린의 머릿속으로 위험경보가 울렸다. 이 사람…… 위험해.
‘왜 이럴 때 아무도 안 지나가는 거야?’
쥐 죽은 듯 고요한 골목을 원망스럽게 힐끔거리며 머릿속으로 집까지 남은 거리를 재고 있는데 남자가 알아들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그 새끼 여자지?”
“네?”
세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되물었다. 남자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희번뜩한 눈으로 무섭게 노려봤다.
“네가 그 새끼 여자냐고!”
“그게 누군데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세린이 되물었다.
“박태수! 박태수 그 씨발새끼!”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고함을 쳤다. 흠칫 놀란 세린이 숨을 들이켰다. 박태수? 그 남자와 관련 있는 남자인가?
“뭔가 잘못 아신 모양인데 난 아니예요.”
세린이 빠르게 말하고 뒤돌려는데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거세게 움켜잡았다.
“헛소리하지 마. 니들이 호텔에서 나오는 거 봤으니까.”
키들거리며 기분 나쁜 목소리로 웃는 남자에게 어깨를 잡힌 채 뒤돌아보자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세린의 눈이 크게 홉떠졌다.
‘서, 설마……!’
엉망으로 구겨진 신문지에 싸인 시퍼렇게 번뜩이는 식칼이 세린의 눈앞에 드러났다.
“오라질 놈이 시벌, 갈보년 자식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 줬으면 고맙게 여길 것이지, 날, 날 감히 날, 날 골로 보내? 어? 빌어먹을 새끼…….”
세린을 향해 칼을 겨눈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남자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칼날을 본 세린은 온몸에 힘이 풀렸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어깨를 아플 정도로 움켜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 새끼는 죽이고 싶어도 지키는 놈들이 많아서 죽일 수가 없어. 그럼 내가 소중한 걸 빼앗겼듯 그 새끼 것도 빼앗아야지. 안 그래?”
남자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자 세린이 시선을 칼에 둔 채로 말했다.
“난 그 남자의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니까요!”
“크크크큭.”
세린이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제발 누구라도……!
“아악!”
남자가 칼을 치켜들자 세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죽음이라고 생각한 순간 떠오른 건 우습게도 그 남자였다. 이렇게 죽는다면 그 이유는 그 남자 때문인데 왜…… 이 순간 그 남자한테 끝을 말했던 마지막 날이 떠오르는 걸까. 그걸 너무나 후회하고 있었다는 걸 왜 지금 깨닫는 거지?
우습게도 난 그렇게 잔인했던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나 봐.
“어헉!”
“……?”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여러 명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사방이 시끄러워지자 세린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앞에선 몇 명의 남자에게 제압당한 미치광이 남자의 칼이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사이렌이 울리고 좁은 골목에 경찰차가 등장했다.
“안 다치셨습니까?”
세린이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데 그중 한 남자가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다, 당신들은…….”
“회장님 사람이니 안심하십시오. 회장님 지시로 두 달 전부터 정세린 씨를 비밀 경호 중이었습니다.”
두 달 전부터?
그럼 매일같이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고 느꼈던 건 이 사람들이었단 소린가?
세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경호팀장을 바라보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놔! 이거 놓으라고!”
수갑에 포박된 채 경찰차에 태워지면서도 남자가 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는 세린에게 경호팀장이 말했다.
“경찰에 넘기기 위한 확실한 장면을 잡기 위해 시간을 지체해서 놀라게 해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놀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건가요?”
“네. 저 남자가 오늘 세린 씨 주변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흉기를 소지한 걸 파악한 시점에 회장님께 보고가 들어갔으니 아마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 사람이…….
몸에 힘이 풀려 다리가 훅 꺾이자 경호원이 그녀를 황급히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세린이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이마를 짚었다.
“괜찮아요. 좀 놀라서 그럴 뿐이에요.”
그때 골목으로 거칠게 차가 들어왔다. 끼익 소리와 함께 멈춘 차에서 태수가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렸다.
“정세린!”
태수가 세린에게 빠르게 달려왔다.
“태수 씨…….”
태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세린은 바보 같을 정도로 안심이 됐다. 그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경호팀장이 태수에게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피했다.
“괜찮아?”
세린의 어깨를 두 손으로 세게 붙잡은 태수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녀의 몸을 살폈다. 그의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자 세린은 심장이 뜨거워졌다.
이 사람이 날…… 이 정도로 걱정했던 거야?
“난 멀쩡하니 안심해요.”
세린이 슬몃 미소를 지으며 태수를 올려다보자 그가 인상을 구겼다.
“지금 웃음이 나와?”
“당신 그런 얼굴 지독히 안 어울리니까 그렇죠.”
핀잔 주듯 하는 말에 태수가 고함을 쳤다.
“내가 여기까지 어떤……!”
말을 멈춘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태수 씨? 왜 그래요?”
매끈한 이마를 구기고 숨을 몰아쉬던 태수가 세린의 팔을 낚아챘다. 그대로 차로 데려가 세린을 태운 그도 차에 올랐다. 곧바로 최 실장이 시동을 걸었다. 세린은 옆자리에 탄 태수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있는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괜찮아요? 태수 씨.”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세린이 묻자 차를 출발시키려던 최 실장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린과 함께 차에 타고 있을 때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