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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도 오케이! 2권
1화
Chapter 7. 망고의 발견
아침 햇살이 방에 들어도 나는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다.
망했다.
인간의 인생에 단 한 번, 인기 절정기가 온다는 이야기는 과거에 아란으로부터 들었다. 그 시기엔 각기 다른 속성을 가진 다양한 남자들이 한 번에 꼬여서 장르의 꽃, 역하렘을 현실에서 이루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고.
상상만 해도 행복한 그 순간을 지난 뒤에는 또 타임 슬립물이 이어진다고 했다. 그저 눈을 감았다가 뜬 것뿐인데, 하렘에 있던 한 남자와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게 된다고 한다.
침대에 엎드린 나는 내 머리를 열심히 두드렸다.
역하렘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최대한 주의하기로 했다. 이대로 타임 슬립을 당할 수는 없었다. 이왕 펼쳐진다면 모험물이 좋겠다. 연인이 되더라도 어쨌든 ‘우리의 여행은 끝나지 않아!’라는 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니까.
“역하렘이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고! 필요 없어! 가져가!”
“허락하신다면!”
“안 해!”
가만, 역하렘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그러니까 역하렘이란 한 명의 여자에게 여러 명의 남자가 붙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한 명뿐이고, 솔은 내 마음을 얻지 못하면 남자가 될 수 없는 거잖아?
오. 아직 장르는 성립되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가 역하렘으로 흘러가는 대참사가 일어나서는 안 되니까.
그나저나, 이 장르와의 전쟁은 도대체 언제쯤이면 끝나는 거지.
“레루.”
“……네, 테라 님.”
설명을 못 하게 했더니 묘하게 대답이 느리다. 토라진 걸까.
“부탁이 있어.”
“말씀하세요.”
“저기, 책상 위에 보면 내가 올려 둔 돈이 조금 있을 거야. 그걸 라프 님께 전해 줄래?”
“……출장 매춘은 불법입니다.”
“출장 안 했어.”
“설마 찾아가셨나요.”
“매춘 안 했어! 물건 대금을 넘기는 것뿐이야!”
“다행입니다. 어젯밤에 테라 님 방에서 이상한 신음이 들리는 것 같다는 보고가 있어서 걱정했습니다.”
보고?
내 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그녀가 ‘보고’받았다고?
내가 아무리 바깥에서 장사나 하고 왔던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 말이 괴이하다는 것은 알았다. 솔의 명령으로 달의 궁은 정식으로 나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최종 보고를 들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또한, 그들은 나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침묵할 의무를 갖는다. 함부로 나와 솔 이외의 다른 이에게 보고하여 알릴 수는 없다. 나와 가장 가까운 레루라고 하더라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레루는 어째서 보고라는 말을 사용한 걸까. 차라리 적당히 ‘소문’이라고 했다면 나도 이해했을 것이다. 사용인들은 가끔 제 의무를 잊는다고 했으니.
“잠깐, 레루.”
실수인가, 경고인가.
나의 영향에, 솔의 영향에 들지 않는 누군가가 궁 안에 있다. 그리고 레루는 그자를 알고 있고, 또한 이용하고 있다. 그 뒤의 흑막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시죠?”
“내가 갈게. 준비를 도와줘.”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루가 한껏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만 씻고, 또 레루가 가져오는 드레스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입었다. 어제부터 생각이 많아져서, 도저히 이런 자잘한 것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솔이 나의 마음을 배신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그저 의심스러웠고, 머릿속을 차지한 의심은 나를 깊은 생각의 바다로 빠트렸다.
이 옷을 다 입고 나면, 하나씩 해결할 것이다.
몸을 강하게 조이는 드레스라서 다행이다. 등에서부터 느껴지는 허리의 뻐근함 덕분에 나도 마음을 다잡게 되니까.
강하게 조이면 조일수록, 내 마음도 그렇게 단단해지길. 흔들리지 않기를.
“테라 님.”
“으, 응?”
레루는 진중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잠시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기 때문일까, 나는 대답하면서 고인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아직…… 부피가 큽니다.”
“…….”
“흡! 하고, 숨을 들이쉬세요!”
“사람의 허리에, 흡! 부피라는 말 쓰는 거 좀, 흡! 그만해 줄래. 흡!”
아, 아파. 레루, 그만 조여. 내 각오는 이제, 아주 단단하다! 그 이전에 살이 터질 것 같아. 제발!
레루가 한껏 조여 준 덕분에 있지도 않던 가느다란 허리를 자랑하게 된 것은 기뻤지만, 이래서야 온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음껏 움직일 수도 없을 것 같다.
서, 설마 솔이 시킨 건가. 내가 마음껏 움직여 도망이라도 칠까 봐. 이런 불편한 옷 안에 가두어 두는 건가!
차라리 감옥에 가둬! 감옥에서는 목욕도 했고, 부채도 만들었다고. 으아아아! 아직도 감옥에서의 생활을 만족스러워하고 있잖아! 제발 사라지라고 이 비굴한 긍정 마인드!
“구두는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나의 허리선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레루는 구두들을 진열해 놓은 장 앞에 서서 의견을 물었다. 구두는 보통 그녀가 드레스에 어울리는 것으로 알아서 골라 주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물어보는 걸까.
“저기 있는 하얀색 구두로 할게.”
“태양신의 세례를 받으셨을 때 신으셨던 구두군요. 예쁜 구두죠.”
레루는 내 앞에 구두를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언젠가 솔과 함께 번갈아 가면서 신었던 추억이 있는 구두라 더욱 좋았다.
“허락하신다면 넘겨짚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두 덕분에 기분이 나아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아름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감이 되어 주고…….”
“무기가 되어 준다고?”
“과연,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테라 님.”
언젠가 내가 솔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그가 원망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웃게 된다. 그의 하얀 발목에 내 구두를 신겨 주던 순간도. 그리고 반대로 그가 왕자님처럼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구두를 돌려주던 시간도.
물론 그때의 ‘망고부 직원 습격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아 버렸지만.
높은 굽을 신은 덕에 자세가 바뀌었다. 정면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렇게 제대로 입어 본 것이 얼마 만이더라.
“레루, 고마워.”
어쩐지 자신감이 생겼다.
장르? 약속? 매춘? 그 어떤 것도 내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천천히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 나가 보자.
다른 모든 것이 어그러져 있는 지금도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내가 나와 했던 약속.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던 것. 이 태양의 나라를 빠져나갈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내기로 했던 것.
할 수 있어. 아직 길은 남아 있어.
◇
아냐, 틀렸어. 벌써 길이 막혔다.
방을 나서자마자 내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무척이나 커다란 풍채를 가진 청년은 동글동글한 눈으로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더니 곧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망고부에서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활약이 적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내 길을 막는 것은 역시 망고뿐이로군.
“무슨 일이시죠?”
“그것이.”
청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동그란 눈을 이리 한 번, 저리 한 번 굴리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였다.
“망고 농가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래. 그래요. 뭔가 망고들이 난리를 칠 때가 되었어요. 저를 더욱 불행으로 이끌고 싶은 그 마음 잘 알아요.
“저어, 그래서.”
그러나 그의 말은 느렸다. 나는 레루를 돌아보았다. 뭐든 넘겨짚기를 잘하니까 이쯤에서 그의 말을 대신해 할 수 있지 않을까! 레루! 지금이야말로 네 설명 실력을 망고부에 보여 줄 차례야!
내 마음속 말을 들었는지 레루가 드디어 입을 열어 주었다.
“그래요. 용기를 갖고,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격려하지 마!
“테라 님께서 망고 농가에 생선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망고 농가에 생선을 공급해 달라고요?”
“네, 테라 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반으로 잘라서요.”
망고 농가, 생선, 딱 절반. 나의 명석한 두뇌에 그리운 이름이 떠올랐다.
엘로이스 드 피쉬라이스! 잘 지내니! 아니, 잘 썩고 있니? 훌륭히 그 향기를 풍기며 썩고 있겠지. 그러니 다른 망고 농장에서도 생선을 잘라 달라고 성화일 테고.
“망고 농가는 수도 없이 많아요. 온실은 더욱 많고요. 거기에 들어가는 모든 생선을 제가 잘라서 공급하라고요?”
어, 잠깐. 이거 굉장히 기가 막힌 사업 아이템인데? 수많은 망고 농가와 독점 계약을 맺고 생선 토막을 파는 거지. 물론 계절 장사라는 단점이 있지만, 성수기가 아닌 때엔 조금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쁜 사업은 아니야.
“아, 아뇨. 요청이 들어오는 곳만……. 무, 물론 망고부의 인증을 통과한 농장들…….”
“쳇.”
전국의 망고 농가를 대상으로 머릿속의 주판을 두드리던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발열의 궁, 망고 여신의 숨결로.”
아마 그곳에 내가 자를 생선들을 준비해 두려는 모양이다. 나는 손짓하여 레루에게 메모를 부탁했다. 그녀는 내게 일정이 있을 때마다 훌륭히 메모하여 기억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가야 할 때가 되면 조용히 다가와 귓가에 ‘테라 님, 시간입니다.’라고 속삭이며 내 등을 살짝 떠밀어 주곤 했다.
“지금 가시면 됩니다.”
“네?”
선약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은 대체 무슨 경우인가. 뒤에 있던 레루가 얼른 가까이 다가왔다. 역시 나를 위해서 망고부의 무례를 따져 물으려는 것일 터다.
“테라 님, 시간입니다.”
……등 밀지 마!
◇
망고나무의 커다란 그늘 아래에 있는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인 고귀한 나, 테라.
손에는 식칼. 앞에는 커다란 나무 도마.
그리고 한 줄로 선 망고 농장주들은 노란색 물고기를 한 마리씩 들고 와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는 노인회의 할아버지들은 비린내가 난다며 기겁을 했다. 빨리 걷고 싶은데 무릎이 따라 주지 않아서 고통이 가중되는 모양이었다.
첫 번째 물고기가 도마 위에 올라왔다. 나는 한숨을 쉬었고, 아무 생각 없이 칼을 높이 휘둘렀다.
그때였다.
내 뒤에서 행사를 주관하고 있던 망고부의 젊은 직원들이 매우 익숙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께, 태양신의 세례를!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께, 태양신의 은총을!”
생선 자르는데 경건한 BGM 깔지 마!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이시여!”
심지어 안무도 하나도 안 맞아!
제, 제길 이 형편없는 춤과 노래를 배경으로 두고 있으니, 저 멀리 다른 궁에서도 구경을 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 비린내 때문에, 모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있지만.
“오오오!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께, 태양신의 세례를!”
노래에 괴상한 추임새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붉어진 얼굴은 도마에 고정되었다. 생선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이 자리를 빨리 피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잘라 내는 수밖에 없겠어.
나는 마기 할머니가 했던 대로, 생선을 살짝 강하게 도마에 내던졌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노래와 묘하게 박자가 맞아 버렸다. 생선 해체 쇼 아니야! 다들 감탄하지 마!
내가 칼을 높이 들어 올리자 모두의 긴장된 시선이 느껴졌다. 생선을 반으로 잘라 내는 순간에 잠시 움찔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 토막 난 생선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 기뻐하는 농장주의 모습을 보고 다시 미소를 찾았다.
“정말이야! 정말이었어! 딱 반이야!”
농장주 아저씨는 그렇게 외치면서 달려 나갔다.
저기, 전부터 느꼈는데. 혹시 나한테…… 생선을 딱 반으로 자르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그다음 생선을 도마 위에 올려 얼른 잘라 보았다.
“과연! 정말이야! 딱 반이다!”
같은 반응이 나왔다. 조금 재미있어졌다. 다음 생선을 올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난이도를 올려서, 기절을 시키지 않은 채 칼을 휘둘렀다.
“딱 반!”
세상에!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능력의 끝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다음 생선이 내 앞에 놓였을 때, 나는 물고기를 기절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예 눈까지 감았다. 평범한 애송이라면, 칼을 휘두르는 것마저 하지 못할 것이고, 휘두르더라도 겨우 나무 도마나 갈라내겠지! 하지만 나는 딱 반의 여신! 그런 애송이와는 비교 불가!
“하아!”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식칼에서 익숙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표면의 탄력이 날카로운 칼날에 끝까지 저항하는 감각, 그리고 끝끝내 그것이 갈라지고, 중심까지 한 번에 닿았다. 단단한 것에 살짝 멈추어졌던 칼날은 곧 그것까지 으스러트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 딱 반으로 갈라졌겠구나, 하고.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경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농장주. 그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나를 경배하는 사람들이었다.
“과, 과연 테라 님! 태양의 나라를 위한 가장 완벽한 마지막 조각 님!”
그는 양손에 생선 조각을 든 채, 가장 마지막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경배하는 분위기에 맞춰 망고부의 직원들도 계속 노래했다.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이시여!”
그러니까, 너희! 안무 틀렸다고!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께, 태양신의 세례를!”
생선 다 잘랐어! 이제 그만해!
◇
생선 손질이 끝나자마자 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괴상한 노래와 사람들의 경이로운 시선이 모두 부담스러웠다. 순조롭게 이곳에 적응하고 있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만 같아 불편했다.
농장주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시면서, 내년에도 꼭 부탁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나는 선물로 받은 망고 젤리를 한가득 들고 달의 궁으로 돌아왔다. 달콤한 냄새에 참지 못하고 하나 뜯어서 우물거리니, 머릿속이 맑아질 정도로 달콤하고 부드러워서 금방 행복해졌다. 역시 달콤한 것은 좋아. 비록 본체는 망고이지만.
1화
Chapter 7. 망고의 발견
아침 햇살이 방에 들어도 나는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다.
망했다.
인간의 인생에 단 한 번, 인기 절정기가 온다는 이야기는 과거에 아란으로부터 들었다. 그 시기엔 각기 다른 속성을 가진 다양한 남자들이 한 번에 꼬여서 장르의 꽃, 역하렘을 현실에서 이루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고.
상상만 해도 행복한 그 순간을 지난 뒤에는 또 타임 슬립물이 이어진다고 했다. 그저 눈을 감았다가 뜬 것뿐인데, 하렘에 있던 한 남자와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게 된다고 한다.
침대에 엎드린 나는 내 머리를 열심히 두드렸다.
역하렘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최대한 주의하기로 했다. 이대로 타임 슬립을 당할 수는 없었다. 이왕 펼쳐진다면 모험물이 좋겠다. 연인이 되더라도 어쨌든 ‘우리의 여행은 끝나지 않아!’라는 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니까.
“역하렘이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고! 필요 없어! 가져가!”
“허락하신다면!”
“안 해!”
가만, 역하렘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그러니까 역하렘이란 한 명의 여자에게 여러 명의 남자가 붙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한 명뿐이고, 솔은 내 마음을 얻지 못하면 남자가 될 수 없는 거잖아?
오. 아직 장르는 성립되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가 역하렘으로 흘러가는 대참사가 일어나서는 안 되니까.
그나저나, 이 장르와의 전쟁은 도대체 언제쯤이면 끝나는 거지.
“레루.”
“……네, 테라 님.”
설명을 못 하게 했더니 묘하게 대답이 느리다. 토라진 걸까.
“부탁이 있어.”
“말씀하세요.”
“저기, 책상 위에 보면 내가 올려 둔 돈이 조금 있을 거야. 그걸 라프 님께 전해 줄래?”
“……출장 매춘은 불법입니다.”
“출장 안 했어.”
“설마 찾아가셨나요.”
“매춘 안 했어! 물건 대금을 넘기는 것뿐이야!”
“다행입니다. 어젯밤에 테라 님 방에서 이상한 신음이 들리는 것 같다는 보고가 있어서 걱정했습니다.”
보고?
내 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그녀가 ‘보고’받았다고?
내가 아무리 바깥에서 장사나 하고 왔던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 말이 괴이하다는 것은 알았다. 솔의 명령으로 달의 궁은 정식으로 나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최종 보고를 들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또한, 그들은 나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침묵할 의무를 갖는다. 함부로 나와 솔 이외의 다른 이에게 보고하여 알릴 수는 없다. 나와 가장 가까운 레루라고 하더라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레루는 어째서 보고라는 말을 사용한 걸까. 차라리 적당히 ‘소문’이라고 했다면 나도 이해했을 것이다. 사용인들은 가끔 제 의무를 잊는다고 했으니.
“잠깐, 레루.”
실수인가, 경고인가.
나의 영향에, 솔의 영향에 들지 않는 누군가가 궁 안에 있다. 그리고 레루는 그자를 알고 있고, 또한 이용하고 있다. 그 뒤의 흑막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시죠?”
“내가 갈게. 준비를 도와줘.”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루가 한껏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만 씻고, 또 레루가 가져오는 드레스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입었다. 어제부터 생각이 많아져서, 도저히 이런 자잘한 것에는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솔이 나의 마음을 배신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그저 의심스러웠고, 머릿속을 차지한 의심은 나를 깊은 생각의 바다로 빠트렸다.
이 옷을 다 입고 나면, 하나씩 해결할 것이다.
몸을 강하게 조이는 드레스라서 다행이다. 등에서부터 느껴지는 허리의 뻐근함 덕분에 나도 마음을 다잡게 되니까.
강하게 조이면 조일수록, 내 마음도 그렇게 단단해지길. 흔들리지 않기를.
“테라 님.”
“으, 응?”
레루는 진중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잠시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기 때문일까, 나는 대답하면서 고인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아직…… 부피가 큽니다.”
“…….”
“흡! 하고, 숨을 들이쉬세요!”
“사람의 허리에, 흡! 부피라는 말 쓰는 거 좀, 흡! 그만해 줄래. 흡!”
아, 아파. 레루, 그만 조여. 내 각오는 이제, 아주 단단하다! 그 이전에 살이 터질 것 같아. 제발!
레루가 한껏 조여 준 덕분에 있지도 않던 가느다란 허리를 자랑하게 된 것은 기뻤지만, 이래서야 온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음껏 움직일 수도 없을 것 같다.
서, 설마 솔이 시킨 건가. 내가 마음껏 움직여 도망이라도 칠까 봐. 이런 불편한 옷 안에 가두어 두는 건가!
차라리 감옥에 가둬! 감옥에서는 목욕도 했고, 부채도 만들었다고. 으아아아! 아직도 감옥에서의 생활을 만족스러워하고 있잖아! 제발 사라지라고 이 비굴한 긍정 마인드!
“구두는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나의 허리선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레루는 구두들을 진열해 놓은 장 앞에 서서 의견을 물었다. 구두는 보통 그녀가 드레스에 어울리는 것으로 알아서 골라 주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물어보는 걸까.
“저기 있는 하얀색 구두로 할게.”
“태양신의 세례를 받으셨을 때 신으셨던 구두군요. 예쁜 구두죠.”
레루는 내 앞에 구두를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언젠가 솔과 함께 번갈아 가면서 신었던 추억이 있는 구두라 더욱 좋았다.
“허락하신다면 넘겨짚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두 덕분에 기분이 나아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아름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감이 되어 주고…….”
“무기가 되어 준다고?”
“과연,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테라 님.”
언젠가 내가 솔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그가 원망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웃게 된다. 그의 하얀 발목에 내 구두를 신겨 주던 순간도. 그리고 반대로 그가 왕자님처럼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구두를 돌려주던 시간도.
물론 그때의 ‘망고부 직원 습격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아 버렸지만.
높은 굽을 신은 덕에 자세가 바뀌었다. 정면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렇게 제대로 입어 본 것이 얼마 만이더라.
“레루, 고마워.”
어쩐지 자신감이 생겼다.
장르? 약속? 매춘? 그 어떤 것도 내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천천히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 나가 보자.
다른 모든 것이 어그러져 있는 지금도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내가 나와 했던 약속.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던 것. 이 태양의 나라를 빠져나갈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내기로 했던 것.
할 수 있어. 아직 길은 남아 있어.
◇
아냐, 틀렸어. 벌써 길이 막혔다.
방을 나서자마자 내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무척이나 커다란 풍채를 가진 청년은 동글동글한 눈으로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더니 곧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망고부에서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활약이 적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내 길을 막는 것은 역시 망고뿐이로군.
“무슨 일이시죠?”
“그것이.”
청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동그란 눈을 이리 한 번, 저리 한 번 굴리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였다.
“망고 농가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래. 그래요. 뭔가 망고들이 난리를 칠 때가 되었어요. 저를 더욱 불행으로 이끌고 싶은 그 마음 잘 알아요.
“저어, 그래서.”
그러나 그의 말은 느렸다. 나는 레루를 돌아보았다. 뭐든 넘겨짚기를 잘하니까 이쯤에서 그의 말을 대신해 할 수 있지 않을까! 레루! 지금이야말로 네 설명 실력을 망고부에 보여 줄 차례야!
내 마음속 말을 들었는지 레루가 드디어 입을 열어 주었다.
“그래요. 용기를 갖고,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격려하지 마!
“테라 님께서 망고 농가에 생선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망고 농가에 생선을 공급해 달라고요?”
“네, 테라 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반으로 잘라서요.”
망고 농가, 생선, 딱 절반. 나의 명석한 두뇌에 그리운 이름이 떠올랐다.
엘로이스 드 피쉬라이스! 잘 지내니! 아니, 잘 썩고 있니? 훌륭히 그 향기를 풍기며 썩고 있겠지. 그러니 다른 망고 농장에서도 생선을 잘라 달라고 성화일 테고.
“망고 농가는 수도 없이 많아요. 온실은 더욱 많고요. 거기에 들어가는 모든 생선을 제가 잘라서 공급하라고요?”
어, 잠깐. 이거 굉장히 기가 막힌 사업 아이템인데? 수많은 망고 농가와 독점 계약을 맺고 생선 토막을 파는 거지. 물론 계절 장사라는 단점이 있지만, 성수기가 아닌 때엔 조금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쁜 사업은 아니야.
“아, 아뇨. 요청이 들어오는 곳만……. 무, 물론 망고부의 인증을 통과한 농장들…….”
“쳇.”
전국의 망고 농가를 대상으로 머릿속의 주판을 두드리던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발열의 궁, 망고 여신의 숨결로.”
아마 그곳에 내가 자를 생선들을 준비해 두려는 모양이다. 나는 손짓하여 레루에게 메모를 부탁했다. 그녀는 내게 일정이 있을 때마다 훌륭히 메모하여 기억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가야 할 때가 되면 조용히 다가와 귓가에 ‘테라 님, 시간입니다.’라고 속삭이며 내 등을 살짝 떠밀어 주곤 했다.
“지금 가시면 됩니다.”
“네?”
선약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은 대체 무슨 경우인가. 뒤에 있던 레루가 얼른 가까이 다가왔다. 역시 나를 위해서 망고부의 무례를 따져 물으려는 것일 터다.
“테라 님, 시간입니다.”
……등 밀지 마!
◇
망고나무의 커다란 그늘 아래에 있는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인 고귀한 나, 테라.
손에는 식칼. 앞에는 커다란 나무 도마.
그리고 한 줄로 선 망고 농장주들은 노란색 물고기를 한 마리씩 들고 와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는 노인회의 할아버지들은 비린내가 난다며 기겁을 했다. 빨리 걷고 싶은데 무릎이 따라 주지 않아서 고통이 가중되는 모양이었다.
첫 번째 물고기가 도마 위에 올라왔다. 나는 한숨을 쉬었고, 아무 생각 없이 칼을 높이 휘둘렀다.
그때였다.
내 뒤에서 행사를 주관하고 있던 망고부의 젊은 직원들이 매우 익숙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께, 태양신의 세례를!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께, 태양신의 은총을!”
생선 자르는데 경건한 BGM 깔지 마!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이시여!”
심지어 안무도 하나도 안 맞아!
제, 제길 이 형편없는 춤과 노래를 배경으로 두고 있으니, 저 멀리 다른 궁에서도 구경을 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 비린내 때문에, 모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있지만.
“오오오!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께, 태양신의 세례를!”
노래에 괴상한 추임새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붉어진 얼굴은 도마에 고정되었다. 생선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이 자리를 빨리 피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잘라 내는 수밖에 없겠어.
나는 마기 할머니가 했던 대로, 생선을 살짝 강하게 도마에 내던졌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노래와 묘하게 박자가 맞아 버렸다. 생선 해체 쇼 아니야! 다들 감탄하지 마!
내가 칼을 높이 들어 올리자 모두의 긴장된 시선이 느껴졌다. 생선을 반으로 잘라 내는 순간에 잠시 움찔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 토막 난 생선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 기뻐하는 농장주의 모습을 보고 다시 미소를 찾았다.
“정말이야! 정말이었어! 딱 반이야!”
농장주 아저씨는 그렇게 외치면서 달려 나갔다.
저기, 전부터 느꼈는데. 혹시 나한테…… 생선을 딱 반으로 자르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그다음 생선을 도마 위에 올려 얼른 잘라 보았다.
“과연! 정말이야! 딱 반이다!”
같은 반응이 나왔다. 조금 재미있어졌다. 다음 생선을 올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난이도를 올려서, 기절을 시키지 않은 채 칼을 휘둘렀다.
“딱 반!”
세상에!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능력의 끝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다음 생선이 내 앞에 놓였을 때, 나는 물고기를 기절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예 눈까지 감았다. 평범한 애송이라면, 칼을 휘두르는 것마저 하지 못할 것이고, 휘두르더라도 겨우 나무 도마나 갈라내겠지! 하지만 나는 딱 반의 여신! 그런 애송이와는 비교 불가!
“하아!”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식칼에서 익숙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표면의 탄력이 날카로운 칼날에 끝까지 저항하는 감각, 그리고 끝끝내 그것이 갈라지고, 중심까지 한 번에 닿았다. 단단한 것에 살짝 멈추어졌던 칼날은 곧 그것까지 으스러트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 딱 반으로 갈라졌겠구나, 하고.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경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농장주. 그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나를 경배하는 사람들이었다.
“과, 과연 테라 님! 태양의 나라를 위한 가장 완벽한 마지막 조각 님!”
그는 양손에 생선 조각을 든 채, 가장 마지막으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경배하는 분위기에 맞춰 망고부의 직원들도 계속 노래했다.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이시여!”
그러니까, 너희! 안무 틀렸다고!
“태양왕의 마지막 조각께, 태양신의 세례를!”
생선 다 잘랐어! 이제 그만해!
◇
생선 손질이 끝나자마자 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괴상한 노래와 사람들의 경이로운 시선이 모두 부담스러웠다. 순조롭게 이곳에 적응하고 있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만 같아 불편했다.
농장주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시면서, 내년에도 꼭 부탁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나는 선물로 받은 망고 젤리를 한가득 들고 달의 궁으로 돌아왔다. 달콤한 냄새에 참지 못하고 하나 뜯어서 우물거리니, 머릿속이 맑아질 정도로 달콤하고 부드러워서 금방 행복해졌다. 역시 달콤한 것은 좋아. 비록 본체는 망고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