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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줄게
1화
Prologue
4년 만에 처음 밟은 한국 땅은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창밖으로 고요히 떨어져 내리는 순백의 눈은 여전히 시리도록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서둘러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하율은 흩날리는 눈을 보기 위해 보딩브리지의 창가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던 날에도 그렇게 눈이 내렸다. 어둑한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앉는 하얀 눈꽃들이 그때는 마치 절망과 좌절의 상징처럼 느껴졌었다. 도망치듯 떠났던 그날을 까맣게 잊은 듯, 또다시 흰 눈에 설레는 제 마음이 그녀는 달갑지 않았다.
“하율 씨, 아예 창을 뚫고 뛰어내리겠네. 눈 처음 보는 사람처럼 왜 이래?”
어깨를 툭 치며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하율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부사장이 코앞에서 넉살 좋게 웃고 있었다.
“아아…… 몇 년 만에 눈 구경하니까 반가워서요.”
“뭐야, 몇 년 만이라니. 아무리 캘리포니아에 있었다지만 스키장 같은 데도 한 번 안 갔어?”
“그거야, 일이 바빠서…….”
꺼낸다고 꺼낸 변명이었지만 상대는 회사의 2인자, 그닥 좋지 않은 변명이었나 보다. 부사장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누가 들으면 휴가도 제대로 안 주는 회산 줄 알겠네.”
“그게 아니라요…….”
“알아, 알아. 좀 즐기지 그랬어. 하율 씨 일 많이 한 거야 알지. 북미 지사에서 일 년에 서너 개씩은 히트 게임들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한국 왔으니까 이제 좀 쉬엄쉬엄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부사장이 싱긋 웃었다.
“서두르자고. 비행기 도착 시간이 너무 지연돼서 사장이 눈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걸. 눈은 나중에 많이 보자고. 겨울은 이제 시작이니까.”
“네.”
경쾌한 걸음으로 앞서가는 부사장을 쫓아서 그녀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한 무리의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앞에서 밀물처럼 공항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보딩브리지를 건너면서도 하율의 시선은 내내 창밖에 내리는 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가 일했던 ‘오즈게임즈’의 북미 지사는 캘리포니아의 남부에 위치해 있어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고 따뜻했다. 애써 산악지대나 스키장을 찾지 않는 한 1년 내내 눈을 보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것이 파견을 지원한 가장 큰 이유였다.
불과 13시간 전만 해도 그녀는 눈부신 태양과 푸른 바다, 야자수가 늘어선 서퍼들의 도시, 캘리포니아의 오렌지카운티에 있었다. 파란 바다와 오렌지빛 구름,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 따뜻한 해변의 도시는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몇 년을 바다만 보고 살았다. 틈날 때마다 서핑을 하고 파도를 가르며,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따위는 까맣게 잊으려고 노력했었다. 생각날까 봐. 아플까 봐. 무엇보다 그리울까 봐.
「지켜 줄게.」
내리는 눈만 보면 떠올랐다.
새하얀 설경 속에서 아프게 울려오던 그 말이.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잊히지 않던 진중한 눈빛이.
지키지도 못할 무의미한 말을 한없이 무겁게 쏟아 내던 그 사람이.
***
“아직도 못 찾았어?”
“네. 아무래도 누가 짐을 잘못 가져갔나 봐요. 저는 신고하고 갈 테니까 부사장님 먼저 들어가세요.”
수하물 컨베이어벨트가 벌써 몇 바퀴를 돌았는데도 하율의 캐리어는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수하물이 분실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겪게 되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흔한 디자인의 흔한 상표라 헛갈리기 쉬울까 봐 일부러 눈에 띄는 빨간 손수건으로 묶어 놓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먼저 가세요. 괜히 저 때문에…….”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는 부사장을 올려다보며 하율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전원을 켠 순간부터 부사장의 핸드폰은 정신없이 울려 대고 있었다. 해외 지사 다섯 곳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부사장이었기에 찾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마도 지금 울리는 전화는 십중팔구 성격 급한 사장의 전화일 것이다. 북미 쪽 게임회사 하나를 인수하기 위한 물밑 협상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확인한 부사장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미안해. 먼저 가 봐야겠네. 조심해서 와. 꼭 모범택시 타고.”
“네.”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서 부사장은 서둘러 입국장을 빠져나갔다. 애써 괜찮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며 하율은 다시 컨베이어벨트로 시선을 옮겼다. 승객들이 짐을 거의 찾아간 컨베이어벨트 위엔 몇 개의 수하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녀의 캐리어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누가 들고 나가기라도 한 걸까. 정말이지 막막했다. 책과 다이어리, 겨울 코트와 당분간 입을 옷가지며 세면도구, 화장품이 모두 그곳에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자료 파일이 담긴 외장하드를 캐리어에 넣어 둔 것이 못내 후회되었다. 북미 지사에서 쓰던 컴퓨터를 포맷해 두고 온 터라 캐리어를 찾지 못하면 외장하드와 함께 그간 꼼꼼히 모아둔 자료들이 고스란히 날아가 버릴 처지였다.
한국에 돌아온 첫날부터 암담했다. 떠날 땐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모두 정리하고 떠나 놓고, 사장의 꼬임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깟 연봉이 뭐라고.
후우. 한참 만에 결국 수하물 분실 신고를 하고서 터덜터덜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잃어버린 짐 때문에 두 시간 넘게 씨름하느라, 어둑해질 무렵에 도착한 공항은 벌써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다.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니 흩날리던 눈발은 더욱 굵어져 있었다. 캘리포니아를 떠날 때 입고 온 얇은 점퍼는 영하를 한참 밑도는 추위를 막아 주기엔 역부족이다. 출국을 위해 공항을 찾은 사람들 모두가 두꺼운 점퍼에 목도리며 털모자까지 쓴 든든한 차림이었다. 추위를 몹시 타는 그녀는 공항을 나가기도 전에 벌써부터 기가 질렸다. 우선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식당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주머니에서 지잉,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 짐은 찾았어, 하율 씨?
부사장이었다. 공항을 나간 지 한 시간 반이 넘었으니 회사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걱정이 되어서 전화한 모양이었다. 이런 세심한 면 때문에 부사장에 대한 부하 직원들의 충성도는 무척이나 높았다.
“아뇨, 아직. 신고만 했어요. 사장님께 보고는 잘 하셨어요?”
― 그럼. 내가 누구야. 아직 공항이지?
“네. 분실신고 하고 그러다 보니 아직요.”
― 저녁도 못 먹었겠네. 데리러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네? 아, 아니에요. 택시 타고 가면 되는 걸요. 그냥 쉬세요. 며칠째 강행군하셨잖아요. 잠도 별로 못 주무시고.”
― 엄청 밟고 있으니까 금방 갈 거야. 꼼짝 말고 기다려. 비싼 거 사 줄 테니까 저녁 먹지 말고.
“아니에요, 부사장님. 저는 괜…….”
띠릭.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리는 이상한 습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별거인 일을 별거 아니게 만드는 독특한 습성도 함께. 오지 말라고 말려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부사장의 전화에 그녀는 몹시 안도하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고국이 아직은 낯설어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하율은 로비의 빈 의자를 찾아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비행기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삼삼오오 모여 선 사람들의 목소리로 로비는 시끄러웠다. 입국장 앞은 누군가를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팻말에 글씨를 써 온 여행사 사람들, 딸인 듯한 여자를 부둥켜안는 초로의 아저씨와 산더미 같은 짐을 받아 드는 비서 같은 사람도 보였다. 누군가를 마중하고 마중받는 풍경에 가슴이 시큰했다.
그러고 보니 4년 만에 돌아왔건만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겨 줄 가족은 원래 없었고, 유일한 친구인 선미마저 사흘 전에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에 있었다.
짐을 잃어버려서인지 초라해진 마음에 외로움까지 밀려들었다.
이럴 바엔 일이나 하는 게 낫겠다. 하율은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 내면서 출시 예정인 모바일 게임의 테스트를 위해 핸드폰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로그인하면서 게임의 배경음악 때문에 주위에 폐가 될까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막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왜 이제 나왔지? 짐 찾아 놓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귓전을 파고들어 그녀는 멈칫했다.
설마. 아니겠지.
몹시 묘한 기분이었지만 하율은 머리를 들지 않았다. 아니, 묘한 기분이었기에 더더욱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손에 쥔 핸드폰 아래로 남자의 고급스러운 검은색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평범한 검은색 캐리어와 손잡이에 꼼꼼하게 묶여 있는 빨간 손수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 손으로 묶어 놓은 화려한 빛깔의 그 손수건을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잃어버린 그녀의 캐리어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오랜만이야, 공하율.”
갑작스레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하율은 저도 모르게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우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건만 하필이면 도착하자마자라니.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꽂아 넣은 장신의 남자가 비웃듯 입술 끝을 올리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렇게 애써도 잊히지 않던 날카로운 눈매가 다정한 듯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파삭, 손에 쥐었던 핸드폰이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으나 하율은 느끼지 못했다.
「지켜 줄게.」
그 말만이 악몽처럼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주위가 온통 안개처럼 부옇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로비의 시끄러운 소리도 그녀의 귀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데리러 왔어, 여보.”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1. 아버지의 의뢰인(1)
겨울이 성큼 찾아들던 5년 전의 어느 추운 날 하율은 그를 처음 만났다. 어리숙했던 스물네 살의 그녀에게 스물아홉의 그는 누구보다 근사하고 멋진 사람으로 다가왔었다.
신중한 행동에서 우러나는 무게감, 수려한 외모와 유려한 언변, 날카로우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두루 갖춘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여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마치 TV 속의 스타를 동경하는 십 대처럼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만약에’라는 가정은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하율은 종종 생각했었다. 만약에 그날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그랬다면 그와 그렇게 엮이는 일도,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일도, 겪지 않아도 될 끔찍한 일들을 맞닥뜨리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빠. 저보고 의뢰인을 대신 만나라고요?”
일 때문에 며칠째 지방에 내려가 계신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오신 건 아침 닭도 울기 전의 꼭두새벽이었다. 잠결에 건성으로 전화를 받았던 하율은 아버지의 부탁에 잠이 모두 달아나는 것 같았다.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아버지의 의뢰인이라면 대충 어떤 사람일지 짐작이 되었다. 아직까지 탐정이 합법적인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상, 들어오는 의뢰의 대부분이 어둡고 음습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 말 같은 건 나눌 필요 없으니까 걱정 마라. 물건만 전해 주고 오면 되는 거야.
“무슨 물건인데요?”
물건이라는 말이 어딘가 비밀스럽게 들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몰래 수집한 누군가의 신상자료이거나, 불륜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찍은 사진들이 아닐까.
사실 그런 일들은 아버지에게 몹시 어울리지 않았다. 서울경찰청의 강력계장으로,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아버지가 형사를 그만두고 탐정사무소를 여신 것이 하율은 못내 속상했다.
무슨 이유로 그만두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형사 일을 하실 때가 제일 빛났다. 지금도 경찰청에서 큰 사건이 터지면 자문위원으로 수사에 도움을 주곤 하시는데, 그럴 때의 아버지는 특히 활기에 넘치셨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계셨다.
― 안방 장롱 세 번째 문을 열면 맨 위 칸에 큰 박스가 보일 거다. 그거 치우면 양복케이스가 다섯 개 있거든. 그중 제일 뒤쪽 케이스 안에 남색 가방이 하나 들어 있어. 그거 열어 보면 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은 검은 상자가 나올 거다. 그것만 넘겨주면 돼. 절대 열어 보면 안 된다.
“아아. 네.”
참 복잡하게도 숨겨 두셨다. 불편한 대화 중이라는 것도 잊고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물건을 꽁꽁 감춰 두는 버릇이 있는 아버지는 사소한 것도 아주 비밀스레 숨겨 두곤 하셨다. 이를테면 비상금은 낡은 운동화 깔창 아래에, 3돈 짜리 황금돼지는 산세베리아 화분에 파묻어 놓는 식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작정하고 찾으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전직 강력계 형사이자 현직 탐정사무소장의 비밀 장소라고 하기엔 모두 조금씩 어설픈 데가 있었다.
― 거기 한정식집 카운터에서 내 이름 말하면 안내해 줄 거야. 저녁 일곱 시니까 늦지 않게 회사에서 좀 일찍 퇴근하고.
“제가 꼭 가야 되는 거예요? 오늘은 회사가 정말 바빠서요. 밤샘해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 나도 부탁하고 싶지 않다만 어쩌겠냐. 물건은 급하게 전해 줘야 하고, 나는 부산에 있고. 이것 참.
아버지의 목소리가 몹시 난감하게 들렸지만 그녀도 선뜻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얼마간의 침묵 끝에 아버지가 달래듯 말을 꺼내셨다.
― 저기, 하율아. 너 운전 연습해 보고 싶다 그러지 않았냐? 도로 연수한 지 너무 오래돼서 운전 다 까먹겠다며.
“아아, 그랬죠. 근데 차가 없잖아요. 아빠 차는 절대로 안 된다면서요.”
― 그게, 그러니까 말이다.
“네.”
― 빌려주마.
“네?”
― 심부름 갔다 오면 3일 동안 차를 대여해 주겠다고. 오케이?
하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비록 3일이지만 차를 몹시 아끼는 아버지로선 정말이지 큰 선심이었다.
― 스페어 키는 컴퓨터 키보드 아래에 붙여 놨다. 운전 조심해. 아직 할부금도 다 안 부은 빤딱빤딱한 새 차야.
금쪽같은 스페어 키라 또 그런 곳에 감춰 놓으신 모양이었다. 산 지 3년도 넘은 데다 이미 10만km도 넘게 뛰어서 새 차라기엔 좀 어폐가 있었지만, 운전 연습을 할 수 있다니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조건이었다.
“5일 대여로 해요, 아빠. 괜찮죠?”
“……그럼 뭐…… 그렇게 하든지.”
“좋아요. 물건 잘 전할게요. 걱정 마세요, 아빠.”
내키지 않는 듯 어정쩡하게 수긍한 아버지의 마음이 변할세라, 그녀는 약속 내용만 간단히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운전대를 잡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부리나케 달려가 차 키부터 찾아 들고는 출근 준비도 대충 끝내 버리고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들뜬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은 하율의 뇌리에서 이미 의뢰인에 대한 부담감은 지워지고 없었다.
***
저녁 일곱 시가 한참을 넘은 시간, 하율의 차는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서 있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었건만 벌써 약속 시간에서 40분이나 늦어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갑자기 시작된 폭설 때문이었다. 아침까지도 청명하기만 하던 하늘이었는데, 퇴근 무렵부터 어쩐 일인지 가늘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갈수록 굵어지던 눈송이는 이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미처 폭설에 대비하지 못한 도로엔 두껍게 눈이 쌓여 갔고, 앞에서 사고까지 나는 바람에 느리게 기어가던 차들은 아예 도로에서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늦는다고 연락이라도 해야겠는데, 그녀는 의뢰인의 전화번호는커녕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여쭤 보려고 전화한 아버지의 핸드폰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방법이 없어 답답한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1화
Prologue
4년 만에 처음 밟은 한국 땅은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창밖으로 고요히 떨어져 내리는 순백의 눈은 여전히 시리도록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서둘러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하율은 흩날리는 눈을 보기 위해 보딩브리지의 창가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던 날에도 그렇게 눈이 내렸다. 어둑한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앉는 하얀 눈꽃들이 그때는 마치 절망과 좌절의 상징처럼 느껴졌었다. 도망치듯 떠났던 그날을 까맣게 잊은 듯, 또다시 흰 눈에 설레는 제 마음이 그녀는 달갑지 않았다.
“하율 씨, 아예 창을 뚫고 뛰어내리겠네. 눈 처음 보는 사람처럼 왜 이래?”
어깨를 툭 치며 들려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하율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부사장이 코앞에서 넉살 좋게 웃고 있었다.
“아아…… 몇 년 만에 눈 구경하니까 반가워서요.”
“뭐야, 몇 년 만이라니. 아무리 캘리포니아에 있었다지만 스키장 같은 데도 한 번 안 갔어?”
“그거야, 일이 바빠서…….”
꺼낸다고 꺼낸 변명이었지만 상대는 회사의 2인자, 그닥 좋지 않은 변명이었나 보다. 부사장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누가 들으면 휴가도 제대로 안 주는 회산 줄 알겠네.”
“그게 아니라요…….”
“알아, 알아. 좀 즐기지 그랬어. 하율 씨 일 많이 한 거야 알지. 북미 지사에서 일 년에 서너 개씩은 히트 게임들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한국 왔으니까 이제 좀 쉬엄쉬엄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부사장이 싱긋 웃었다.
“서두르자고. 비행기 도착 시간이 너무 지연돼서 사장이 눈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걸. 눈은 나중에 많이 보자고. 겨울은 이제 시작이니까.”
“네.”
경쾌한 걸음으로 앞서가는 부사장을 쫓아서 그녀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한 무리의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앞에서 밀물처럼 공항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보딩브리지를 건너면서도 하율의 시선은 내내 창밖에 내리는 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가 일했던 ‘오즈게임즈’의 북미 지사는 캘리포니아의 남부에 위치해 있어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고 따뜻했다. 애써 산악지대나 스키장을 찾지 않는 한 1년 내내 눈을 보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것이 파견을 지원한 가장 큰 이유였다.
불과 13시간 전만 해도 그녀는 눈부신 태양과 푸른 바다, 야자수가 늘어선 서퍼들의 도시, 캘리포니아의 오렌지카운티에 있었다. 파란 바다와 오렌지빛 구름,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 따뜻한 해변의 도시는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몇 년을 바다만 보고 살았다. 틈날 때마다 서핑을 하고 파도를 가르며,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따위는 까맣게 잊으려고 노력했었다. 생각날까 봐. 아플까 봐. 무엇보다 그리울까 봐.
「지켜 줄게.」
내리는 눈만 보면 떠올랐다.
새하얀 설경 속에서 아프게 울려오던 그 말이.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잊히지 않던 진중한 눈빛이.
지키지도 못할 무의미한 말을 한없이 무겁게 쏟아 내던 그 사람이.
***
“아직도 못 찾았어?”
“네. 아무래도 누가 짐을 잘못 가져갔나 봐요. 저는 신고하고 갈 테니까 부사장님 먼저 들어가세요.”
수하물 컨베이어벨트가 벌써 몇 바퀴를 돌았는데도 하율의 캐리어는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수하물이 분실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겪게 되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흔한 디자인의 흔한 상표라 헛갈리기 쉬울까 봐 일부러 눈에 띄는 빨간 손수건으로 묶어 놓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먼저 가세요. 괜히 저 때문에…….”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는 부사장을 올려다보며 하율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전원을 켠 순간부터 부사장의 핸드폰은 정신없이 울려 대고 있었다. 해외 지사 다섯 곳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부사장이었기에 찾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마도 지금 울리는 전화는 십중팔구 성격 급한 사장의 전화일 것이다. 북미 쪽 게임회사 하나를 인수하기 위한 물밑 협상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확인한 부사장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미안해. 먼저 가 봐야겠네. 조심해서 와. 꼭 모범택시 타고.”
“네.”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서 부사장은 서둘러 입국장을 빠져나갔다. 애써 괜찮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며 하율은 다시 컨베이어벨트로 시선을 옮겼다. 승객들이 짐을 거의 찾아간 컨베이어벨트 위엔 몇 개의 수하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녀의 캐리어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누가 들고 나가기라도 한 걸까. 정말이지 막막했다. 책과 다이어리, 겨울 코트와 당분간 입을 옷가지며 세면도구, 화장품이 모두 그곳에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자료 파일이 담긴 외장하드를 캐리어에 넣어 둔 것이 못내 후회되었다. 북미 지사에서 쓰던 컴퓨터를 포맷해 두고 온 터라 캐리어를 찾지 못하면 외장하드와 함께 그간 꼼꼼히 모아둔 자료들이 고스란히 날아가 버릴 처지였다.
한국에 돌아온 첫날부터 암담했다. 떠날 땐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모두 정리하고 떠나 놓고, 사장의 꼬임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깟 연봉이 뭐라고.
후우. 한참 만에 결국 수하물 분실 신고를 하고서 터덜터덜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잃어버린 짐 때문에 두 시간 넘게 씨름하느라, 어둑해질 무렵에 도착한 공항은 벌써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다.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니 흩날리던 눈발은 더욱 굵어져 있었다. 캘리포니아를 떠날 때 입고 온 얇은 점퍼는 영하를 한참 밑도는 추위를 막아 주기엔 역부족이다. 출국을 위해 공항을 찾은 사람들 모두가 두꺼운 점퍼에 목도리며 털모자까지 쓴 든든한 차림이었다. 추위를 몹시 타는 그녀는 공항을 나가기도 전에 벌써부터 기가 질렸다. 우선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식당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주머니에서 지잉,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 짐은 찾았어, 하율 씨?
부사장이었다. 공항을 나간 지 한 시간 반이 넘었으니 회사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걱정이 되어서 전화한 모양이었다. 이런 세심한 면 때문에 부사장에 대한 부하 직원들의 충성도는 무척이나 높았다.
“아뇨, 아직. 신고만 했어요. 사장님께 보고는 잘 하셨어요?”
― 그럼. 내가 누구야. 아직 공항이지?
“네. 분실신고 하고 그러다 보니 아직요.”
― 저녁도 못 먹었겠네. 데리러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네? 아, 아니에요. 택시 타고 가면 되는 걸요. 그냥 쉬세요. 며칠째 강행군하셨잖아요. 잠도 별로 못 주무시고.”
― 엄청 밟고 있으니까 금방 갈 거야. 꼼짝 말고 기다려. 비싼 거 사 줄 테니까 저녁 먹지 말고.
“아니에요, 부사장님. 저는 괜…….”
띠릭. 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리는 이상한 습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별거인 일을 별거 아니게 만드는 독특한 습성도 함께. 오지 말라고 말려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부사장의 전화에 그녀는 몹시 안도하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고국이 아직은 낯설어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하율은 로비의 빈 의자를 찾아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비행기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삼삼오오 모여 선 사람들의 목소리로 로비는 시끄러웠다. 입국장 앞은 누군가를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팻말에 글씨를 써 온 여행사 사람들, 딸인 듯한 여자를 부둥켜안는 초로의 아저씨와 산더미 같은 짐을 받아 드는 비서 같은 사람도 보였다. 누군가를 마중하고 마중받는 풍경에 가슴이 시큰했다.
그러고 보니 4년 만에 돌아왔건만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겨 줄 가족은 원래 없었고, 유일한 친구인 선미마저 사흘 전에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에 있었다.
짐을 잃어버려서인지 초라해진 마음에 외로움까지 밀려들었다.
이럴 바엔 일이나 하는 게 낫겠다. 하율은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 내면서 출시 예정인 모바일 게임의 테스트를 위해 핸드폰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로그인하면서 게임의 배경음악 때문에 주위에 폐가 될까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막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왜 이제 나왔지? 짐 찾아 놓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귓전을 파고들어 그녀는 멈칫했다.
설마. 아니겠지.
몹시 묘한 기분이었지만 하율은 머리를 들지 않았다. 아니, 묘한 기분이었기에 더더욱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손에 쥔 핸드폰 아래로 남자의 고급스러운 검은색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평범한 검은색 캐리어와 손잡이에 꼼꼼하게 묶여 있는 빨간 손수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 손으로 묶어 놓은 화려한 빛깔의 그 손수건을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잃어버린 그녀의 캐리어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오랜만이야, 공하율.”
갑작스레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하율은 저도 모르게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우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건만 하필이면 도착하자마자라니.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꽂아 넣은 장신의 남자가 비웃듯 입술 끝을 올리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렇게 애써도 잊히지 않던 날카로운 눈매가 다정한 듯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파삭, 손에 쥐었던 핸드폰이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으나 하율은 느끼지 못했다.
「지켜 줄게.」
그 말만이 악몽처럼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주위가 온통 안개처럼 부옇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로비의 시끄러운 소리도 그녀의 귀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데리러 왔어, 여보.”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1. 아버지의 의뢰인(1)
겨울이 성큼 찾아들던 5년 전의 어느 추운 날 하율은 그를 처음 만났다. 어리숙했던 스물네 살의 그녀에게 스물아홉의 그는 누구보다 근사하고 멋진 사람으로 다가왔었다.
신중한 행동에서 우러나는 무게감, 수려한 외모와 유려한 언변, 날카로우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두루 갖춘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여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마치 TV 속의 스타를 동경하는 십 대처럼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만약에’라는 가정은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하율은 종종 생각했었다. 만약에 그날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그랬다면 그와 그렇게 엮이는 일도,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일도, 겪지 않아도 될 끔찍한 일들을 맞닥뜨리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빠. 저보고 의뢰인을 대신 만나라고요?”
일 때문에 며칠째 지방에 내려가 계신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오신 건 아침 닭도 울기 전의 꼭두새벽이었다. 잠결에 건성으로 전화를 받았던 하율은 아버지의 부탁에 잠이 모두 달아나는 것 같았다.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아버지의 의뢰인이라면 대충 어떤 사람일지 짐작이 되었다. 아직까지 탐정이 합법적인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상, 들어오는 의뢰의 대부분이 어둡고 음습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 말 같은 건 나눌 필요 없으니까 걱정 마라. 물건만 전해 주고 오면 되는 거야.
“무슨 물건인데요?”
물건이라는 말이 어딘가 비밀스럽게 들렸다. 아마도 아버지가 몰래 수집한 누군가의 신상자료이거나, 불륜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찍은 사진들이 아닐까.
사실 그런 일들은 아버지에게 몹시 어울리지 않았다. 서울경찰청의 강력계장으로,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아버지가 형사를 그만두고 탐정사무소를 여신 것이 하율은 못내 속상했다.
무슨 이유로 그만두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형사 일을 하실 때가 제일 빛났다. 지금도 경찰청에서 큰 사건이 터지면 자문위원으로 수사에 도움을 주곤 하시는데, 그럴 때의 아버지는 특히 활기에 넘치셨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계셨다.
― 안방 장롱 세 번째 문을 열면 맨 위 칸에 큰 박스가 보일 거다. 그거 치우면 양복케이스가 다섯 개 있거든. 그중 제일 뒤쪽 케이스 안에 남색 가방이 하나 들어 있어. 그거 열어 보면 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은 검은 상자가 나올 거다. 그것만 넘겨주면 돼. 절대 열어 보면 안 된다.
“아아. 네.”
참 복잡하게도 숨겨 두셨다. 불편한 대화 중이라는 것도 잊고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물건을 꽁꽁 감춰 두는 버릇이 있는 아버지는 사소한 것도 아주 비밀스레 숨겨 두곤 하셨다. 이를테면 비상금은 낡은 운동화 깔창 아래에, 3돈 짜리 황금돼지는 산세베리아 화분에 파묻어 놓는 식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작정하고 찾으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전직 강력계 형사이자 현직 탐정사무소장의 비밀 장소라고 하기엔 모두 조금씩 어설픈 데가 있었다.
― 거기 한정식집 카운터에서 내 이름 말하면 안내해 줄 거야. 저녁 일곱 시니까 늦지 않게 회사에서 좀 일찍 퇴근하고.
“제가 꼭 가야 되는 거예요? 오늘은 회사가 정말 바빠서요. 밤샘해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 나도 부탁하고 싶지 않다만 어쩌겠냐. 물건은 급하게 전해 줘야 하고, 나는 부산에 있고. 이것 참.
아버지의 목소리가 몹시 난감하게 들렸지만 그녀도 선뜻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얼마간의 침묵 끝에 아버지가 달래듯 말을 꺼내셨다.
― 저기, 하율아. 너 운전 연습해 보고 싶다 그러지 않았냐? 도로 연수한 지 너무 오래돼서 운전 다 까먹겠다며.
“아아, 그랬죠. 근데 차가 없잖아요. 아빠 차는 절대로 안 된다면서요.”
― 그게, 그러니까 말이다.
“네.”
― 빌려주마.
“네?”
― 심부름 갔다 오면 3일 동안 차를 대여해 주겠다고. 오케이?
하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비록 3일이지만 차를 몹시 아끼는 아버지로선 정말이지 큰 선심이었다.
― 스페어 키는 컴퓨터 키보드 아래에 붙여 놨다. 운전 조심해. 아직 할부금도 다 안 부은 빤딱빤딱한 새 차야.
금쪽같은 스페어 키라 또 그런 곳에 감춰 놓으신 모양이었다. 산 지 3년도 넘은 데다 이미 10만km도 넘게 뛰어서 새 차라기엔 좀 어폐가 있었지만, 운전 연습을 할 수 있다니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조건이었다.
“5일 대여로 해요, 아빠. 괜찮죠?”
“……그럼 뭐…… 그렇게 하든지.”
“좋아요. 물건 잘 전할게요. 걱정 마세요, 아빠.”
내키지 않는 듯 어정쩡하게 수긍한 아버지의 마음이 변할세라, 그녀는 약속 내용만 간단히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운전대를 잡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부리나케 달려가 차 키부터 찾아 들고는 출근 준비도 대충 끝내 버리고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들뜬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은 하율의 뇌리에서 이미 의뢰인에 대한 부담감은 지워지고 없었다.
***
저녁 일곱 시가 한참을 넘은 시간, 하율의 차는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서 있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었건만 벌써 약속 시간에서 40분이나 늦어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갑자기 시작된 폭설 때문이었다. 아침까지도 청명하기만 하던 하늘이었는데, 퇴근 무렵부터 어쩐 일인지 가늘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갈수록 굵어지던 눈송이는 이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미처 폭설에 대비하지 못한 도로엔 두껍게 눈이 쌓여 갔고, 앞에서 사고까지 나는 바람에 느리게 기어가던 차들은 아예 도로에서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늦는다고 연락이라도 해야겠는데, 그녀는 의뢰인의 전화번호는커녕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여쭤 보려고 전화한 아버지의 핸드폰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방법이 없어 답답한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