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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한 내 운명
1화
프롤로그 옹녀는 네 운명
‘아 목말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사 올 걸 그랬나?’
다미는 긴장한 탓에 바짝바짝 마르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아냐, 이런 곳에서 그런 거 먹는 것도 이상하지. 부정 탈지 몰라. 몇 년째 꼬이기만 하는 내 인생의 해답 찾으러 온 곳인데 경건하게 들어가야지. 아, 제발 잘 풀리면 좋으련만.’
간절한 바람을 담고 조심스레 미닫이문을 열었다.
“옹녀 누나 왔네.”
문을 다 열기도 전에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말고 또 누가 있나?’
다미는 방 안과 자기 뒤를 살펴보았다. 두 평 남짓한 방 안에는 동자신 신 내림을 받아 신점을 본다던 박수무당밖에 없었다.
‘이건 뭐지? 통화하는 중인가? 나 조금 있다가 들어가야 하나?’
엉거주춤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문지방에 반쯤 걸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 있자 박수무당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얼른 들어와.”
좌식 테이블 뒤에 마흔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박수무당이 다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테이블 위의 뽀로로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 저요?”
“응. 누나.”
스물아홉 살이지만 어려 보이는 얼굴 탓에 고등학생으로도 보이는 다미였다.
‘아저씨 액면가가 얼핏 봐도 마흔 살은 되어 보이는데 무슨 누나예요. 아저씨가 아무리 슈퍼 동안이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요.’
팔뚝에 오소소 오른 소름을 벅벅 긁으며 앞쪽에 있는 방석을 끌어다가 앉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박수무당은 다시 눈을 감고 중얼중얼 무엇인가를 되뇌었다.
‘아, 뭐지. 점집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태어나서 점집이라는 곳을 처음 온 다미는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다지 밝지 않은 방 안, 박수무당의 뒤로는 오방색의 천들과 절 입구에 놓여 있는 사천왕처럼 무서운 장수 그림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지은 죄도 없건만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 앞 제단에는 과일과 약과, 옥춘과 함께 동자신이 좋아해서 갖다 놓은 듯한 장남감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한가운데 향로에 꽂힌 긴 향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기다랗고 하얀 연기가 방 안을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뽀얀 연기, 이질적 냄새, 이상한 그림들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미는 조심스레 방석 위에 앉으며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알아주길 바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박수무당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박수무당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옹녀가 제 성질 누르고 살려니까 될 일도 안 되지. 그냥 네 성질대로 살아.”
진짜로 텔레파시가 통한 건가? 말을 하긴 했는데 내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잖아? 왜 자꾸 아까부터 옹녀 타령이래. 딴 사람 얘기 하는 건가?
알아듣지 못할 말에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네? 저, 저요?”
“응, 그래. 누나, 너. 여기 누나랑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네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니 그러지요. 그나저나 네가 자꾸 외치던 옹녀가 나야? 29년 인생 순결하게 살자고 다짐한 것도 아닌데, 강제로 숫처녀의 인생을 살고 있는 억울한 나한테 왜 자꾸 옹녀래?
갑자기 가슴속에서 깊은 빡침이 몰려왔다. 하지만 굳은 맘 먹고 온 자리였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하고자 했던 말을 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일이 자꾸 안 풀려서요. 공무원 시험 4년을 준비했는데 계속 사고 나서 시험을 보러 못 가거나, 시험 때만 되면 집안에 일이 생기거나, 그것도 아니면 1, 2점 차이로 떨어지거나 하니까 뭔가 액이 꼈나 싶기도 하고……. 공무원 시험 포기하고 취업하려고 지원서 내도 면접 보라고 연락 오는 곳은 하나도 없고.”
지난 일이 떠올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가 올해 스물아홉 살인데 삼재인가 싶기도 하고……. 앞으로도 이러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물어보려고 온 건데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시니까…….”
뒷말을 얼버무리며 말했다. 이런 건 자기가 알아서 딱딱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일일이 말해 줘야 해? 저 무당 엄청 용하다더니 사기 아냐?
평상시 간간이 점을 보러 다니던 보영이를 쓸데없는 데 돈 쓴다고 구박하던 다미였다. 혹시나 해서 왔지만 역시 자기가 맞았다는 생각에 박수무당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누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지 모르겠네. 누나 바보야? 왜 말해도 못 알아들어? 누나 성질대로 살라고. 음란하고 음탕하게. 그러면 잘 풀린다고, 누나 인생.”
그 말을 이해해 보려고 나름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다미의 모습을 본 박수무당이 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누나 팔자가 원래 옹녀 팔자야. 그것도 그냥 옹녀가 아니라 아주 센 옹녀 팔자. 근데 그걸 누르고 사니 일이 잘 풀릴 리가 있나. 그러니까 원래 팔자대로, 순리대로 살라고. 그게 누나 운명이니까 거스르려고 하지 말고. 그럼 잘 풀리게 되어 있어.”
아니 음탕하게 사는 게 운명이라니. 뭐 이런 거지 같은 운명이 다 있어?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절로 나왔다.
몇 번 하지도 못했지만 하는 연애마다 족족 말아먹고 취업도 안 되고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게 음탕하게 살지 않아서라니? 내가 뭐 일부러 도 닦자고 운명을 거스르고 수행하듯 사는 줄 아나? 나도 다른 애들처럼 얼레리꼴레리 하며 살고 싶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쭉쭉빵빵 늘씬늘씬 섹시하고 화려한 미녀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 간신히 160cm 살짝 넘는 키에 어려 보이는 얼굴은 음란하고 음탕하게 살기에 그리 쉬운 조건이 아니었다.
‘나한테 연애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몸으로 어필할 수 없다면 능력으로 어필하겠어! 요새는 공무원이 최고라니 공무원이 되어 보자꾸나!’
지난 몇 년간 연애도 접고 공무원 시험에 올인했던 시간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게다가 올해는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일반 사기업에 취업하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되고 있다.
‘일 안 풀리는 것도 서러운데 그게 다 내 운명을 거슬렀기 때문이라니. 누가 그 운명 거스르고 싶어서 거슬렀나? 나도 따르고 싶네! 그 운명!’
뒷머리로 열이 쫙 올랐다. 갑자기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그 운명과 안 풀리는 일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운명을 거스르니 일이 안 풀리고, 일이 안 풀리니 연애도 쉽지 않고. ‘아― 어쩌란 말이냐’란 노랫가락이 절로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적을 쓸까요? 아니면 굿이라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는데, 지금은 저 박수무당만이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다. 간절한 눈길로 박수무당을 쳐다보았다.
“그런 거 없어. 왜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만들어. 아, 이 누나 말귀 더럽게 못 알아먹는다. 귀찮아. 나 갈래.”
그 순간 박수무당의 눈빛이 탁 바뀌었다. 만지작거리던 뽀로로 인형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부채를 집어 들었다.
“동자님 가셨다.”
“네? 가셨다고요?”
아니 이놈은 점 보러 온 사람 답답한 거 다 풀리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토껴?
멍하니 박수무당을 쳐다보았다.
“그럼 전 어떡해요? 뭔가 해결책을 주셔야지…….”
점 보러 왔는데 가슴만 점점 더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몸을 좌식 테이블 쪽으로 바짝 기울이며 무당을 쳐다봤다.
‘무당아, 무당아. 해결 방안을 내놓아라. 해결 방안을 내놓지 않으면 내 너를 구워 먹, 아니지. 해결 방안 좀 주세요. 제발.’
애처로운 눈을 하며 제발 도와 달라는 듯 간절히 박수무당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박수무당도 그녀가 불쌍했는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음기가 충만하다 못해 음기 탱천한 상태인데, 여기에 좋은 양기를 섞어 줘야지 네 음기가 가라앉아. 일종의 음양 조화라 할 수 있지.”
박수무당이 눈을 감고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양기라 하면…… 남자요?”
“응. 보통 남자 말고 양기가 너처럼 많은 놈을 만나야 해. 일반 놈들은 너 감당 못 해. 변강쇠를 찾아야 해. 변강쇠.”
변강쇠라니? 남자를 만나기도 힘든 세상에 변강쇠를 찾으란다. 그 말이 제 귀에는 모래밭에서 바늘 찾으란 소리처럼 들렸다. 얼굴이 심란함으로 물들었다.
“근데 어디를 가서 변강쇠를 찾나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만나면 알게 될 거야. 그놈이 변강쇠인지 아닌지. 나는 할 말 다 했으니까 가 봐.”
“아니 그래도 힌트라도 좀…….”
“그것까지 해 주면 여기가 결혼 소개소지 점집이겠니?”
박수무당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미는 자꾸 안 풀리는 일들 때문에 조언을 구하고자 점을 보았지만, 몰랐던 문제까지 들춰지면서 해결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을 느끼며 무당집을 나왔다.
1화 강쇠를 찾아서
자신의 방에서 잔뜩 긴장한 다미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린 채로 핸드폰을 받쳐 들었다.
부정 안 타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후― 하고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한 자리씩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버튼을 누르길 반복했다. 곧 연결되는 신호음 소리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 네. 내일물산 인사팀 박순호입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재빨리 곧추세웠다. 몇 번이나 연습한 말을 빠르고 예의 바르게 뱉어 냈다.
“안녕하세요? 지난주 입사 지원 한 이다미라고 합니다. 혹시 합격자 발표가 났나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 이다미 씨라고 하셨죠?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로 무엇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오갈까 싶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수화기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인지 길게 느껴졌다.
― 이다미 씨? 이번 채용에는 안타깝게도 불합격하셨네요.
“네……. 감사합니다.”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와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그런 형식적인 말들이 오갔다.
“하…….”
짧은 시간이지만 긴장했던 온몸에 기운이 쑥 빠져나간 듯했다. 그대로 침대에 털썩 앉았다.
“또 떨어졌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일주일 넘게 연락이 안 오는 건 암묵적 불합격이니까. 그래도 확실히 하고 싶어서 전화를 건 것이다. 그리고 확인했다.
“윽. 아프다.”
가슴을 부여잡고 침대 위에 큰대자로 쓰러졌다.
“잔고가 얼마 남았더라?”
이틀 전, 점집에 가기 위해 현금 인출을 할 때 모니터에 뜬 잔액이 100만 원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었다. 제대로 보기 무서워서.
“우씨. 괜히 점 보러 갔어.”
한 푼이 아쉬운 때였다.
“이다미. 29세. 무직. 전 재산 100만 원 이하.”
천장을 보며 자신의 스펙을 읊어 보았다.
“아, 초라하다, 초라해.”
그동안 뭐 하고 산 건가 싶다. 아르바이트하고 공부하고,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하는 생활이 전부였다. 이제 공무원 시험 공부를 그만두었으니, 아르바이트가 아닌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경력 없는 29세의 신입을 원하는 곳이 생각보다 없었다.
“이 넓은 대한민국, 그 많은 직장 중에 날 받아 줄 곳이 한 곳도 없다니. 칫― 내가 뭐가 부족해서 안 데리고 가느냔 말이야. 열렬히 일 좀 해 주십사 구애를 해도 모자랄 판에.”
시켜만 준다면 분골쇄신의 자세로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취직운도 운이라서 그런가? 영 따라 줄 기미가 안 보였다.
꽤 괜찮은 인서울 4년제를 들어갈 만큼 학창 시절에 노력했고, 적은 금액이지만 장학금도 꾸준히 받으며 공부하고, 대학 생활 내내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계속해 오며 집안에 손 벌린 적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나름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항상 2%가 부족했다.
죽어라 공부해도 평상시 성적보다 한 단계 아래 대학에 입학했고, 코피 터지게 죽어라 공부해도 수석 장학금은 타 본 적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몇 년간 올인했지만, 항상 행운의 여신은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운이란 건 이다미 인생에 없었다. 내 노력보다 과하게, 운으로, 덕분에 ‘땡 잡았다’를 외쳤던 순간이 있었나 싶다.
초등학교 때 길거리에서 오천 원짜리 지폐를 한 번 주워 본 것 같고, 그다음엔 음, 없었다. 그 흔한 보물찾기 한 번 성공해 본 적 없고, 시험 문제 찍어서 맞춘 적 한 번이 없다.
“염병, 이 정도야?”
요행 따윈 바라지도 않고 개미같이 열심히 살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1화
프롤로그 옹녀는 네 운명
‘아 목말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사 올 걸 그랬나?’
다미는 긴장한 탓에 바짝바짝 마르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아냐, 이런 곳에서 그런 거 먹는 것도 이상하지. 부정 탈지 몰라. 몇 년째 꼬이기만 하는 내 인생의 해답 찾으러 온 곳인데 경건하게 들어가야지. 아, 제발 잘 풀리면 좋으련만.’
간절한 바람을 담고 조심스레 미닫이문을 열었다.
“옹녀 누나 왔네.”
문을 다 열기도 전에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말고 또 누가 있나?’
다미는 방 안과 자기 뒤를 살펴보았다. 두 평 남짓한 방 안에는 동자신 신 내림을 받아 신점을 본다던 박수무당밖에 없었다.
‘이건 뭐지? 통화하는 중인가? 나 조금 있다가 들어가야 하나?’
엉거주춤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문지방에 반쯤 걸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 있자 박수무당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얼른 들어와.”
좌식 테이블 뒤에 마흔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박수무당이 다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테이블 위의 뽀로로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 저요?”
“응. 누나.”
스물아홉 살이지만 어려 보이는 얼굴 탓에 고등학생으로도 보이는 다미였다.
‘아저씨 액면가가 얼핏 봐도 마흔 살은 되어 보이는데 무슨 누나예요. 아저씨가 아무리 슈퍼 동안이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요.’
팔뚝에 오소소 오른 소름을 벅벅 긁으며 앞쪽에 있는 방석을 끌어다가 앉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박수무당은 다시 눈을 감고 중얼중얼 무엇인가를 되뇌었다.
‘아, 뭐지. 점집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태어나서 점집이라는 곳을 처음 온 다미는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다지 밝지 않은 방 안, 박수무당의 뒤로는 오방색의 천들과 절 입구에 놓여 있는 사천왕처럼 무서운 장수 그림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지은 죄도 없건만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 앞 제단에는 과일과 약과, 옥춘과 함께 동자신이 좋아해서 갖다 놓은 듯한 장남감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한가운데 향로에 꽂힌 긴 향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기다랗고 하얀 연기가 방 안을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뽀얀 연기, 이질적 냄새, 이상한 그림들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미는 조심스레 방석 위에 앉으며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알아주길 바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박수무당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박수무당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옹녀가 제 성질 누르고 살려니까 될 일도 안 되지. 그냥 네 성질대로 살아.”
진짜로 텔레파시가 통한 건가? 말을 하긴 했는데 내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잖아? 왜 자꾸 아까부터 옹녀 타령이래. 딴 사람 얘기 하는 건가?
알아듣지 못할 말에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네? 저, 저요?”
“응, 그래. 누나, 너. 여기 누나랑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네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니 그러지요. 그나저나 네가 자꾸 외치던 옹녀가 나야? 29년 인생 순결하게 살자고 다짐한 것도 아닌데, 강제로 숫처녀의 인생을 살고 있는 억울한 나한테 왜 자꾸 옹녀래?
갑자기 가슴속에서 깊은 빡침이 몰려왔다. 하지만 굳은 맘 먹고 온 자리였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하고자 했던 말을 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일이 자꾸 안 풀려서요. 공무원 시험 4년을 준비했는데 계속 사고 나서 시험을 보러 못 가거나, 시험 때만 되면 집안에 일이 생기거나, 그것도 아니면 1, 2점 차이로 떨어지거나 하니까 뭔가 액이 꼈나 싶기도 하고……. 공무원 시험 포기하고 취업하려고 지원서 내도 면접 보라고 연락 오는 곳은 하나도 없고.”
지난 일이 떠올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가 올해 스물아홉 살인데 삼재인가 싶기도 하고……. 앞으로도 이러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물어보려고 온 건데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시니까…….”
뒷말을 얼버무리며 말했다. 이런 건 자기가 알아서 딱딱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일일이 말해 줘야 해? 저 무당 엄청 용하다더니 사기 아냐?
평상시 간간이 점을 보러 다니던 보영이를 쓸데없는 데 돈 쓴다고 구박하던 다미였다. 혹시나 해서 왔지만 역시 자기가 맞았다는 생각에 박수무당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누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지 모르겠네. 누나 바보야? 왜 말해도 못 알아들어? 누나 성질대로 살라고. 음란하고 음탕하게. 그러면 잘 풀린다고, 누나 인생.”
그 말을 이해해 보려고 나름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다미의 모습을 본 박수무당이 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누나 팔자가 원래 옹녀 팔자야. 그것도 그냥 옹녀가 아니라 아주 센 옹녀 팔자. 근데 그걸 누르고 사니 일이 잘 풀릴 리가 있나. 그러니까 원래 팔자대로, 순리대로 살라고. 그게 누나 운명이니까 거스르려고 하지 말고. 그럼 잘 풀리게 되어 있어.”
아니 음탕하게 사는 게 운명이라니. 뭐 이런 거지 같은 운명이 다 있어?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절로 나왔다.
몇 번 하지도 못했지만 하는 연애마다 족족 말아먹고 취업도 안 되고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게 음탕하게 살지 않아서라니? 내가 뭐 일부러 도 닦자고 운명을 거스르고 수행하듯 사는 줄 아나? 나도 다른 애들처럼 얼레리꼴레리 하며 살고 싶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쭉쭉빵빵 늘씬늘씬 섹시하고 화려한 미녀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 간신히 160cm 살짝 넘는 키에 어려 보이는 얼굴은 음란하고 음탕하게 살기에 그리 쉬운 조건이 아니었다.
‘나한테 연애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몸으로 어필할 수 없다면 능력으로 어필하겠어! 요새는 공무원이 최고라니 공무원이 되어 보자꾸나!’
지난 몇 년간 연애도 접고 공무원 시험에 올인했던 시간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게다가 올해는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일반 사기업에 취업하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되고 있다.
‘일 안 풀리는 것도 서러운데 그게 다 내 운명을 거슬렀기 때문이라니. 누가 그 운명 거스르고 싶어서 거슬렀나? 나도 따르고 싶네! 그 운명!’
뒷머리로 열이 쫙 올랐다. 갑자기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그 운명과 안 풀리는 일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운명을 거스르니 일이 안 풀리고, 일이 안 풀리니 연애도 쉽지 않고. ‘아― 어쩌란 말이냐’란 노랫가락이 절로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적을 쓸까요? 아니면 굿이라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는데, 지금은 저 박수무당만이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다. 간절한 눈길로 박수무당을 쳐다보았다.
“그런 거 없어. 왜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만들어. 아, 이 누나 말귀 더럽게 못 알아먹는다. 귀찮아. 나 갈래.”
그 순간 박수무당의 눈빛이 탁 바뀌었다. 만지작거리던 뽀로로 인형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부채를 집어 들었다.
“동자님 가셨다.”
“네? 가셨다고요?”
아니 이놈은 점 보러 온 사람 답답한 거 다 풀리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토껴?
멍하니 박수무당을 쳐다보았다.
“그럼 전 어떡해요? 뭔가 해결책을 주셔야지…….”
점 보러 왔는데 가슴만 점점 더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몸을 좌식 테이블 쪽으로 바짝 기울이며 무당을 쳐다봤다.
‘무당아, 무당아. 해결 방안을 내놓아라. 해결 방안을 내놓지 않으면 내 너를 구워 먹, 아니지. 해결 방안 좀 주세요. 제발.’
애처로운 눈을 하며 제발 도와 달라는 듯 간절히 박수무당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박수무당도 그녀가 불쌍했는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음기가 충만하다 못해 음기 탱천한 상태인데, 여기에 좋은 양기를 섞어 줘야지 네 음기가 가라앉아. 일종의 음양 조화라 할 수 있지.”
박수무당이 눈을 감고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양기라 하면…… 남자요?”
“응. 보통 남자 말고 양기가 너처럼 많은 놈을 만나야 해. 일반 놈들은 너 감당 못 해. 변강쇠를 찾아야 해. 변강쇠.”
변강쇠라니? 남자를 만나기도 힘든 세상에 변강쇠를 찾으란다. 그 말이 제 귀에는 모래밭에서 바늘 찾으란 소리처럼 들렸다. 얼굴이 심란함으로 물들었다.
“근데 어디를 가서 변강쇠를 찾나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만나면 알게 될 거야. 그놈이 변강쇠인지 아닌지. 나는 할 말 다 했으니까 가 봐.”
“아니 그래도 힌트라도 좀…….”
“그것까지 해 주면 여기가 결혼 소개소지 점집이겠니?”
박수무당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미는 자꾸 안 풀리는 일들 때문에 조언을 구하고자 점을 보았지만, 몰랐던 문제까지 들춰지면서 해결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을 느끼며 무당집을 나왔다.
1화 강쇠를 찾아서
자신의 방에서 잔뜩 긴장한 다미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린 채로 핸드폰을 받쳐 들었다.
부정 안 타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후― 하고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한 자리씩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버튼을 누르길 반복했다. 곧 연결되는 신호음 소리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 네. 내일물산 인사팀 박순호입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재빨리 곧추세웠다. 몇 번이나 연습한 말을 빠르고 예의 바르게 뱉어 냈다.
“안녕하세요? 지난주 입사 지원 한 이다미라고 합니다. 혹시 합격자 발표가 났나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 이다미 씨라고 하셨죠?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로 무엇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오갈까 싶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수화기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인지 길게 느껴졌다.
― 이다미 씨? 이번 채용에는 안타깝게도 불합격하셨네요.
“네……. 감사합니다.”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와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그런 형식적인 말들이 오갔다.
“하…….”
짧은 시간이지만 긴장했던 온몸에 기운이 쑥 빠져나간 듯했다. 그대로 침대에 털썩 앉았다.
“또 떨어졌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일주일 넘게 연락이 안 오는 건 암묵적 불합격이니까. 그래도 확실히 하고 싶어서 전화를 건 것이다. 그리고 확인했다.
“윽. 아프다.”
가슴을 부여잡고 침대 위에 큰대자로 쓰러졌다.
“잔고가 얼마 남았더라?”
이틀 전, 점집에 가기 위해 현금 인출을 할 때 모니터에 뜬 잔액이 100만 원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었다. 제대로 보기 무서워서.
“우씨. 괜히 점 보러 갔어.”
한 푼이 아쉬운 때였다.
“이다미. 29세. 무직. 전 재산 100만 원 이하.”
천장을 보며 자신의 스펙을 읊어 보았다.
“아, 초라하다, 초라해.”
그동안 뭐 하고 산 건가 싶다. 아르바이트하고 공부하고,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하는 생활이 전부였다. 이제 공무원 시험 공부를 그만두었으니, 아르바이트가 아닌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경력 없는 29세의 신입을 원하는 곳이 생각보다 없었다.
“이 넓은 대한민국, 그 많은 직장 중에 날 받아 줄 곳이 한 곳도 없다니. 칫― 내가 뭐가 부족해서 안 데리고 가느냔 말이야. 열렬히 일 좀 해 주십사 구애를 해도 모자랄 판에.”
시켜만 준다면 분골쇄신의 자세로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취직운도 운이라서 그런가? 영 따라 줄 기미가 안 보였다.
꽤 괜찮은 인서울 4년제를 들어갈 만큼 학창 시절에 노력했고, 적은 금액이지만 장학금도 꾸준히 받으며 공부하고, 대학 생활 내내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계속해 오며 집안에 손 벌린 적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나름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항상 2%가 부족했다.
죽어라 공부해도 평상시 성적보다 한 단계 아래 대학에 입학했고, 코피 터지게 죽어라 공부해도 수석 장학금은 타 본 적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몇 년간 올인했지만, 항상 행운의 여신은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운이란 건 이다미 인생에 없었다. 내 노력보다 과하게, 운으로, 덕분에 ‘땡 잡았다’를 외쳤던 순간이 있었나 싶다.
초등학교 때 길거리에서 오천 원짜리 지폐를 한 번 주워 본 것 같고, 그다음엔 음, 없었다. 그 흔한 보물찾기 한 번 성공해 본 적 없고, 시험 문제 찍어서 맞춘 적 한 번이 없다.
“염병, 이 정도야?”
요행 따윈 바라지도 않고 개미같이 열심히 살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