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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히트!(Be hit!) 1화
제 1장. 지피지기 백전백승 (1)
뿅. 삐용. 삐용삐용.
시계의 시침이 막 1에 닿아 가는 시간, 빈 사무실 안에 울리는 소리가 힘찼다.
점심시간의 사무실은 늘 그렇듯 조용하기만 하다. 일 더 한다고 돈 더 주는 것도 아니니, 식사 시간에 굳이 사무실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예외를 자처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텅 빈 공간에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지훈의 표정이 심각했다. 키보드 방향키를 누르는 손놀림은 좌우로 현란하다. 띠. 띠. 띠. 테트리스의 블록이 손가락을 따라 오가며 삑삑이 신발 같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밥은 고사하더라도, 마지막 단계는 깨야 될 것 아닌가. 아. 조금만…… 조금만 버텨라…….
“강지훈.”
“아.”
지훈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안 그래도 헐겁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벅벅 털었다. 모니터에는 천장까지 닿아 버린 긴 블록 하나와, GAME OVER라는 빨간 자막이 패배를 알리고 있었다. 지훈이 허망한 표정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 마지막 단계였는데! 너 때문에 죽었잖아!”
“거짓말도 뻔뻔하게 친다. 나 3분 전부터 서 있었어. 금방 죽을 것 같길래 부른 거거든.”
동상처럼 꼿꼿이 선 재준을 노려본 지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재준에 비해 지훈은 동네 마실이라도 온 모양새다. 둘의 옷차림 사이에 공통점이라곤 목에 걸린 푸른색 사원증뿐이었다.
“어디 가.”
“오줌 싸러 간다.”
“가기 전에 부국장님한테 좀 들러.”
“왜, 또.”
상사의 부름이 달갑지 않은 건 부국장이 기꺼운 일로 지훈을 불렀던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부국장은 안 좋은 일은 꼭 얼굴을 맞대고 쿠사리를 줬다. 반대로 잘한 일은 굳이 불러서 칭찬하는 일이 드물었다. 시청률이 잘 나오면 별말 없이 집으로 선물 세트를 보내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 수치가 얼마냐에 따라 선물 세트의 종류도 천차만별이었다. 스팸부터 홍삼까지.
지훈은 특품 굴비를 받은 적이 있다. 엄마는 이런 맛의 굴비는 처음이라며 꼴랑 여덟 마리짜리 생선을 8개월 동안이나 아껴 먹었다. 지훈의 입엔 그냥 굴비였다. 굴비가 그래 봤자 굴비지.
“나 안 놀았어. 저번에 박 피디 도와준다고 촬영 B팀까지 뛰어 줬는데.”
“누가 뭐래?”
“근데 왜 또 나야!”
지훈이 발에 닿는 대로 무언가를 퍽 찼다. 뚜껑 닫힌 쓰레기통이 빈 깡통 같은 소리를 내며 덜덜 재준의 앞까지 굴러갔다. 재준은 혀를 쯧쯧 차며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래.”
“그래서?”
“네가 대신 좀 가라.”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재준이 사원증의 꼬인 줄을 손가락으로 풀며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한번 가 봐.”
썅. 좋은 일, 안 좋은 일이 무슨 상관인가.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둘 다 죽어서 가는 건 마찬가지인데. 지훈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올렸다.
* * *
“뭘 해요?”
“네가 김 작가 신작 좀 맡아 달라고.”
지훈이 뚱한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웬일로 앉혀 놓고 차까지 타 주더라. 밑밥 깔기였다 이거지?
“왜 제가요? 사극 끝나면 윤 피디님한테 맡기시죠. 저 같은 초짜가 뭘 안다고.”
“네가 해. 네가 하는 게 제일 어울릴 것 같더라.”
“그래 봤자 초짜는 초짜죠.”
입봉작이었던 특집 단막극, 그 다음의 16부작 미니시리즈까지 연달아 히트시키며 지훈을 향한 기대치는 한껏 높아졌다. 일단 일이 재밌어서 하기는 하는데. 촬영 들어가면 며칠 밤새우는 것은 일상인 데다, 여름엔 더워서 짜증났고 겨울엔 추워서 힘들었다. 한량이 체질인 지훈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잔말 말고 좀 하라면 그냥 해라. 너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는 거, 더 이상 보고 있기도 힘들다.”
“제가요? 놀긴 뭘 놀아요. 그래도 월급 받아먹는 값은 다 했는데.”
지훈이 부스스한 머리를 괜히 긁적거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부국장이 이렇게 직접 불러서 얘기하는데 퇴짜를 놓을 만한 짬은 없다.
“너 그거 무려 김온 대본이야. 하고 싶어 하는 사람 널렸다. 기회 준다는데도 말이 많아.”
아아. 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한테 그런 작가 드라마를 맡겨요? 부국장님도 영, 감이 떨어졌나 봅니다.”
“눈에 뵈는 거 없는 게 네 장점이긴 하지.”
부국장은 후루룩거리며 둥굴레차를 잘도 마셨다. 지훈은 나름대로 심각하게 기억 속 김온의 드라마를 되짚었다. 직업 특성상 꽤나 많은 드라마들을 보지만, 인물들이 죄다 울고 싶어 하거나 울기 직전이거나 울고 있는 장르는 좀처럼 속도가 붙질 않는다.
“저 강지훈인데요.”
“내가 그걸 지금 몰라?”
“도재준을 부르려다 잘못 불렀나 해서요.”
“야, 정신 차리고 빨리 작가랑 미팅부터 해. 알았어?”
젊은 나이에 뒷배와 능력을 고루 갖춰 초고속 승진 대로에 오른 부국장이다. 거의 짐승 수준의 감을 자랑하는 지훈조차도 부국장에겐 한 수를 접었다. 하지만 뭔가 생각이 있겠지 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죽이고 찌르고 패는 거면 몰라도, 눈물 질질 짜는 드라마는…… 지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장르였다. 피디가 공감 못 하는 드라마를 찍어서 뭐 어쩌자는 말인가.
“예에. 짖으라면 짖어야죠.”
그래도 어차피 을의 인생이란 다 이런 법이었다.
* * *
점심시간이 끝난 사무실은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오가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그 어느 회사보다도 회의가 잦은 곳이 방송국이다. 예능이고 드라마고 부서마다 매일 매일이 사고의 천국인 곳이었다. 지훈은 그들 틈새로 비켜 가며 터덜터덜 걸었다. 뭔가에 정신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종이를 한 아름씩 들고 뛰어다녔다.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진 지훈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내친김에 거의 눕다시피 몸에 힘을 풀고 고개를 젖혔다.
주말 드라마도 아니고, 평일 미니시리즈 편성이었다. 메인을 자신이 잡더라도 어차피 제작사의 외주를 껴야 될 텐데. 편성된 날짜를 고려하면 지금부터 빠듯하게 준비해도 반 사전 제작 정도의 스케줄이 맞춰질 터였다. 팬층이 탄탄하고 대본 퀄리티도 좋은 작가다. 나서서 캐스팅에 힘쓰지 않아도 하고 싶다 자청하는 배우들은 널렸을 것이다. 작가가 나서서 까다롭게 가리지만 않는다면.
씨발, 그러면 뭐 해. 뭘 어떻게 하든 지들끼리 싸우느라 지랄이겠지. 알력 싸움이란 게 원래 본인들 알량한 자존심보다는 배로 큰 스케일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시간은 촉박하지 않게 넉넉히 줄 테니까 좀 최선을 다해서 해 봐. 알겠어?’
부국장의 말이 지훈의 귀에 맴돌았다. 상사야 어찌됐든 늘 짜증나는 존재지만, 이왕 하는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누웠던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시놉시스와 4회까지의 대본 뭉치를 들었다가 인상만 쓰고선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일단 사전 탐색부터 해 보자고.
노트북으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두 글자를 쳤다. ‘김온’. 느려 터진 사내 와이파이 때문에 지훈의 속이 터질 뻔했다. 성격 급한 지훈이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김온. 드라마 작가. 데뷔 2012년 KBC 미니시리즈 ‘달과 소년.’ 수상 2012년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신인작가상.
아니, 그래도 나름 히트 작가인데 그 흔한 프로필 사진도 없었다. 학력도, 나이도, 김온이란 인간에 대한 건 뭣도 없다. 키나 몸무게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건 빈약해도 너무 빈약한데. 눈에 띄는 특징은 드라마가 끝나면 소설로 엮어 출간한다는 점. 그나마 쓸 만한 건 소속사가 없는 프리랜서라는 정도다. 지훈이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의자를 한 바퀴 돌렸다.
아무래도 작가 탐색은 드라마를 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 * *
“아, 내 눈.”
지훈이 혹사당한 눈알을 눈꺼풀 위로 꾹꾹 누르며 노트북을 덮었다. 1회를 볼 때는 한 다섯 번쯤 빨리 감기를 누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야 했다. 그래도 어쨌든 끝까지 다 보기는 했다. 1회를 넘기니 2회는 금방이었고, 3회나 4회는 그보다 더 빠르게 훅 지나갔다. 틈나는 대로 재생 버튼을 누르다 보니 날짜는 그새 이틀을 넘겼다. 먹고 자고 싸는 거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드라마에 처박은 덕분이었다.
거뭇하게 내려앉은 눈 그늘을 대충 슥슥 문질렀다. 눈알이 소금이라도 왕창 부은 것처럼 텁텁하고 깔끄럽다.
드라마는 눈물 젖은 필름이 다 그렇듯이 과거를 배경으로 했다. 사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적당히 뻔한 클리셰에 적당히 참신한 인물들의 적당한 조화가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이게 왜 인기를 끌었는지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툭툭 내던지는 대사들이 남달랐다. 어라, 싶은 대사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아무도 모르는 엉덩이의 왕 점을 쿡 찔린 기분이랄까. 생각 없이 사는 게 생각의 모토인 지훈조차도 가끔은 재생을 멈추고 팔짱을 낄 정도였다.
“강 피디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쩌다 책상을 섞어 쓰게 된 막내 작가가 지훈에게 물었다. 한 마디를 던지면 열두 마디를 혼자 부산스럽게 떠드는 여자였다. 지훈과는 죽었다 깨어나도 잘 맞지 않는 부류다.
“똥 싸러 갈까 말까요.”
“농담도.”
그러면서 은근히 말을 이어 가려는 낌새를 보였다. 지훈은 귀찮은 표정을 역력히 지으며 내선 전화기를 들었다. 잘 모르겠을 땐 직진이 답이다. 지구가 괜히 둥그렇겠어. 앞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원래 서 있던 곳으로라도 돌아오겠지. 지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만 하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A4 종이뭉치들 사이에서 빳빳한 파일 하나를 골라냈다. 그리고 그 앞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의 열한 자리 숫자를 더듬거리며 눌렀다. 컬러링 없는 단조로운 신호음이 열 번쯤 이어졌다.
찰칵.
그리고 조용했다. 전화 상대는 침묵을 지켰다. 꼭 여보세요, 하는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결국 지훈이 먼저 입을 열어야만 했다.
“여보세요.”
-네.
“김온 작가님? 여기 KBC입니다.”
또 한 번 끊어질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한, 2.5초쯤일까? 지훈이 자동차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렸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다. 남자 같다고 생각하면 여자 같고, 여자 같다고 생각하면 남자 같은 목소리였다. 전화기 너머에선 목소리를 제외하면 작은 숨소리조차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데요.
그 흔한 안녕하냐는 인사말도 없는 건가. 김온이란 인간의 윤곽이 아주 스리슬쩍 드러나고 있었다.
“저 강지훈 피딥니다. 긴말 필요 없이 한번 만나죠.”
* * *
날짜, 시간, 장소를 정해서 연락하겠습니다. 메트로놈으로 박자를 세어도 흐트러지지 않을 법한 정갈한 목소리였다. 지훈은 가끔 그 목소리를 생각했다. 커피 자판기 앞에서 빨간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릴 때, 멈춰 버린 구식 노트북 앞에 앉아서, 편집실 기기가 켜지는 동안에도. ‘불현듯’이나 ‘갑자기’란 수식어가 아주 잘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몇 번쯤, 정말로 날짜 시간 장소만 간결한 문자를 들여다봤다. 내가 누구라든가, 안녕하냐든가, 계면쩍은 관계의 사람들이 앞세우는 흔한 인사치레조차도 없다.
무슨 문자에 마침표까지 찍고 지랄이야.
지훈은 휴대폰 화면이 새까매질 때까지 그 문자를 들여다봤다. 이번엔 텅 빈 복도를 지나가다 아주 문득, 한 손엔 길어질 편집을 위한 간식 더미를 다발로 든 채였다. 요즘 세상에 문자를 쓰는 인간이 얼마나 있다고. 심지어 명절날 안부를 묻는 배우나 스텝들조차도 적잖이 메신저를 이용하는 세상이 아닌가.
지훈이 콧방귀를 뀌곤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연이틀을 방송국에서 새우느라 감지 못한 머리에 대해 생각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눌러쓴 캡 모자는 몇 년 전 막내 시절에 뛴 드라마의 스텝 단체 모자였다. 모자 위에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수놓여 있어도 그게 드라마 제목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는, 그런 것. 왜냐면 드라마가 폭삭 망했거든. 지훈은 언제나 그랬듯이 손에 잡히는 대로 썼을 뿐이다.
아, 좀 씻어 볼까.
그렇게 생각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뭘, 언제부터 이런 거에 신경을 썼다고.
* * *
문자에 찍힌 장소는 방송국 근처였다. 근처인 건 알지만 들었을 때 익숙하진 않은 곳이다. 입사 후 몇 년 간 들락거린 곳이 술집, 밥집이 다인 지훈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요 며칠 들어 부쩍 추워졌다. 가까운 거리라고 호기롭게 후드티 하나를 홑겹으로 걸친 지훈이 훈기 어린 카페 안으로 들어서며 몸을 움츠렸다.
“엄청 춥네.”
춥다, 추워. 습관적으로 내뱉은 말은 쉬이 멈출 수 없는 법이다. 지훈은 마지막으로 카페에 사람을 만나러 온 게 언제였는지를 생각했다. 금방 떠오르지 않을 정도인 걸 보니, 꽤나 까마득하구나 싶었다.
카페들이 으레 그러하듯, 약간 명도가 낮은 노란색 조명을 깔아 놓은 평범한 카페였다. 심지어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마저도 특색 없이 무난하기만 했다. 사람이라곤 카운터의 주인뿐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 근처에 등을 지고 앉은 조그만 뒤통수도 빼고 말이다.
지훈은 문득 이 인간이 카페를 전세라도 냈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바로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 뇌세포 낭비도 습관이라면 습관이다. 괜히 터진 웃음 때문에 피식거림을 멈추지 못하고 김온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작가가 늦어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근거는 없다. 그저 단순한 감이다.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은 지훈이 마주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어라. 이건 또, 생각보다……. 지훈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외마디 감탄사를 씹어 삼켰다.
덩치가 뒤통수만큼이나 조그만 남자는 책을 읽고 있었다. 사람이 앉은 것을 알아차리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은근히 꿋꿋하고 고집 있는 자세였다. 지훈은 밝은 갈색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책을 쥐고 있는 희고 뼈대가 얇은 손가락까지 단번에 스캔했다. 인식할 새도 없이 감상평이 떠오르고 말았다.
“어린데.”
지훈은 제 목소리를 귀로 듣고서야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음을 깨달았다. 아주 잠깐 아차, 했다가 이내 그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원래도 민망함이란 걸 모르는 인간이다. 지훈의 말을 듣자마자 작가의 담담하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떠올랐다. 책을 덮고 완전히 얼굴을 마주하자 그늘져 있던 올망졸망 오뚝한 콧대가 지훈을 향했다.
지훈은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리다는 말을 듣자마자 기분 나쁜 티를 내는 것을 보니 동안인 얼굴이 고민이 될 만큼은 나이를 먹었나 본데. 아니면 본인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애든가. 지훈은 후자에 무게를 더 실었다. 전자라고 생각하기엔, 얼굴이 정말로 앳되어서.
들리는 소문에, 작가보다는 연예인에 가까운 얼굴이라고 하더니. 지훈은 그 말에 백번 공감했다.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여자처럼 생겼냐고 물어본다면, 곧장 그렇다곤 하지 못 하겠다. 굳이 말하자면 중성적인 느낌이랄까. 지훈은 미인이란 단어로 제 감상을 에둘러 포장했다.
온은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듯 표정을 갈무리했다.
“강지훈입니다.”
“김온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테이블 한 편으로 책을 밀었다. 지훈의 눈이 책 제목을 확인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까, 물론 무슨 책인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커피 마실 건가요?”
생긴 건 꼭 교복 모델 같은데 말투는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묻는 의사 뺨치게 무게가 실려 있다. 지훈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달고 짠 맛에 익숙해진 지훈의 입맛에, 아메리카노는 담뱃재를 탄 물 같았다. 라떼는 담뱃재를 넣고 왕창 흔든 우유 같았고.
“시놉이랑 대본 잘 봤습니다. 재밌더라고요.”
온이 어색하게 얼굴 근육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거리 한번 제대로 두네. 이게 무슨, 서로의 만남을 양가 부모들까지 알고 있는 혼기 꽉 찬 남녀 맞선도 아니고. 지훈이 목 뒤를 긁적거렸다.
“뭐. 편성은 내년 상반기로 결정됐고. 제작사는 세 개로 추렸으니까 작가님이 맘에 드는 걸로 하나 집어 주시면…….”
지훈은 잠시 말을 멈췄다. 또 해야 할 말이 무엇이 있었던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온은 얘기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 비운 커피 잔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를 잠깐 관망하던 지훈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무슨 할 말 있습니까?”
온은 지금 이 자리가 지나치게 불편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내가 누굴 편하게는 못 해 줘도, 딱히 불편하게 하진 않는 것 같은데.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페에선 들어 본 적 없는 잔잔한 멜로디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온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 빈 잔 속을 바라보았다. 내리깔린 긴 속눈썹이 지훈의 시선을 잠시 훔쳐갔다.
“그쪽 말고, 다른 PD랑 하고 싶어요.”
엉뚱하게도 지훈은 갑자기 케이퍼 무비가 보고 싶어졌다. 다이아나 금고 같은 거 노리는 지질한 도둑질 말고, 대부호의 재산을 가진 요염한 재벌 3세 소년의 마음을 훔치는 걸로다가.
어라, 근데 방금 뭐라고 했더라?
“다른 PD랑 하고 싶다고요?”
지훈이 저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온은 양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흠,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지훈이 테이블 위로 턱을 괴었다. 그 말 하려고 얼굴 보자 그랬나. 왠지 모르게 헛헛했다.
“왜요?”
거절을 당했으니 이유를 묻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든 너의 생각에 반박을 해서 그 마음을 고쳐 놓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 지훈은 성격이 급했다. 촬영하다 나는 딜레이에도 성질을 못 이겨 씬을 통째로 날려 먹거나 하는 일이 적잖을 정도였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 조용하고 느린 작가의 대답을 기다려 보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온은 조약돌같이 매끄럽고 동그란 손가락 끝을 옹송그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중이로군.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점은 앳된 외모와 참 잘 어울렸다. 그리고 지훈은 그 손가락 끝을 쥐어 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만 치밀어 올라서 애꿎은 입 안 살만 씹어 댔다.
“그쪽 연출은 저랑 잘 안 어울려요.”
“……잘 안 어울린다고요?”
“제 대본 읽어 보셨다면서요.”
“읽어야 봤는데……. 다른 이유 없고 그거 딱 하나 때문에?”
“그럼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지훈은 눈치가 빨랐고 온은 거짓말을 못했다.
“그럼 나 말고는 누가 좋은데요.”
“어…….”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아, 커피 냄새 맡으니까 속 너무 안 좋네. 전날 밤 진탕 술을 마신 지훈이 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갈비탕 먹으러 갈까.
“도재준 피디님?”
“도재준?”
지훈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쭉 뻗었다. 하고 많은 애 중에 도재준? 마주 앉아 있는 온과 한창 촬영 중일 재준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공통점은, 둘 다 윤이 반질반질하게 닦은 조약돌 같다는 거. 얼굴에 ‘나 바른 생활 사나이요’ 하고 써 놓은 것도. 덩치는 콩만 한 주제에 말투나 표정은 세상 진지하다는 것이 특히나 닮았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이 닮았어.
“걔는 안 돼요. 주말 드라마 덜 끝나서 아직 바쁩니다. 패스하세요.”
헛소리다. 막바지 촬영에 돌입한 재준이 편성이 반년 가까이 남은 드라마에 못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제 입에서 나온 영문 모를 개소리에 지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온은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골똘히 생각에 잠긴 온은 그 이후로도 몇 명의 연출 이름을 내놓았다. 죄다 뽀샤시한 분홍색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필름의 소유자들이었다. 지훈은 ‘박 피디님 출산 휴가요’를 시작으로 이직 예정, 사극으로 갈아탔음, 파업 나갔어요, 하는 둥의 퇴짜를 늘어놓았다. 연이어 몇 명의 감독 이름을 읊던 온의 얼굴도 점차 구겨졌다.
제 1장. 지피지기 백전백승 (1)
뿅. 삐용. 삐용삐용.
시계의 시침이 막 1에 닿아 가는 시간, 빈 사무실 안에 울리는 소리가 힘찼다.
점심시간의 사무실은 늘 그렇듯 조용하기만 하다. 일 더 한다고 돈 더 주는 것도 아니니, 식사 시간에 굳이 사무실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예외를 자처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텅 빈 공간에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지훈의 표정이 심각했다. 키보드 방향키를 누르는 손놀림은 좌우로 현란하다. 띠. 띠. 띠. 테트리스의 블록이 손가락을 따라 오가며 삑삑이 신발 같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밥은 고사하더라도, 마지막 단계는 깨야 될 것 아닌가. 아. 조금만…… 조금만 버텨라…….
“강지훈.”
“아.”
지훈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안 그래도 헐겁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벅벅 털었다. 모니터에는 천장까지 닿아 버린 긴 블록 하나와, GAME OVER라는 빨간 자막이 패배를 알리고 있었다. 지훈이 허망한 표정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 마지막 단계였는데! 너 때문에 죽었잖아!”
“거짓말도 뻔뻔하게 친다. 나 3분 전부터 서 있었어. 금방 죽을 것 같길래 부른 거거든.”
동상처럼 꼿꼿이 선 재준을 노려본 지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재준에 비해 지훈은 동네 마실이라도 온 모양새다. 둘의 옷차림 사이에 공통점이라곤 목에 걸린 푸른색 사원증뿐이었다.
“어디 가.”
“오줌 싸러 간다.”
“가기 전에 부국장님한테 좀 들러.”
“왜, 또.”
상사의 부름이 달갑지 않은 건 부국장이 기꺼운 일로 지훈을 불렀던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부국장은 안 좋은 일은 꼭 얼굴을 맞대고 쿠사리를 줬다. 반대로 잘한 일은 굳이 불러서 칭찬하는 일이 드물었다. 시청률이 잘 나오면 별말 없이 집으로 선물 세트를 보내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 수치가 얼마냐에 따라 선물 세트의 종류도 천차만별이었다. 스팸부터 홍삼까지.
지훈은 특품 굴비를 받은 적이 있다. 엄마는 이런 맛의 굴비는 처음이라며 꼴랑 여덟 마리짜리 생선을 8개월 동안이나 아껴 먹었다. 지훈의 입엔 그냥 굴비였다. 굴비가 그래 봤자 굴비지.
“나 안 놀았어. 저번에 박 피디 도와준다고 촬영 B팀까지 뛰어 줬는데.”
“누가 뭐래?”
“근데 왜 또 나야!”
지훈이 발에 닿는 대로 무언가를 퍽 찼다. 뚜껑 닫힌 쓰레기통이 빈 깡통 같은 소리를 내며 덜덜 재준의 앞까지 굴러갔다. 재준은 혀를 쯧쯧 차며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래.”
“그래서?”
“네가 대신 좀 가라.”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재준이 사원증의 꼬인 줄을 손가락으로 풀며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한번 가 봐.”
썅. 좋은 일, 안 좋은 일이 무슨 상관인가.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둘 다 죽어서 가는 건 마찬가지인데. 지훈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올렸다.
“뭘 해요?”
“네가 김 작가 신작 좀 맡아 달라고.”
지훈이 뚱한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웬일로 앉혀 놓고 차까지 타 주더라. 밑밥 깔기였다 이거지?
“왜 제가요? 사극 끝나면 윤 피디님한테 맡기시죠. 저 같은 초짜가 뭘 안다고.”
“네가 해. 네가 하는 게 제일 어울릴 것 같더라.”
“그래 봤자 초짜는 초짜죠.”
입봉작이었던 특집 단막극, 그 다음의 16부작 미니시리즈까지 연달아 히트시키며 지훈을 향한 기대치는 한껏 높아졌다. 일단 일이 재밌어서 하기는 하는데. 촬영 들어가면 며칠 밤새우는 것은 일상인 데다, 여름엔 더워서 짜증났고 겨울엔 추워서 힘들었다. 한량이 체질인 지훈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잔말 말고 좀 하라면 그냥 해라. 너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는 거, 더 이상 보고 있기도 힘들다.”
“제가요? 놀긴 뭘 놀아요. 그래도 월급 받아먹는 값은 다 했는데.”
지훈이 부스스한 머리를 괜히 긁적거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부국장이 이렇게 직접 불러서 얘기하는데 퇴짜를 놓을 만한 짬은 없다.
“너 그거 무려 김온 대본이야. 하고 싶어 하는 사람 널렸다. 기회 준다는데도 말이 많아.”
아아. 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한테 그런 작가 드라마를 맡겨요? 부국장님도 영, 감이 떨어졌나 봅니다.”
“눈에 뵈는 거 없는 게 네 장점이긴 하지.”
부국장은 후루룩거리며 둥굴레차를 잘도 마셨다. 지훈은 나름대로 심각하게 기억 속 김온의 드라마를 되짚었다. 직업 특성상 꽤나 많은 드라마들을 보지만, 인물들이 죄다 울고 싶어 하거나 울기 직전이거나 울고 있는 장르는 좀처럼 속도가 붙질 않는다.
“저 강지훈인데요.”
“내가 그걸 지금 몰라?”
“도재준을 부르려다 잘못 불렀나 해서요.”
“야, 정신 차리고 빨리 작가랑 미팅부터 해. 알았어?”
젊은 나이에 뒷배와 능력을 고루 갖춰 초고속 승진 대로에 오른 부국장이다. 거의 짐승 수준의 감을 자랑하는 지훈조차도 부국장에겐 한 수를 접었다. 하지만 뭔가 생각이 있겠지 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죽이고 찌르고 패는 거면 몰라도, 눈물 질질 짜는 드라마는…… 지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장르였다. 피디가 공감 못 하는 드라마를 찍어서 뭐 어쩌자는 말인가.
“예에. 짖으라면 짖어야죠.”
그래도 어차피 을의 인생이란 다 이런 법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사무실은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오가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그 어느 회사보다도 회의가 잦은 곳이 방송국이다. 예능이고 드라마고 부서마다 매일 매일이 사고의 천국인 곳이었다. 지훈은 그들 틈새로 비켜 가며 터덜터덜 걸었다. 뭔가에 정신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종이를 한 아름씩 들고 뛰어다녔다.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진 지훈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내친김에 거의 눕다시피 몸에 힘을 풀고 고개를 젖혔다.
주말 드라마도 아니고, 평일 미니시리즈 편성이었다. 메인을 자신이 잡더라도 어차피 제작사의 외주를 껴야 될 텐데. 편성된 날짜를 고려하면 지금부터 빠듯하게 준비해도 반 사전 제작 정도의 스케줄이 맞춰질 터였다. 팬층이 탄탄하고 대본 퀄리티도 좋은 작가다. 나서서 캐스팅에 힘쓰지 않아도 하고 싶다 자청하는 배우들은 널렸을 것이다. 작가가 나서서 까다롭게 가리지만 않는다면.
씨발, 그러면 뭐 해. 뭘 어떻게 하든 지들끼리 싸우느라 지랄이겠지. 알력 싸움이란 게 원래 본인들 알량한 자존심보다는 배로 큰 스케일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시간은 촉박하지 않게 넉넉히 줄 테니까 좀 최선을 다해서 해 봐. 알겠어?’
부국장의 말이 지훈의 귀에 맴돌았다. 상사야 어찌됐든 늘 짜증나는 존재지만, 이왕 하는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누웠던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시놉시스와 4회까지의 대본 뭉치를 들었다가 인상만 쓰고선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일단 사전 탐색부터 해 보자고.
노트북으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두 글자를 쳤다. ‘김온’. 느려 터진 사내 와이파이 때문에 지훈의 속이 터질 뻔했다. 성격 급한 지훈이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김온. 드라마 작가. 데뷔 2012년 KBC 미니시리즈 ‘달과 소년.’ 수상 2012년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신인작가상.
아니, 그래도 나름 히트 작가인데 그 흔한 프로필 사진도 없었다. 학력도, 나이도, 김온이란 인간에 대한 건 뭣도 없다. 키나 몸무게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건 빈약해도 너무 빈약한데. 눈에 띄는 특징은 드라마가 끝나면 소설로 엮어 출간한다는 점. 그나마 쓸 만한 건 소속사가 없는 프리랜서라는 정도다. 지훈이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의자를 한 바퀴 돌렸다.
아무래도 작가 탐색은 드라마를 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아, 내 눈.”
지훈이 혹사당한 눈알을 눈꺼풀 위로 꾹꾹 누르며 노트북을 덮었다. 1회를 볼 때는 한 다섯 번쯤 빨리 감기를 누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야 했다. 그래도 어쨌든 끝까지 다 보기는 했다. 1회를 넘기니 2회는 금방이었고, 3회나 4회는 그보다 더 빠르게 훅 지나갔다. 틈나는 대로 재생 버튼을 누르다 보니 날짜는 그새 이틀을 넘겼다. 먹고 자고 싸는 거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드라마에 처박은 덕분이었다.
거뭇하게 내려앉은 눈 그늘을 대충 슥슥 문질렀다. 눈알이 소금이라도 왕창 부은 것처럼 텁텁하고 깔끄럽다.
드라마는 눈물 젖은 필름이 다 그렇듯이 과거를 배경으로 했다. 사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적당히 뻔한 클리셰에 적당히 참신한 인물들의 적당한 조화가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이게 왜 인기를 끌었는지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툭툭 내던지는 대사들이 남달랐다. 어라, 싶은 대사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아무도 모르는 엉덩이의 왕 점을 쿡 찔린 기분이랄까. 생각 없이 사는 게 생각의 모토인 지훈조차도 가끔은 재생을 멈추고 팔짱을 낄 정도였다.
“강 피디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쩌다 책상을 섞어 쓰게 된 막내 작가가 지훈에게 물었다. 한 마디를 던지면 열두 마디를 혼자 부산스럽게 떠드는 여자였다. 지훈과는 죽었다 깨어나도 잘 맞지 않는 부류다.
“똥 싸러 갈까 말까요.”
“농담도.”
그러면서 은근히 말을 이어 가려는 낌새를 보였다. 지훈은 귀찮은 표정을 역력히 지으며 내선 전화기를 들었다. 잘 모르겠을 땐 직진이 답이다. 지구가 괜히 둥그렇겠어. 앞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원래 서 있던 곳으로라도 돌아오겠지. 지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만 하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A4 종이뭉치들 사이에서 빳빳한 파일 하나를 골라냈다. 그리고 그 앞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의 열한 자리 숫자를 더듬거리며 눌렀다. 컬러링 없는 단조로운 신호음이 열 번쯤 이어졌다.
찰칵.
그리고 조용했다. 전화 상대는 침묵을 지켰다. 꼭 여보세요, 하는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결국 지훈이 먼저 입을 열어야만 했다.
“여보세요.”
-네.
“김온 작가님? 여기 KBC입니다.”
또 한 번 끊어질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한, 2.5초쯤일까? 지훈이 자동차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렸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다. 남자 같다고 생각하면 여자 같고, 여자 같다고 생각하면 남자 같은 목소리였다. 전화기 너머에선 목소리를 제외하면 작은 숨소리조차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데요.
그 흔한 안녕하냐는 인사말도 없는 건가. 김온이란 인간의 윤곽이 아주 스리슬쩍 드러나고 있었다.
“저 강지훈 피딥니다. 긴말 필요 없이 한번 만나죠.”
날짜, 시간, 장소를 정해서 연락하겠습니다. 메트로놈으로 박자를 세어도 흐트러지지 않을 법한 정갈한 목소리였다. 지훈은 가끔 그 목소리를 생각했다. 커피 자판기 앞에서 빨간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릴 때, 멈춰 버린 구식 노트북 앞에 앉아서, 편집실 기기가 켜지는 동안에도. ‘불현듯’이나 ‘갑자기’란 수식어가 아주 잘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몇 번쯤, 정말로 날짜 시간 장소만 간결한 문자를 들여다봤다. 내가 누구라든가, 안녕하냐든가, 계면쩍은 관계의 사람들이 앞세우는 흔한 인사치레조차도 없다.
무슨 문자에 마침표까지 찍고 지랄이야.
지훈은 휴대폰 화면이 새까매질 때까지 그 문자를 들여다봤다. 이번엔 텅 빈 복도를 지나가다 아주 문득, 한 손엔 길어질 편집을 위한 간식 더미를 다발로 든 채였다. 요즘 세상에 문자를 쓰는 인간이 얼마나 있다고. 심지어 명절날 안부를 묻는 배우나 스텝들조차도 적잖이 메신저를 이용하는 세상이 아닌가.
지훈이 콧방귀를 뀌곤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연이틀을 방송국에서 새우느라 감지 못한 머리에 대해 생각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눌러쓴 캡 모자는 몇 년 전 막내 시절에 뛴 드라마의 스텝 단체 모자였다. 모자 위에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수놓여 있어도 그게 드라마 제목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는, 그런 것. 왜냐면 드라마가 폭삭 망했거든. 지훈은 언제나 그랬듯이 손에 잡히는 대로 썼을 뿐이다.
아, 좀 씻어 볼까.
그렇게 생각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뭘, 언제부터 이런 거에 신경을 썼다고.
문자에 찍힌 장소는 방송국 근처였다. 근처인 건 알지만 들었을 때 익숙하진 않은 곳이다. 입사 후 몇 년 간 들락거린 곳이 술집, 밥집이 다인 지훈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요 며칠 들어 부쩍 추워졌다. 가까운 거리라고 호기롭게 후드티 하나를 홑겹으로 걸친 지훈이 훈기 어린 카페 안으로 들어서며 몸을 움츠렸다.
“엄청 춥네.”
춥다, 추워. 습관적으로 내뱉은 말은 쉬이 멈출 수 없는 법이다. 지훈은 마지막으로 카페에 사람을 만나러 온 게 언제였는지를 생각했다. 금방 떠오르지 않을 정도인 걸 보니, 꽤나 까마득하구나 싶었다.
카페들이 으레 그러하듯, 약간 명도가 낮은 노란색 조명을 깔아 놓은 평범한 카페였다. 심지어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마저도 특색 없이 무난하기만 했다. 사람이라곤 카운터의 주인뿐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 근처에 등을 지고 앉은 조그만 뒤통수도 빼고 말이다.
지훈은 문득 이 인간이 카페를 전세라도 냈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바로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 뇌세포 낭비도 습관이라면 습관이다. 괜히 터진 웃음 때문에 피식거림을 멈추지 못하고 김온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작가가 늦어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근거는 없다. 그저 단순한 감이다.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은 지훈이 마주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어라. 이건 또, 생각보다……. 지훈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외마디 감탄사를 씹어 삼켰다.
덩치가 뒤통수만큼이나 조그만 남자는 책을 읽고 있었다. 사람이 앉은 것을 알아차리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은근히 꿋꿋하고 고집 있는 자세였다. 지훈은 밝은 갈색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책을 쥐고 있는 희고 뼈대가 얇은 손가락까지 단번에 스캔했다. 인식할 새도 없이 감상평이 떠오르고 말았다.
“어린데.”
지훈은 제 목소리를 귀로 듣고서야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음을 깨달았다. 아주 잠깐 아차, 했다가 이내 그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원래도 민망함이란 걸 모르는 인간이다. 지훈의 말을 듣자마자 작가의 담담하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떠올랐다. 책을 덮고 완전히 얼굴을 마주하자 그늘져 있던 올망졸망 오뚝한 콧대가 지훈을 향했다.
지훈은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리다는 말을 듣자마자 기분 나쁜 티를 내는 것을 보니 동안인 얼굴이 고민이 될 만큼은 나이를 먹었나 본데. 아니면 본인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애든가. 지훈은 후자에 무게를 더 실었다. 전자라고 생각하기엔, 얼굴이 정말로 앳되어서.
들리는 소문에, 작가보다는 연예인에 가까운 얼굴이라고 하더니. 지훈은 그 말에 백번 공감했다.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여자처럼 생겼냐고 물어본다면, 곧장 그렇다곤 하지 못 하겠다. 굳이 말하자면 중성적인 느낌이랄까. 지훈은 미인이란 단어로 제 감상을 에둘러 포장했다.
온은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듯 표정을 갈무리했다.
“강지훈입니다.”
“김온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테이블 한 편으로 책을 밀었다. 지훈의 눈이 책 제목을 확인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까, 물론 무슨 책인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커피 마실 건가요?”
생긴 건 꼭 교복 모델 같은데 말투는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묻는 의사 뺨치게 무게가 실려 있다. 지훈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달고 짠 맛에 익숙해진 지훈의 입맛에, 아메리카노는 담뱃재를 탄 물 같았다. 라떼는 담뱃재를 넣고 왕창 흔든 우유 같았고.
“시놉이랑 대본 잘 봤습니다. 재밌더라고요.”
온이 어색하게 얼굴 근육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거리 한번 제대로 두네. 이게 무슨, 서로의 만남을 양가 부모들까지 알고 있는 혼기 꽉 찬 남녀 맞선도 아니고. 지훈이 목 뒤를 긁적거렸다.
“뭐. 편성은 내년 상반기로 결정됐고. 제작사는 세 개로 추렸으니까 작가님이 맘에 드는 걸로 하나 집어 주시면…….”
지훈은 잠시 말을 멈췄다. 또 해야 할 말이 무엇이 있었던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온은 얘기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 비운 커피 잔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를 잠깐 관망하던 지훈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무슨 할 말 있습니까?”
온은 지금 이 자리가 지나치게 불편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내가 누굴 편하게는 못 해 줘도, 딱히 불편하게 하진 않는 것 같은데.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페에선 들어 본 적 없는 잔잔한 멜로디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온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 빈 잔 속을 바라보았다. 내리깔린 긴 속눈썹이 지훈의 시선을 잠시 훔쳐갔다.
“그쪽 말고, 다른 PD랑 하고 싶어요.”
엉뚱하게도 지훈은 갑자기 케이퍼 무비가 보고 싶어졌다. 다이아나 금고 같은 거 노리는 지질한 도둑질 말고, 대부호의 재산을 가진 요염한 재벌 3세 소년의 마음을 훔치는 걸로다가.
어라, 근데 방금 뭐라고 했더라?
“다른 PD랑 하고 싶다고요?”
지훈이 저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온은 양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흠,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지훈이 테이블 위로 턱을 괴었다. 그 말 하려고 얼굴 보자 그랬나. 왠지 모르게 헛헛했다.
“왜요?”
거절을 당했으니 이유를 묻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든 너의 생각에 반박을 해서 그 마음을 고쳐 놓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 지훈은 성격이 급했다. 촬영하다 나는 딜레이에도 성질을 못 이겨 씬을 통째로 날려 먹거나 하는 일이 적잖을 정도였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 조용하고 느린 작가의 대답을 기다려 보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온은 조약돌같이 매끄럽고 동그란 손가락 끝을 옹송그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중이로군.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점은 앳된 외모와 참 잘 어울렸다. 그리고 지훈은 그 손가락 끝을 쥐어 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만 치밀어 올라서 애꿎은 입 안 살만 씹어 댔다.
“그쪽 연출은 저랑 잘 안 어울려요.”
“……잘 안 어울린다고요?”
“제 대본 읽어 보셨다면서요.”
“읽어야 봤는데……. 다른 이유 없고 그거 딱 하나 때문에?”
“그럼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지훈은 눈치가 빨랐고 온은 거짓말을 못했다.
“그럼 나 말고는 누가 좋은데요.”
“어…….”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아, 커피 냄새 맡으니까 속 너무 안 좋네. 전날 밤 진탕 술을 마신 지훈이 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갈비탕 먹으러 갈까.
“도재준 피디님?”
“도재준?”
지훈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리를 쭉 뻗었다. 하고 많은 애 중에 도재준? 마주 앉아 있는 온과 한창 촬영 중일 재준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공통점은, 둘 다 윤이 반질반질하게 닦은 조약돌 같다는 거. 얼굴에 ‘나 바른 생활 사나이요’ 하고 써 놓은 것도. 덩치는 콩만 한 주제에 말투나 표정은 세상 진지하다는 것이 특히나 닮았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이 닮았어.
“걔는 안 돼요. 주말 드라마 덜 끝나서 아직 바쁩니다. 패스하세요.”
헛소리다. 막바지 촬영에 돌입한 재준이 편성이 반년 가까이 남은 드라마에 못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제 입에서 나온 영문 모를 개소리에 지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온은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골똘히 생각에 잠긴 온은 그 이후로도 몇 명의 연출 이름을 내놓았다. 죄다 뽀샤시한 분홍색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필름의 소유자들이었다. 지훈은 ‘박 피디님 출산 휴가요’를 시작으로 이직 예정, 사극으로 갈아탔음, 파업 나갔어요, 하는 둥의 퇴짜를 늘어놓았다. 연이어 몇 명의 감독 이름을 읊던 온의 얼굴도 점차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