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3화


놀아 본 사람이 논다고 일에만 매달려 있던 서희가 편안히 쉬는 것에 적응을 못해 정말 몸살 아닌 몸살이 오려고 할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노부부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서희가 벌떡 일어났다.
“회장님.”
“아냐아냐. 누워 있어.”
일어나는 서희를 말리며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았다.
그들은 서희 할아버지의 친우이자 수혁의 할아버지인 임 회장 내외였다. 서희의 입원 소식을 김 박사로부터 전해 듣고는 열 일 제쳐 두고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다.
“괜찮아?”
“네. 큰 병도 아닌데 왜 오셨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사람이 아프면 얼굴 디미는 게 당연하지. 그래, 좀 쉬면 괜찮은 거야?”
“네, 회장님.”
“인석아. 할애비보고 회장님이 뭐야.”
임 회장의 말에 서희가 웃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황 여사가 잡았다.
“일만 하지 말고 네 몸도 챙겨 가면서 해야지. 아프면 너만 서글퍼.”
“네.”
“다 큰 녀석이 영양 결핍이 뭐냐. 뭐든 한 가지만 먹는 거 안 좋다고 했지? 내 이것저것 골고루 해서 보낼 테니깐 챙겨서 먹어.”
서희의 손을 쓰다듬던 황 여사가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쓸어 내렸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서희를 보니 마음이 짠해지는 그녀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기는. 괜찮은 애가 이 꼴로 누워 있어?”
자분자분 나무라는 황 여사의 말에 서희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서희야.”
“네.”
“누누이 말하지만 네 잘못 아니다. 그러니 이젠 좀 밝게 살아도 돼. 언제까지 벌주며 살 거냐. 이건 자기 학대야. 너 잘 먹고 잘 사는 게 먼저 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임 회장과 황 여사는 힘없이 대답하는 서희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은 저렇게 하지만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집에서 해 온 죽과 간식거리를 간병인에게 건넨 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 걱정하지 말고 쉴 때 푹 쉬어. 회사 일 하다 쓰러진 사람이니 당연히 회사에서 해결해야지.”
“아니에요.”
“아니긴. 우린 간다. 쉬어라.”
배웅하려고 일어나려는 서희를 눕혀 놓고 병실을 나서던 임 회장 내외는 때마침 퇴근길에 병원에 들른 수혁과 마주쳤다.
“어! 할아버지.”
“그래, 수혁이 왔구나. 퇴근하는 길이냐?”
“네.”
“서희 좀 작작 부려 먹어. 얼마나 부려 먹었길래 애가 입원을 해!”
임 회장의 나무람에 수혁이 멋쩍게 웃었다.
“웃지만 말고 잘해.”
“알았어요. 집으로 가실 거예요?”
“네 할머니 좋아하는 오리고기 먹고 들어갈 거야.”
“네. 맛있게 드세요.”
“너도 저녁 굶지 말고.”
“네.”
임 회장 부부를 배웅하고 난 뒤 수혁이 병실로 들어갔다. 문 열리는 소리에 서희가 고개를 들자 병실로 들어서는 수혁을 발견했다.
“회장님!”
“최 실장, 좀 괜찮습니까?”
“네.”
수혁의 모습을 본 간병인이 서희에게 말했다.
“아가씨, 나 잠시 나갔다 와도 될까? 아들이 병원 앞으로 온다고 해서.”
간병인의 말에 수혁이 대답했다.
“다녀오십시오.”
“고맙습니다.”
부부가 돌아가고 간병인도 잠시 외출을 한 뒤 병실에는 수혁과 서희 두 사람만 남았다. 회사에서는 일 때문에 할 말이 많았었는데 일을 빼고 나니 왠지 서먹한 두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서희는 수혁이 자신을 업고 왔다는 김 박사의 말이 떠올라 고개도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희를 수혁이 찬찬히 살펴봤다. 항상 하나로 틀어 올리던 머리는 등 뒤로 가지런히 내려와 있었고 검정색의 딱딱한 정장만 입던 것과 다르게 환자복이긴 하지만 하얀색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평소의 서희와는 다르게 보이게 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김 박사님 말씀이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하니 회사 걱정 하지 말고 쉬어요.”
“그러면 일이 많이 밀릴 텐데…….”
“다른 사람들도 이참에 일 좀 배워야죠. 그동안 최 실장이 맡아 온 일이 너무 많았어요. 그렇게 하는 것 없이 사무실에 자리만 채우고 있을 것 같으면 차라리 출근 안 하는 게 나아요. 그리고 최 실장도 너무 혼자 일을 끌어안고 있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좀 시키고 해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죠?”
“네, 회장님.”
아파서인지 평소보다 기운이 없는 모습에 수혁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계속 앉아 있으면 서희가 쉬지 못할 것 같아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요. 내가 있으면 쉬지도 못하겠네.”
수혁이 일어나자 서희도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니. 그냥 있어요. 최 실장 환자예요.”
“네.”
수혁의 만류로 앉아서 목례를 하는 그때 머리카락이 스르륵 앞으로 쏟아지며 서희의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수혁의 눈에 와 닿았다.

옛말에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수혁도 이 여유를 느긋하게 즐기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 주에 서희가 출근을 하게 되면 또다시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도 쉴 수 있을 때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간단하게 샤워만 했을 텐데 오늘은 퇴근 준비를 하는 도우미에게 욕조에 물을 받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의 부탁대로 욕조에 물을 받아 놓은 도우미가 퇴근을 하자 수혁은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마시는 위스키를 잔에 붓고 욕실로 가져갔다.
욕실 앞 파우치 룸에서 옷을 전부 다 벗은 뒤 술잔을 다시 집어 들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감싸 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음.”
가져온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그가 욕조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기대었다.
그동안 피로에 지친 몸이 나른하게 풀어지며 눈이 저절로 감겼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있던 수혁의 머릿속에 좀 전에 봤던 서희의 하얀 목덜미가 떠올랐다. 항상 단정하게 올림머리를 하고 있어 늘 보던 그녀의 목덜미가 왜 오늘 그의 눈에 띄었는지 수혁도 모를 일이었다.
그 순간 신체의 한 부분이 반응을 하자 놀란 수혁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 여꺊?있소.’ 하며 존재감을 나타내는 분신을 쳐다보며 수혁은 기가 차 실소를 터뜨렸다. 아무리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봐도 반응이 없던 놈이 서희의 목덜미에 반응을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야, 인마! 번지수가 틀렸어.”
수혁이 타박을 해 보지만 수그러들 기세가 아닌 분신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밤, 수혁은 몇 해 만에 가장 긴 밤을 보냈다.

모두에게 교훈을 줬던 서희의 휴가가 끝나고 그녀의 출근 날이 되었다. 그것을 상기시킨 수혁은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를 띠었다.
분신이 자신의 의지를 반하고 폭동을 일으킨 이후로 수혁은 서희의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 그저 유능한 직원이라고 생각한 서희에게 자신의 몸이 반응을 했다는 것에 혼란스러워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 대리를 비롯한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한 잔 부탁해요.”
“네.”
툭 던지듯 커피를 부탁한 수혁은 얼른 회장실로 들어가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곁눈질로 서희가 평소의 자기 자리에서 본인을 맞이하는 모습에 수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혁의 주문에 서희가 내려 준 커피를 들고 들어갔던 민경이 그 미소를 목격했다. 저도 모르게 보게 된 수혁의 미소에 놀란 그녀가 사무실에서 급하게 나왔다.
“세상에. 회장님이 이 주 만에 웃으셨어요.”
그동안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비서실 직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오늘부터 일주일씩 교대로 두 사람은 인사팀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가야 하는 현실에 의미가 다른 한숨이 나왔다.
“대리님, 진짜 가야 돼요?”
민경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회장님 한 번 하신 말씀 번복 없는 거 잘 알잖아.”
“휴.”
민경과 제희는 별달리 항의할 방도도 없고,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박 대리도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을 타일렀다.
“가서 제대로 다시 배워 와. 솔직히 우리들 그동안 너무 나태했어. 사실이잖아. 그래도 사직서 제출 안 하고 재교육에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네…….”
민경이 먼저 인사팀으로 내려가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한 회장실은 그야말로 전쟁터로 돌변했다. 서희가 입원해 있는 동안 미뤄졌던 일들이 한꺼번에 진행이 되면서 남은 두 사람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평소 서희가 시키는 간단한 심부름이나 복사 정도만 해 오던 제희가 일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허덕였다. 그리고 산처럼 쌓인 결재 서류들을 분류하다가 그동안 이 많은 일을 서희 혼자 해 왔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더 서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기. 실장님.”
제희가 조심스럽게 서희를 불렀다.
“응?”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희가 대답했다.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혼자 하셨어요?”
제희의 말에 서희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얼굴을 마주 봤다.
“조금만 신경 쓰면 다 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그동안 복사시킨 서류, 조금만 관심 가지고 봤으면 어느 정도 흐름은 알 수 있었어. 회장님은 닥치는 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야.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미팅하는 부서 순서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럼 준비하는 것도 쉬워지고, 자세하게 내용은 몰라도 최근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 정도는 알수 있게 돼.”
서희의 말에 제희는 더 이상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복사를 부탁하면 열심히 복사만 했었지 복사가 끝나는 동안 서류 한 장을 안 읽어 봤었다. 시키는 대로만 일을 해 온 게 사실이었다. 꼼꼼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느낀 제희는 조용히 서류를 훑어봤다.
수혁의 사무실도 비서실과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바빴다. 수혁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본 사람은 없지만 그날 밤, 서희를 상대로 자신이 한 행동에 줄곧 그녀를 의식적으로 피해 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안 보고 살 수는 없는 일. 보고를 위해 사무실에 들어오는 서희를 상대할 때마다 수혁은 난감했다. 평소에는 그냥 넘겼을 일인데 사소한 것 하나까지 그녀에게 신경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좀 전에 서류를 건네는 그녀의 손가락을 봤을 때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동통하지만 생각보다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과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무심코 쳐다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속으로 많이 놀랐다. 그저 유능한 비서라고만 생각해 왔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며칠 전에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양복을 털어 주는 손길에 움찔했다. 속으로는 그냥 여직원일 뿐이라고 다짐을 해도 자신도 모르게 서희에게 관심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픈 사람에게 느끼는 동정심이라고 스스로 몇 번을 되뇌고 다짐을 해도 어느샌가 본인도 모르게 서희의 햐얀 목덜미가 생각이 나 수혁은 몇 번이나 냉수마찰을 해야만 했다.



2장


수혁의 처지는 아랑곳없이 하루하루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동안 수혁은 무슨 관음증 환자라도 된 것처럼 시간만 나면 서희를 흘깃거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희는 그저 제 할 일만 할 뿐이었다.
회장이 되고 3년 동안 불도저처럼 일을 추진하던 수혁이 서희의 병원행을 계기로 일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눈앞에 주어진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했었다면 지금은 조금 덜 급한 일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방식을 바꾼 것이다.
그렇게 하자 직원들도 편해졌지만 그도 한결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모처럼 그를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를 위해 일찍 퇴근을 하였다. 그리고 본가로 향하는 길에 꽃집에 들러 황 여사가 좋아하는 장미꽃을 한 다발 사서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드디어 본가에 도착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서 와. 고생 많지?”
“괜찮아요. 그런데 뭘 하셨길래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요?”
“너 좋아하는 삼계탕 했다. 얼른 씻고 와.”
오랜만에 세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땀을 흘리면서도 잘 먹는 손자의 모습에 황 여사는 마냥 기분이 좋아 수혁의 앞으로 반찬을 가져다 놓았다.
“어서 먹어.”
“너 먹이려고 네 할머니가 불 앞에 서서 직접 삶았어. 많이 먹어.”
“네.”
마주 앉아 손자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임 회장이 아내에게 말했다.
“한 마리는 잘 싸 놨어?”
“네. 반찬도 이것저것 해서 잘 싸 놨어요.”
황 여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수혁이, 나중에 갈 때 서희 집에 좀 들러라.”
“최 실장 집에요?”
“그래. 가는 길에 할머니가 싸 주시는 음식 가져다주고 가.”
할아버지의 말씀에 수혁이 그동안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할아버지 최 실장 말이에요. 일하는 것 보면 똑소리 나는데 자기 관리는 왜 안 하는 걸까요?”
수혁의 말에 황 여사가 수저를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휴, 그러게. 그래서 할미도 속상해. 살만 빼면 얼마나 예쁘냐. 아기 땐 꼭 인형 같았어.”
“어렸을 땐 날씬했었나 보네요?”
황 여사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살이 찐 거예요?”
“그게 말이다.”
황 여사가 말을 꺼내다 말고 임 회장을 쳐다봤다. 아내의 눈길에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던 임 회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서희가 어릴 때 좀 아팠다.”
“아파요?”
“그래. 그래서 병원에 한참을 다녔어.”
임 회장도 수저를 놓았다.
“그게 서희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니깐 7살 때구나. 서희 애비가 산을 타는 걸 좋아했어. 그 뭐냐. 등산 동아리? 뭐 거기서 서희 엄마를 만났나 보더라. 사고가 나던 날도 비가 많이 온 뒤라 산에 가는 걸 서희 할아버지가 말렸어. 그런데 기어코 서희까지 데리고 등산을 간 모양이더라. 어른들도 비 온 뒤에 산 타는 게 힘든데 이제 7살짜리가 잘 타면 얼마나 잘 탄다고……. 아휴! 서희가 그때 다리를 헛짚어서 미끄러졌는데 부부가 서희를 붙잡으려다 실족사 했다. 그 어린 것이 눈앞에서 제 부모가 그리된 것을 보고는 한동안 정신을 놨었어. 제 할아버지가 속을 엄청 끓였지. 그때 서희가 아무것도 먹으려고 하질 않았었다.”
말을 하면서도 황 여사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 어린것이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곡기를 끊을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속상한 일이었다. 잠시 말을 끊고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인 황 여사가 말을 이었다.
“휴, 너무 안 먹어서 제 할아버지가 같이 죽자고 난리를 치니깐 먹긴 먹는데 눈앞에 있는 거 하나만 먹는 거야. 그러니 영양 불균형에 살만 찌는 거야. 정신과 치료도 받아 보고 했는데 결국 본인이 의욕이 없어서 치료가 소용이 없었지. 그래도 그렇게라도 먹는 게 어디냐고 제 할아버지는 좋아했는데. 휴! 뭐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구나.”
할머니의 말씀에 수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자기 관리를 못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지 서희에게 그런 아픔이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너도 서희 좀 챙겨.”
“네. 알았어요.”
수혁 자신도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셔 혼자라는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채워 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자신의 허전함은 그녀에게 견줄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의 오붓한 시간을 뒤로하고 수혁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에게 황 여사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수고스럽더라도 서희 가져다줘. 삼계탕하고 반찬이야.”
“네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