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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보다 1분 더 1화
프롤로그
혜수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심호흡을 했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인 이른 아침의 복도는 적막하고 싸늘했으며,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옮기는 발걸음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복도의 중간쯤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보도 2국 프로듀서 이강욱
팻말 속 이름에 굳어 있던 혜수의 안면 근육이 조금씩 풀려 갔다.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설렘 때문에 괜스레 몸까지 우스꽝스럽게 꼬이는 듯했다.
“이 이름에 이렇게 떨릴 날이 올 줄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문짝에 귀를 가져갔다. 그는 지금쯤 출근해 있을 것이다. 다른 직원들보다 30분 전 출근을 고수하면서, 지각한 후배들을 향해 일침을 날리는 게 그의 하루의 시작이니까.
방 안의 기척에 귀를 활짝 열어 두던 혜수는 어느 순간 이맛살을 구겼다. 늘 그랬듯 그의 방에선 귀에 익은 클래식이 들려왔다. 이강욱의 아침은 늘 클래식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보도국 사람들은 다 안다. 다른 선배들한테 듣기론 벌써 5년째라고 했다.
이강욱과 클래식이라…….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혜수는 늘 생각했다. 그는 뭇 여자들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모태 미남이 분명했고, 지적인 데다가 과묵하기까지 하여 클래식이 어울릴 법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도 존재했다. 핀트가 어긋나면 불같이 화를 내고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막말을 내뱉는다. 그래서 그에게 들이댄 여자들이 하나같이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나갔다는 소문도 돌았던 것이다.
“모를 일이야.”
문짝에서 귀를 뗀 혜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 자신도 분명 강욱의 일침에 상처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쩌다 이 남자에게 꽂혀 버린 걸까. 혜수는 멀거니 선 채 팻말에 눈을 두었다.
분명히 다른 여자들처럼 혜수 본인도 상처받고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절대 먼저 고백을 하면 안 된다. 이십 대, 그 황금 같은 시기를 짝사랑만 연거푸 세 번으로 날려 먹지 않았던가. 먼저 고백을 하고 차이고, 또 고백하고 차이고. 눈물로 얼룩졌던 그 세월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고백을 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러면 그의 앞에서 괜히 주눅 들 일도 어깨를 움츠릴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를 볼 때마다 속이 문드러지는 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지. 짝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혜수의 얼굴이 자못 어두워졌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그때 그의 얼굴을 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며칠 동안 애를 태우며 그의 방 주변을 서성거릴 일도 없었을 텐데. 설렘과 동시에 후회가 찾아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 정말로 또, 짝사랑이 시작된 거야? 미치겠네.”
그의 방문을 손등으로 스윽 스치며, 혜수는 억울한 듯 나직이 뇌까렸다. 허탈하게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며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혜수는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무슨 일이야?”
“아……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선배님.”
“아무 일도 아닌 거 맞아? 네 얼굴은 아주 떨떠름해 보이는데?”
“정말…… 아무 일 아닙니다. 그럼 이만. 좋은 아침 되세요.”
혜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그녀야말로 아무 일도 없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흐르기 시작한 감정 때문에 발만 미치도록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래, 부딪치지 말자. 마주치지 말자. 그럼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애꿎은 엘리베이터 버튼만 죽어라 눌러 댔다.
1. (1)
며칠 전.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3월의 한복판을 향해 달려가던 날씨가 잠시 주춤거리며 한기를 내보냈다. 버스에서 내린 혜수는 갑자기 몰려든 추위에 어깨를 힘껏 모으곤 낑낑대며 우산을 폈다. 한쪽 품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안겨 있던 터라 움직임이 여의치 않았다.
활짝 편 우산으로 꽃다발을 먼저 보호했다. 보도 2국 기자들 방에 들여놓을 꽃이라 제 몸보다 더욱 소중하게 다루어야 했다. 꽃집을 운영하는 그녀의 어머니가 신선한 놈들로 골랐다며 방송국까지 잘 가지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안개꽃과 프리지아 등, 여러 종류였다.
일에 미쳐 분주히 돌아가는 기자 사무실은 꽃과는 하등 상관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엄마! 이런 오지랖은 안 부려도 돼, 제발.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다구!’라며 하소연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이 방송국에 보도국 기자로 입성한 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꽃을 보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벌써 3년째다.
몸의 절반이 비에 흠뻑 젖을지라도 꽃다발만은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혜수는 묵묵히 방송국 정문을 향해 걸었다. 비와 싸우면서 힘겹게 정문을 통과하고 있는데 갑자기 흠씬 젖어 버린 그녀의 한쪽 어깨를 무언가가 살며시 덮고 있었다.
혜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틀었다. 절로 자세를 정돈하게 만드는 존재가 눈앞에 서 있었다. 혜수가 입사한 첫해 보도국 차원에서 맺어 준 그녀의 멘토(mento)이기도 했고 지금은 보도 2국의 피디인 강욱이였다. 그는 자신의 우산으로 그녀의 어깨를 씌워 주고 있었다.
“어? 선배님.”
“서혜수. 너 무슨 짓이야, 이게?”
“……예?”
혜수는 인상을 팍 구기고 있는 강욱의 얼굴을 쳐다보곤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큰 키와 화려한 외모에서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과묵한 그의 성격 때문인지 워낙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잘 웃고 대화도 곧잘 한다고는 하지만 혜수가 직접 겪은 경험은 전무했다.
3년 전 강욱이 그녀의 멘토였던 시절에도 둘 사이에 대화라곤 전혀 없었다. 그는 매일 과제를 냈고 그녀는 그가 낸 미션을 수행할 뿐이었다. 미션에 합격하면 ‘퇴근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걸로 하루가 끝이었다.
하여 그가 베풀고 있는 이 사소한 선의마저, 혜수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대뜸 저렇게 화를 내고 아침부터 인상을 팍팍 쓰고 있다니. 혜수가 어색함에 어물쩍거리고 있는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기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 장대비 속에 제 몸 건사할 생각은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맞을 게 없어서 비를 맞고 있냐? 그러다 감기 걸리면 현장엔 어떻게 나갈 건데?”
그의 잔소리가 속사포처럼 쏟아졌지만 혜수는 의외의 모습에 신기할 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이토록 길게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걸 써. 그건 주고.”
한술 더 떠 그가 쓰고 있던 우산을 혜수 쪽으로 내밀었다. 검은색의 우산은 보통 우산보다 크기가 커서 확실히 비를 덜 맞을 것 같긴 했다. 그는 커다란 우산의 손잡이를 스윽 내밀곤 혜수의 작은 우산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혜수는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아뇨, 서, 선배님. 전 이걸 쓰면 돼요. 어차피 방송국까지 몇 발 남지도 않았는데요.”
“그 몇 발이 중요한 거야. 그 몇 발 사이에 사람이 죽고 병이 나고 감기가 걸릴 수도 있어. 알아? 얼른 안 주고 뭐 해?”
그 순간에, 혜수는 그의 목소리가 귓속을 쑤시고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눈빛이 머리를 찌르고 우산을 내미는 손길이 가슴을 스치는 것 같았다. 괜스레 심장 한구석이 뜨끈해지는 기분에 혜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강욱이 서둘러 우산을 바꾸었다. 강욱의 커다란 우산이 혜수의 손에 쥐어졌고, 혜수의 우산이 강욱의 손에 들렸다. 그가 혜수의 우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로비에 맡겨 둘 테니까 편할 때 찾아가.”
“자, 잠깐만요. 선배님은 비 맞고 들어가시게요?”
“몇 발 남지도 않았는데 뭐.”
혜수가 했던 말을 그가 내뱉었다. 더불어 입꼬리가 스윽 휘어지도록 짧게 미소 지었다. 혜수는 찰나의 순간에 보인 강욱의 미소에 심장이 달음박질하는 것 같았다. 그는 혜수의 우산을 손에 쥔 채 빗속을 뛰었다. 찰박찰박. 그의 구둣발 소리가 멀리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는 금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방금 그 미소는 뭐였지? 왜 나를 보며 웃었던 거지?
그녀가 기자로 일했던 3년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이강욱의 짧은 미소는 비교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받았던 호의에, 혜수의 시선은 한동안 그가 들어선 로비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땅바닥을 향해 규칙적으로 내리꽂히는 빗소리에 갇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와중에도, 강욱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감겨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무척 오랜만에 느껴 본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 혜수는 자신도 모르게 강욱의 방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살짝 열린 문틈 새로 보이는 그의 옷자락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보도 2국 전체 회의 시간에도 되도록 강욱의 근처에 앉으려 남몰래 고군분투했다.
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면할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서운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모르는 그녀만의 작은 소원이 하나 생겼다.
언제 또 비가 오려나.
* * *
스물여덟 해를 사는 동안 혜수에겐 세 번의 짝사랑이 있었고 모두 비극으로 끝이 났다. 첫 번째는 대학 1학년 때로 같은 과의 동기에게 반해 들이댔지만,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그를 가로챘다.
두 번째는 대학 4학년 때 했던 미팅에서 만난 남자로, 알고 보니 그에겐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다. 혜수는 그 남자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걸 알 순간 그 남자의 가운뎃다리를 힘껏 차올려 주었다.
그녀의 마지막 짝사랑의 상대는 기자 시험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같은 학원의 학원생이었다. 오가며 자연스레 안면을 텄고 가끔 떡볶이를 함께 먹으며 친분을 나누었다. 매사에 열심인 그를 흠모하게 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며 맥주를 사던 날, 혜수는 분위기와 술에 취해 고백을 해 버렸고 보기 좋게 걷어채었다. 그는 아직은 여자보다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혜수가 했던 고백을 모든 학원생들에게 소문내어 혜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실속 없이 허세만 가득한 남자였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네 번째의 짝사랑.
당연히 예전과는 태도가 달라졌다. 혜수는 기자 사무실 창밖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먼저 고백하지 말자.
“뭐 해?”
“엄마야!”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진 음성 때문에 혜수는 놀라 어깨를 오므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지아가 다가와 있었다. 혜수와 동갑내기인 지아는 저녁 6시 뉴스의 담당 기자였고, 아침 7시 뉴스를 담당하고 있는 혜수와는 가장 친한 동료였다. 펑퍼짐한 지아의 체구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눌러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하긴. 너 그렇게 진지한 표정은 방송국에선 한 번도 못 봤는데.”
“날씨가 좋아서 그랬다. 이런 날씨에 사무실에 틀어박혀 현장 대기조로 앉아만 있자니 억울해서.”
“가서 점심이나 먹어. 오늘 삼계탕이더라. 나 두 그릇 먹었어. 너 먹으러 간다면 내가 한 그릇 정도 더 먹어 줄 의향이 있어.”
지아가 자랑하듯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보였다. 혜수는 놀란 표정을 다소 과장되게 지어 보이곤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삼겹살 5인분을 먹겠다, 가 생활신조인 지아는 사람 몸에는 지방이 좀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한다. 그래야 사람 냄새가 난다나?
운동보다는 먹는 삶을 택하겠다는 그녀답게 뚱뚱한 체구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외모만 봐선 무척 둔해 보이고 느려 보이지만, 지아는 이곳 기자들 중 가장 민첩하게 현장을 파악하고 중용의 시선에서 그것들을 정리한다. 혜수는 그런 지아가 늘 좋았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 혜수에게 지아는 그런 존재였다. 혜수는 턱을 괸 채로 지아를 쳐다보면서 그녀를 불렀다.
“어이, 김 기자야.”
“왜? 서 기자야.”
“우리가 아주 절친한 친구니까 하는 말인데, 오늘부터라도 다이어트하자. 늦지 않았어. 건강은 젊을 때 지켜야 하는 거라고 우리 엄마가 늘 그러셨거든.”
“워워. 서 기자야. 난 지금이 딱 좋아.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각종 영양소들을 왜 굳이 없애야 해? 난 싫어. 난 내 몸을 누구보다 애정해.”
통하지도 않을 지아였지만, 혜수는 꾹 참고 다이어트의 필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건강은 차치하고라도 저 포동포동한 몸 때문에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한 지아가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물론 지아의 외모가 아닌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알아보고 좋아해 줄 남자가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생각하곤 있지만, 그 생각만 3년째였다. 그런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프롤로그
혜수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심호흡을 했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인 이른 아침의 복도는 적막하고 싸늘했으며,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옮기는 발걸음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복도의 중간쯤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보도 2국 프로듀서 이강욱
팻말 속 이름에 굳어 있던 혜수의 안면 근육이 조금씩 풀려 갔다.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설렘 때문에 괜스레 몸까지 우스꽝스럽게 꼬이는 듯했다.
“이 이름에 이렇게 떨릴 날이 올 줄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문짝에 귀를 가져갔다. 그는 지금쯤 출근해 있을 것이다. 다른 직원들보다 30분 전 출근을 고수하면서, 지각한 후배들을 향해 일침을 날리는 게 그의 하루의 시작이니까.
방 안의 기척에 귀를 활짝 열어 두던 혜수는 어느 순간 이맛살을 구겼다. 늘 그랬듯 그의 방에선 귀에 익은 클래식이 들려왔다. 이강욱의 아침은 늘 클래식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보도국 사람들은 다 안다. 다른 선배들한테 듣기론 벌써 5년째라고 했다.
이강욱과 클래식이라…….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혜수는 늘 생각했다. 그는 뭇 여자들이 한눈에 반할 정도로 모태 미남이 분명했고, 지적인 데다가 과묵하기까지 하여 클래식이 어울릴 법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도 존재했다. 핀트가 어긋나면 불같이 화를 내고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막말을 내뱉는다. 그래서 그에게 들이댄 여자들이 하나같이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나갔다는 소문도 돌았던 것이다.
“모를 일이야.”
문짝에서 귀를 뗀 혜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 자신도 분명 강욱의 일침에 상처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쩌다 이 남자에게 꽂혀 버린 걸까. 혜수는 멀거니 선 채 팻말에 눈을 두었다.
분명히 다른 여자들처럼 혜수 본인도 상처받고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절대 먼저 고백을 하면 안 된다. 이십 대, 그 황금 같은 시기를 짝사랑만 연거푸 세 번으로 날려 먹지 않았던가. 먼저 고백을 하고 차이고, 또 고백하고 차이고. 눈물로 얼룩졌던 그 세월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고백을 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러면 그의 앞에서 괜히 주눅 들 일도 어깨를 움츠릴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를 볼 때마다 속이 문드러지는 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지. 짝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혜수의 얼굴이 자못 어두워졌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그때 그의 얼굴을 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며칠 동안 애를 태우며 그의 방 주변을 서성거릴 일도 없었을 텐데. 설렘과 동시에 후회가 찾아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 정말로 또, 짝사랑이 시작된 거야? 미치겠네.”
그의 방문을 손등으로 스윽 스치며, 혜수는 억울한 듯 나직이 뇌까렸다. 허탈하게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며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혜수는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무슨 일이야?”
“아……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선배님.”
“아무 일도 아닌 거 맞아? 네 얼굴은 아주 떨떠름해 보이는데?”
“정말…… 아무 일 아닙니다. 그럼 이만. 좋은 아침 되세요.”
혜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그녀야말로 아무 일도 없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흐르기 시작한 감정 때문에 발만 미치도록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래, 부딪치지 말자. 마주치지 말자. 그럼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애꿎은 엘리베이터 버튼만 죽어라 눌러 댔다.
1. (1)
며칠 전.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3월의 한복판을 향해 달려가던 날씨가 잠시 주춤거리며 한기를 내보냈다. 버스에서 내린 혜수는 갑자기 몰려든 추위에 어깨를 힘껏 모으곤 낑낑대며 우산을 폈다. 한쪽 품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안겨 있던 터라 움직임이 여의치 않았다.
활짝 편 우산으로 꽃다발을 먼저 보호했다. 보도 2국 기자들 방에 들여놓을 꽃이라 제 몸보다 더욱 소중하게 다루어야 했다. 꽃집을 운영하는 그녀의 어머니가 신선한 놈들로 골랐다며 방송국까지 잘 가지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안개꽃과 프리지아 등, 여러 종류였다.
일에 미쳐 분주히 돌아가는 기자 사무실은 꽃과는 하등 상관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엄마! 이런 오지랖은 안 부려도 돼, 제발.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다구!’라며 하소연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이 방송국에 보도국 기자로 입성한 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꽃을 보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벌써 3년째다.
몸의 절반이 비에 흠뻑 젖을지라도 꽃다발만은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혜수는 묵묵히 방송국 정문을 향해 걸었다. 비와 싸우면서 힘겹게 정문을 통과하고 있는데 갑자기 흠씬 젖어 버린 그녀의 한쪽 어깨를 무언가가 살며시 덮고 있었다.
혜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틀었다. 절로 자세를 정돈하게 만드는 존재가 눈앞에 서 있었다. 혜수가 입사한 첫해 보도국 차원에서 맺어 준 그녀의 멘토(mento)이기도 했고 지금은 보도 2국의 피디인 강욱이였다. 그는 자신의 우산으로 그녀의 어깨를 씌워 주고 있었다.
“어? 선배님.”
“서혜수. 너 무슨 짓이야, 이게?”
“……예?”
혜수는 인상을 팍 구기고 있는 강욱의 얼굴을 쳐다보곤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큰 키와 화려한 외모에서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과묵한 그의 성격 때문인지 워낙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잘 웃고 대화도 곧잘 한다고는 하지만 혜수가 직접 겪은 경험은 전무했다.
3년 전 강욱이 그녀의 멘토였던 시절에도 둘 사이에 대화라곤 전혀 없었다. 그는 매일 과제를 냈고 그녀는 그가 낸 미션을 수행할 뿐이었다. 미션에 합격하면 ‘퇴근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걸로 하루가 끝이었다.
하여 그가 베풀고 있는 이 사소한 선의마저, 혜수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대뜸 저렇게 화를 내고 아침부터 인상을 팍팍 쓰고 있다니. 혜수가 어색함에 어물쩍거리고 있는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기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 장대비 속에 제 몸 건사할 생각은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맞을 게 없어서 비를 맞고 있냐? 그러다 감기 걸리면 현장엔 어떻게 나갈 건데?”
그의 잔소리가 속사포처럼 쏟아졌지만 혜수는 의외의 모습에 신기할 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이토록 길게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걸 써. 그건 주고.”
한술 더 떠 그가 쓰고 있던 우산을 혜수 쪽으로 내밀었다. 검은색의 우산은 보통 우산보다 크기가 커서 확실히 비를 덜 맞을 것 같긴 했다. 그는 커다란 우산의 손잡이를 스윽 내밀곤 혜수의 작은 우산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혜수는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아뇨, 서, 선배님. 전 이걸 쓰면 돼요. 어차피 방송국까지 몇 발 남지도 않았는데요.”
“그 몇 발이 중요한 거야. 그 몇 발 사이에 사람이 죽고 병이 나고 감기가 걸릴 수도 있어. 알아? 얼른 안 주고 뭐 해?”
그 순간에, 혜수는 그의 목소리가 귓속을 쑤시고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눈빛이 머리를 찌르고 우산을 내미는 손길이 가슴을 스치는 것 같았다. 괜스레 심장 한구석이 뜨끈해지는 기분에 혜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강욱이 서둘러 우산을 바꾸었다. 강욱의 커다란 우산이 혜수의 손에 쥐어졌고, 혜수의 우산이 강욱의 손에 들렸다. 그가 혜수의 우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로비에 맡겨 둘 테니까 편할 때 찾아가.”
“자, 잠깐만요. 선배님은 비 맞고 들어가시게요?”
“몇 발 남지도 않았는데 뭐.”
혜수가 했던 말을 그가 내뱉었다. 더불어 입꼬리가 스윽 휘어지도록 짧게 미소 지었다. 혜수는 찰나의 순간에 보인 강욱의 미소에 심장이 달음박질하는 것 같았다. 그는 혜수의 우산을 손에 쥔 채 빗속을 뛰었다. 찰박찰박. 그의 구둣발 소리가 멀리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는 금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방금 그 미소는 뭐였지? 왜 나를 보며 웃었던 거지?
그녀가 기자로 일했던 3년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이강욱의 짧은 미소는 비교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받았던 호의에, 혜수의 시선은 한동안 그가 들어선 로비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땅바닥을 향해 규칙적으로 내리꽂히는 빗소리에 갇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와중에도, 강욱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감겨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무척 오랜만에 느껴 본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 혜수는 자신도 모르게 강욱의 방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 살짝 열린 문틈 새로 보이는 그의 옷자락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보도 2국 전체 회의 시간에도 되도록 강욱의 근처에 앉으려 남몰래 고군분투했다.
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면할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서운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모르는 그녀만의 작은 소원이 하나 생겼다.
언제 또 비가 오려나.
* * *
스물여덟 해를 사는 동안 혜수에겐 세 번의 짝사랑이 있었고 모두 비극으로 끝이 났다. 첫 번째는 대학 1학년 때로 같은 과의 동기에게 반해 들이댔지만,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그를 가로챘다.
두 번째는 대학 4학년 때 했던 미팅에서 만난 남자로, 알고 보니 그에겐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다. 혜수는 그 남자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걸 알 순간 그 남자의 가운뎃다리를 힘껏 차올려 주었다.
그녀의 마지막 짝사랑의 상대는 기자 시험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같은 학원의 학원생이었다. 오가며 자연스레 안면을 텄고 가끔 떡볶이를 함께 먹으며 친분을 나누었다. 매사에 열심인 그를 흠모하게 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며 맥주를 사던 날, 혜수는 분위기와 술에 취해 고백을 해 버렸고 보기 좋게 걷어채었다. 그는 아직은 여자보다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혜수가 했던 고백을 모든 학원생들에게 소문내어 혜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실속 없이 허세만 가득한 남자였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네 번째의 짝사랑.
당연히 예전과는 태도가 달라졌다. 혜수는 기자 사무실 창밖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먼저 고백하지 말자.
“뭐 해?”
“엄마야!”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진 음성 때문에 혜수는 놀라 어깨를 오므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지아가 다가와 있었다. 혜수와 동갑내기인 지아는 저녁 6시 뉴스의 담당 기자였고, 아침 7시 뉴스를 담당하고 있는 혜수와는 가장 친한 동료였다. 펑퍼짐한 지아의 체구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눌러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하긴. 너 그렇게 진지한 표정은 방송국에선 한 번도 못 봤는데.”
“날씨가 좋아서 그랬다. 이런 날씨에 사무실에 틀어박혀 현장 대기조로 앉아만 있자니 억울해서.”
“가서 점심이나 먹어. 오늘 삼계탕이더라. 나 두 그릇 먹었어. 너 먹으러 간다면 내가 한 그릇 정도 더 먹어 줄 의향이 있어.”
지아가 자랑하듯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보였다. 혜수는 놀란 표정을 다소 과장되게 지어 보이곤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삼겹살 5인분을 먹겠다, 가 생활신조인 지아는 사람 몸에는 지방이 좀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한다. 그래야 사람 냄새가 난다나?
운동보다는 먹는 삶을 택하겠다는 그녀답게 뚱뚱한 체구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외모만 봐선 무척 둔해 보이고 느려 보이지만, 지아는 이곳 기자들 중 가장 민첩하게 현장을 파악하고 중용의 시선에서 그것들을 정리한다. 혜수는 그런 지아가 늘 좋았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 혜수에게 지아는 그런 존재였다. 혜수는 턱을 괸 채로 지아를 쳐다보면서 그녀를 불렀다.
“어이, 김 기자야.”
“왜? 서 기자야.”
“우리가 아주 절친한 친구니까 하는 말인데, 오늘부터라도 다이어트하자. 늦지 않았어. 건강은 젊을 때 지켜야 하는 거라고 우리 엄마가 늘 그러셨거든.”
“워워. 서 기자야. 난 지금이 딱 좋아.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각종 영양소들을 왜 굳이 없애야 해? 난 싫어. 난 내 몸을 누구보다 애정해.”
통하지도 않을 지아였지만, 혜수는 꾹 참고 다이어트의 필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건강은 차치하고라도 저 포동포동한 몸 때문에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한 지아가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물론 지아의 외모가 아닌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알아보고 좋아해 줄 남자가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생각하곤 있지만, 그 생각만 3년째였다. 그런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