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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연지 입사 2년 차 - 어느 날 갑자기 사장님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퇴근길 버스에서 내린 연지는 상가 1층의 신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응, 연지 왔구나.”
9년 전, 연지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지금의 동네로 이사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손녀딸을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서울 근교로 집을 옮긴 것이다.
동네 입구의 신발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것을 아신 할머니는 20년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금세 그녀와 절친이 되셨다. 손녀딸이 늦게까지 공부하고 오는 날에는 버스 정류장이 내다보이는 그 신발 가게에서 수다를 떨며 기다리곤 하셔서 주인아주머니를 연지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어째 지난번 봤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진 것 같네. 직장 일이 많이 힘든가 봐?”
얌전하고 예쁘장했던 여고생이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단다. 그 집안 어르신들의 손녀딸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손녀딸도 요즘 큰애기들 같지 않게 할머니 할아버지께 잘해서 기특하다 생각한다.
“예. 업무가 바뀌는 바람에 좀 바빴어요.”
사회 초년생, 입사 1년 만에 사장의 비서로 발탁되었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직급이 오른 것인데 비서실 직원들은 축하는커녕 그녀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위로해 주었다.
이유를 아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전의 업무비서가 사표를 낸 후 무단결근하는 바람에 인수인계는 꿈도 못 꾸고 하나부터 열까지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배워야 했던 것이다. 두통은 기본으로 달고 살았고, 여차하면 체하기까지 했다. 한 달 사이에 몸무게가 3kg이나 빠졌으니 수명은 3년쯤 단축되었을 것이다.
두 달째로 접어들면서 호통과 꾸지람 듣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석 달째엔 무뚝뚝하지만 ‘수고했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지난달엔 생각지도 못한 특별 보너스까지 받아 할머니 할아버지를 고급 레스토랑에 모시고 가 기분 좋게 외식을 했다.
파란만장했던 지난 5개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포옥, 한숨이 흐른다.
“……할머니 신으실 고무신 좀 사려고요.”
“응, 고무신은 이짝에 있어. ……골라 봐. 할머니가 특별히 찾으시는 게 있음 말하고.”
주인아주머니가 가르쳐 준 선반을 뒤적이는 연지의 얼굴이 시무룩하다.
“좋은 신발도 많은데 꼭 고무신만 신으신대요.”
“고무신이 얼매나 편한지 몰라 그런 말하는 게야. 요즘도 고무신만 신는 노인네들 많아.”
그녀는 할머니가 즐겨 신으시는 하얀 고무신과 할아버지 고무신까지 두 켤레를 골랐다. 나란히 들고 번갈아 보다가 할머니 고무신은 빨간 꽃들이 예쁘게 핀 것으로 바꿨다. 야해서 싫다고 하시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더 예쁜 게 없나 다른 것을 뒤적인다.
“그 꽃무늬 이쁘잖어. 제일 잘 나가는 것이여, 고것이.”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힘입어 꽃무늬 고무신으로 결정하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넸다.
기다리고 섰는데 문득 사장이 집무실에서 신는 슬리퍼가 떠오른다. 굽이 닳고 실밥이 터져 너덜거리는…….
거스름돈과 고무신이 담긴 비닐봉지를 받아들고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까지 한 그녀의 걸음이 가게 문 앞에서 다시 멈췄다.
“아주머니, 사무실에서 신기 좋은 남자 슬리퍼 있을까요?”
“것도 많이 있지. 나이가 몇인데?”
“서른……한 살이요.”
조금 전과 달리 주저주저하는 연지의 모습에 주인아주머니가 빙그레 웃는다.
“남자 친구?”
“예에? ……아, 아니에요.”
“얼굴에 다 쓰여 있구먼. 그럴 나이도 됐지 뭘.”
짓궂게 놀린 주인아주머니가 이번엔 반대편 벽으로 옮겨 간다. 가게 사방으로 빼곡히 박혀 있는 신은 족히 수천 켤레가 될 것 같은데 원하는 것을 말만 하면 척척 나온다.
남자 슬리퍼를 종류별로 꺼내 놓던 주인아주머니가 그중 하나를 내밀었다.
“이 지압 쓰레빠가 요번에 새로 들어온 건데 짱짱하니 아주 좋아. 모냥도 젊은 사람들 신기에 무난하게 빠졌고.”
“신어 봐도 돼요?”
“당연히 되지. 맘껏 신어 봐.”
연지는 슬리퍼를 내려놓고 발을 넣어 보았다. 남자 신이라곤 할아버지 고무신 밖에 사 본 적 없어 어떤 걸 골라야 하는지 망설여진다.
“바닥이 좀 불편한 것 같은데…… 원래 이런 건가요?”
“가운데 불룩 튀어나온 고것 땜시 좀 아프지만, 거를 팍팍 눌러 주면 남자한테 특히 좋대. 그래서 특허까지 받은 거래.”
“남자한테요?”
“……잘 알잖여.”
그녀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 주인아주머니가 호들갑스럽게 웃어 젖힌다.
뒤늦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연지는 귓불에 열감을 느끼며 얼른 다른 것을 손짓했다.
“저것도 좀 볼게요.”
“그것도 괜찮어. 우레탄이라 가볍고 푹신하고.”
대충 신는 슬리퍼인데도 직접 신어 보고 요리조리 살피는 모습에 참 꼼꼼한 아가씨구나 생각하던 주인아주머니는 가게 밖에서 기웃거리는 손님을 발견하곤 잽싸게 쫓아 나간다.
“……예! 어서 오세요.”
그녀가 아이 운동화를 찾는 손님을 상대하는 동안 연지는 진지한 얼굴로 여러 슬리퍼를 들었다 놨다 한다.
잠시 후, 가게를 나오는 연지의 비닐봉지엔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무신과 남자에게 특히 좋다는 최신상 지압용 슬리퍼가 담겨 있었다.

***

언제나처럼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출근한 연지는 사장 집무실과 회의실을 정리하고 동료들을 위해 커피를 내려놓았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가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을 한 번 더 돌아보곤 쇼핑백을 들고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려던 손이 주춤한다.
뒤늦게 사장의 낡은 슬리퍼가 선물 받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귀한 사람에게 받은 선물이라 일부러 닳도록 신는 것일지 모른다.
혹여 사연이 없는 물건이라도 버릴 땐 주인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이 순서다.
집무실의 사무용품이나 소모품 따위를 새것으로 바꿔 놓는 일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슬리퍼도 새로 샀는데 상황이 복잡해졌다.
뭐라고 하면서 줘야 하나. 지시하지 않은 일을 한 건 처음이라 사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고맙다는 말은 기대도 안 하고,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면박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냥 주지 말까? 슬리퍼를 책상 밑에 놔두고 잠깐씩 구두 벗은 발을 올려놓는 용도로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이게 뭐라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장의 낡은 슬리퍼가 왜 마음에 걸려 새로 사 오기까지 했는지. 안 해도 될 고민을 만들어 하고 있는 연지는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쇼핑백만 만지작거린다.
“……뭐?”
굵은 목소리에 화들짝 돌아섰다.
한 걸음 거리에 버티고 선 사장을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시커먼 바윗덩어리가 눈앞에 쿵,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장의 살벌한 분위기는 5개월을 겪어도 도무지 적응되질 않는다.
아침부터 집무실 문에 머리를 박고 있던 자신을 달리 변명할 길이 없다,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사장님 슬리퍼가 낡은 것 같아 새로 구입했습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 시선이 그녀가 내민 쇼핑백에서 멈춰진다.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동안에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지, 시장 물건이라고 싫어할지 모르겠다, 백화점에서 살 걸 그랬나, 혹시 남자 슬리퍼는 사이즈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연지의 머리를 스친다.
망설임이 무색하게 사장은 그녀를 그대로 지나쳤고, 등 뒤에서 집무실 문이 쾅! 닫혔다. 스쳐 지나며 가볍게 인 바람마저 냉랭하다.
자리로 돌아온 연지는 쇼핑백을 책상 안쪽에 얌전히 세워 놓았다.
역시 주제넘은 짓이었다. 이런 일은 하는 게 아니었다.

“……대회의실 세팅은 다 되었나?”
점심시간이 끝나 자리로 돌아와 앉은 연지의 곁을 사장이 양치 컵을 든 채 지나친다. 오전에 설명회 준비로 바빴던 그는 점심을 지하 매점에서 대충 때운 것 같다.
“예. 정 실장이…….”
사장의 뒤에 대고 대답하던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가 집무실로 들어가 버리자 서둘러 책상 밑에 넣어 놨던 쇼핑백 안을 확인한다.
“나눠 줄 자료는?”
“……예! 참석 인원에 맞게 준비했습니다.”
사장이 다시 나온 줄 모르고 있다가 발딱 일어났다.
“들고 따라와.”
“예.”
급하게 한 무더기의 프린트물을 안아 든 연지가 사무실을 나가는 사장의 뒤를 쫓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사장의 발밑에서 직직 끌리는 슬리퍼를 다시 확인했다. 그녀가 사 온, 남자에게 특히 좋아 특허까지 받았다는 지압용 슬리퍼가 맞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리둥절한 상황에 연지는 사장의 뒤통수와 발에 끌리는 슬리퍼를 번갈아 본다.
“아…… 씨, 왜 이렇게 아픈 거야!”
갑자기 버럭 한 사장이 돌아서는 바람에 대여섯 걸음 뒤에서 따르던 그녀도 덩달아 멈춰야 했다.
험악한 시선이 동그래진 눈동자로 날아와 박힌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사장은 당장에라도 슬리퍼를 벗어 창밖으로 던져 버릴 기세다.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라 오가는 이 하나 없는 복도에서 홀로 사장을 마주하게 된 연지는 꼴깍 침을 삼켰다. 그의 성질을 돋우지 않으려면 당황하거나 더듬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터득한 후라 오그라드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는다.
“특허받은 거랍니다. ……몸에도 좋고.”
콧구멍이 벌렁거릴 정도로 씩씩대던 문후는 홍 비서의 차분한 응대에 부드득 이를 갈아 물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에서 시작된 통증이 척추까지 찔러 댔다. 참아 보려 해도 이제는 뒷덜미까지 쭈뼛거려 아주 미쳐 버리겠다.
“……경비 처리했어?”
연지는 눈만 깜빡거리다 뒤늦게 슬리퍼 구입비에 대해 묻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니요.”
“경비 처리해.”
그럴 생각이 없어 영수증도 안 받았지만, 일단…….
“예.”
“다시는 이런 거 사 오지 마.”
“예, 사장님.”
다짐을 받고서야 돌아선 사장이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15층 대회의실에 도착해 설명회 준비를 점검하는 중에도 불평은 계속되었다. 드럽게 아프다 툴툴거리면서도 벗을 생각은 않는다. 연지는 그런 사장을 졸졸 따라다니며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즐겁게 콩닥거린다.


홍연지 입사 4년 차 - 여자의 육감은 정확합니다



채은이 나타나자 기다리고 섰던 최 비서가 대형 세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문후 씨?”
공항에서 그곳까지 오는 동안 잠들어 있던 남자는 감은 눈꺼풀을 슬쩍 들어 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 손채은에게 그런 하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보름만의 데이트에 들뜬 그녀는 개의치 않고 차에 올랐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채은은 길게 늘어져 있는 문후의 다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구겨진 와이셔츠에 느슨하게 풀린 넥타이.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잠이 든 남자는 무척이나 섹시했다. 허벅지의 탄탄한 근육까지 만져지자 그녀의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저녁이고 뭐고 당장 침대로 직행했으면 하는 마음에 허벅지를 지그시 쥐어 봤지만 깊게 잠들었는지 미동도 없다. 더 대담해진 손이 허벅지 안쪽을 더듬어 올라간다.
“……밥부터 먹자. 배고파.”
시큰둥한 반응에 손을 거둬들인 채은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많이 바빴나 봐?”
“……응.”
눈은 뜨지 않고 대답만 하는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다.
배도 고프고 섹스도 고프겠지. 그러니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화한 것이겠지.
근사한 식사를 즐기고 밤을 뜨겁게 지새울 텐데 조급해할 필요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한 번 불붙으면 끝장을 보는 남자니까.
곯아떨어진 줄 알았던 문후가 휴대폰이 울리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긁어 넘기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얼굴도 훑어 댔다.
그의 통화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채은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전화가 끊기자 눈매가 신경질적으로 치떠진다.
“홍 비서?”
“음…….”
“도대체…… 둘이 뭐야?”
휴대폰을 던져 놓은 그가 뚱한 얼굴로 돌아본다.
“둘이 사귀어?”
두툼한 입술에서 피식, 웃음이 샜다.
“회사 일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
“그 여자 몇 살이야?”
“스물…… 몇 살쯤 됐겠지.”
대충 대답하곤 다시 몸을 기대 눈을 감는다.
“당신 비서로 일한 지 얼마나 됐어?”
“……2년.”
이전 비서가 울며불며 회사를 뛰쳐나가는 바람에 인수인계도 못 받아 쩔쩔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2년도 넘었다. 근무 기간과 상관없이 홍처럼 자신의 수족처럼 일하는 비서는 그동안 없었다.
처음엔 수전증 걸린 줄 알았다, 결재판 내려놓을 때마다 달달 떨어서. 그렇게 겁에 질려서도 모르는 것은 귀찮을 정도로 쫓아다니며 묻던 모습이…….
“예뻐?”
“네가 더 예뻐.”
곧바로 되돌아온 말은 건성이었다.
사귄다지만 바쁜 남자라 자주 데이트도 못 한다. 짬짬이 만날 때조차 홍 비서와의 통화는 당연한 것이었다. 둘만의 시간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그녀 때문에 채은은 유부남을 몰래 만나는 세컨드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혹시 그 여자가 당신한테 꼬리쳐?”
“……말 함부로 하지 마라.”
갑자기 인상을 팍 쓰는 얼굴이 기가 막혔다. 그게 그렇게 기분 나빠할 말인가?
그동안 사업가를 여럿 사귀어 봤지만, 비서에게 질투를 느낀 적은 처음이다. 정말 아무 사이 아닌데 자신이 오해하는 것인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만약에 나랑 그 여자랑 바다에 빠지면 누구 먼저 구할 거야?”
계속되는 질문이 성가신지 이제는 대꾸도 없다.
“응? 대답해 봐.”
“홍 비서.”
약이 오른 채은의 주먹이 꼭 쥐어졌다. 부러 그러는 것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밤중에 내가 많이 아파서 와 달라고 전화했어. 그 여자도 아프대. 누구한테 먼저 갈 거야?”
“홍 비서.”
이번엔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문후는 줄곧 눈은 감은 채 입술만 달싹였다.
그에겐 자신을 만나기 전에도 여자가 있었고 자신과 헤어진 후에도 여자가 있을 것이다. 자신도 적당히 즐기다가 깔끔하게 끝낼 생각이지만, 이런 취급까지 당하니 자존심 상해 못 견디겠다.
“만나는 동안엔 서로에게 충실해야 하잖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짜증이 번지는 문후의 얼굴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마음은 다른 여자한테 가 있으면서 몸만 나한테 와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단지 전화 통화를 자주 해서가 아니다. 유독 홍 비서와 통화할 땐 뭔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억양이나 얼굴에 스치는 표정, 무심결에 나오는 몸짓 등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당신, 그 여자 좋아해. 분명.”
“그만해. 화나려고 하니까.”
이런 거지 같은 기분으로 무슨 저녁을 먹나. 채은은 숄을 걸치고 백을 들었다.
“차 세우라고 해. 나 내릴 거야.”
“그만 징징거리라고 했다.”
“왜 몸이랑 마음이랑 따로 노냐고! 당신 변태야?”
날 선 비난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던 눈꺼풀이 가늘게 열렸다. 화가 나 바들바들 떠는 여자의 얼굴에 초점을 맞춘 눈동자가 차갑게 식기 시작한다.
“……최 비서, 차 세워.”
차선을 변경한 차가 인도 쪽으로 붙어 서행하다 멈췄다.
“계속 헛소리할 거면 내려.”
더는 홍 비서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경고에 채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다.
차문후는 밀당 따윈 모르는 남자다. 돌려 말하거나 여지를 두지 않는 사람이니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릴 것이다. 둘의 관계는 그대로 끝이다.
자신은 심각한데 상대조차 안 해 주는 그의 무심함이 서운하다.
속눈썹에 맺혔던 눈물방울이 곱게 화장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탑 여배우로서의 자존심과 차문후에 대한 미련 사이에서 갈등하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하나만 더 물을 게. ……그 여자와 나, 누가 더 좋아?”
구차하다 싶을 만큼 유치한 질문은 붙잡아 달라는 애원이었다. ‘네가 더 좋아’ 한마디만 해 주면 무조건 믿겠다는 암묵의 약속이었다.
“내려.”
이미 얼음처럼 싸늘해진 남자는 마지막까지 소름 끼치게 냉정했다.
쿵-!
차 문이 열렸다 닫히고 출발하는 차 안에서 문후가 다시 잠을 청한다.
“……시팔, 오랜만에 밥다운 밥 좀 먹으려 했더니.”
여자와 끝난 것보다 배가 고픈 게 더 짜증 났다. 출장 기간 내내 숙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끼니는 도시락으로 때우며 일만 했던 것이다.
싸 들고 온 일거리도 산더미인데…… 이렇게 된 김에 일이나 하러 가야겠다.
“회사로 가자.”
최 비서에게 목적지를 지시하곤 휴대폰의 단축 버튼을 누른다.
“……어디야?”
-퇴근하는 길입니다.
“회사로 와.”
-예, 사장님.
사장은 이미 퇴근한 비서를 거리낌 없이 불러들였고, 비서도 지체 없이 그러겠다 대답한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 대는 사장과 그에 단련된 비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가를 긁으며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홍 비서를 부른다.
-예, 사장님.
“……밥…… 먹었어?”
-예, 먹었습니다.
“……그래.”
통화를 끝내자 ‘당신, 그 여자 좋아해. 분명’ 채은의 말이 귓가에서 쟁쟁거린다.
“별 미친…….”
코웃음 친 문후는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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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후, 홍연지 결혼 2년 차 - 아들이 아빠를 닮는 건 당연합니다


호텔 방으로 들어온 문후가 시간을 확인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흔들며 의자에 앉는다.
전화가 연결되자 노트북 화면에 양평 집 차 회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접니다.”
-으잉, 잘 뵌다. 인쟈 호텔에 들어갔나 보네. 거 날씨는 으쩌냐?
“더워요.”
멋대가리 없이 뚝뚝 잘라 말하는 아들한테 익숙한 차 회장은 별말 없이 안고 있던 손자를 추켜세우며 화면 앞으로 당겨 앉는다.
-우주야, 저그 봐라. 아빠다. 아빠~ 해 봐.
동글동글한 아들 얼굴이 화면 가득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진 문후가 자주 하던 습관대로 아기 코를 콕콕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깔깔대는 녀석인데 지금은 화면이라 그러진 않는다.
알사탕처럼 새까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우주가 화면 속의 아빠를 뒤늦게 알아보곤 핑크빛 잇몸을 몽땅 드러내며 까륵, 웃는다.
마침 침실에서 올 나간 스타킹을 바꿔 신고 나오던 연지가 부리나케 달려와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주야, 엄마도 있어. 안녕~”
문후가 의자를 옆으로 밀어 자리를 내어 주자 노트북 앞으로 가깝게 다가선다.
“우리 우주, 잘 놀고 있지?”
표정은 웃고 있는데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겨우 하루 못 봐 놓고 뭐가 저리 애틋한지. 아들을 향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아주 노트북 안으로 들어갈 기세다.
“아버님, 때마다 죄송해요.”
-죄송허긴. 울 귀한 손주 밤낮없이 볼 수 있으니 나야 고맵지.
“어머님은 어디 가셨어요?”
-뒤뜰에 나갔으. 메주 띄우는 때라 바뻐.
연지는 엉덩이를 쓸어 올리는 문후의 손을 툭 쳐 냈다.
“바쁘실 때 아기까지 맡겼나 봐요.”
-도우미 아줌마가 있응께 더 성가실 일은 읎어. 아줌마가 아를 아주 잘 다뤄야? 시간 딱딱 맞춰 젖 데워 멕이고 목욕도 수월하게 시키고…….
“예. 저 몸조리할 때부터 돌봐 주시던 분이라 우주에 대해 잘 아세요.”
그녀는 결국 귀찮게 지분거리던 문후의 무릎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시아버지 앞이라 남편과 더는 싸울 수 없어 포기하고 만다.
“우주 잠은 잘 잤나요? 요즘 잠투정이 심해져서요.”
-응. 어제 후문이 새끼덜이랑 신나게 놀더니 밤새 잘 자더라. 야가 개를 엄청시리 좋아하드먼.
말이 새끼지 이미 다 커서 한 등치 하는 녀석들이다. 후문이까지 합세해 여섯 마리가 우르르 몰려다닐 땐 마치 소 떼 같다.
아직 면역이 약한 아기라 위생에 신경 써야 하는데 시골 노인에겐 많은 걸 바라선 안 된다는 걸 아는 연지는 긴말 안 하고 ‘예, 아기들은 동물 좋아해요’ 대답하며 웃는다.
연지를 제 무릎에 앉혀 놓는 데에 성공한 문후는 이제 느긋하니 턱을 괴고 있었다. 화면 건너편에선 안 보이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는 중이다. 허리 주변을 더듬다 스커트 훅을 풀려 하자 쫓아온 손이 밀어냈지만, 아버지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그러다 만다.
그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우주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화면 속 아들을 향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빠의 재롱에 까르르 웃더니 조그만 입에 제 주먹을 쑤셔 넣으려고 용을 쓴다.
녀석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하나하나가 마냥 귀엽다. 턱받이가 흥건히 젖을 정도로 침을 흘려도, 시도 때도 없이 똥오줌을 싸도 희한하게 더럽다는 생각이 안 든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아들의 포동포동한 뺨에 뺨을 비비며 달콤한 젖 냄새를 맡고 싶다. 올챙이처럼 빵빵한 배를 입으로 간지럽혀 깔딱깔딱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도 듣고 싶다.
-……문후야, 야가 네 아들은 틀림없는가 보다. 말을 욕으로 배울라 한다.
퍼뜩 정신이 든 그가 몸을 곧추세웠다. 영문을 몰라 둥그레진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시…….
들으라는 듯이 화면 안의 우주가 보골보골 게거품을 물며 옹알이를 한다. 문후도 몇 번 그 ‘시’를 들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욕처럼 들린다. 연지도 같은 생각인지 주물럭대던 몸이 대번에 굳고, 궁지에 몰린 것을 깨달은 그가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어, 어이가 없네. 내가 욕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
아버지의 장난에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어 연지에게 작게 소곤거린다.
“저 봐, 내가 아버지한테 우주 맡기면 안 된다고 했잖아.”
-다 들린다, 이눔아. 누구 핑계를 대는 거여. 시상에 어뜬 할애비가 손주한테 욕을 갈치겠냐.
“그러면,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아들한테 욕을 가르치겠습니까?”
-나는 니가 갈친 줄 알았는디?
부자가 투덕거리는 중에도 옹알이에 재미를 붙인 우주는 침을 흘리며 ‘시’를 연발한다. 조만간 ‘팔’도 할 것 같다.
때마침 룸서비스가 도착해 벨이 울리자 연지가 화면 밖으로 나가 스커트 훅을 채우며 문으로 향한다.
누명을 벗지 못한 문후는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화면에선 ‘아빠, 왜 그랬쎄용~’ 하며 아버지가 약을 올리듯 아기 손을 붙잡고 흔들어 댄다. 말 못 하는 우주를 붙잡고 누구한테 배웠냐 물을 수도 없어 억울해 미치겠다.
-아 참, 야가 못 본 새에 붕알이 겁나게 커져 부렸어야? 가만 생각해 보니께 너도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붕알이 내 주먹만 했었으. 여름에 벗겨 놓으면 동네 여편네들이 저놈 보소, 저놈 보소 했당께. 너도 고것이 재미졌는지 클 때까정 바지 홀딱 벗고 뛰어 댕기고……. 우리 우주도 그럴 것 같으. 역시 씨는 못 속이는 법이여, 허허허!”
급하게 볼륨을 낮춘 그가 연지를 돌아보았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녀는 트레이의 음식을 테이블로 옮기고 있었다. 연달아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폭로성 말들에 피곤이 급격히 밀려왔다. 빨리 끊어야겠다.
“저 점심 먹고 바로 나가야 하거든요, 이만 끊겠습니다.”
-둘째는 이왕이면 손녀였으면 좋겄다. 알겠지, 문후야?
문후는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 노트북을 닫아 버렸다.
“……나 골탕 먹이려고 아버지가 일부러 가르친 걸 거야.”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고 점심이 차려진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룸서비스치고는 진수성찬인데 흐르는 침묵이 영 불편해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연지야?”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괜스레 긴장한 문후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한다.
“세상에 ‘시’로 시작되는 말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욕이라고 단정할 순 없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서 드세요. 미팅이 한 시간도 안 남았잖아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연지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린 문후는 그제야 나이프를 들었다. 세상에 어떤 아빠가 아들한테 욕을 가르칠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 안 믿는 게 당연하다.
오늘도 두툼한 스테이크가 덩어리째 잘려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순식간에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의 접시를 말끄러미 보던 연지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육식을 줄여야 할까 봐요.”
소스에 듬뿍 적셔진 고깃덩어리가 허공에서 멈춰졌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아빠 말투를 우주가 배울 거예요.”
“……고칠게. 고치면 되잖아.”
“습관적으로 나오는 욕이 쉽게 고쳐지겠어요?”
문후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포크를 그대로 내려놓았다.
“습관이라는 건 나도 인정하는데, 욕이랑 고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육식을 줄이겠다는 거야?”
설마 좋아하는 음식을 조절하면서 나쁜 말버릇을 고치겠다는 건가? 똥개 훈련하는 방법을 남편한테 써먹으려 하다니. 보자 보자 하니까 저 여자가 정말!
“육식이 사람을 호전적으로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시팔, 어떤 놈의 쉐끼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뾰족 솟는 연지의 눈초리에 문후의 입이 저절로 닥쳐졌다. 물 잔으로 입을 축이며 끓어오르는 성질을 가라앉히려 애쓴다.
그놈의 요리 학원. 주말마다 건강식이라고 해 주는 맛없는 요리 먹는 것도 고역인데 이젠 아예 염소 새끼로 만들 작정인가 보다.
“아예 먹지 말자는 얘긴 아니고요. 조금씩 줄여 가자고요.”
“싫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소도 잡아먹고 돼지도 잡아먹고 닭도 잡아먹을 거야, 많이!”
문후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세상 음식의 절반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호전적이 되고 말겠다.
“난 고기 못 먹어 한이 맺힌 사람이라고. 죽을 때까지 피 뚝뚝 떨어지는 싱싱한 고기 실컷 먹을 거라니까!”
그의 격한 반응을 멀뚱히 바라보던 연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그럼.”
곧바로 계획이 철회되었지만, 문후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뜻대로 하기로 한 일도 나중에 보면 연지의 뜻대로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녀가 물러선 것 같지만, 앞으로 집에선 고기 구경하기 힘들 것이라는 걸 문후는 알고 있었다. 식당에 가서도 연지의 눈치를 보게 생겼다. 두 번 시킬 걸 한 번만 시키고 결국엔 잡초만 되새김질하면서 살게 되겠지, ……시팔.
“그렇게 보지 마요. 문후 씨 노려볼 때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네가 날 무서워한 적이 있기나 해?”
콧방귀를 낀 그가 씩씩대며 나이프를 문질렀다. 자신이 훨씬 덩치도 크고 힘도 세고 목소리도 큰데 왜 만날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문후 씨가 고기에 한이 맺혔다는 건 몰랐어요.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를 억지로 못 먹게 하면서까지 채식주의자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러나 문후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는 얼굴로 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를 고깃덩어리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다.
“……정말?”
“단, 우리 우주를 위해서 말투는 꼭 고쳐야 해요?”
그는 입안 가득 고기를 우물거리며 대답대신 맹세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이 맛있는 걸…… 음, 음……. 절대 포기 못 하지.
“저렇게 고기 좋아하는데 살 안 찌는 거 보면 신기해.”
연지가 맑은 채소 육수에 담긴 누들을 포크에 돌돌 감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밤낮없이 일하는데 살찔 틈이 없잖아. ……홍연지도 만만치 않아. 고기도 잘 안 먹으면서 밤낮으로 날 상대하는 거 보면.”
입에 것을 꿀꺽 삼킨 문후가 음흉하게 웃자 그녀가 태연하게 받아친다.
“체력이 좋으니까 밤낮없이 일만 하는 차문후 사장님 비서를 3년씩이나 했겠죠?”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연지를 불러내 부려 먹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는 군말 없이 달려 나왔고, 그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때…… 사표 내고 맞선 보러 다녔었잖아. 그러기 전에 날 잡아 볼 생각은 왜 안 했어?”
아무리 짝사랑이라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까지 하려 했던 연지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늘 불가능한 일에 죽기 살기로 도전하며 살아온 그에겐 더더욱 공감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정말 그녀의 계획대로 되었으면 어땠을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혹시 그녀의 사랑이 그만큼 절실하지 않아 자신을 포기하려던 것은 아닌지 살짝 섭섭한 마음도 생긴다.
“잡으려 해도 잡힐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엄두도 못 냈었어요. 아마 문후 씨 좋아하는 눈치를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그 자리에서 해고당했을걸요?”
문후는 그녀의 추측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직원을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테니까.
사장과 비서로만 지낸 3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3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면 연지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녀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일찍 깨닫고 설익은 감정으로 사귀자고 달려들었다면 그렇고 그런 연애를 하다 그냥 그렇게 끝나 버렸을 것이다.
연지는 자신이 아니라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잘 살았겠지만, 자신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평생 일에 파묻혀 일만 하다 죽었을 것이다. 한때는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었는데……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벅찬 감동도, ‘가족’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추운 겨울에 모닥불 가에 앉은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도 영영 몰랐을 것이다.
홍연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 다행이다. 그녀가 변덕쟁이가 아니라서 고맙기도 하다. 떠나야 할 여러 이유를 뒤로하고 자신을 인내하며 기다려 준 것도.
접시에 곁들여 나온 새싹 채소들을 긁어 먹으며 건너편의 아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지도…… 자신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호텔 꼭대기에 야외 수영장이 있는데, 경치가 끝내준대.”
“그래요? 그럼 저녁에 한 번 가 볼까요?”
동그란 어묵을 오물거리던 연지의 귀가 번쩍 뜨였다. 방콕이야 1년 내내 덥긴 하지만, 한국에선 코트를 입고 출발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더웠다. 갑작스런 온도 변화에 입맛이 떨어져 점심도 억지로 먹는 중이었다.
“날도 더운데 오늘 일정 제치자.”
그답지 않은 제안이라 연지의 눈이 동그래진다.
“지난번 중국 갔을 때도 그러더니…… 왜 그래요?”
“단둘이 해외로 나오니까 이러는 거잖아.”
연지가 산후 조리를 끝내고 다시 정식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게 지난달이다. 드디어 소원하던 출장도 함께 다니게 되었는데, 해외로 나오면 꼭 신혼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그녀가 임신 중일 때 신혼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껏 즐기지 못한 그때의 미련이 남았는지 일이고 뭐고 종일 연지와 뒹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선다.
“일정 하루 미룬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 내일부터 더 열심히 하면 되지.”
“가이드도 그렇고 현장 사람들도 다 문후 씨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결혼 후에 그가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남자는 어린애라는 할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달래는 수밖에.
“다음부터는 출장 일정을 좀 느슨하게 짜 볼게요. 응?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문후 씨 일할 때 모습이 제일 멋있단 말이에요.”
“아닐 텐데…… 침대에서 더 멋있을 텐데.”
한쪽 눈을 찡긋하는 그를 부드럽게 흘겨본 연지가 샐러드를 뒤적인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장면들 때문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얼굴 붉히면 더 짓궂게 놀려 대는 사람인줄 잘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자신이 싫어 살짝 화딱지가 난다.
“침대에선…… 그냥 짐승 같아.”
“섹시하다는 말이겠지.”
연지는 함께 샤워하는 것도 싫어하고 아무 때나 몸을 만져도 질색한다. 그의 앞에선 옷도 잘 안 갈아입으려 한다. 결혼해 애까지 낳았는데 아직도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게 많은지.
그나마 밤에 침대에서는 고분고분하니 참는다. 그마저도 안 되었으면 욕구불만으로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섹스는 꼭 침대에서 해야 한다는 그녀의 고정관념은 아직 깨지 못했다. 그런 생각의 차이로 결혼해서 1년 넘게 승강이하는 중이다.
“아니, 어감이 좀 다르죠. 문후 씨는 그냥 짐승 같아.”
“그 말도 칭찬처럼 들리는데?”
“짐승 같다는 말이 칭찬인 줄은 몰랐네.”
새침한 중얼거림에 아스파라거스를 뚝뚝 잘라 먹던 그가 정색한다.
“정말 흉보는 거였어?”
“……아니, 섹시하다는 뜻이었어요. 최고로 섹시해.”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싸우기 싫어 마지못해 엄지까지 추켜올리며 맞장구를 쳐 준 것인데 그래도 좋은지 문후는 싱글벙글이다.
“밤에는…… 수영장보다 야경을 구경하면서 거품 목욕은 어때?”
그제야 연지는 삼면이 창으로 된 욕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던 일을 떠올리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참, 여기 욕실이 좀 그렇더라. 밖에서 들여다보일 것 같아 블라인드 다 내려놨어요.”
“25층인데 누가 들여다본다고 그래?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라지 뭐. 인생이 얼마나 따분하면 남의 방까지 훔쳐볼까.”
연지의 입이 떡 벌어진다.
“……저질.”
“내가 저질인지 몰랐다는 듯이 말을 하네?”
풋, 웃은 그녀가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더니 어딘가 불편한지 허리를 곧게 폈다. 문후는 많이 본 모습이라 왜 그러는지 안다.
“또 뭉쳤어?”
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축할 시간도 아닌데 영상통화만 하고 나면 젖이 돈다. 우주를 보기만 해도 몸이 반응하는 게 신기하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우리 우주 밥이잖아. 침실로 들어가지 왜 화장실이야?”
“이번엔 짜서 버리려고요. 여기 날씨가 너무 더워서 냉동해서 가져가도 좀 불안해.”
일어서는 그녀의 팔을 문후가 급하기 붙잡았다. 엉큼한 눈이 불룩한 젖가슴을 더듬는다.
“내가 다 먹어 줄 수 있는데…….”
“못 말려, 정말.”
연지가 욕실 쪽으로 사라지고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은 문후는 이제 먹는 일에 집중했다. 포크로 찍어 올린 고기를 연신 씹어 삼키며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욕실 방향을 흘끔거린다.
지금쯤 블라우스 단추를 다 풀었을 것이다. 브래지어도 벗고, 팽팽한 젖가슴을 주무르고 있겠지.
마음이 급해진 그는 접시에 남은 음식을 한입에 쓸어 넣고 대충 씹어 꿀꺽했다. 물까지 쭈욱 들이켜고 컵을 내려놓았다.
냅킨으로 입을 닦아 던져 버리고 노트북 옆에 놔뒀던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한다.
미팅 30분 전. 30분으론 어림없는데…….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성큼성큼 기둥을 돌아들어 가 복도 끝의 욕실 문을 노크한다.
“연지야, 안에 내 휴대폰 좀 줘.”
“……휴대폰이요? ……없는데요?”
“거기 있어. 잘 찾아봐.”
와이셔츠를 훌렁 벗고 허리 벨트를 풀면서 손잡이를 돌려 봤는데 역시 잠겨 있어 다시 문을 두드린다.
“문은 왜 만날 잠그는 거야?”
“……정말 여기 없다니까요. 다른 데 찾아봤어요?”
“급하게 통화할 데가 있어서 그래. 잠깐이면 되니까 문 좀 열어 봐.”
“금방 나갈게요.”
다리를 털어 흘러내린 바지를 옆으로 차 버렸다.
“……빨리!”
“아, 알았어요, 잠깐만요.”
마지막 남은 드로어즈까지 훌떡 벗어 던진 그가 딸각, 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문을 밀고 들어갔다.
“꺄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