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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도 오케이! 1권
1화
Chapter 1. 망고의 망조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변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제발. 그만해.”
“테라께서는 내가 두려운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지?”
애달픈 눈동자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치사해. 나는 항상 솔의 그런 눈빛에 약했으니까.
“그대도 알겠지. 내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곧…….”
“솔!”
나의 마음이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끊었다. 그저 상황을 붙잡아 멈추려는 그 부름에 그가 응할 리 없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의지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의 몸도 함께 변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
그는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항상 아름다웠고 반짝였던 솔이 오늘은 어쩐지 위협적으로 보였다. 무엇 때문일까, 그 노골적인 시선 탓일까.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인 테라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모습으로.”
“솔, 우리의 약속은…….”
분명히 우리는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맹세했다. 각자의 뜻과 꿈을 따르기로. 마음의 색을 그대로 간직하기로.
“약속은 유효해. 다만 이제 나의 뜻에 있는 이가 바뀌어 버린 것뿐이야.”



태양의 나라와 달의 나라가 있었다. 태양을 닮아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불의 종족. 달을 닮아 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달의 종족.
전쟁도 작은 논쟁도 없었던 두 나라 사이에는 오랜 세월 동안 굳게 내려오는 사소한 약속이 있었다.
「태양의 나라 왕은 달의 나라 사람과 혼인한다.」
왕과 혼인할 사람은 달의 여신이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자. 여신의 결정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다. 성별, 나이, 직업, 신분을 초월하는 그녀의 신성한 기준은 매번 바뀌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것을 가늠하여 미리 준비할 수도 없었다.
태양의 나라 왕은 탄생과 동시에 그 고귀함이 정해졌다. 아무리 많은 왕의 자손이 있다고 하더라도 왕이 될 씨앗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을 구별하는 방법은 무척이나 쉬웠다.
왕이 될 자는 성性을 지니지 않고 태어났다.
세계의 가장 큰 이분법, 남성과 여성이라는 벽을 모두 품고 이해하는 존재로. 그리고 나아가 모든 존재를 두루 살피는 왕이 될 수 있도록 태양의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한 태양왕도 언젠가는 하나의 성을 선택해야 했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그도 이때만큼은 타인의 선택에 자신의 성별을 맡겨야 했다.



“그게 누구냐고? 당연하지, 테라! 바로 우리 달의 여신님 아니겠어?”
아란의 손가락 끝이 내 미간을 향했다. 흥분하셨구먼.
아란이 지금까지 실컷 떠든 이야기는 달의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 살 이전에 들었을 법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달의 여신님이 이 세계 최강이에요!’라고 ‘달부심’을 부채질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술만 먹으면 꺼내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 달의 여신님이 이 세계 최강이에요!”
나왔다! 저 대사!
“아란. 요즘 그 이야기를 술 마실 때마다 반복하는 거 알고 있어?”
“내가? 내가? 무슨 이야기를?”
“……주정뱅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니.”
나는 한숨을 쉬며, 아란 앞에 놓여 있는 술병을 슬쩍 치워 두었다.
앞에 앉아 있는 긴 금발 아가씨는 스무 살 동갑인 나의 둘도 없는 친구. 성격적인 문제는 많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다. 취미는 미용실 놀이. 그녀가 항상 내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 하는 탓에 나는 평생에 걸쳐 이 단발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테라, 들어 봐. 이건 비밀인데.”
“비밀?”
그렇지 않아도 손님이 적어서 조용한 가게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비밀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최선을 다해 반응해 주기로 했다.
“내 사촌인 아리아 언니의 남편의 직장 동료의 옆집 사는 아저씨의 친구가 제법 높은 신분의 문관인데.”
세 글자로 줄여서 생판 남이라고 말해도 될 텐데.
“곧 여신님의 선택이 있을 거라고 해.”
“아, 그래?”
“‘아, 그래?’라니. 태양왕의 신부를 고르는 일에 어쩜 너는 그렇게 관심이 없니?”
나의 미지근한 반응이 아란의 기대에 영 미치지 못했나 보다. 그러니까 전부터 원하는 반응이 있으면 미리 이야기해 달라고 해도 아란은 항상 이런 식이다. 처음부터 ‘내 이야기에 환호해 줘.’ 혹은 ‘위로해 줘.’ 혹은 ‘손뼉 쳐 줘.’라고 원하는 정답을 말해 주면 그대로 해 줄 수 있는데.
“할 말이 있는데, 아란.”
“응.”
“여신께서 고르시는 것은 태양왕의 반려지 ‘신부’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야. ‘신랑’일 수도 있다고.”
“반드시 신부일 거야. 신부일 거야. 신부여야 해.”
“왜?”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성인식의 소원에 내가 그렇게 여신께 빌었거든.”
이 멍청한!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겨우 그딴 걸로 날려 먹다니. 차라리 그날 저녁 메뉴를 최고급 소고기 스테이크로 준비해 달라고 할 것이지! 그렇게 했으면 하다못해 배라도 불렀을 텐데!
“차라리 널 보내 달라고 구체적으로 빌지 그랬어?”
“응? ‘태양의 나라로 가는 달의 반려가 꼭 신부였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면 여신께서도 내가 그 자리를 원한다고 이해하시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아란. 전부터 말했지만 원하는 대답이나 반응이 있으면 제발 그냥 대놓고 말해. 그렇게 답을 정해 놓고 에둘러 말하면 여신이 아니라 여신의 여신의 여신님이 와도 이해 못 할 테니까!
“그래. 알아주실지도 모르지.”
나는 답답한 마음을 꿀꺽 삼켜 냈다. 아마 아란을 지켜보시는 여신도 같은 마음이셨을 거다.
“여신님의 기준은 뭘까?”
아란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기준이 뭔지는 몰라도 ‘에둘러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기준이 항상 달랐으니까. 이번에도 뭔가 새로운 거겠지.”
항상 새로운 기준을 내놓는 것은 여신님에게도 꽤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여신님의 기준을 생각해 봐도 그랬다.
인중이 턱보다 긴 사람.(그 여인을 태양의 나라에 보낼 때 달의 왕은 사죄의 편지를 같이 보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만월 밤에 오이를 먹고 배탈이 난 사람.(혼인의 구슬을 받는 순간에도 배탈이 나아지지 않아서 화장실에 들락거리다 중요한 혼인의 구슬을 그…… 위로…… 철퍼덕! 떨어뜨렸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형제, 자매가 아껴 둔 푸딩을 연간 10회 이상 훔쳐 먹은 사람.(발표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태양의 나라로 떠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성 기능이 가장 뛰어난 사람.(여신의 선택 이후에도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민심이 지독하게 나빠졌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실까? 어떤 것일지는 몰라도 민심이 나빠지는 방향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민심이 나빠지면,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으면, 내가 운영하는 부채 가게는 직격탄을 맞아서 망할지도 모른다.
부채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는 물건이라 다들 내가 돈을 쓸어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정이 어려워지면 사람들의 소비는 먹는 것과 같이 생명에 직결된 것에만 집중되어 버린다. 있어도 없어도 좋은 부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적당한 두께의 책으로 대체할 수 있는 부채는 사치품 아닌 사치품이니까.
“내 계획은 이래.”
아란은 또 큰 목소리로 비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순진한 친구야. 그렇게 동네방네 사람들에게 다 들리도록 말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고 발표라고 해야 하는 거야.
“뭔데?”
“지금까지의 기준을 보면, 대부분 뭔가 특이한 행동을 한 사람을 딱 집어서 ‘바로 그 행동을 한 너야.’라고 하셨잖아?”
“그, 그랬지?”
“그러니까 나는 오늘부터 상식 밖의 행동을 잔뜩 해 버릴 거야. 즉 어떤 이상한 요구에도 내가 포함될 수 있도록 할 거라는 거지.”
나는 마음속으로 지금까지 아란이 해낸 상식 밖의 일이 될 만한 것을 꼽아 보았다.
낮부터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린다.(뜻밖에 이러는 사람은 많으니까 아닐 것 같다.)
비밀 이야기를 온 동네가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한다.(이건 정말 아란밖에 없을 것 같다.)
생각보다 별로 없네. 조금 더 힘내야겠다. 아란.
“열심히 해.”
조금 엉뚱하기는 해도 아란은 가장 좋은 친구다. 그녀가 행복을 위해서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내가 찬물을 뿌릴 수는 없지. 나중에 자기가 뽑히지 않았다고 엉엉 울면 아껴 두었던 공작새의 깃털을 풍성하게 달아서 부채를 만들어 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아할 거다.
아란은 단순하니까.



아란과 헤어지고 나서 나는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휴일이라고 분명히 며칠 전부터 공지를 해 두었는데도 다녀간 손님들이 있었던 듯, 문 앞에는 쪽지 여러 개가 붙어 있었다.
여름이 지나고 계속 이어지는 선선한 날씨에 하루쯤은 쉬고 싶어서 정한 휴일이었는데, 오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엄청 더운 날씨! 참 운도 없지.
나는 쪽지를 떼어서 하나씩 읽어 보았다.

「테라! 다녀간다. 오늘 쉬는 날이네. 오랜만의 더운 날에 부채 가게가 문을 닫다니, 돈을 많이 벌긴 한 모양인가 봐? ―파울로.」
「테라 씨. 지난번에 주문한 부채의 제작 상황을 보고 싶어서 왔는데 쉬시는 군요, 다음번에 오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바샴.」
「테라! 햇살색의 불새 꽁지깃 입고 완료. 오늘까지만 기다려 준다. ―시에라.」

으아! 불새의 꽁지깃? 그것도 햇살색이라고? 엄청 귀한 물건이다! 쉬는 날을 따질 때가 아니잖아?
시에라 씨는 외곽 지역에서 동물을 잡는 사냥꾼들과 연계하여 각종 동물의 가죽이나 털을 납품하는 일을 하신다. 사냥은 왕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니 물량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었다. 특히나 귀한 물건은 인맥 없고 발이 느린 사람은 절대로 구할 수 없는 법.
아이고, 아무리 급해도 시에라 씨가 좋아하는 태양의 나라 망고를 사서 가야겠다. 먼저 연락도 주고 기다려 주기까지 하는데, 아무런 보답 없이 갔다가는 이런 혜택을 다시는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루 아저씨의 과일 가게에서 가장 비싼 망고를 모두 샀다. 재고가 남지 않아서 행복해진 과일 가게 아저씨는 덤으로 사과 몇 개를 더 얹어 주었다.
돈주머니는 가벼워지고 손은 무거워졌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비싼 털은 좋다. 만지는 촉감이며, 만들고 나서의 완성도까지 내 눈을 흡족하게 해 준다. 어울리는 주인을 찾아갔을 때 돌아오는 두둑한 돈은 더 좋았고.
부채를 만드는 일도, 또 판매하는 일도 모두 좋아하지만 역시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잔뜩 모아서 달의 나라도 태양의 나라도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에만 돈을 쓰며 살면 적은 돈으로도 그럭저럭 많은 곳을 둘러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저렴한 재료로 적당한 가격의 부채를 여러 개 파는 것보다 귀한 재료로 엄청나게 비싼 부채를 파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약간의 희귀성만 부각시켜 주면 서로들 사겠다고 달려드니 팔기도 훨씬 편했고.
불새의 꽁지깃도 제법 기대가 되는 재료다. 짤랑, 짤랑, 짤랑. 돈 들어오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은 이 기분!
“시에라 씨!”
“흐응, 늦지 않았네.”
가게 안쪽에 앉아 시원하게 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미녀가 바로 시에라 씨! 달의 나라 최고의 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연하죠! 그래서 어디에 있어요, 불새의 꽁지깃은?”
시에라 씨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지간한 남자라면 그 행동 하나에도 이미 그녀의 포로가 되었겠지. 거친 사냥꾼들을 한 번에 제압하는 비결은 바로 저 미모라고 하는데, 사실일지도.
“자, 여기. 사인부터 해.”
그녀는 종이와 깃펜을 내밀었다. 개인적인 친밀도와 관계없이 그녀는 모든 일을 서류로 남겨 두는 것을 선호했다.
나는 서류 내용을 읽어 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평소처럼 모든 거래의 절차가 상세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물론 상품의 신용도는 보장할 테니 절대로 환불은 없다는 조건까지.
“마지막까지 제대로 읽었어?”
“뭐, 평소와 같죠?”
나는 조금 급한 마음이 들어 숫자나 날짜들만 유심히 보았을 뿐이었다.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고.”
애매한 대답. 시에라 씨는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나는 얼른 서류의 밑에 사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