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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리자 은호는 잠시 당황하여 음성을 낮추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는 짜증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해은은 숨을 쉴 틈도 없이 그에게 물었다.
“네 짓이니?”
“뭐가?”
“블라디보스톡.”
해은의 서늘한 음성에 은호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대로 나가지 않는 대답은, 역시 그녀의 질문에 대한 긍정을 뜻했다. 해은과 사귄 게 1년 남짓, 그리고 해은에게 이별을 고한 지 두 달.
하지만 여전히 병원 안 여기저기에서 툭하면 마주치는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현재 한창 공을 들이고 있는 성형외과 레지던트 1년차인 민경에게 해은이 찾아가 자신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꿈을 매일 꾼다.
“네가 부원장님한테 나 보내라고 떼 쓴 거 맞지? 네 아버지한테 말이야.”
“연유야 어찌됐건 넌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르면 되는 거 아냐? 그걸 왜 나한테 뭐라 그래?”
“솔직해서 좋다, 김은호? 나한테 들이댈 때도 그렇게 솔직하지 그랬어?”
“뭐?”
해은은 잔뜩 불쾌해하고 있는 은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연애 기간 내내 어떻게든 그녀를 구슬려 잠자리 할 생각만 했던 게 그의 본모습이었다.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자 급기야 자신 몰래 다른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내기 시작한 사람이다.
어차피 은호에게 깊은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들 그녀를 싫어한다고 여기고 있던 와중에 유일하게 웃으며 다가온 은호가 신기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부원장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의사로 크게 성공하고자 했던 해은에게 호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비밀연애가 시작됐다.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사랑을 받는 방법에 모두 서툴렀던 해은은 결국 은호의 본모습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어이, 파파보이.”
해은은 은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서른이나 먹도록 아버지 품 안에서 놀아날 거면 앞으로 만날 여자들한테 당당하게 못 박아둬. 넌 파파보이라고. 나한테처럼 뒤통수 때리지 말고.”
“그러는 넌? 너도 애초부터 나한테 감정도 없었잖아. 내가 이 병원 부원장 아들이래서 나한테 쉽게 넘어왔던 거 아냐? 하긴 너 같은 애가 연애하자고 하는 말에 덥석 그러마고 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지. 넌 도서관이랑 병원밖에 모르는 앤데 말이야.”
“내가 네 배경을 탐낸 것과, 네가 내 몸만 탐낸 게 뭐가 달라?”
“동일선상에 놓으면 안 되지. 내 부모는 적어도 미혼모나 미혼부는 아니잖아?”
빈정대는 듯한 은호의 말투에 해은은 턱을 굳혔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이별을 선언한 이유가 이거였다는 것을. 은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지 확실히는 모른다. 아마도 엄마와 통화를 할 때 옆에서 다 듣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엄마는 통화를 할 때마다 신세한탄을 하니까.
‘엄마가 미혼모였던 게 내 잘못이야?’라고 전화로 눌렀던 화를 쏟아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옆자리에 은호가 와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다음 날 은호에게서 이별통보를 받았다. 그러니 여기서 이별의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개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툭 터놓고 말해보자. 가진 건 머리 하나뿐인 주제에 나한테 다리 한 번 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냐? 네 거기는 뭐 금이라도 박혀있대? 난 네가 하도 튕기기에 대단한 백그라운드라도 가진 줄 알았지 뭐냐.”
결국 바닥까지 보이고야 만 은호와의 대면이 더는 견디기가 힘겨웠다. 그 어느 때보다 치욕스러운 순간을 맛보고 있음에도 그것보다 더 분명하게 와 닿는 건, 이제 블라디보스톡으로 꼼짝없이 날아가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가 직접 네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철회해달라고 할 수 없다 이거지?”
“난 술 먹고 아빠한테 술주정으로 그랬을 뿐이야. 아빠가 정말로 수를 쓰실 줄은 몰랐어. 그게 다야. 날더러 뭘 어쩌라고?”
“너한테 뭘 어쩌라는 건 아냐. 내가 알아서 해.”
해은은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었다. 날아갈 때 날아가더라도 자신이 충분히 억울할만한 일이라는 사실을 어필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급히 움직이는 그녀의 발걸음을 은호가 방해했다.
“아버지한테 가는 길이라면 소용없어. 오늘 아침에 학회 때문에 미국에 가셨어.”
비상구를 나가려던 걸음이 느리게 끌렸다. 해은은 걸음을 멈추고 뇌까렸다.
“막장이 따로 없구나.”
바닥까지 끌려 내려가서야 현실이 보인다. 진흙구덩이에서 뒹굴다가 온몸이 더럽혀진 현실이. 해은은 씁쓸하게 자조하며 그곳을 떠났다. 너는 왜, 라는 질문을 채 던지기도 전에 알아버린 이유. 그 이유에 갇혀 또다시 그녀 자신을 잃어버리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 머릿속을 비워야했다.
의국으로 돌아온 해은은 무너지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에 머리털까지 아픈 듯했다. 이러다 응급 콜이라도 들어오면 큰일인데, 라는 생각으로 아랫입술을 으깨 물며 양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도록, 그 힘이 온몸에 다시 퍼져 기운을 낼 수 있도록,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꿈이 무너진 게 아니라고 되뇌면서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무너지려 하는 자신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몇 차례의 호흡을 들이켠 해은은 결심한 듯 핸드폰을 쥐었다. 엄마의 번호를 찾아 버튼을 누르려는데 차마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빌어먹을 신세한탄 때문에 짜증이 나곤 했지만, 오직 딸 하나만 보고 살아온 엄마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알기에 섣불리 실망을 안겨주기가 두려웠다.
블라디보스톡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엄마는 최소한 일주일 정돈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울지도 모른다. 어차피 서울에 있어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으니, 전근에 대한 건 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은이 엄마에겐 블라디보스톡 행을 숨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데, 불현듯 의국의 문이 열리고 영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하니? 여기서?”
문짝에 삐딱하게 기대고 서서 쳐다보는 눈빛을 보니 영인도 이 사태를 모두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해은은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아하! 혹시 블라디보스톡에 대해서 검색이라도 해 본 거야?”
묻는 어투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예과 시절부터 해은의 라이벌로 자리 잡았던 영인은 부모가 모두 의사로, 은호와 같은 금수저 출신이었다. 타고나기를 사랑받을 수밖에 없게끔 타고난 영인이 유일하게 적대시하는 대상이 해은이다. 주위에서 라이벌이라 칭했지만 실상 영인의 실력은 해은에 비해 뒤처졌던 것이다. 영인은 묵묵부답인 해은을 보며 조소했다.
“로비게시판에 발령공고문이 붙어 있어서 알게 됐어. 내가 교수님들한테 여쭤봤는데, 블라디보스톡이 살기에 되게 좋다더라? 금세 적응될 거야.”
“고맙다. 걱정해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머릿속이 갈라질 정도로 골치가 지끈거렸지만 우선 그녀 자신부터가 무감각해져야 견뎌낼 수 있을 듯했다. 영인의 저 비웃음조차도. 그녀의 무감한 대답 한마디에 영인은 더욱 신나 했다.
“너 일하면서 뭐 실수한 거 있어? 아니지. 너한테 실수를 묻다니 내가 잠시 미쳤나 보다. 네가 실수 같은 걸 할 애가 아닌데. 그럼 대체 이유가 뭔데?”
영인은 대답을 기다리며 해은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도피를 해야 할 성 싶었다. 해은의 마음속 파란을 알 리 없는 영인은 계속해서 해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 뭐. 거기도 두 달 전에 베드 200개 돌파했다더라. 병원 평판도 좋은 편이고 뭣보다 전부 다 우리 병원에서 차출된 사람들이니 아는 얼굴일 거잖아. 그거 하난 다행이다. 그치?”
“그러게.”
“급여도 여기 두 배라며? 땡 잡은 거지.”
“그럴지도.”
“출퇴근 시간도 칼이라잖아. 물론 무료진료의 날이 되면 바쁘겠지만. 넌 이 기회에 쉬엄쉬엄 논다고 생각하고 체력이랑 건강이나 챙기는 거야.”
“그러든지.”
“각 과별로 통역사도 붙어 있다니까 언어소통에 큰 문젠 없을 거야.”
“그렇겠지.”
“아, 참! 그러고 보니 우리 과 한재열 교수님도 작년 이맘 때 자원해서 거기 가셨잖아.”
영인이 그렇게 말하는 의도를 알면서도 멀거니 기계적으로 대답을 이어가던 해은은 그 부분에서 눈을 확 치떴다. 동시에 미간이 절로 찡그려지고 마치 눈앞에 현실이 다가오기라도 한 양 각성의 한숨을 터뜨렸다. 그녀는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맞다. 그 또라이 교수님도 거기 계시지.”
“또라이라니. 능력 있는 스텝한테 말버릇 고약한 거 보니 아직 기 안 죽었네?
“쓸데없이 한량이시니까. 어느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사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야.”
“네 문제는 바로 그거야. 다른 사람들을 형편없이 깔고 본다는 거. 너 그 교수님 손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 줄 알아? 나 인턴 때 운 좋게 NA(nonfunctioning adenoma, 비기능성 샘종) 수술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집도의가 당시 치프였던 한 교수님이었어. 스텝도 아닌 분이 수술집도를 하셨고 게다가 어시로 들어온 레지던트들 다루는 스킬이 장난 아니셔. 내가 그 수술을 보고 신경외과 레지던트에 지원했을 정도니까.”
“그거야 네가 운이 좋았을 때 얘기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 교수님은 한량이야. 대충 시간만 죽이다가 수술 있으면 들어가고 없으면 아무 데서나 누워서 자고. 실력이 아무리 있으면 뭐해. 앞날이 안 보이는데. 네 존경심을 남한테 강요하지 마.”
해은의 단언에 영인은 입술을 쀼루퉁하게 내밀었다. 역시 정이 가지 않는 친구라는 표정이다. 영인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넌 왜 그렇게 애가 꼬였니?”
“넌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아무리 즐거워도 거짓말은 하지 말지?”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지금 즐거워서 미치겠잖아. 네 기분 충분히 알 것 같으니까 걱정된다느니 뭐 그런 거짓말로 자존감을 상실하지 말란 소리야.”
해은의 말에 영인의 낯빛이 금세 일그러졌다. 부아에 입술을 떨며 무언가 할 말을 찾고 있던 영인이 마침 긴급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해은이 그것을 냅다 가로챈다.
“응급실이네. 내가 갈게.”
“야! 문해은! 나한테 온 호출이잖아!”
“떠나기 전에 교수님들한테 점수 좀 따놔야지. 넌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겠지만 난 아니야.”
그러곤 영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쌩하니 나가버린다. 뜨악해진 영인은 바람을 일으키고 나가버린 해은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나쁜 년. 뭐 저런 게 다 있어!”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리자 은호는 잠시 당황하여 음성을 낮추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는 짜증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해은은 숨을 쉴 틈도 없이 그에게 물었다.
“네 짓이니?”
“뭐가?”
“블라디보스톡.”
해은의 서늘한 음성에 은호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대로 나가지 않는 대답은, 역시 그녀의 질문에 대한 긍정을 뜻했다. 해은과 사귄 게 1년 남짓, 그리고 해은에게 이별을 고한 지 두 달.
하지만 여전히 병원 안 여기저기에서 툭하면 마주치는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현재 한창 공을 들이고 있는 성형외과 레지던트 1년차인 민경에게 해은이 찾아가 자신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꿈을 매일 꾼다.
“네가 부원장님한테 나 보내라고 떼 쓴 거 맞지? 네 아버지한테 말이야.”
“연유야 어찌됐건 넌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르면 되는 거 아냐? 그걸 왜 나한테 뭐라 그래?”
“솔직해서 좋다, 김은호? 나한테 들이댈 때도 그렇게 솔직하지 그랬어?”
“뭐?”
해은은 잔뜩 불쾌해하고 있는 은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연애 기간 내내 어떻게든 그녀를 구슬려 잠자리 할 생각만 했던 게 그의 본모습이었다.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자 급기야 자신 몰래 다른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내기 시작한 사람이다.
어차피 은호에게 깊은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들 그녀를 싫어한다고 여기고 있던 와중에 유일하게 웃으며 다가온 은호가 신기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부원장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의사로 크게 성공하고자 했던 해은에게 호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비밀연애가 시작됐다.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사랑을 받는 방법에 모두 서툴렀던 해은은 결국 은호의 본모습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어이, 파파보이.”
해은은 은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서른이나 먹도록 아버지 품 안에서 놀아날 거면 앞으로 만날 여자들한테 당당하게 못 박아둬. 넌 파파보이라고. 나한테처럼 뒤통수 때리지 말고.”
“그러는 넌? 너도 애초부터 나한테 감정도 없었잖아. 내가 이 병원 부원장 아들이래서 나한테 쉽게 넘어왔던 거 아냐? 하긴 너 같은 애가 연애하자고 하는 말에 덥석 그러마고 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지. 넌 도서관이랑 병원밖에 모르는 앤데 말이야.”
“내가 네 배경을 탐낸 것과, 네가 내 몸만 탐낸 게 뭐가 달라?”
“동일선상에 놓으면 안 되지. 내 부모는 적어도 미혼모나 미혼부는 아니잖아?”
빈정대는 듯한 은호의 말투에 해은은 턱을 굳혔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이별을 선언한 이유가 이거였다는 것을. 은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지 확실히는 모른다. 아마도 엄마와 통화를 할 때 옆에서 다 듣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엄마는 통화를 할 때마다 신세한탄을 하니까.
‘엄마가 미혼모였던 게 내 잘못이야?’라고 전화로 눌렀던 화를 쏟아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옆자리에 은호가 와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다음 날 은호에게서 이별통보를 받았다. 그러니 여기서 이별의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개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툭 터놓고 말해보자. 가진 건 머리 하나뿐인 주제에 나한테 다리 한 번 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냐? 네 거기는 뭐 금이라도 박혀있대? 난 네가 하도 튕기기에 대단한 백그라운드라도 가진 줄 알았지 뭐냐.”
결국 바닥까지 보이고야 만 은호와의 대면이 더는 견디기가 힘겨웠다. 그 어느 때보다 치욕스러운 순간을 맛보고 있음에도 그것보다 더 분명하게 와 닿는 건, 이제 블라디보스톡으로 꼼짝없이 날아가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가 직접 네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철회해달라고 할 수 없다 이거지?”
“난 술 먹고 아빠한테 술주정으로 그랬을 뿐이야. 아빠가 정말로 수를 쓰실 줄은 몰랐어. 그게 다야. 날더러 뭘 어쩌라고?”
“너한테 뭘 어쩌라는 건 아냐. 내가 알아서 해.”
해은은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었다. 날아갈 때 날아가더라도 자신이 충분히 억울할만한 일이라는 사실을 어필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급히 움직이는 그녀의 발걸음을 은호가 방해했다.
“아버지한테 가는 길이라면 소용없어. 오늘 아침에 학회 때문에 미국에 가셨어.”
비상구를 나가려던 걸음이 느리게 끌렸다. 해은은 걸음을 멈추고 뇌까렸다.
“막장이 따로 없구나.”
바닥까지 끌려 내려가서야 현실이 보인다. 진흙구덩이에서 뒹굴다가 온몸이 더럽혀진 현실이. 해은은 씁쓸하게 자조하며 그곳을 떠났다. 너는 왜, 라는 질문을 채 던지기도 전에 알아버린 이유. 그 이유에 갇혀 또다시 그녀 자신을 잃어버리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 머릿속을 비워야했다.
의국으로 돌아온 해은은 무너지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에 머리털까지 아픈 듯했다. 이러다 응급 콜이라도 들어오면 큰일인데, 라는 생각으로 아랫입술을 으깨 물며 양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도록, 그 힘이 온몸에 다시 퍼져 기운을 낼 수 있도록,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꿈이 무너진 게 아니라고 되뇌면서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무너지려 하는 자신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몇 차례의 호흡을 들이켠 해은은 결심한 듯 핸드폰을 쥐었다. 엄마의 번호를 찾아 버튼을 누르려는데 차마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빌어먹을 신세한탄 때문에 짜증이 나곤 했지만, 오직 딸 하나만 보고 살아온 엄마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알기에 섣불리 실망을 안겨주기가 두려웠다.
블라디보스톡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엄마는 최소한 일주일 정돈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울지도 모른다. 어차피 서울에 있어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으니, 전근에 대한 건 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은이 엄마에겐 블라디보스톡 행을 숨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데, 불현듯 의국의 문이 열리고 영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하니? 여기서?”
문짝에 삐딱하게 기대고 서서 쳐다보는 눈빛을 보니 영인도 이 사태를 모두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해은은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아하! 혹시 블라디보스톡에 대해서 검색이라도 해 본 거야?”
묻는 어투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예과 시절부터 해은의 라이벌로 자리 잡았던 영인은 부모가 모두 의사로, 은호와 같은 금수저 출신이었다. 타고나기를 사랑받을 수밖에 없게끔 타고난 영인이 유일하게 적대시하는 대상이 해은이다. 주위에서 라이벌이라 칭했지만 실상 영인의 실력은 해은에 비해 뒤처졌던 것이다. 영인은 묵묵부답인 해은을 보며 조소했다.
“로비게시판에 발령공고문이 붙어 있어서 알게 됐어. 내가 교수님들한테 여쭤봤는데, 블라디보스톡이 살기에 되게 좋다더라? 금세 적응될 거야.”
“고맙다. 걱정해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머릿속이 갈라질 정도로 골치가 지끈거렸지만 우선 그녀 자신부터가 무감각해져야 견뎌낼 수 있을 듯했다. 영인의 저 비웃음조차도. 그녀의 무감한 대답 한마디에 영인은 더욱 신나 했다.
“너 일하면서 뭐 실수한 거 있어? 아니지. 너한테 실수를 묻다니 내가 잠시 미쳤나 보다. 네가 실수 같은 걸 할 애가 아닌데. 그럼 대체 이유가 뭔데?”
영인은 대답을 기다리며 해은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도피를 해야 할 성 싶었다. 해은의 마음속 파란을 알 리 없는 영인은 계속해서 해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 뭐. 거기도 두 달 전에 베드 200개 돌파했다더라. 병원 평판도 좋은 편이고 뭣보다 전부 다 우리 병원에서 차출된 사람들이니 아는 얼굴일 거잖아. 그거 하난 다행이다. 그치?”
“그러게.”
“급여도 여기 두 배라며? 땡 잡은 거지.”
“그럴지도.”
“출퇴근 시간도 칼이라잖아. 물론 무료진료의 날이 되면 바쁘겠지만. 넌 이 기회에 쉬엄쉬엄 논다고 생각하고 체력이랑 건강이나 챙기는 거야.”
“그러든지.”
“각 과별로 통역사도 붙어 있다니까 언어소통에 큰 문젠 없을 거야.”
“그렇겠지.”
“아, 참! 그러고 보니 우리 과 한재열 교수님도 작년 이맘 때 자원해서 거기 가셨잖아.”
영인이 그렇게 말하는 의도를 알면서도 멀거니 기계적으로 대답을 이어가던 해은은 그 부분에서 눈을 확 치떴다. 동시에 미간이 절로 찡그려지고 마치 눈앞에 현실이 다가오기라도 한 양 각성의 한숨을 터뜨렸다. 그녀는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맞다. 그 또라이 교수님도 거기 계시지.”
“또라이라니. 능력 있는 스텝한테 말버릇 고약한 거 보니 아직 기 안 죽었네?
“쓸데없이 한량이시니까. 어느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사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야.”
“네 문제는 바로 그거야. 다른 사람들을 형편없이 깔고 본다는 거. 너 그 교수님 손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 줄 알아? 나 인턴 때 운 좋게 NA(nonfunctioning adenoma, 비기능성 샘종) 수술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집도의가 당시 치프였던 한 교수님이었어. 스텝도 아닌 분이 수술집도를 하셨고 게다가 어시로 들어온 레지던트들 다루는 스킬이 장난 아니셔. 내가 그 수술을 보고 신경외과 레지던트에 지원했을 정도니까.”
“그거야 네가 운이 좋았을 때 얘기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 교수님은 한량이야. 대충 시간만 죽이다가 수술 있으면 들어가고 없으면 아무 데서나 누워서 자고. 실력이 아무리 있으면 뭐해. 앞날이 안 보이는데. 네 존경심을 남한테 강요하지 마.”
해은의 단언에 영인은 입술을 쀼루퉁하게 내밀었다. 역시 정이 가지 않는 친구라는 표정이다. 영인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넌 왜 그렇게 애가 꼬였니?”
“넌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아무리 즐거워도 거짓말은 하지 말지?”
“그게 무슨 뜻이야?”
“너 지금 즐거워서 미치겠잖아. 네 기분 충분히 알 것 같으니까 걱정된다느니 뭐 그런 거짓말로 자존감을 상실하지 말란 소리야.”
해은의 말에 영인의 낯빛이 금세 일그러졌다. 부아에 입술을 떨며 무언가 할 말을 찾고 있던 영인이 마침 긴급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해은이 그것을 냅다 가로챈다.
“응급실이네. 내가 갈게.”
“야! 문해은! 나한테 온 호출이잖아!”
“떠나기 전에 교수님들한테 점수 좀 따놔야지. 넌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겠지만 난 아니야.”
그러곤 영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쌩하니 나가버린다. 뜨악해진 영인은 바람을 일으키고 나가버린 해은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나쁜 년. 뭐 저런 게 다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