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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일 사흘 전 1화
1부. 송별회 (1)


후배가 군대를 간다.
새삼 놀라울 일도 아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와서 썩어 가는 동안 수많은 후배놈들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질질 훈련소에 끌려가는 걸 봐 왔다.
문제는 이번에 군대 가는 놈이 단순한 후배가 아니라 친한 후배라는 거다. 꽤 오래 봐 왔던, 거의 친구 수준의 후배.
일곱 살이나 아래이기는 하지만 나이는 친구와 관계없으니까.
처음엔 후배가 아니었는데 어느새 후배가 됐고 학교 근처에서 술 마실 나이도 됐다. 이제는 군대까지 간다. 스물두 살, 그야말로 혈기왕성한 나이에 군대로 끌려가는 거니 참으로 힘들 거다.
근데 걔는 그렇다 치고…… 나는 왜 기분이 구물거리는 거지.
“……형? 무슨 생각해요?”
“어?”
하마터면 막걸리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양은그릇에다가 입을 박은 채로 눈만 내놓고 그 녀석을 빤―히 보고 있던 참이었다.
내 앞에 앉은 후배 녀석. 이름은 이문수다. 아직 깎지 않은 부슬부슬한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를 덮었다. 좀 처진 것처럼 보이는 눈은 물음표를 서너 개쯤 담고 있었다.
이름이 무슨 어사 박문수냐 어쩌구 하면서 이름 가지고 적당히 놀려 댔던 게 어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커선 막걸리 맞다이도 나한테 이길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제대 후 학비를 벌기 위해선 과외를 해야 했지만, 군 생활 동안 머리가 돌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정작 내가 이비에스를 보고 공부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만 깡으로 과외중개업체를 찾아갔고, 아무거나 받아 찾아간 학생 집에서 이 녀석을 만났다. 그때 나는 스물넷이었고, 문수는 열일곱이었다.
“아니, 그냥. 너 군대 가는 게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웃겨서. 벌써 네가 군대 갈 때도 됐나 싶다.”
“새삼 왜 그래요, 며칠 전에 말했는데.”
“사흘 뒤면 가잖아.”
“네.”
“그럼 진짜 계속 못 보는 거잖아. 한 달에 한 번쯤 너 보는 게 습관이 돼서 좀 이상할 거 같다.”
그렇게 말했더니 문수가 픽픽 웃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좀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뭐가? 저 피부가. 군대 가면 햇볕에 지글지글 탈 텐데 이 녀석은 피부가 깨끗하고 맑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래서 볼 때마다 좋아 보인다. 선크림 많이 바르라고 말은 해 뒀지만 어차피 다 땀에 지워질 테니 삭아서 나올 게 분명했다.
안타깝다. 나 좀 주고 가지.
그런 헛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그릇에 막걸리가 콸콸콸 채워졌다. 아이고, 이 녀석 페이스에는 못 따라가겠다. 난 어느새 스물아홉이고, 보통 술 마신 다음 날엔 끙끙대며 나이든 걸 인증하곤 한다. 물론 예전보다 더 잘 취하고.
그렇다 해도 기본 주량은 센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처음에 우리가 술을 마셨을 땐 문수가 먼저 취했다. 음, 자랑은 아니다.
“갔다 오면 형은 서른하나네요.”
“남의 노화를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돼……. 너 총 사 갈 걱정이나 해라.”
“형, 그런 건 이미 하도 들어서 안 속아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해 온다. 뭐 반드시 속아라! 하는 마음으로 던진 건 아닌데.
“근데 왜. 내가 서른하나면 뭐.”
“아뇨, 그냥.”
“그냥?”
“음…… 서른하나면 결혼할 나이잖아요.”
“그래서 뭐, 이 새끼야.”
“아야.”
술김에 딱밤을 너무 세게 때려 버렸다. 문수의 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너무 아프게 했나, 역시? 나는 병 주고 약 주는 심정으로 그 부위를 손바닥으로 마구 문질렀다.
“아프냐? 좀 셌나?”
“……괜찮아요.”
“그러게 솔로를 왜 건드리냐, 솔로를. 안 그래도 벌써부터 부모님이 갈구기 시작한다고. 여자 없냐, 언제 결혼할 거냐, 대학원은 언제 졸업하냐, 교수는 언제 되냐……. 교수 자리가 뭐 하늘에서 떨어지나.”
“근데 형은 왜 솔로예요?”
“…….”
정말 근원적인 질문인데 꽤 짜증 나네. 짜증 나게 하려고 한 거면 성공이다.
나는 녀석을 째려봐 주며 막걸리를 그릇 가득 부어 버렸다. 주전자에 있던 건 금방 동났다. 세 주전자째다. 마셔, 하고 퉁명스레 말한 나는 젓가락을 들어 식어 가는 파전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문수에게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닌지 꿀꺽꿀꺽 잘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왜 솔로냐.”
나도 나름 대학원에서 썩으면서 그 주제에 관해 깊은 고찰을 해 봤다.
“왜냐면 내가 구예진 걔한테 뻥뻥 까였으니까. 응.”
“…….”
“그리고 주위에 여자가 없다는 거지. 죄다 남자야. 게다가 놀면 너랑 놀게 되잖아. 요새 들어선 특히 더 그랬고. 심지어 여행도 너랑 가면 되니까……. 근데 너랑 여행 가면 항~상 너한테만 여자가 붙고.”
1년 전 여름에 우리는 국내여행을 하기로 마음먹고 기차를 예약했다. 별것도 아닌 여행이었다. 여행을 제안했던 건 문수였다. 그냥 배터지게 먹고 오자, 녀석은 우리 여행의 목표를 제시했고 나는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여행길, 기차에서 여자들과 얘기하게 됐는데 인기는 죄다 문수가 먹었다. 와구와구. 나는 쩌리가 돼서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렸었다. 그래, 뭐 잘생긴 놈이 많은 것을 차지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들과 문수가 잘된 건 아니었다.
왜 안 만나냐, 한 번이라도 만나 봐라, 젊었을 때 많이 만나 둬야 나처럼 후회 안 한다, 이런 소리를 했더니 문수는 고개를 흔들면서 그런 여자들 싫어요, 하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헌팅보다는 주위에서 만나야 할 타입인 것 같았다.
그렇게 주위에 널린 여자들도 잡지 않고 대학 생활 2년을 허비한 녀석은, 결국 여친도 없이 그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불쌍한 녀석. 면회는 내가 가 주마. 특별히 피자도 사 줄게.
“그래요…….”
뭔 생각을 하는지 문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취했나? 눈을 보니 취한 건 아니었다. 문수는 취하면 눈가가 새빨개진다. 그거 말고 다른 주사는 모르겠다. 이 녀석이 제대로 맛이 가기 전에 내가 먼저 취하는 일이 많으니까.
“그럼 나 없으면 누구랑 놀게요?”
“……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사실 생각 안 해 봤다. 내가 처음에 구물구물한 기분이 든다고 한 게 이거 때문이었다. 나름 5년 동안이나 함께했던 녀석인데 갑자기 2년 동안 제대로 못 본다고 생각하니 좀 허전했다.
뭐랄까…… 한 문장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어쨌건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이 녀석을 알게 된 후로 5년, 우리가 친분을 쌓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술을 마셔서 감성적이라도 됐는지.
나는 문수가 고3이 되던 여름에 과외 자리에서 잘렸다. 그리고 겨울에 녀석이 나와 같은 대학에 붙었다며 연락 와선 놀아 달라고 했던가…….
그때 술을 사 줬고 녀석이 만취해서는 내가 예전에 보여 줬던 <어사 박문수> 드라마 주제가를 흥얼거렸다. 어허 그건 아니지, 이제는 달라야지이…….
난 그걸 듣고 너 이름 박문수로 개명하라면서 낄낄거렸다. 근데 그때 나도 좀 취해서 결국 그 노랠 같이 불렀다. 즈믄 해 동안 커져 가기를~ 하아늘아 도우소서어~
……그다음부턴 주사 안 부리려고 노력 많이 했다.
이후로도 술을 같이 마셨고 대학 소개도 해 줬다. 소개팅도 해 보고, 미팅도 하고, 여자 좀 만나라, 그런 충고도 잊지 않았다. 좀 시큰둥하게 듣는 것 같긴 했지만.
문수는 이성교제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물론 내가 만난 여자애들 얘기에는 꽤 관심을 기울였으니 고자는 아닌 것 같은데.
또 뭘 같이 했더라. 내 자취방에서 치킨 뜯으며 엘 클라시코 경기를 같이 보기도 했지. 개판인 방바닥에 이불 깔아 놓고 뒹굴거리면서.
정리 안 하고 사는 내 방에 대해 별말 안 한 유일한 사람이 문수였다. 형의 위엄은 좀 없어졌던 것 같지만. 또 시험공부도 같이 했었고, 식도락 여행 한 번, 캐리비안베이 한 번…….
정말 이 녀석하고 잘 놀았다. 그런 것들을 다 떠올리고 나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왜 나랑 놀았지? 일곱 살 차이나 나는, 별로 재미도 없는 형하고 놀 만큼 이 녀석이 친구가 없나?
내가 학교에서 본 사람들 중에 손가락에 꼽을 만큼 문수는 괜찮게 생겼다. 여자 만나기도 바쁠 판에 냄새나는 인문계 대학원생에 일곱 살 차이 나는 형하고 노는 거, 좀 힘들지 않을까? 아무리 말이 잘 맞아도 다섯 살쯤 차이나면 세대 차이 난다던데. 뭐 난 인터넷을 많이 해서 모를 건 없지만.
혹시나 내가 꼰대질을 하지 않을까 싶어 항상 조심하면서 문수를 대하기는 한다. 그게 좋은가? 그리고 내가 술값도 좀 많이 내 주고…… 아니, 요새는 그렇지도 않은데. 문수도 알바를 해서 종종 술값을 내기 시작했으니까. 음…… 대체 뭘까.
하지만 이런 걸 대놓고 물어볼 만큼 내가 부끄러움이나 민망함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이 자린 군대 가기 전 송별회의 느낌인데, 진실게임 같은 건 좀.
“형, 편지 써 줄 거예요?”
문수가 짙은 눈썹을 희한하게 올리며 질문했다. 편지라, 편지. 내가 지금까지 어떤 군인에게도 써 본 적이 없는 편지. 심지어 전 여친한테도 카드 한 장에 그것도 달랑 세 문장 썼던 것 같다. 예진아, 사랑한다. 생일 축하한다. 주영이가.
“뭐…… 일단은? 네가 어디 갔는지를 난 모르니까.”
“알림 문자, 형으로 하려고요.”
“어?”
“알림 문자요.”
“……그 여자친구 같은 애들한테 훈련병 번호 알려 주는 그거?”
“네.”
“그걸 왜 나냐?”
하도 황당해서 문법이 이상하다.
“음, 다른 사람 설정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요.”
“부모님, 아님 심녀 없어?”
“부모님은 주민번호 치면 알 수 있고, 심녀요?”
“어, 왜. 그런 거 안 키워?”
“안 키워요.”
“너 어쩌려고 그러냐……. 하긴 여친 없이 군대 가는 게 여자애한텐 좋지만. 그래도 여친한테 편지 받고 그러면 그 엿 같은 기분이 좀 나은데.”
“…….”
문수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릴 거 같다. 두상이 예뻐서.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음, 고놈 참 잘생겼네…… 하고 내가 육성으로 말하고 있다는 건 역시 나 좀 취한 상태인 듯. 내가 취하면 좀 솔직해지는 맛이 있다.
“잘생겼어요?”
“어, 왜.”
“……형도요.”
“오늘 면도도 안 했다, 이 새끼야. 거짓말도 작작 해라.”
“진짜인데요. 진짜 예쁜데.”
내가 좀 예쁘긴 하지. 그것도 다 입 밖으로 냈다. 문수가 소리 내서 웃었다. 순정 만화 남자 주인공이 딱 저렇게 웃을 것 같다.
나는 젓가락을 집어 올렸다가, 파전이 먹기 싫어져서 도로 내려놨다. 대신 막걸리잔을 들고 입술로 가장자리를 물었다. 차가운 쇠 맛이 난다. 막걸리 향도.
아, 졸려. 다행히 학교 앞 막걸리집이라 내 자취방은 여기서 10분 거리다. 금방 가지. 문수는 통학인데……. 뭐, 내 집에서 자고 가면 되는 거고. 벌써 새벽 1시였다.
다시 문수를 봤더니 또다시 빤히 쳐다보고 있다. 까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아직 취하진 않은 것 같은데, 뭐 할 말 있냐.
그릇 가장자리는 먹을거리가 아니지만 그냥 심심해서 낼름 핥았다. 또 쇠 맛이 났다. 맛없는데 왜 계속 하게 될까, 나 변탠가.
“형.”
“어, 왜.”
“저 가는 거, 슬퍼요?”
아이고. 이 녀석도 군대 가는 게 정말 싫은 모양이다. 전형적으로 입대하기 전에 사람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문수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당연히!”
“…….”
“하나도 안 슬픈데!”
그러고선 혼자 낄낄거렸다. 아, 나 진짜 취했네, 이런 안 웃기는 농담이나 하고. 좀 정신 차리자 싶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좀 흐리다, 이제. 녀석의 얼굴이 잘 안 보였다.
“야, 좋겠냐, 너 간다는데. 우리 잘 놀았잖아. 나도 이제 가을학기 시작되면 진짜 바쁘고 그럴 테니까 너 면회 가는 것도 솔직히 자주는 못 가고……. 당연히 안 좋지, 그걸 들어야 아냐?”
“형은 들어야지 알잖아요.”
문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갑자기 목소릴 깔아. 나는 실실 쪼개면서 문수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농을 던졌다.
“너랑 나 사이에 들어야만 알겠냐? 딱딱! 눈만 봐도 알아맞힐 정도 안 됐어?”
“……그런 사람이 모르나.”
“엉? 뭐가?”
“형, 집 안 가요?”
“가. 가자. 가야 돼. 아, 졸려.”
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문수한테 내밀었다. 계―산, 그렇게 말하면서. 문수는 그 카드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제가 낼게요, 하고 말했다. 무슨 소리냐, 형이 내야지. 그랬더니 녀석은 고개를 젓고서는 계산대로 가 버렸다. 뭐야, 오늘은 내 차례 맞는데. 군대 간다 이건가.
결국 하릴없이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나는 아무리 취해도 다리에 힘은 안 풀린다. 그래서 항상 귀소본능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술집을 나오자, 여름밤의 미지근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형, 발밑에 조심해요. 넘어질라.”
뒤에서 문수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오냐―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여자 아이돌 그룹 노래를 흥얼거렸다. 미스터 츄~ 입술 위에 츄~ 거리는 노래.
“기분 좋아요?”
“넌 안 불러?”
“어…… 부르죠 뭐.”
그래서 우리는 내 자취방으로 가면서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좀 잔인하긴 하지만, 나도 군대 갈 때 이렇게 놀림당했으니까. 고성방가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가사는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그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나는 문수의 어깨에 팔을 둘…… 두르려고 했다. 그런데 녀석이 키가 커서 어깨가 좀 안 맞는다.
“너 키가 몇이더라?”
“185요.”
“아, 크다. 미치게 크네. 새끼, 위너네.”
“형 키도 작은 거 아니잖아요.”
“난 루저.”
“그래서 좋은데.”
“내가 키 작은데 네가 뭐가 좋아.”
“…….”
한참 침묵하던 문수는 그러게요, 하고 별 의미 없는 동의를 해 왔다. 그러고선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훌륭한 어깨동무가 완성됐다. 나는 여전히 팔 올리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아…… 야, 자기 전에 맥주 딱 하나만 더 마시고 자자.”
“……그래요, 그럼.”
그래서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고, 우리는 다시 반 어깨동무 상태로 처언처언히 밤길을 걸었다.
내 자취방에 들어가서 맥주를 까고, 우리랑은 관련 없는 국가들이 하는 월드컵 경기를 틀어 놓았다. 자취방에 문수가 오는 건 이제 일상이 돼서 아무렇지 않다.
중계하는 사람들이 떠드는 걸 멍하니 듣고 있다가, 나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선 그대로 엎드렸다. 졸리다. 침대 아래 바닥에 앉아 있던 문수가 자게요? 하고 나를 보았다. 맥주를 다 못 마시긴 했지만, 졸린 걸 어떡하나.
“형, 이라도 닦고 자요.”
“졸려, 하루 안 닦는다고 인생이 망하진 않으니까……. 넌 이불 깔고 자든가, 아님 위로 올라오든가 네 맘대로 해라.”
내 자취방은 나름 호화로워서 트윈 베드다. 아, 근데 말해 놓고 후회했다. 여름이라 좀 더우려나. 에어컨 틀어 놨으니 뭐. 음…… 자야지…….
“형, 형.”
“왜에……. 잔다, 냅둬…….”
“나 할 말 있는데, 들으면 안 돼요?”
“내일 얘기하지…….”
“내일은 왠지 다시 말 못할 것 같은데…….”
문제는 내가 잠을 잘 못 참는다는 거였다. 나는 겨우 눈을 뜨고 문수를 보았다. 졸려서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왜, 뭔데.
문수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따뜻하고 큼지막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더니 이내 나직하게 속삭여 왔다.
“형. 나 형이 좋아요.”
뭐야, 겨우 그거냐.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내렸다. 잡은 손을 한번 꽉 잡아 주고선, 내가 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어, 나도……. 잔다.”
인간이 극한의 졸림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기이한 행동은 수만 가지다. 그중 하나를 나는 해 버렸던 거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이 뚝, 끊겼다.

* * *

처음에 문수를 만났을 때 어땠냐 하면, 그 녀석 참 꽤 똘망똘망한 녀석이네, 생각했다. 집엔 부모님이 안 계셨는데 맞벌이라고 했다. 과외 신청도 자기가 직접 한 거라면서 문수는 나를 빤히 보았다.
그렇게 빤히 보는 건 녀석의 습성이랄까 그런 거였는데, 그때의 나는 당연히 그런 걸 알 도리가 없으니 어쩐지 기묘한 기분이 되었었다.
내가 가르칠 과목은 수학이었다. 이비에스를 열심히 시청하고 강사의 말투까지 따라할 수 있는 지경이 됐으니, 이제 과외할 수 있는 최소의 자격은 갖췄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문수가 질문하는 첫 문제부터 막혀서 진땀을 뺐다.
욕 안 하려고 꽤 노력했다. 선생의 위엄, 선생의 위엄.
“……이거 어려운 문제긴 해요. 최고난이도 문제집이라서.”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문수가 나한테 말했다. 그 말에 더 열이 올라서 나는, 내가 이건 반드시 푼다, 하고 생각해 버렸다.
“아니! 쉬운데 너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 중인데?! 조금만 기다려 봐. 이이이이거라도 풀고 있어, 알았냐? 하…… 후우…….”
“…….”
그리고 30분이 지난 후, 나는 드디어 그 망할 놈의 문제를 풀어냈다. 시옷비읍의 초성을 가진 욕설이 목구멍 바깥으로 나오려는 순간, 수학의 신이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는지 영감을 내려 준 것 같았다.
하, 나는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 게 이렇게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으며 춤이라도 추고 싶어졌다. 정말 출까 고민했지만 나도 체통을 지켜야 했으니까.
“자, 이제 설명해 줄게.”
문수는 나를 또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그나마 쉬웠다. 왜 안 풀렸는지 모를 정도로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근데 선생님, 이거…… 답이 이게 아닌데요.”
“…….”
내 얼굴은 거의 우리 학교 엠블럼이나 다름없는 빨간색으로 물들었을 테고,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시바……까지 입 밖에 내 버렸다. 아, 진짜 쪽팔리고 민망하고 화가 나서 이 과외는 그만둬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데 문수가 아, 하고 펜으로 노트의 한 부분을 짚었다.
“계산이 여기가 잘못됐네요. 방식은 맞는 건가 봐요.”
“그래? 어…… 그러네.”
“네.”
“……그렇군.”
그 이후로 나는 태연을 가장해서 꾸역꾸역 계속 과외를 진행했다. 그다음 문제들은 그래도 잘 풀 수 있었다. 문수의 지적 덕분에 내 쬐끄만한 ‘선생으로서의 위신’은 지켜 냈다. 내 머릿속에서 녀석의 이미지는 조금 향상됐다.
나는 문제를 풀고 있는 녀석을 살펴봤다. 문수는 고딩 때에도 고딩 중에서 잘생긴 편이었고, 교복 모델을 해도 될 만큼 교복이 잘 어울리는 깔끔한 얼굴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땐 안경도 쓰고 있었고. 사실 문수는 안경 쓴 것도 괜찮아 보이는 신기한 녀석이다.
그렇게 내 엉망진창이 될 뻔한, 하지만 반은 엉망이긴 한 첫 시범 과외는 끝이 났다. 아직도 얼굴에 올랐던 열이 가시질 않아서 손부채질을 열심히 하면서 나는 방을 나왔다. 문수가 그 뒤를 따랐고.
나름 차려입고 온답시고 왔지만 내 신발은 스니커즈였다. 대충 구겨 신고 뒤로 돌아서서 그 하얀 얼굴을 봤다.
“내가 참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말이야.”
“…….”
“저기…… 나하고 할 거냐?”
“네?”
“과외. 할 거냐고.”
“……아.”
순간 문수는 멍해졌다가, 갑자기 나만큼이나 얼굴을 붉혔다. 나는 당연히 머릿속에 물음표가 마흔일곱 개쯤 들어찼다.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하얀 얼굴이 그렇게까지 빨개질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모습이었다.
문수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는지 버벅거리며 말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녀석이 이 정도로 멘탈이 흔들리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왜 그랬는지는 끝까지 못 들었다.
“죄송해요. 저기, 네, 할게요. 부모님한테 말씀드려 놓을게요, 과외비는 다음에 드리고.”
“어…… 그래. 고맙다.”
“…….”
“…….”
“그럼 나 간다. 화요일에 보자.”
“……네.”
이렇게 우리의 관계는 과외선생과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내 과외 실력이 나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문수가 그냥 머리가 좋고 열심히 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문수는 성적이 더 올랐다.
그래서 나는 수학과 함께 영어 과외도 맡게 됐다. 젠장, 영어도 손 놓은 지 백만 년이었는데. 토익 공부도 한다 치고 내 딴에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으니 문수를 가르친 게 내 인생에도 도움이 좀 됐던 셈이다.
문수 얘기를 하면 과외를 하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존나 부럽다.’
난 처음 과외한 게 문수였기 때문에 뭐가 좋은 학생이고 나쁜 학생인지 몰랐지만, 일단 나쁜 학생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숙제 내주면 다 해 오고, 가르쳐 주면 한 번에 알아듣고, 말썽 안 피우고 두 시간 내내 집중하고.
다시 생각해 보니 문수 성적이 오른 건 문수 덕이 90%인 듯싶다.
문수 부모님이 나를 좋아하는 거야 뭐 당연한 일이었다. 성적도 올려 주고 애도 잘 잡아 줘서 고맙다면서 성과급 같은 것도 몇 번 줬다.
그래서 난 당연히 문수가 수능을 볼 때까지 내가 계속 과외를 하겠거니 생각했다. 문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응원 올 거예요? 하고 물어봤었다. 내가 가서 뭐해, 난 그렇게 답하며 웃었다.
그리고 6월 20일. 날짜를 기억하고 있는 건 그만큼 놀랐기 때문이다. 문수가 6월 모의고사를 올 1등급을 맞았다는 소식에 기뻐서 신나하고 있던 날 저녁, 갑자기 문자로 통보가 왔다.

문수 어머니 [문수 엄마인데요. 사정이 생겨서 과외 그만두려구요 그 동안 감사했습니ㄷㅏ]

나는 맞춤법이나 철자에 좀 엄격한 편인데, 마지막 글자가 오타 난 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쇼크를 먹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거의 3년 가까이 한 과외인데 한순간에 잘렸다. 왜?
문제는 이유가 그저 ‘사정’이라고만 명시되어 있다는 거였다. 자위하다가 찍 하는 그 사정이 아닌 이상, 그 사정은 나로선 전혀 모를 일이었다.
문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충격을 내 친구들한테 털어놓으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야 했다. 막걸리를 미친 듯이 마시고 취해서, 노래방에서 여자 아이돌 노래를 불러 젖혔다.
쏘원을 말해 봐! 원래는 태연처럼 이쁘고 깜찍하게 불러야 했지만 나는 샤우팅 창법을 사용했고 친구들의 원성을 샀다. 사실 그래, 나 태연이 속한 그 그룹을 좀 좋아한다. 사실, 좀 많이.
그걸 나중에 문수한테 말했더니 걔네가 뭐가 좋아요?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서, 태연과 윤아의 아름다움에 관해 떠들어 대며 정신교육을 시킨 적도 있다. 그랬는데도 녀석은 난 별로예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선 혼자서 투덜거렸다. 난 생각했다.
……에이핑크 팬인 걸까, 저 새끼.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잘린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두 가지 가능성. 하나, 올 1등급을 찍으니 내가 필요가 없어진 것으로 생각한 부모님의 결단. 둘, 나도 모르는 사이 문수가 나한테 딥빡친 일이 있었던 거.
나는 둘 중에서 고민하다가 첫 번째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꽤 빡쳤다. 그렇다고 문수가 수능을 망치기를 바라진 않았다.
내 첫 학생이자, 아끼는 동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