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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최 비서
1화
프롤로그
착륙 방송이 나오자 수혁은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서류를 간추려서 가방에 넣고, 노트북의 전원도 껐다.
180이 넘는 키에 남자답게 다부진 그의 외모에 비행 내내 일에 몰두하는 그를 흘깃거렸던 승무원들이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승무원들의 그런 상황은 모른 채 수혁은 부지런히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봤다. 점점 커지는 한글로 된 광고판을 보니 정말 귀국을 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간 뒤 15년 만에 한국 땅을 밟게 되는 수혁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조부모님 손에서 자란 수혁은 경영 수업을 위해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유학을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학 졸업 후 현지 법인에서 근무를 했던지라 정말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오게 돼 수혁은 약간 흥분이 되었다. 오랜만에 보게 될 조부모님의 모습 또한 기대되었다.
스튜어디스의 안내에 따라 안전벨트를 하며 착륙을 기다리는 수혁의 마음은 기류에 따라 출렁거리는 비행기처럼 흥분으로 출렁거렸다.
연일 쏟아지는 장맛비에 대한민국 전체는 며칠째 햇빛 한 줌 볼 수 없는 날씨였다. 높은 기온에 습기까지 더해지니 사람들의 불쾌지수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누구 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지내기 위해 최대한 얇고 짧은 옷을 선호했다. 이런 날씨에 정장을 갖춰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천공항 국제 청사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이 되었다.
모두가 짧고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것만 해도 시선이 집중될 판인데 그 무리의 맨 앞에 서서 걸어가는 여자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깔끔하게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에 하얀 피부, 그리고 뒤따르는 사람들과 같은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까지는 여느 오피스 걸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은 여느 여자들과 다른 몸매 때문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전체 식품 중에 다이어트 보조 식품만 매출이 몇 년째 상승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지금은 그야말로 다이어트의 전성시대였다.
마른 여자들도 어떻게든 1킬로그램이라도 더 빼 보겠다고 난리인 판국에 한 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큰 덩치의 여자가 건장한 남자들을 거느리고 로비를 지나가는 모습은 근처의 사람들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이 어떻든 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 무리들은 서둘러 입국장으로 향했다.
수혁이 탄 비행기의 입국 수속을 알리는 글귀가 전광판에 올라오자 서희는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한국에 도착한 수혁이 바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전화 통화와 이메일로 꾸준히 연락을 했지만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 서희는 잔뜩 긴장이 되었다.
보통의 비서들과는 다른 외모에 수혁이 행여 놀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그녀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던 그때 게이트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린 뒤 서희는 작은 서류 가방을 들고 나오는 수혁을 볼 수가 있었다.
180이 넘는 키에 남자답고 다부지게 생긴 수혁이 걸어 나오자 이미 사진으로 그를 알고 있던 비서실 직원들이 순간 긴장을 했다.
옆에 서 있던 박 비서도 수혁을 발견했는지 재빠르게 수혁에게 뛰어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
살짝 목례를 하는 박 비서에게 수혁도 목례를 했다.
“반갑습니다.”
수혁에게 길을 터 준 박 비서가 서희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앞으로 나서 수혁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비서실장 최서희입니다.”
“잘해 봅시다, 최 실장.”
수혁이 선뜻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으레 몸매부터 훑어보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보며 인사를 하는 그가 뜻밖이었는지 서희가 수혁을 잠시 응했다. 그런 뒤 그녀도 수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수혁은 비서진들과 몇 명의 경호원들이 터 주는 길을 따라 수혁은 공항을 나가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몸을 실었다.
본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수혁은 앞좌석에 앉아 있는 서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박 비서라고 소개한 남자 비서가 운전을 하고 서희는 그 옆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서희의 모습에 수혁은 몇 달 전 일을 떠올렸다.
이제 80을 넘기신 할아버지께서 더 이상 회사를 경영하기에는 힘에 부친다는 말로 그에게 한국으로 들어오라 말씀하셨다.
‘수혁아! 이제 내가 힘에 부치는구나. 그러니 들어와. 어차피 네 회사야.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도 안 좋아. 그러니 들어와.’
‘아직 배울 것이 많아요. 할아버지.’
‘들어와. 들어와서 내 옆에서 배워. 내가 일 잘하는 녀석도 붙여 줄 테니깐 군말 말고 들어와. 혁아, 할미 할애비 얼마 안 남았다. 네 할머니 자나 깨나 너 언제 들어오냐고 난리다.’
몸이 편찮아 장거리 여행이 불편한 할머니가 그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수혁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귀국 날짜를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하게 될 업무의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붙여 준 사람이 서희였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일 처리를 똑 부러지게 해내는 모습에 수혁은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틈틈이 그룹 내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 꼼꼼하고 폭넓게 업무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이메일로 주고받는 일은 그가 원하는 서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있지만 전화로 물어보는 일도 그녀는 막힘없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같이 일했던 4개월의 시간 동안 갈수록 그녀가 궁금해지는 수혁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귀국 준비 상황을 말씀드리러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한 김에 그녀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 최 실장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 서희?
‘네.’
- 할애비 오랜 지기의 손녀야.
‘아…….’
- 일 잘하지?
‘네, 놀랐어요.’
- 걔가 한 번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해내는 성격인가 보더라. 학교 다니면서도 장학금 한 번 놓친 적이 없대. 덕분에 제 할아버지는 크게 돈 걱정은 안 했나 봐. 나도 데리고 있어 봤는데 보통이 아니야. 나오거든 맞춰서 잘해 봐.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일에 있어서는 완벽하다는 것을 수혁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신뢰감이 쌓여서일까. 공항에서 처음 본 그녀의 모습에 수혁은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처음 보고 느끼는 거부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눈에 서희는 그저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유능한 비서였다.
함께 일해 본 서희는 두말할 것도 없고 기사 대신 운전을 하고 있는 박 비서의 모습에 수혁은 왠지 모를 든든함을 느꼈다.
“두 사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수혁의 말에 서희가 고개를 돌려 간단한 목례를 했다.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운전을 하고 있던 박 비서도 큰 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그였다.
1장
꽝!
회장실의 문이 부서져라 닫고 들어가는 수혁 때문에 비서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요 며칠 비서들은 수혁의 눈치를 보느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박 비서님, 실장님 언제 나오신대요?”
“글쎄.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 이렇게 오랫동안 휴가를 쓰신 적이 없는데.”
비서실 막내인 제희의 말에 박 비서가 대답을 했다.
“실장님 안 계시니깐 미치겠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일 제대로 안 배우고 뭐했어? 실장님이 워낙 잔소리하는 걸 싫어하시니깐 그동안 그냥 넘어간 거지. 제희 씨나 민경 씨는 이번 기회에 반성 좀 해.”
박 비서의 말에 두 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서희가 휴가를 내고 딱 3일 만에 BS그룹의 모든 일은 마비가 됐다고 봐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처음 서희가 몸이 불편한 것을 이유로 수혁에게 휴가를 신청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사달이 날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은 수혁의 미간에도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가 회사를 물려받은 이후로 3년 동안 서희는 수혁과 거의 한 몸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도 제대로 된 휴식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그녀의 요청에 따라 휴가를 허락했는데 3주도 아니요 3년도 아닌, 단 3일 만에 그녀의 부재를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박 비서를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월급을 받아 갔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커피를 부탁하려고 인터폰으로 손을 뻗던 수혁이 이내 손을 거두었다. 어제 마셨던 커피의 맛이 떠올랐던 것이다. 매일 아침 서희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내려 주던 커피 맛이 아니었기에 또 한 번 짜증이 나는 수혁이었다. 그래도 따뜻한 차 한 잔이 절실해 결국 수혁은 인터폰을 눌렀다.
- 네, 회장님.
“나 녹차 한 잔 부탁하고, 박 대리 들어오라고 해요.”
- 네.
잠시 뒤 박 비서가 녹차가 든 잔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최 실장하고 연락해 봤어요?”
“그렇지 않아도 좀 전에 전화를 했었는데 안 받으시던데요.”
“그래요?”
“네.”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도 전화는 꼭 받는 서희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자 수혁은 의아했다.
“휴가가 이틀 남았죠?”
“네.”
“다시 한 번 더 연락해 보고, 최 실장 출근하면 인사팀에 연락해서 밖의 두 사람 재교육 실시하라고 하세요. 전화나 받고 웹서핑이나 하라고 비싼 월급 주고 일 시키는 거 아닙니다. 그동안 한 일이 없잖아요.”
화가 난 수혁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최 실장 하나 없다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건 그동안은 최 실장이 시키는 것만 했다는 소린데, 그럴 바에는 대학생 아르바이트 쓰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박 대리도 잘한 거 없어요. 최 실장 업무가 얼마나 많은지는 더 잘 알 거 아닙니까. 내가 시키는 일도 양이 만만치 않은데 소소한 것까지 최 실장이 다 신경 써야 됩니까? 다들 입사한 지 몇 년째인데 회의 준비 하나 제대로 못합니까!”
결국 큰 소리로 박 비서에게 호통을 쳤지만 수혁의 기분은 여전히 나빴다.
아침 임직원 회의 때 가장 기본인 회의록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직원들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그것을 회의 내내 숨기려고 무척 노력을 했었다. 수혁의 호통에 박 대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서희가 워낙 일 처리 속도가 빠르고 정확해 그도 상당 부분을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들 한 번의 기회는 더 줄 테니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세요.”
“네, 회장님.”
박 대리가 나가고도 수혁은 화가 풀리지 않아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수혁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박 대리가 비서실로 나오자 두 명의 여비서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회장님이 뭐라고 하세요?”
“일 좀 똑바로 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 가신 실장님을 꼭 중간에 불러야겠어? 그리고 두 사람, 실장님 출근하시면 재교육 받아야 할 거야. 회장님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시니깐 제대로 배워서 와. 알겠어?”
“네에.”
그의 말에 두 비서가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했다. 제희와 민경에게 한 소리를 한 후 박 대리는 절실한 마음으로 다시 서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신호만 갈 뿐 서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서희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짜증이 났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오밤중처럼 어두운 집, 안방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온몸이 젖어 있었다.
3년간 휴일도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일을 해 왔고, 며칠 전부터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아 겸사겸사 수혁에게 휴가를 신청을 했었다. 그러자 수혁도 흔쾌히 허락을 해 줬다.
하지만 가벼운 몸살인 줄 알았던 증상은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었던지 열이 오름과 동시에 식은땀이 온몸을 적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계산이 안 될 정도로 그녀의 의식은 비몽사몽이었다. 그런 의식을 뚫고 끊임없이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한없이 늘어졌던 몸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버릇처럼 침대 옆 탁자를 더듬거려 손끝에 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끝내 전화를 받지 못하고 서희는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화
프롤로그
착륙 방송이 나오자 수혁은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서류를 간추려서 가방에 넣고, 노트북의 전원도 껐다.
180이 넘는 키에 남자답게 다부진 그의 외모에 비행 내내 일에 몰두하는 그를 흘깃거렸던 승무원들이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승무원들의 그런 상황은 모른 채 수혁은 부지런히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봤다. 점점 커지는 한글로 된 광고판을 보니 정말 귀국을 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간 뒤 15년 만에 한국 땅을 밟게 되는 수혁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조부모님 손에서 자란 수혁은 경영 수업을 위해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유학을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학 졸업 후 현지 법인에서 근무를 했던지라 정말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오게 돼 수혁은 약간 흥분이 되었다. 오랜만에 보게 될 조부모님의 모습 또한 기대되었다.
스튜어디스의 안내에 따라 안전벨트를 하며 착륙을 기다리는 수혁의 마음은 기류에 따라 출렁거리는 비행기처럼 흥분으로 출렁거렸다.
연일 쏟아지는 장맛비에 대한민국 전체는 며칠째 햇빛 한 줌 볼 수 없는 날씨였다. 높은 기온에 습기까지 더해지니 사람들의 불쾌지수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누구 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지내기 위해 최대한 얇고 짧은 옷을 선호했다. 이런 날씨에 정장을 갖춰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천공항 국제 청사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이 되었다.
모두가 짧고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것만 해도 시선이 집중될 판인데 그 무리의 맨 앞에 서서 걸어가는 여자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깔끔하게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에 하얀 피부, 그리고 뒤따르는 사람들과 같은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까지는 여느 오피스 걸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은 여느 여자들과 다른 몸매 때문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전체 식품 중에 다이어트 보조 식품만 매출이 몇 년째 상승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지금은 그야말로 다이어트의 전성시대였다.
마른 여자들도 어떻게든 1킬로그램이라도 더 빼 보겠다고 난리인 판국에 한 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큰 덩치의 여자가 건장한 남자들을 거느리고 로비를 지나가는 모습은 근처의 사람들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이 어떻든 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 무리들은 서둘러 입국장으로 향했다.
수혁이 탄 비행기의 입국 수속을 알리는 글귀가 전광판에 올라오자 서희는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한국에 도착한 수혁이 바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전화 통화와 이메일로 꾸준히 연락을 했지만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 서희는 잔뜩 긴장이 되었다.
보통의 비서들과는 다른 외모에 수혁이 행여 놀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그녀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던 그때 게이트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린 뒤 서희는 작은 서류 가방을 들고 나오는 수혁을 볼 수가 있었다.
180이 넘는 키에 남자답고 다부지게 생긴 수혁이 걸어 나오자 이미 사진으로 그를 알고 있던 비서실 직원들이 순간 긴장을 했다.
옆에 서 있던 박 비서도 수혁을 발견했는지 재빠르게 수혁에게 뛰어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
살짝 목례를 하는 박 비서에게 수혁도 목례를 했다.
“반갑습니다.”
수혁에게 길을 터 준 박 비서가 서희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앞으로 나서 수혁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비서실장 최서희입니다.”
“잘해 봅시다, 최 실장.”
수혁이 선뜻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으레 몸매부터 훑어보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보며 인사를 하는 그가 뜻밖이었는지 서희가 수혁을 잠시 응했다. 그런 뒤 그녀도 수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수혁은 비서진들과 몇 명의 경호원들이 터 주는 길을 따라 수혁은 공항을 나가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몸을 실었다.
본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수혁은 앞좌석에 앉아 있는 서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박 비서라고 소개한 남자 비서가 운전을 하고 서희는 그 옆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서희의 모습에 수혁은 몇 달 전 일을 떠올렸다.
이제 80을 넘기신 할아버지께서 더 이상 회사를 경영하기에는 힘에 부친다는 말로 그에게 한국으로 들어오라 말씀하셨다.
‘수혁아! 이제 내가 힘에 부치는구나. 그러니 들어와. 어차피 네 회사야.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도 안 좋아. 그러니 들어와.’
‘아직 배울 것이 많아요. 할아버지.’
‘들어와. 들어와서 내 옆에서 배워. 내가 일 잘하는 녀석도 붙여 줄 테니깐 군말 말고 들어와. 혁아, 할미 할애비 얼마 안 남았다. 네 할머니 자나 깨나 너 언제 들어오냐고 난리다.’
몸이 편찮아 장거리 여행이 불편한 할머니가 그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수혁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귀국 날짜를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하게 될 업무의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붙여 준 사람이 서희였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일 처리를 똑 부러지게 해내는 모습에 수혁은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틈틈이 그룹 내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 꼼꼼하고 폭넓게 업무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이메일로 주고받는 일은 그가 원하는 서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있지만 전화로 물어보는 일도 그녀는 막힘없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같이 일했던 4개월의 시간 동안 갈수록 그녀가 궁금해지는 수혁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귀국 준비 상황을 말씀드리러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한 김에 그녀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 최 실장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 서희?
‘네.’
- 할애비 오랜 지기의 손녀야.
‘아…….’
- 일 잘하지?
‘네, 놀랐어요.’
- 걔가 한 번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해내는 성격인가 보더라. 학교 다니면서도 장학금 한 번 놓친 적이 없대. 덕분에 제 할아버지는 크게 돈 걱정은 안 했나 봐. 나도 데리고 있어 봤는데 보통이 아니야. 나오거든 맞춰서 잘해 봐.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일에 있어서는 완벽하다는 것을 수혁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신뢰감이 쌓여서일까. 공항에서 처음 본 그녀의 모습에 수혁은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처음 보고 느끼는 거부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눈에 서희는 그저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유능한 비서였다.
함께 일해 본 서희는 두말할 것도 없고 기사 대신 운전을 하고 있는 박 비서의 모습에 수혁은 왠지 모를 든든함을 느꼈다.
“두 사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수혁의 말에 서희가 고개를 돌려 간단한 목례를 했다.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운전을 하고 있던 박 비서도 큰 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그였다.
1장
꽝!
회장실의 문이 부서져라 닫고 들어가는 수혁 때문에 비서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요 며칠 비서들은 수혁의 눈치를 보느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박 비서님, 실장님 언제 나오신대요?”
“글쎄.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봐. 이렇게 오랫동안 휴가를 쓰신 적이 없는데.”
비서실 막내인 제희의 말에 박 비서가 대답을 했다.
“실장님 안 계시니깐 미치겠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일 제대로 안 배우고 뭐했어? 실장님이 워낙 잔소리하는 걸 싫어하시니깐 그동안 그냥 넘어간 거지. 제희 씨나 민경 씨는 이번 기회에 반성 좀 해.”
박 비서의 말에 두 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서희가 휴가를 내고 딱 3일 만에 BS그룹의 모든 일은 마비가 됐다고 봐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처음 서희가 몸이 불편한 것을 이유로 수혁에게 휴가를 신청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사달이 날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은 수혁의 미간에도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가 회사를 물려받은 이후로 3년 동안 서희는 수혁과 거의 한 몸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도 제대로 된 휴식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그녀의 요청에 따라 휴가를 허락했는데 3주도 아니요 3년도 아닌, 단 3일 만에 그녀의 부재를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박 비서를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월급을 받아 갔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커피를 부탁하려고 인터폰으로 손을 뻗던 수혁이 이내 손을 거두었다. 어제 마셨던 커피의 맛이 떠올랐던 것이다. 매일 아침 서희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내려 주던 커피 맛이 아니었기에 또 한 번 짜증이 나는 수혁이었다. 그래도 따뜻한 차 한 잔이 절실해 결국 수혁은 인터폰을 눌렀다.
- 네, 회장님.
“나 녹차 한 잔 부탁하고, 박 대리 들어오라고 해요.”
- 네.
잠시 뒤 박 비서가 녹차가 든 잔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최 실장하고 연락해 봤어요?”
“그렇지 않아도 좀 전에 전화를 했었는데 안 받으시던데요.”
“그래요?”
“네.”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도 전화는 꼭 받는 서희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자 수혁은 의아했다.
“휴가가 이틀 남았죠?”
“네.”
“다시 한 번 더 연락해 보고, 최 실장 출근하면 인사팀에 연락해서 밖의 두 사람 재교육 실시하라고 하세요. 전화나 받고 웹서핑이나 하라고 비싼 월급 주고 일 시키는 거 아닙니다. 그동안 한 일이 없잖아요.”
화가 난 수혁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최 실장 하나 없다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건 그동안은 최 실장이 시키는 것만 했다는 소린데, 그럴 바에는 대학생 아르바이트 쓰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박 대리도 잘한 거 없어요. 최 실장 업무가 얼마나 많은지는 더 잘 알 거 아닙니까. 내가 시키는 일도 양이 만만치 않은데 소소한 것까지 최 실장이 다 신경 써야 됩니까? 다들 입사한 지 몇 년째인데 회의 준비 하나 제대로 못합니까!”
결국 큰 소리로 박 비서에게 호통을 쳤지만 수혁의 기분은 여전히 나빴다.
아침 임직원 회의 때 가장 기본인 회의록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직원들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그것을 회의 내내 숨기려고 무척 노력을 했었다. 수혁의 호통에 박 대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서희가 워낙 일 처리 속도가 빠르고 정확해 그도 상당 부분을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들 한 번의 기회는 더 줄 테니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세요.”
“네, 회장님.”
박 대리가 나가고도 수혁은 화가 풀리지 않아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수혁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박 대리가 비서실로 나오자 두 명의 여비서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회장님이 뭐라고 하세요?”
“일 좀 똑바로 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 가신 실장님을 꼭 중간에 불러야겠어? 그리고 두 사람, 실장님 출근하시면 재교육 받아야 할 거야. 회장님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시니깐 제대로 배워서 와. 알겠어?”
“네에.”
그의 말에 두 비서가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했다. 제희와 민경에게 한 소리를 한 후 박 대리는 절실한 마음으로 다시 서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신호만 갈 뿐 서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서희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짜증이 났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오밤중처럼 어두운 집, 안방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온몸이 젖어 있었다.
3년간 휴일도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일을 해 왔고, 며칠 전부터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아 겸사겸사 수혁에게 휴가를 신청을 했었다. 그러자 수혁도 흔쾌히 허락을 해 줬다.
하지만 가벼운 몸살인 줄 알았던 증상은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이었던지 열이 오름과 동시에 식은땀이 온몸을 적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계산이 안 될 정도로 그녀의 의식은 비몽사몽이었다. 그런 의식을 뚫고 끊임없이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한없이 늘어졌던 몸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버릇처럼 침대 옆 탁자를 더듬거려 손끝에 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끝내 전화를 받지 못하고 서희는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