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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제 1부. 메두사, 큐피드를 만나다
1.


“드디어 왔군!”
강현이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자, 업무를 보고 있던 부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맞이했다.
“뭐 마실래?”
“전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그럼, 차가운 녹차 두 잔으로 부탁할게.”
석호의 말에 비서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가운 녹차 두 잔을 금세 준비해서 돌아왔다. 녹차를 강현의 앞자리에 놔 주면서 비서의 눈길이 반사적으로 힐끔, 강현의 얼굴을 살피고는 수줍게 미소 지어 보였다. 비서가 나가자 부사장이 신기한 듯 허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사원들 돌 보듯 대하던 우리 김 비서도 자네한테는 어쩔 수가 없나 봐. 여전하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여자가 따르는 그 인기는. 그것도 복이라면, 아주 큰 복이야.”
아무르의 부사장 차석호는 디자이너 출신의 전문 CEO로 2년 전, 강현이 일하던 J―come 세계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강현을 직접 채용하고 함께 일을 했던 석호는 그의 뛰어난 감각과 가능성을 높이 사며 몇 번이고 한국으로 귀국해 자신과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하지만 번번이 기회가 닿지 않아 서운해하던 차에 갑자기 강현이 자의로 귀국할 의사를 밝혀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석호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강현이 전에 일했던 파트이자, 아무르의 매출에서 크게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슈즈’가 아닌, ‘가방’ 파트로 일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었다.
“생각은 좀 해 봤어?”
“네. 몇 번이고 생각해 봤는데, 드릴 수 있는 답이 똑같네요.”
그가 ‘슈즈’ 파트로 생각을 바꾸길 바랐던 석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실망하셨어요?”
“그럴 리가. 조금 아쉬운 것뿐이지. 워낙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상품화될 가치를 보는 시선이 예리하기 때문에 어느 파트에 가든 잘해 낼 거라는 믿음이 있지. 우리 강현이는, 아니, 이제는 양 팀장이라고 해야 하지? 하하!”
띠동갑을 훨씬 넘는 나이 차이와 경력을 뒷받침하는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강현에게 석호는 친한 동네 형 같은 존재처럼 편안했다.
“오늘 점심은 나랑 같이 먹자고. 알았지?”
“네.”
“뭐 먹을지 고민해 놔. 거하게 사 줄 테니까.”
호탕하게 웃는 석호를 마주 보며 강현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강현을 보며 석호는 남자가 봐도 참, 사랑스러운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변 이사가 곧 올라올 거야. 변 이사 알지? 워낙 유명하잖아.”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변정연 이사님.”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
강현은 고작, 이름 한 번 불러 봤을 뿐인데 감당되지 않는 웃음기가 자꾸만 피어오르는 자신이 낯설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새벽 내내,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설렘에 물들어진 몸과 마음은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결국,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 극심한 설렘은 거세게 몰려드는 피곤함을 가차 없이 밀어 버리고 여전히 강현의 온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강현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오, 우리 변 이사 왔나 보네.”
쿵.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살결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 때문에 발끝부터 머리까지 다 울리는 기분이었다. 강현은 회심 서린 한숨을 입술 밖으로 내뱉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또각또각.
마침, 문이 열리고 조금 날카롭게 느껴지는 하이힐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왔다. 그녀가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강현은 재빠르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살며시 돌려 정연을 마주했다.
짧고 까만 쇼트커트가 잘 어울릴 정도로 뽀얗고 가느다란 목선과 감히 원피스 따위로는 감출 수 없는 탄력 있으면서도 육감적인 몸매, 건조한 듯하면서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눈빛. 그녀를 보며 강현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잘 자라 줬다.
우습게도 강현은 제 나이를 잊고 중얼거렸다.
고작, 낙엽이 구르는 걸 보면 까르르 숨넘어가듯 웃던 수줍음 많던 소녀는 어느새, 온몸에서 관능미를 풍기고 있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정연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발걸음으로 단숨에 강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가방 디자인 팀 이사 변정연입니다.”
그녀가 다가오자 일렁이는 미세한 바람은 은은한 장미꽃 향기를 싣고 강현의 코끝을 조심도 없이 간질였다. 강현은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는 정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누나에게 맞아서 우는 자신을 달래 주던 그 부드러운 손길은 여전할까? 강현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정연의 손을 맞잡았다.
“이번 가방 디자인 팀에 합류하게 될 팀장, 양강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커다란 손에 완전히 감싸이는 그녀의 작은 손은 놓아야 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서른 살의 양강현은 아직도 이 손의 감촉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변 이사.”
“네. 부사장님.”
“내가 특별히 아끼는 친구이니,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잘 가르쳐 주게.”
둘의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석호가 신신당부를 했다. 정연이 가볍게 묵례를 취했다. 세 사람은 다시 자리에 앉아 강현의 포트폴리오에 대해서 간단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파이팅들 하고! 아, 그리고 변 이사 오늘 점심에 약속 없으면, 나랑 양 팀장이랑 같이 점심…….”
“죄송합니다. 급하게 처리할 게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양 팀장은 점심때 보자고.”
부사장실에서 나온 강현은 정연과 함께 나란히 복도를 거닐었다. 자신의 이름을 말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선 어떤 표정의 미동도 없었다. 자신을 단박에 알아볼 거라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굴엔 잠시라도 그 서운한 표정을 지을 틈이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체구로 열심히 앞장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좋을까.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에요, 라는 통상적이고 촌스러운 인사?
아니면 여전히 예쁘네요, 하는 좀 오글거리는 인사?
그것도 아니면 보고 싶었다는, 뜬금없긴 하지만 진심을 담은 인사?
“팀원들에게 인사하기에 앞서 잠깐 저 좀 먼저 보죠.”
고민을 하는 사이, 그녀의 말에 사무실에 도착한 강현은 자신을 발견하고 얼굴에 화색을 띠우며 일어나는 사원들을 뒤로하고 정연을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문을 닫고 인사를 건네기 위해 정연에게로 다가가던 강현의 걸음이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눈앞에 보이는 믿기 힘든 광경에 재갈을 입에 물은 것처럼 말문이 막혀 버렸다.
정연의 손에는 아까 석호가 건넸던 강현의 포트폴리오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포트폴리오는 한 장, 한 장 정연의 손에 뜯겨 분쇄기에서 비참하게 갈리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놀라 묻는 강현의 질문에 돌아온 건 정연의 대답이 아닌, 여전히 분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전부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요!”
분쇄기에 종이를 넣고 있던 정연의 손목을 낚아챈 강현은 평소엔 듣기 드문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정연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여전히 건조한 얼굴로 강현을 응시했다.
“보면 몰라? 쓰레기 버리고 있잖아.”
고저 없는 목소리가 지독히도 냉랭하게 느껴졌다. 강현은 단언했다. 자신이 ‘쓰레기’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잘못 들었다고. 천사인 정연이 ‘쓰레기’라는 상스러운 단어를 입에 담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 줄 생각인지, 정연은 전보다 훨씬 더 사납게 굳은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강현의 디자인을 구기며 바닥으로 내던졌다. 강현의 디자인이 무참히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이런 경우 없는 상황을 처음 겪어 본 강현은 그저 말문이 막힐 만큼 어이가 없었다.
“잘 부탁? 여기가 학교야, 학원이야? 내가 왜 널 가르쳐야 하지? 부족한 게 많다면 처음부터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낙하산 타고 내려온 게 자랑이야?”
“…….”
“쪽팔리지도 않니?”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주던 정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몰아붙이는 정연을 보며 강현은 몰려드는 수치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안 쪽팔립니다.”
“안 쪽팔려?”
“네.”
“왜 안 쪽팔릴까? 낙하산의 뜻을 모르나. 아니면, 낙하산도 능력이라고 생각하나, 설마?”
“이사님 눈에는 제 디자인이 낙하산 수준으로 보이세요?”
“응. 그것도 확실히. 네 디자인이 증명하고 있잖아. 낙. 하. 산. 이라고.”
J―come에서조차도 몇 번이고 사표를 물릴 만큼 실력을 인정받던 강현이였다. 그랬기에 정연의 낙하산이라는 발언에 그의 자존심은 비참하게 뭉개졌다. 하지만 그런 강현의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연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강현을 매섭게 올려다보았다.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선수라도 다 같을 순 없어. 야구, 축구, 농구……. ‘운동’이라는 공통된 단어를 쓴다 해도 광범위한 종목이라는 게 있는 거지. 축구 선수가 느닷없이 야구를 할 순 없잖니? 마찬가지야. 같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해서 모든 디자인을 할 수는 없는 거야. 그 말은, 네가 슈즈 분야에서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쪽 분야에는 그 감각이라는 것이 영 없다는 거지. 네 분야를 살려. 괜히 깨끗한 웅덩이에 미꾸라지처럼 들어와 물 흐리지 말고.”
믿었던 도끼에게 발등을 찍혀도 이보다 더 아프고 배신감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강현은 불현듯, 자신이 여태 그녀에게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거품처럼 사라지는 허탈함에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자신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녀가 야속했고 상처받아야 하는 이 순간이 속상했다.
강현은 자신을 지나쳐 회의실을 막 빠져나가려던 정연을 불러 세웠다.
“굴러 온 돌한테 발등 다친다는 속담 아십니까?”
뜬금없는 강현의 속담 타령에 정연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며 낮게 물었다.
“발등 조심하시라는 뜻입니다.”
보폭이 큰 걸음으로 단숨에 정연의 앞으로 다가온 강현의 얼굴엔 시종일관 스며들어 있는 장난스러운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보면 아시겠죠. 제가 미꾸라지일지, 아니면 박힌 돌 빼낼 굴러 온 돌일지는.”
정연의 귓가를 파고드는 강현의 음성은 냉랭한 기운이 묻어난 경고처럼 들렸다. 정연은 보란 듯이 콧방귀를 끼고 회의실을 나왔다. 강현에게 인사를 하려고 엉거주춤 서 있던 사원들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정연을 보며 죄다 눈치를 살피다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뒤로 강현이 따라 나왔다.
강현은 앞에 서 있던 정연을 지나쳐 사무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사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연에게서 강현으로 옮겨 갔다. 강현은 방금 회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입술을 떼어 냈다.
“다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양강현 팀장입니다.”
자신의 인사말을 경청하는 사원들을 쭉 둘러본 강현의 시선이 맨 끝에 서 있는 정연에게로 꽂혔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현의 목소리는 분명 달콤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꽉 억눌려 있었다. 어금니를 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연은 그의 시선을 오래도록 되받아치다가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왔다.

‘보면 아시겠죠. 제가 미꾸라지일지, 아니면 박힌 돌 빼낼 굴러 온 돌일지는.’

“그럼, 나를 내쫓기라도 하겠다는 뜻이야? 어디서 건방지게…….”
회의실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향해 경고하던 강현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정연은 지금 막 집어 들었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에 내던졌다.
강현이 전에 근무했던 해외 브랜드에서는 슈즈 디자이너로서 꽤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은 있어도 가방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은 없다는 거였다. 한마디로, 그 경력으로는 가방 파트에 총괄 ‘팀장’급으로 들어올 만한 인재는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실력을 정확하게 입증하지 못하고 단지 경력만 있다는 이유와, 그리고 어찌 보면 부사장의 적극 추진으로 ‘팀장’급을 달아 버리면 밑바닥부터 깨지며 올라온 디자이너들은 승진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을 당하는 거였다.
차라리 그의 경력이 가방 디자이너였다면 이런 불만이 조금은 미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슈즈 디자이너라니……. 가방과 슈즈는 엄연히 다른 종목의 운동이고, 다른 빛깔을 띠우고 있는 하늘이며, 다른 재료들이 들어가는 요리였다. 그런 강현을 떡하니 팀장급 자리에 앉혀 놓은 회사도, 실력도 경력도 없으면서 그 자리에 뻔뻔하게 앉아 있는 강현도 정연은 이해를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수도 없이 그런 이유로 사회에서 외면을 당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똑똑.
한참 열을 내고 있는데 커피를 든 임 비서가 들어왔다. 문이 잠깐 열리고 닫히는 순간, 밑에 사무실은 강현의 등장에 꽤 들떠 있는 분위기처럼 보였다.
“일들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정연의 곱지 못한 물음에도 임 비서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우며 따뜻하게 웃었다.
“다들 잘생긴 양 팀장님과 일할 생각을 하니, 많이 들뜬 모양이에요.”
“참……. 배알도 없는 것들.”
“그래도 양 팀장님 정말 잘생기셨잖아요.”
“잘생기면 뭐해? 얼굴이 디자인 그려 줘? 그리고 잘생기긴 뭐가 잘생겨? 임 비서도 저렇게 애기같이 생긴 얼굴 좋아해?”
“몸이 애기가 아니던데…….”
예기치 못한 임 비서의 말에 혀를 내차며 입술에 커피를 축이던 정연이 당황해서는 그대로 내뿜으며 사레들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