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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는 연애 중
1화
아무르(Amour).
프랑스어로 ‘사랑’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아무르는 패션, 뷰티, 시계와 파인 주얼리 등을 제작, 판매하는 명품 브랜드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고급화된 질로 자신의 이름처럼 많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창립 10년 만에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사인 인터브랜드에서 선정하는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 3년 연속,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아무르가 이렇게까지 빠른 시일 내에 크게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공신을 세운 것은 패션 사업 중 ‘가방’ 파트였다.
창립되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매출 없이 회사 자금만 갉아먹는다고 송충이 취급을 받던 가방 디자인 팀이 훗날에 아무르의 가장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그 중심엔, 한 여자가 있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 탁월한 감각, 뛰어난 실력과 그 모든 것들을 뒷받침하는 그녀의 악착같은 노력이 결국, 최고의 가방을 만들어 냈다. 신상품으로 출시된 ‘봄의 유혹’이라는 타이틀을 단 가방으로 아무르 연 매출을 무려 30.8%나 성장시키는 기적을 보여 주며 그녀는 단숨에 이사 직급을 달고 아무르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 이름, 바로 메두사.
변정연이었다.
프롤로그
1. 메두사, 변정연
“야. 야. 메두사 떴다! 떴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 외치는 사원의 한마디에 사무실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휴게실에서 앉아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던 사원들도, 근무 시간 전까지 한가로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던 사원도, 개인적인 전화 통화를 하고 있던 사원도, 아침밥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사원도, 손에 잡힌 모든 것들을 버리다시피 내팽개치고 허둥지둥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꼿꼿이 허리를 핀 정자세로 업무에 들어갔다.
또각또각.
대리석을 노크하듯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점점 가깝게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에 사원들의 긴장은 극심하게 치솟았다. 저승사자가 이곳을 방문한다 해도 이보다 더 두렵진 않으리.
마침내, 사무실 자동문이 열리고 단 한 번의 숨소리만으로도 중압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녀, 정연이 들어왔다. 사원들은 왕국에서나 볼 듯한 근위병처럼 그녀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지나치게 형식적인 사원들의 인사에 정연은 가볍게 눈을 맞추고는 자신의 사무실이 위치한 2층으로 향했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며 계단으로 올라서는 모습을 보는 사원들의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녀가 사무실 안까지 무사히 들어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잠깐의 긴장도 늦출 수 없어 보이는 초식 동물들의 본능적인 웅크림이었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사무실 안으로 그녀가 들어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걸고 자리에 앉자, 그제야 꽉 막혀 있던 바깥 사무실 이곳저곳에서 숨통 트이는 한숨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책상 위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서류들을 들고 일어나자 그들은 올 것이 왔다며 울상이 된 얼굴로 서둘러 회의 자료를 준비했다.
아래로 내려온 정연은 서류를 들고 있는 손으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이제, 2차 폭탄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할 것이다.
회의실에 모인 사원들은 사냥 나온 암사자의 시야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녀린 사슴들처럼 몸을 최대한 움츠리며 정연의 시선을 피했다.
사원들이 제출한 이번 시즌 신상품 디자인들을 보던 정연의 손이 멈췄다. 그러자 사원들은 제발, 자신의 것은 아니기를 바라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정연이 들고 있던 디자인을 뒤에 앉아 있는 비서에게 보여 주자, 비서가 미리 받은 USB의 자료들을 빔으로 쐈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빔 속에 자신의 디자인이 뜨자, 민정의 얼굴이 절망으로 구겨졌다.
“프린지 장식의 스웨이드 숄더백으로…….”
치이이이익―
더듬거리는 민정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분쇄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회의실 안을 매섭게 점령했다. 분쇄기를 통해 처참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 가고 있는 자신의 디자인을 보는 민정의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불만 있어?”
하나의 과녁을 뚫는 첨예한 화살 같은 정연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민정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럼 그것에 대해서 설명해 봐.”
“네?”
“불만이 없다며. 자신의 자식과도 같다고 여기는 디자인이 이렇게 눈앞에서 무참히 버려지는데도, 불만이 없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설명해 보라고.”
“창의성이…….”
민정은 최대한 정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허공을 바라보며 변명하려 했지만, 도통 떠오르는 말이 없어 그대로 말꼬리를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민정의 목소리에 정연이 한쪽 다리를 꼬고 붉은 입꼬리를 매섭게 올렸다. 사원들은 그녀의 그 작은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지독히도 잘 알고 있기에 모두들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다.
“나 봐요. 여민정 씨.”
정연의 말에 민정의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쳤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자신을 보는 순간, 돌로 만들어 버리는 저주에 걸린 메두사의 자신을 보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여민정 씨, 날 보라고요.”
민정은 마른침을 꼴깍 삼켜서 넘겼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급기야는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심장이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방향을 찾지 못해 두려움에 가득 찬 민정의 초점이 정연에게로 향했다.
“여민정 씨가 만든 디자인의 가방이라면, 난 공짜로 준다고 해도 안 메고 다녀요. 왜? 공짜인 걸 너무 티 내는 것 같아 쪽팔려서.”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저 가방 만든 의도가 뭐야? 동네 시장에 장이나 보러 다닐 때 메라고 만든 거야? 우리 아무르에서?”
얼어붙은 심장이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져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저건, 스웨이드를 능멸하는 디자인이야.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스웨이드를 능멸하는 디자인이 아니라 아무르 디자이너들을 능멸하는 디자인이다. 재작년에나 유행했던 것들을 재탕해야 될 만큼, 소재가 고갈된 거야? 그렇게 고갈된 디자인으로 앞으로 계속 이 생활 할 수나 있겠어?”
민정은 충격을 받아 그대로 굳어져 눈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많은 사원들이 자신의 디자인과 함께 무참히 박살 나고 깨졌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뛰어난 실력과 예리한 안목은 언제나 적중했기에,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클러치백엔 입체적인 스터드 장식을 좀 넣으면 어떨까 하는데.”
거의 삼십 개가 되는 디자인 중에, 분쇄기에 갈리지 않은 가방은 딱 하나였다. 그것도 그리 썩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보완을 해 본다면 꽤 괜찮은 가방이 나올 디자인이었다.
“똑바로들 들어요. 밥 먹을 거 다 먹고, 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면서 일을 하니까, 이따위 디자인들이 나오는 거예요. 아, 발로 그린 디자인들치고는 꽤 봐 줄 만하죠. 앞으로 더 기대되네. 날 얼마나 더 실망시킬 것인지에 대해. 고객들은 가방의 디자인은 다 거기서 거기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 아무르 가방을 보며 그렇게 말할 순 없어. 왜냐. 내가 거기서 거기인 가방은 절대, 출시를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똑 부러지게 말을 이어 가는 정연의 목소리에는 어떤 배려나 망설임도 없었다. 사원들은 모두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찍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렸다.
“하! 정말, 오늘 똥 제대로 밟았다.”
정연이 회의실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 부장이 답답한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탄식했다.
“처음에 들어왔을 땐,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나한테 말도 제대로 못 붙였던 게, 아휴 그냥!”
김 부장은 정연이 나간 방향을 향해 서류를 집어 던지는 동작을 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아무튼, 성질머리가 저러니까 시집을 못 가지.”
“야, 연애도 못 하는 인간이 무슨 시집이야, 시집은. 노처녀 히스테리가 따로 없어.”
“요즘 더 심해진 것 같지 않아요?”
“연애를 안 하는 기간이 더 길어지니까, 심해질 수밖에! 그런데 저 성격 고약한 여자를 어느 남자가 감당이나 할 수 있겠어? 더군다나, 남자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나 보이는 독사 같은 여자를!”
“어디 독설 학원 같은 데 다니는 거 아니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죠?”
“학원은 무슨……. 지가 거기서 강의를 하면 했지. 저 정도는 배우는 수준이 아니야. 가르치는 수준이지.”
“하긴……. 근데, 그 와중에 오늘 메두사 목걸이 진짜 예쁘지 않았어요?”
“스커트도 예쁘더라. 얼마지? 내 월급으로는 감히 감당도 되지 않을 가격의 신상이겠지?”
“자자, 수다 그만 떨고 가서 일하자고. 밥까지 굶으면서 디자인에 매진하라고 하신 이사님이 눈에 불을 켜고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온 사원들의 이목이 일제히 오늘도 역시 끔찍한 지옥의 맛을 보여 준 정연에게 잠시 닿았다가 몸서리를 치며 떨어져 나갔다.
* * *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정연은 소등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듣고 나서야, 혼자 남아 있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찌뿌드드하게 굳은 목을 느긋이 풀어 주며 승강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조금씩 밀려오는 허기짐에 뭘 먹을까, 고민하던 정연의 시야로 승강기 문이 열렸다.
“어머, 변 이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안에서 들려오는 반갑지 않은 말랑말랑한 목소리에 정연의 고운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안에는 슈즈 디자인 팀 권 이사가 타 있었다. 두 손에 금수저를 쥔 채 엄청 튼튼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대표 이사의 딸, 권혜림.
같은 ‘이사’ 직급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 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술을 마신 모양인지, 평소 투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얀 얼굴이 장미를 삼킨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 뭐.”
그다지 상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충 대답하고 올라탔다.
“전, 회사에 뭘 좀 두고 가서요. 가지고 오는 길이에요.”
전혀 궁금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혜림은 상대방이 자신을 굉장히 성가셔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렸다.
“불타는 금요일인데, 변 이사님은 약속 없으신가 봐요.”
“네, 뭐. 딱히…….”
“이렇게 좋은 날에, 같이 불태울 만한 사람 하나 없다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이에요.”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혜림의 목소리에 정연은 마음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되새김질하며 억지로 웃었다.
“쉬엄쉬엄, 좀 여유롭게 놀기도 하면서 일하세요. 워커홀릭은 남자들이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러다가 정말 시집 못 가요. 어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자신이 말하고도 그것이 실수라고 느꼈는지, 혜림이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정연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실수를 가장한 고의적인 놀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실수인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정연에게 ‘시집’을 운운하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이십 대들이었다. 지금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옅은 비웃음을 흘려보내고 있는 혜림 역시, 나이라는 숫자 앞에 승리의 V 자를 뜻하는 ‘2’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예쁘고 어린 나이라는 것을 결코 어린 나이라고 볼 수 없는 정연에게 어필이라도 하고 싶어 안달 내는 듯싶었다.
그렇게들 자랑할 것이 없나.
참, 웃긴 것들이다. 나이가 어린 것이 결코 평생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철없는 것들은 전혀 모르는 듯싶었다.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하룻강아지가 짖는다고 무서워할 범은 없다고 생각하며 정연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 있게 미니스커트를 입을 만큼 늘씬한 혜림의 다리로 눈길을 돌렸다. 아까부터 그녀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권 이사님.”
“네. 변 이사님.”
“스타킹, 올 나갔어요.”
“네?”
다시 되물어 오는 말에 정연은 대답 대신, 눈짓으로 혜림의 다리를 힐끔거렸다. 예상치 못한 정연의 반응에 혜림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스타킹이 세로로 찢겨 흉측한 모양으로 올이 나가 있었다.
“어멋! 나 여태 이러고 다녔다는 거야?”
“그럼, 월요일 날 뵙죠.”
창피함에 스타킹을 가리며 안절부절못하는 혜림을 두고 정연은 주차장에 도착한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주차해 놓은 자신의 차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며 정연은 어이없는 비소를 터트렸다.
“이 아가씨야, 어떡하면 날 더 약 올릴 수 있나 고민할 시간에 제대로 된 상품 하나나 더 만들어. 아니면, 네 스타킹 간수나 잘하든가.”
혜림이 이사로 있는 슈즈 디자인 팀은 회사 이름에 얹혀 간다고 느껴질 정도로 간신히 매출만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팀의 ‘이사’라는 사람이 저렇게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남의 팀 이사를 깎아내릴 생각밖에 안 하고 있으니……. 그런 팀이 어떻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저런 상사를 믿고 있는 팀원들까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정연은 쯧쯧, 혀를 내차며 최대한 서둘러 차를 몰아 을씨년스러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1화
아무르(Amour).
프랑스어로 ‘사랑’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아무르는 패션, 뷰티, 시계와 파인 주얼리 등을 제작, 판매하는 명품 브랜드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고급화된 질로 자신의 이름처럼 많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창립 10년 만에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사인 인터브랜드에서 선정하는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 3년 연속,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아무르가 이렇게까지 빠른 시일 내에 크게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공신을 세운 것은 패션 사업 중 ‘가방’ 파트였다.
창립되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매출 없이 회사 자금만 갉아먹는다고 송충이 취급을 받던 가방 디자인 팀이 훗날에 아무르의 가장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그 중심엔, 한 여자가 있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 탁월한 감각, 뛰어난 실력과 그 모든 것들을 뒷받침하는 그녀의 악착같은 노력이 결국, 최고의 가방을 만들어 냈다. 신상품으로 출시된 ‘봄의 유혹’이라는 타이틀을 단 가방으로 아무르 연 매출을 무려 30.8%나 성장시키는 기적을 보여 주며 그녀는 단숨에 이사 직급을 달고 아무르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 이름, 바로 메두사.
변정연이었다.
프롤로그
1. 메두사, 변정연
“야. 야. 메두사 떴다! 떴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 외치는 사원의 한마디에 사무실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휴게실에서 앉아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던 사원들도, 근무 시간 전까지 한가로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던 사원도, 개인적인 전화 통화를 하고 있던 사원도, 아침밥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사원도, 손에 잡힌 모든 것들을 버리다시피 내팽개치고 허둥지둥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꼿꼿이 허리를 핀 정자세로 업무에 들어갔다.
또각또각.
대리석을 노크하듯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점점 가깝게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에 사원들의 긴장은 극심하게 치솟았다. 저승사자가 이곳을 방문한다 해도 이보다 더 두렵진 않으리.
마침내, 사무실 자동문이 열리고 단 한 번의 숨소리만으로도 중압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녀, 정연이 들어왔다. 사원들은 왕국에서나 볼 듯한 근위병처럼 그녀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지나치게 형식적인 사원들의 인사에 정연은 가볍게 눈을 맞추고는 자신의 사무실이 위치한 2층으로 향했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며 계단으로 올라서는 모습을 보는 사원들의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녀가 사무실 안까지 무사히 들어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잠깐의 긴장도 늦출 수 없어 보이는 초식 동물들의 본능적인 웅크림이었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사무실 안으로 그녀가 들어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걸고 자리에 앉자, 그제야 꽉 막혀 있던 바깥 사무실 이곳저곳에서 숨통 트이는 한숨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책상 위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 서류들을 들고 일어나자 그들은 올 것이 왔다며 울상이 된 얼굴로 서둘러 회의 자료를 준비했다.
아래로 내려온 정연은 서류를 들고 있는 손으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이제, 2차 폭탄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할 것이다.
회의실에 모인 사원들은 사냥 나온 암사자의 시야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녀린 사슴들처럼 몸을 최대한 움츠리며 정연의 시선을 피했다.
사원들이 제출한 이번 시즌 신상품 디자인들을 보던 정연의 손이 멈췄다. 그러자 사원들은 제발, 자신의 것은 아니기를 바라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정연이 들고 있던 디자인을 뒤에 앉아 있는 비서에게 보여 주자, 비서가 미리 받은 USB의 자료들을 빔으로 쐈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빔 속에 자신의 디자인이 뜨자, 민정의 얼굴이 절망으로 구겨졌다.
“프린지 장식의 스웨이드 숄더백으로…….”
치이이이익―
더듬거리는 민정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분쇄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회의실 안을 매섭게 점령했다. 분쇄기를 통해 처참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 가고 있는 자신의 디자인을 보는 민정의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불만 있어?”
하나의 과녁을 뚫는 첨예한 화살 같은 정연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민정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럼 그것에 대해서 설명해 봐.”
“네?”
“불만이 없다며. 자신의 자식과도 같다고 여기는 디자인이 이렇게 눈앞에서 무참히 버려지는데도, 불만이 없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설명해 보라고.”
“창의성이…….”
민정은 최대한 정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허공을 바라보며 변명하려 했지만, 도통 떠오르는 말이 없어 그대로 말꼬리를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민정의 목소리에 정연이 한쪽 다리를 꼬고 붉은 입꼬리를 매섭게 올렸다. 사원들은 그녀의 그 작은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지독히도 잘 알고 있기에 모두들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다.
“나 봐요. 여민정 씨.”
정연의 말에 민정의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쳤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자신을 보는 순간, 돌로 만들어 버리는 저주에 걸린 메두사의 자신을 보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여민정 씨, 날 보라고요.”
민정은 마른침을 꼴깍 삼켜서 넘겼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급기야는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심장이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방향을 찾지 못해 두려움에 가득 찬 민정의 초점이 정연에게로 향했다.
“여민정 씨가 만든 디자인의 가방이라면, 난 공짜로 준다고 해도 안 메고 다녀요. 왜? 공짜인 걸 너무 티 내는 것 같아 쪽팔려서.”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저 가방 만든 의도가 뭐야? 동네 시장에 장이나 보러 다닐 때 메라고 만든 거야? 우리 아무르에서?”
얼어붙은 심장이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져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저건, 스웨이드를 능멸하는 디자인이야.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스웨이드를 능멸하는 디자인이 아니라 아무르 디자이너들을 능멸하는 디자인이다. 재작년에나 유행했던 것들을 재탕해야 될 만큼, 소재가 고갈된 거야? 그렇게 고갈된 디자인으로 앞으로 계속 이 생활 할 수나 있겠어?”
민정은 충격을 받아 그대로 굳어져 눈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많은 사원들이 자신의 디자인과 함께 무참히 박살 나고 깨졌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뛰어난 실력과 예리한 안목은 언제나 적중했기에,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클러치백엔 입체적인 스터드 장식을 좀 넣으면 어떨까 하는데.”
거의 삼십 개가 되는 디자인 중에, 분쇄기에 갈리지 않은 가방은 딱 하나였다. 그것도 그리 썩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보완을 해 본다면 꽤 괜찮은 가방이 나올 디자인이었다.
“똑바로들 들어요. 밥 먹을 거 다 먹고, 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면서 일을 하니까, 이따위 디자인들이 나오는 거예요. 아, 발로 그린 디자인들치고는 꽤 봐 줄 만하죠. 앞으로 더 기대되네. 날 얼마나 더 실망시킬 것인지에 대해. 고객들은 가방의 디자인은 다 거기서 거기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 아무르 가방을 보며 그렇게 말할 순 없어. 왜냐. 내가 거기서 거기인 가방은 절대, 출시를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똑 부러지게 말을 이어 가는 정연의 목소리에는 어떤 배려나 망설임도 없었다. 사원들은 모두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찍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렸다.
“하! 정말, 오늘 똥 제대로 밟았다.”
정연이 회의실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 부장이 답답한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탄식했다.
“처음에 들어왔을 땐,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나한테 말도 제대로 못 붙였던 게, 아휴 그냥!”
김 부장은 정연이 나간 방향을 향해 서류를 집어 던지는 동작을 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아무튼, 성질머리가 저러니까 시집을 못 가지.”
“야, 연애도 못 하는 인간이 무슨 시집이야, 시집은. 노처녀 히스테리가 따로 없어.”
“요즘 더 심해진 것 같지 않아요?”
“연애를 안 하는 기간이 더 길어지니까, 심해질 수밖에! 그런데 저 성격 고약한 여자를 어느 남자가 감당이나 할 수 있겠어? 더군다나, 남자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나 보이는 독사 같은 여자를!”
“어디 독설 학원 같은 데 다니는 거 아니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죠?”
“학원은 무슨……. 지가 거기서 강의를 하면 했지. 저 정도는 배우는 수준이 아니야. 가르치는 수준이지.”
“하긴……. 근데, 그 와중에 오늘 메두사 목걸이 진짜 예쁘지 않았어요?”
“스커트도 예쁘더라. 얼마지? 내 월급으로는 감히 감당도 되지 않을 가격의 신상이겠지?”
“자자, 수다 그만 떨고 가서 일하자고. 밥까지 굶으면서 디자인에 매진하라고 하신 이사님이 눈에 불을 켜고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온 사원들의 이목이 일제히 오늘도 역시 끔찍한 지옥의 맛을 보여 준 정연에게 잠시 닿았다가 몸서리를 치며 떨어져 나갔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정연은 소등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듣고 나서야, 혼자 남아 있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찌뿌드드하게 굳은 목을 느긋이 풀어 주며 승강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조금씩 밀려오는 허기짐에 뭘 먹을까, 고민하던 정연의 시야로 승강기 문이 열렸다.
“어머, 변 이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안에서 들려오는 반갑지 않은 말랑말랑한 목소리에 정연의 고운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 안에는 슈즈 디자인 팀 권 이사가 타 있었다. 두 손에 금수저를 쥔 채 엄청 튼튼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대표 이사의 딸, 권혜림.
같은 ‘이사’ 직급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 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술을 마신 모양인지, 평소 투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하얀 얼굴이 장미를 삼킨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 뭐.”
그다지 상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충 대답하고 올라탔다.
“전, 회사에 뭘 좀 두고 가서요. 가지고 오는 길이에요.”
전혀 궁금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혜림은 상대방이 자신을 굉장히 성가셔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렸다.
“불타는 금요일인데, 변 이사님은 약속 없으신가 봐요.”
“네, 뭐. 딱히…….”
“이렇게 좋은 날에, 같이 불태울 만한 사람 하나 없다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이에요.”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혜림의 목소리에 정연은 마음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되새김질하며 억지로 웃었다.
“쉬엄쉬엄, 좀 여유롭게 놀기도 하면서 일하세요. 워커홀릭은 남자들이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러다가 정말 시집 못 가요. 어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자신이 말하고도 그것이 실수라고 느꼈는지, 혜림이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정연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실수를 가장한 고의적인 놀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실수인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정연에게 ‘시집’을 운운하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이십 대들이었다. 지금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옅은 비웃음을 흘려보내고 있는 혜림 역시, 나이라는 숫자 앞에 승리의 V 자를 뜻하는 ‘2’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예쁘고 어린 나이라는 것을 결코 어린 나이라고 볼 수 없는 정연에게 어필이라도 하고 싶어 안달 내는 듯싶었다.
그렇게들 자랑할 것이 없나.
참, 웃긴 것들이다. 나이가 어린 것이 결코 평생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철없는 것들은 전혀 모르는 듯싶었다.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하룻강아지가 짖는다고 무서워할 범은 없다고 생각하며 정연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 있게 미니스커트를 입을 만큼 늘씬한 혜림의 다리로 눈길을 돌렸다. 아까부터 그녀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권 이사님.”
“네. 변 이사님.”
“스타킹, 올 나갔어요.”
“네?”
다시 되물어 오는 말에 정연은 대답 대신, 눈짓으로 혜림의 다리를 힐끔거렸다. 예상치 못한 정연의 반응에 혜림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스타킹이 세로로 찢겨 흉측한 모양으로 올이 나가 있었다.
“어멋! 나 여태 이러고 다녔다는 거야?”
“그럼, 월요일 날 뵙죠.”
창피함에 스타킹을 가리며 안절부절못하는 혜림을 두고 정연은 주차장에 도착한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주차해 놓은 자신의 차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며 정연은 어이없는 비소를 터트렸다.
“이 아가씨야, 어떡하면 날 더 약 올릴 수 있나 고민할 시간에 제대로 된 상품 하나나 더 만들어. 아니면, 네 스타킹 간수나 잘하든가.”
혜림이 이사로 있는 슈즈 디자인 팀은 회사 이름에 얹혀 간다고 느껴질 정도로 간신히 매출만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팀의 ‘이사’라는 사람이 저렇게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남의 팀 이사를 깎아내릴 생각밖에 안 하고 있으니……. 그런 팀이 어떻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저런 상사를 믿고 있는 팀원들까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정연은 쯧쯧, 혀를 내차며 최대한 서둘러 차를 몰아 을씨년스러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