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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수능 시험을 치고 난 후에도 나는 빠지지 않고 등교했다. 집 안에 있으면 목줄이 감긴 망아지처럼 어딘가 불편했다. 마냥 좋은 아이인 양 연기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날은 유독 추웠다. 이묵주가 선물로 준 목도리를 처음으로 하고 나오는데 세희가 그걸 갖고 싶어 했다.
“어디서 난 거야? 진짜 예쁘다.”
“그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길모퉁이에서 나오던 이묵주를 본 순간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가질래?”
“진짜? 그래도 돼?”
“어. 가져.”
목도리를 풀어 건네자 세희는 마다하지도 않고 제 목에 감았다. 나는 눈처럼 차갑게 얼어 가던 이묵주를 모른 척 지나쳤다. 세희는 그걸 이묵주가 줬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마침 집에서 나오던 이묵주를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나쁜 건 나였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세희에게 목도리를 줘 버린 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악마가 될 수 있는지 그 새싹을 보고 싶다면 당시에 날 보면 됐다. 단순한 감정만으로도 사람은 강자와 약자로 나뉠 수 있었다.
반년이 넘도록 날 좋아하는 이묵주는 약자였고 그런 이묵주를 알고 있는 나는 강자였다. 주인을 잘못 만난 애정은 그렇게 흉기가 됐다.
그 후에도 나는 열심히 흉기를 휘둘렀다. 책을 빌려준다는 핑계로 추운 겨울날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하곤 다음 날 잊어서 미안하다며 다정하게 웃었다.
세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나갔던 이묵주가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더 다쳤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세희만 걱정하는 척했다.
피크는 이묵주 어머니의 장례식이었다. 눈이 퍼붓던 어느 날 이묵주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은 세희의 부모님은 가족 모두가 장례식장에 가기를 요했고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짧은 인사가 오갔다. 세희는 인형처럼 앉아 있는 이묵주가 무색하게 기절할 것처럼 울더니 곧 딸을 걱정한 어머니에 의해 쫓기듯 집으로 떠나야 했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오는 길에 이묵주의 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왜 남편인 내가 받을 수 없냔 말이야. 내가 그 계집애 아빤데. 아직 미성년자잖아. 걔가 그 큰돈을 위험해서 어떻게 받아? 막말로 내가 애 아빤데 보험금 받아 딴짓하겠수? 형씨 좀 유도리 있게 삽시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돌아서던 순간 이묵주와 마주쳤다. 데스마스크처럼 굳어 있던 이묵주의 얼굴이 나를 보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에 피가 날 것처럼 붉어진 귀. 나는 이묵주를 지나치며 말했다.
“좋겠다, 넌. 저런 대단한 아버지가 있어서.”
장례식장에 앉아 꾸역꾸역 처넣었던 음식들을 화장실에 가서 모두 게워 내고 세수를 했다. 고개를 들자 거울 속의 젖은 나와 마주쳤다. 두 눈이 죽은 아버지를 볼 때처럼 경멸과 멸시로 들끓고 있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이묵주와 세희의 관계는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해가 바뀌어 반이 갈라진 후에도 왕래는 계속되었는데 웃긴 건 그들이 전보다 훨씬 친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즈음 나는 이묵주에 대한 관심을 껐다. 이묵주 역시 나에 대한 감정이 이전 같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여자애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울면서 고백하는 여자애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받아 준 게 그 시초였다.
첫 여자 친구가 생긴 걸 우연히 알게 된 세희는 온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때 알았다. 세희의 소유욕이 이미 다른 종류로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애정 없는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여자 친구는 울면서 사랑을 고백했듯 울면서 이별을 고했다. 나는 별다른 충격 없이 그걸 받아들였다.
그게 벌써 열 번째. 나는 같은 과정으로 다른 여자를 사귀었고 얼마 가지 않아 헤어졌다. 그때가 내가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아마 6월 즈음이었을 거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건 그때가 축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에서 차려 놓은 주점에서 강제로 안주를 만들고 있었다.
첫날엔 열 번째 여자 친구가 와서 종일 울다 갔고 두 번째 날엔 다섯, 여섯 번째 여자 친구가 나타나 연달아 깽판을 치고 갔다. 마지막 날엔 세희가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왔다. 거기에 이묵주가 함께 끼어 있었다.
변태 같은 동기와 선배들은 교복 입은 여자애들의 존재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여자애들을 빼내 구석 자리에 앉혔다.
“술은 안 돼. 전이나 먹고 가.”
“아, 오빠. 딱 한 잔만. 응? 좀 있으면 수능 백일인데. 백일주라고 치면 되잖아.”
“안 돼.”
나는 답잖게 모럴이 투철한 편이었다. 그러나 우리 과엔 모럴 제로인 폭탄이 하나 있었으니, 막 제대한 고영민이었다. 형은 막걸리와 소주잔을 가져오더니 인원수만큼 따랐다. 다섯 잔이었다. 소주잔을 본 세희가 볼멘소리를 냈다.
“이게 뭐야. 개미 눈물도 아니고.”
검사 아버지를 둔 열아홉 세희는 종종 클럽에 놀러 다녔다. 신분증 없이도 들여보내 주더라고, 다 내가 예뻐서 그런 거 아니겠냐며 자랑하듯 떠벌렸다. 나는 세희보단 이묵주에게 자꾸 눈이 갔다.
그날 이묵주는 상태가 아주 이상했다. 어딘가 아주 아파 보였는데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소주잔을 모두 나눠 준 영민 형이 이묵주에겐 잔을 내려놓지 않고 물었다.
“넌 어디 아프냐? 얼굴이 왜 그래.”
“아뇨. 멀쩡해요.”
이묵주는 영민 형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단번에 마셨다. 와, 대박. 이묵주. 여자애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졌다. 지지 않겠다는 듯 세희가 원샷했다. 그걸론 성에 차지 않는지 한 잔 더를 외쳤지만 영민 형은 브레이크를 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안 돼. 한 살 더 먹으면 그때 두 잔을 먹든 세 병을 먹든 너희들 마음대로 해.”
주점은 9시 이후가 피크였다. 막걸리가 모자라니 가져오라는 명령을 듣고 밖으로 나섰다. 과방에서 박스 하나를 들고 나오던 참이었다.
밖에서 기름 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였다. 현관 앞에 서서 돌아가 우산을 가져와야 하나 그냥 뛰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더랬다.
비를 가르고 여자애 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교복 차림. 하얀 얼굴. 어딘가 아파 보이는 표정.
“좋아해요.”
이묵주는 다짜고짜 고백했다. 또렷한 목소리로. 젖은 어깨를 덜덜 떨면서.
고백을 그런 얼굴로 하는 여자애를 처음 봤다. 틱 건드리면 툭 하고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알아. 근데 난 너 싫어. 미안하다.”
나는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이묵주의 머리에 덮어 준 뒤 박스를 들고 빗속을 뛰었다.
스치는 시야 너머로 이묵주가 언젠가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쫄딱 젖어 도착한 주점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너, 그거 몰라? 건축학과 석준경, 울면서 고백하면 다 받아 준대.”
이묵주는 울었을까. 뒤늦게 그게 궁금했다.
수안동 일가족 방화 살인 사건이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떠오른 건 다음 날이었다. 화면에 공개된 가해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이묵주의 아버지였다.
정환 엄마, 뉴스 봤어? 뭐? 아, 그 방화 사건. 당연히 봤지. 돈 빌리러 갔는데 안 빌려줘서 그랬다며. 그것도 도박 자금 하려고. 쌍노무 새끼. 그런 인간들은 지 자식이 죽어 봐야 정신을 차리는데.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뉴스가 방영된 지 보름 무렵에는 발끝에 차이는 풀 한 포기까지도 이묵주가 그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다른 것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이묵주와 살았던 건 고작 3년. 홀로 억척스레 딸을 키우던 이묵주의 어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뒤부터였으며 그의 관심은 홀로 남을 딸이 아니라 그녀가 수령할 고액의 보험료였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때부터 이묵주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동족 혐오의 반대 개념인 동족 연민의 발로인지 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랬다. 뉴스는 범인이 검거된 이후 나오는 게 보통이고 집에서 잡았다는 걸 보면 이묵주는 그날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건데.
고백 받아 줄 걸 그랬나.
거지에게 적선을 하지 않고 지나친 뒤 내내 거지 걱정을 하는 심약한 아가씨처럼 나는 그날의 내 행동을 후회했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듯 창백하게 젖어 있던 이묵주의 얼굴이 떠올라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 이묵주는 의연했다. 아니 세희의 말에 따르면 의연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피해자 가족이 학교에 찾아와 침을 뱉고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는데,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의연할 수가 있어? 의연한 척하는 것뿐이겠지.
세희는 다른 의미로 알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모든 애들이 이묵주를 살인자의 딸이라 욕하고 따돌릴 때 홀로 이묵주 편을 들었다. 얘네 아버지가 죽였지. 얘가 죽였어? 그 말을 무용담처럼 말하면서 세희는 날 보았다. 칭찬을 바랄 때의 눈이었다. 세희가 내 가정환경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그래서 할 수 없었을 행동.
주말을 맞이하여 집에 놀러 온 이묵주는 내게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뭔데?”
“옷.”
봉투 안에는 내 후드 점퍼가 들어 있었다. 그날 이묵주에게 주고는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옷이었다. 나는 옷보다 이묵주의 상태에 관심이 갔다. 가뜩이나 마른 얼굴이 더 뾰족해졌다.
“괜찮아?”
되지도 않는 오빠 흉내를 내며 새삼스레 안부를 물었다. 이묵주는 언젠가 세희가 가장 친한 친구라며 절 소개했을 때 같은 얼굴을 했다.
“안 괜찮으면, 뭐. 사귀어 주게?”
벙 찐 나를 내버려 두고 이묵주는 세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묵주의 비웃음은 다른 의미로 충격을 주었다. 동정녀 마리아가 실은 동정녀가 아니었다는 루머를 들은 신도들의 심정이 이럴까. 나는 비틀린 이묵주의 입술을 되새기느라 그녀가 내게 반말을 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반강제로 엠티에 끌려갔다 와 만 하루를 잠만 잤다. 깨어났을 땐 점심때가 한참 지난 오후였다. 어제만 해도 맑았던 하늘은 그새 굵은 비를 토해 내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 한 컵으로 끼니를 때우고 막 무덤에서 깨어난 좀비처럼 계단을 오르던 참이었다. 부산스레 빨래를 걷어 들어온 가정부 아주머니가 비를 털어 내며 말했다.
“어쩌나. 세희 우산 안 들고 갔는데.”
이 정도 비쯤은 맞아도 될 만큼 세희는 건강했지만 얹혀사는 군식구가 그딴 말을 해선 좋을 건 없었다. 제가 다녀올게요. 나는 계단을 마저 오르며 군식구의 소일거리를 만들었다.
오늘은 야자를 하지 않는 날이라고 했다. 씻고 느지막이 집을 나서자 세희의 하교 때와 얼추 시간이 맞아떨어졌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 서 있자니 꼴이 우스워 보일 것 같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장 구석 등나무 벤치에 앉아 메시지를 찍어 보냈다. 5분도 되지 않아 세희는 중앙 현관 앞에 나타났다.
“이거 가져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어.”
“나 오늘 애들이랑 남아서 공부하기로 했는데. 잠깐 여기서 기다리면 약속 취소하고.”
“뭐하러. 공부하고 천천히 와. 간다.”
세희의 부모님은 세회와 내가 사이좋게 지내길 바랐지만 그건 순전히 오누이 같은 시점에서였다.
세희의 마음이 그 오누이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적당히 끊고 자르는 게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고아를 돕는 건 돕는 거고 딸은 딸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나처럼 개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놈과 엮이는 건 누구에게나 달갑진 않을 일일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고 했다. 나의 거울은 짐승보다 잔인했던 아버지와 그 아래에서 속수무책으로 짓밟히기만 했던 어머니였다.
허전하던 운동장은 금세 하교하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나는 옷에 빗물이 튀는 게 거슬려 선비처럼 사뿐사뿐 걷다가 날아온 참고서에 흙탕물 벼락을 맞았다. 무릎까지 치고 오른 얼룩에 짜증이 치민 낯으로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묵주였다.
“내가 틀린 말했어? 맞잖아. 너희 아버진 살인자, 넌 그 살인자 딸.”
“그래서?”
“뭐?”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이묵주는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고 서 있었다. 그 주위를 형형색색의 우산을 쓴 여자애들이 빙 둘러쌌다. 멀리서 보면 유치원생들이 재롱 잔치 때 곧잘 하는 부채춤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비는 거세졌다. 흙탕물에 처박힌 참고서에 적힌 이름 세 글자가 빗물에 보기 싫게 번지고 있었다. 이묵주. 나는 2만 원이나 하는 참고서가 더 젖기 전에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어쨌든 너희 아버지가 죽였으면 너도…….”
웅성거리던 소음이 순간 잦아들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여자애들의 나무 장작처럼 마른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이묵주를 볼 수 있었다.
놀란 여자애들이 동시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묵주는 말했다. 여전히 물웅덩이 속에 무릎을 담근 채 빗물에 온통 젖은 얼굴로.
“살인자 아버지를 둬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공손한 말과는 달리 눈빛은 독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적의에 차 있었다.
수능 시험을 치고 난 후에도 나는 빠지지 않고 등교했다. 집 안에 있으면 목줄이 감긴 망아지처럼 어딘가 불편했다. 마냥 좋은 아이인 양 연기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날은 유독 추웠다. 이묵주가 선물로 준 목도리를 처음으로 하고 나오는데 세희가 그걸 갖고 싶어 했다.
“어디서 난 거야? 진짜 예쁘다.”
“그래?”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길모퉁이에서 나오던 이묵주를 본 순간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가질래?”
“진짜? 그래도 돼?”
“어. 가져.”
목도리를 풀어 건네자 세희는 마다하지도 않고 제 목에 감았다. 나는 눈처럼 차갑게 얼어 가던 이묵주를 모른 척 지나쳤다. 세희는 그걸 이묵주가 줬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마침 집에서 나오던 이묵주를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나쁜 건 나였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세희에게 목도리를 줘 버린 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악마가 될 수 있는지 그 새싹을 보고 싶다면 당시에 날 보면 됐다. 단순한 감정만으로도 사람은 강자와 약자로 나뉠 수 있었다.
반년이 넘도록 날 좋아하는 이묵주는 약자였고 그런 이묵주를 알고 있는 나는 강자였다. 주인을 잘못 만난 애정은 그렇게 흉기가 됐다.
그 후에도 나는 열심히 흉기를 휘둘렀다. 책을 빌려준다는 핑계로 추운 겨울날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하곤 다음 날 잊어서 미안하다며 다정하게 웃었다.
세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나갔던 이묵주가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더 다쳤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세희만 걱정하는 척했다.
피크는 이묵주 어머니의 장례식이었다. 눈이 퍼붓던 어느 날 이묵주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은 세희의 부모님은 가족 모두가 장례식장에 가기를 요했고 나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짧은 인사가 오갔다. 세희는 인형처럼 앉아 있는 이묵주가 무색하게 기절할 것처럼 울더니 곧 딸을 걱정한 어머니에 의해 쫓기듯 집으로 떠나야 했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오는 길에 이묵주의 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왜 남편인 내가 받을 수 없냔 말이야. 내가 그 계집애 아빤데. 아직 미성년자잖아. 걔가 그 큰돈을 위험해서 어떻게 받아? 막말로 내가 애 아빤데 보험금 받아 딴짓하겠수? 형씨 좀 유도리 있게 삽시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돌아서던 순간 이묵주와 마주쳤다. 데스마스크처럼 굳어 있던 이묵주의 얼굴이 나를 보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에 피가 날 것처럼 붉어진 귀. 나는 이묵주를 지나치며 말했다.
“좋겠다, 넌. 저런 대단한 아버지가 있어서.”
장례식장에 앉아 꾸역꾸역 처넣었던 음식들을 화장실에 가서 모두 게워 내고 세수를 했다. 고개를 들자 거울 속의 젖은 나와 마주쳤다. 두 눈이 죽은 아버지를 볼 때처럼 경멸과 멸시로 들끓고 있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이묵주와 세희의 관계는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해가 바뀌어 반이 갈라진 후에도 왕래는 계속되었는데 웃긴 건 그들이 전보다 훨씬 친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즈음 나는 이묵주에 대한 관심을 껐다. 이묵주 역시 나에 대한 감정이 이전 같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여자애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울면서 고백하는 여자애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받아 준 게 그 시초였다.
첫 여자 친구가 생긴 걸 우연히 알게 된 세희는 온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때 알았다. 세희의 소유욕이 이미 다른 종류로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애정 없는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여자 친구는 울면서 사랑을 고백했듯 울면서 이별을 고했다. 나는 별다른 충격 없이 그걸 받아들였다.
그게 벌써 열 번째. 나는 같은 과정으로 다른 여자를 사귀었고 얼마 가지 않아 헤어졌다. 그때가 내가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아마 6월 즈음이었을 거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건 그때가 축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에서 차려 놓은 주점에서 강제로 안주를 만들고 있었다.
첫날엔 열 번째 여자 친구가 와서 종일 울다 갔고 두 번째 날엔 다섯, 여섯 번째 여자 친구가 나타나 연달아 깽판을 치고 갔다. 마지막 날엔 세희가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왔다. 거기에 이묵주가 함께 끼어 있었다.
변태 같은 동기와 선배들은 교복 입은 여자애들의 존재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여자애들을 빼내 구석 자리에 앉혔다.
“술은 안 돼. 전이나 먹고 가.”
“아, 오빠. 딱 한 잔만. 응? 좀 있으면 수능 백일인데. 백일주라고 치면 되잖아.”
“안 돼.”
나는 답잖게 모럴이 투철한 편이었다. 그러나 우리 과엔 모럴 제로인 폭탄이 하나 있었으니, 막 제대한 고영민이었다. 형은 막걸리와 소주잔을 가져오더니 인원수만큼 따랐다. 다섯 잔이었다. 소주잔을 본 세희가 볼멘소리를 냈다.
“이게 뭐야. 개미 눈물도 아니고.”
검사 아버지를 둔 열아홉 세희는 종종 클럽에 놀러 다녔다. 신분증 없이도 들여보내 주더라고, 다 내가 예뻐서 그런 거 아니겠냐며 자랑하듯 떠벌렸다. 나는 세희보단 이묵주에게 자꾸 눈이 갔다.
그날 이묵주는 상태가 아주 이상했다. 어딘가 아주 아파 보였는데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소주잔을 모두 나눠 준 영민 형이 이묵주에겐 잔을 내려놓지 않고 물었다.
“넌 어디 아프냐? 얼굴이 왜 그래.”
“아뇨. 멀쩡해요.”
이묵주는 영민 형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단번에 마셨다. 와, 대박. 이묵주. 여자애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졌다. 지지 않겠다는 듯 세희가 원샷했다. 그걸론 성에 차지 않는지 한 잔 더를 외쳤지만 영민 형은 브레이크를 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안 돼. 한 살 더 먹으면 그때 두 잔을 먹든 세 병을 먹든 너희들 마음대로 해.”
주점은 9시 이후가 피크였다. 막걸리가 모자라니 가져오라는 명령을 듣고 밖으로 나섰다. 과방에서 박스 하나를 들고 나오던 참이었다.
밖에서 기름 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였다. 현관 앞에 서서 돌아가 우산을 가져와야 하나 그냥 뛰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더랬다.
비를 가르고 여자애 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교복 차림. 하얀 얼굴. 어딘가 아파 보이는 표정.
“좋아해요.”
이묵주는 다짜고짜 고백했다. 또렷한 목소리로. 젖은 어깨를 덜덜 떨면서.
고백을 그런 얼굴로 하는 여자애를 처음 봤다. 틱 건드리면 툭 하고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알아. 근데 난 너 싫어. 미안하다.”
나는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이묵주의 머리에 덮어 준 뒤 박스를 들고 빗속을 뛰었다.
스치는 시야 너머로 이묵주가 언젠가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쫄딱 젖어 도착한 주점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너, 그거 몰라? 건축학과 석준경, 울면서 고백하면 다 받아 준대.”
이묵주는 울었을까. 뒤늦게 그게 궁금했다.
수안동 일가족 방화 살인 사건이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떠오른 건 다음 날이었다. 화면에 공개된 가해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이묵주의 아버지였다.
정환 엄마, 뉴스 봤어? 뭐? 아, 그 방화 사건. 당연히 봤지. 돈 빌리러 갔는데 안 빌려줘서 그랬다며. 그것도 도박 자금 하려고. 쌍노무 새끼. 그런 인간들은 지 자식이 죽어 봐야 정신을 차리는데.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뉴스가 방영된 지 보름 무렵에는 발끝에 차이는 풀 한 포기까지도 이묵주가 그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다른 것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이묵주와 살았던 건 고작 3년. 홀로 억척스레 딸을 키우던 이묵주의 어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뒤부터였으며 그의 관심은 홀로 남을 딸이 아니라 그녀가 수령할 고액의 보험료였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때부터 이묵주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동족 혐오의 반대 개념인 동족 연민의 발로인지 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랬다. 뉴스는 범인이 검거된 이후 나오는 게 보통이고 집에서 잡았다는 걸 보면 이묵주는 그날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건데.
고백 받아 줄 걸 그랬나.
거지에게 적선을 하지 않고 지나친 뒤 내내 거지 걱정을 하는 심약한 아가씨처럼 나는 그날의 내 행동을 후회했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듯 창백하게 젖어 있던 이묵주의 얼굴이 떠올라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 이묵주는 의연했다. 아니 세희의 말에 따르면 의연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피해자 가족이 학교에 찾아와 침을 뱉고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는데,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의연할 수가 있어? 의연한 척하는 것뿐이겠지.
세희는 다른 의미로 알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모든 애들이 이묵주를 살인자의 딸이라 욕하고 따돌릴 때 홀로 이묵주 편을 들었다. 얘네 아버지가 죽였지. 얘가 죽였어? 그 말을 무용담처럼 말하면서 세희는 날 보았다. 칭찬을 바랄 때의 눈이었다. 세희가 내 가정환경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그래서 할 수 없었을 행동.
주말을 맞이하여 집에 놀러 온 이묵주는 내게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뭔데?”
“옷.”
봉투 안에는 내 후드 점퍼가 들어 있었다. 그날 이묵주에게 주고는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옷이었다. 나는 옷보다 이묵주의 상태에 관심이 갔다. 가뜩이나 마른 얼굴이 더 뾰족해졌다.
“괜찮아?”
되지도 않는 오빠 흉내를 내며 새삼스레 안부를 물었다. 이묵주는 언젠가 세희가 가장 친한 친구라며 절 소개했을 때 같은 얼굴을 했다.
“안 괜찮으면, 뭐. 사귀어 주게?”
벙 찐 나를 내버려 두고 이묵주는 세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묵주의 비웃음은 다른 의미로 충격을 주었다. 동정녀 마리아가 실은 동정녀가 아니었다는 루머를 들은 신도들의 심정이 이럴까. 나는 비틀린 이묵주의 입술을 되새기느라 그녀가 내게 반말을 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반강제로 엠티에 끌려갔다 와 만 하루를 잠만 잤다. 깨어났을 땐 점심때가 한참 지난 오후였다. 어제만 해도 맑았던 하늘은 그새 굵은 비를 토해 내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 한 컵으로 끼니를 때우고 막 무덤에서 깨어난 좀비처럼 계단을 오르던 참이었다. 부산스레 빨래를 걷어 들어온 가정부 아주머니가 비를 털어 내며 말했다.
“어쩌나. 세희 우산 안 들고 갔는데.”
이 정도 비쯤은 맞아도 될 만큼 세희는 건강했지만 얹혀사는 군식구가 그딴 말을 해선 좋을 건 없었다. 제가 다녀올게요. 나는 계단을 마저 오르며 군식구의 소일거리를 만들었다.
오늘은 야자를 하지 않는 날이라고 했다. 씻고 느지막이 집을 나서자 세희의 하교 때와 얼추 시간이 맞아떨어졌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 서 있자니 꼴이 우스워 보일 것 같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장 구석 등나무 벤치에 앉아 메시지를 찍어 보냈다. 5분도 되지 않아 세희는 중앙 현관 앞에 나타났다.
“이거 가져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어.”
“나 오늘 애들이랑 남아서 공부하기로 했는데. 잠깐 여기서 기다리면 약속 취소하고.”
“뭐하러. 공부하고 천천히 와. 간다.”
세희의 부모님은 세회와 내가 사이좋게 지내길 바랐지만 그건 순전히 오누이 같은 시점에서였다.
세희의 마음이 그 오누이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적당히 끊고 자르는 게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고아를 돕는 건 돕는 거고 딸은 딸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나처럼 개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놈과 엮이는 건 누구에게나 달갑진 않을 일일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고 했다. 나의 거울은 짐승보다 잔인했던 아버지와 그 아래에서 속수무책으로 짓밟히기만 했던 어머니였다.
허전하던 운동장은 금세 하교하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나는 옷에 빗물이 튀는 게 거슬려 선비처럼 사뿐사뿐 걷다가 날아온 참고서에 흙탕물 벼락을 맞았다. 무릎까지 치고 오른 얼룩에 짜증이 치민 낯으로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묵주였다.
“내가 틀린 말했어? 맞잖아. 너희 아버진 살인자, 넌 그 살인자 딸.”
“그래서?”
“뭐?”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이묵주는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고 서 있었다. 그 주위를 형형색색의 우산을 쓴 여자애들이 빙 둘러쌌다. 멀리서 보면 유치원생들이 재롱 잔치 때 곧잘 하는 부채춤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비는 거세졌다. 흙탕물에 처박힌 참고서에 적힌 이름 세 글자가 빗물에 보기 싫게 번지고 있었다. 이묵주. 나는 2만 원이나 하는 참고서가 더 젖기 전에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어쨌든 너희 아버지가 죽였으면 너도…….”
웅성거리던 소음이 순간 잦아들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여자애들의 나무 장작처럼 마른 다리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이묵주를 볼 수 있었다.
놀란 여자애들이 동시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묵주는 말했다. 여전히 물웅덩이 속에 무릎을 담근 채 빗물에 온통 젖은 얼굴로.
“살인자 아버지를 둬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공손한 말과는 달리 눈빛은 독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적의에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