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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서울 도심을 벗어난 승용차가 산비탈을 돌았다. 빽빽한 잡목 숲을 지나자, 호수를 끼고 있는 너른 평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후 얼마를 달렸을까. 병풍처럼 둘린 산을 배경으로, 단순한 형태의 넓은 직사각형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천 평 가까이 되어 보이는 넓은 정원에는 갖가지 조경수가 잘 손질된 채로 가꾸어져 있었다. 아직은 추운 겨울이지만,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오면 넓은 정원에는 짙은 녹음과 꽃향기로 가득할 것이다.
코로 스미는 숲의 향기가 혜원의 어린 마음을 더욱 들뜨게 했다. 차장 밖으로 목을 빼고 정원을 바라보는 혜원과 달리 화옥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앞을 응시할 뿐이었다.
기사의 안내를 받고 현관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을 기다리던 정 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윤 보살님. 힘든 걸음 하셨습니다.”
화옥을 향해 인사를 하면서도 정 비서의 눈은 내내 혜원에게 향해 있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날카롭고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혜원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전한 정 비서가 두 사람을 재촉하고 나섰다.
“사모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일단 안으로 좀 들어가시죠.”
두 개의 층을 합한 높은 천장의 거실 중앙에는 2층으로 이어진 나선형의 계단이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와 미술품으로 장식된 실내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미술관이나 전시관처럼 단순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정 비서를 따라 두 사람이 계단을 올랐다. 긴 복도를 지나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정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정 비서가 문을 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소파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혜원은 낯선 긴장감에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단정하게 말아 올린 머리와 단순한 디자인의 원피스가 우아하고 기품 있는 외모에 잘 어울렸다.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인상을 풍기는 여자가 화옥이 말했던 유명한 기업의 안주인인 모양이었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을 때, 앞서가던 화옥이 혜원을 향해 말했다.
“어서 인사드려라. 정한그룹의 장영화 여사님이시다.”
혜원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목이 잠겨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와서 앉아라.”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명령에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혜원이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꿰뚫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몸이 잘게 떨려 왔다.
“열여덟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구나. 언뜻 보면, 스무 살은 되어 보이는데 말이야.”
혜원의 몸을 훑던 장 여사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학생답게 교복을 입고 왔지만, 이미 낡고 작아진 옷은 터질 듯이 성숙한 몸을 감추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직은 앳된 이목구비를 하고 있지만, 그조차도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티 없이 깨끗한 피부와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보면 볼수록 시선을 사로잡았다.
홀아비 밑에서 배를 곯고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묘한 귀태까지 흘렀다. 제대로 먹이고 입힌다면, 더욱 빛을 발할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름이 뭐라고?”
“강혜원입니다.”
“네 이야기는 윤 보살에게 전해 들었다. 기꺼이 이곳으로 오겠다고 해서, 내심 어떤 아이인가 궁금했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쁘구나. 눈매도 아주 또렷하고…….”
장 여사가 만족스러운 듯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때 말없이 두 사람을 주시하던 화옥이 끼어들었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지난번에 말씀드린 거 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다행히 아이가 영민해 보이고 이렇게 인물도 출중하니, 나중을 위해서 제대로 공부시키고 꾸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생기는 물론 음기도 남다른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강한 음기가 강준 도련님의 양기를 깨울 겁니다. 치성을 드리고 정성을 쏟는다면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다면 이 아이에게도 그만큼의 상을 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이 아이는 강준이 약혼녀로 이 집에 들인 겁니다. 깨어나기만 한다면 호적에도 올리고 온전한 내 집 사람으로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단호한 말에서 간절한 염원이 느껴졌다. 장 여사가 혜원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괜한 구설에 휘말릴 수 있으니, 네 아비는 시설 좋은 요양 시설에 보낼 생각이다. 학교는 인근의 고등학교로 통학하고 대학 갈 때까지 실력 있는 가정교사를 붙여 주마. 대신 밤에는 강준이 곁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혜원은 자기 일보다는 아버지를 요양 시설에 보낸다는 말이 더 기뻤다.
잠시 후, 누군가 차를 내오자, 사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참, 유학 가신 둘째 아드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아직도 여전합니까?”
화옥의 물음에, 장 여사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새로운 화제가 불편해 보였다.
“그 아이야 늘 그렇죠. 제멋대로에 천방지축,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니까요. 게다가 제 형이 저렇게 누워 있는데, 생전 안부를 묻는 법이 없어요.”
“말씀드렸죠? 강혁 도련님은 지배자의 사주를 타고났습니다. 강압적이기보다는 부드럽게 대하셔야 합니다.”
“무슨 소리. 그 아이 때문에 강준이가 저렇게 누워 있어요. 제아무리 날뛰어도 정한그룹은 강준이 겁니다. 어디 제 놈이 함부로!”
말을 끊은 장 여사가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이 잠시 숨을 골랐다. 차고 매서운 말투에 흠칫 놀란 혜원이 장 여사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출발하기 전에 화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화옥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것이고, 생각이 많다는 것은 마음을 쉬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쉬지 못하는 마음이 행복할 리 없으며 더불어 남의 행복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돌연 강혁이라는 남자의 존재가 궁금했다. 지배자의 사주를 지녔지만, 자신을 낳은 모친에게조차 외면받는 존재. 어쩐지 쫓기듯이 집을 나온 자신의 처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허황한 생각이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자신과 그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해가 서쪽 산으로 넘어갈 즈음, 근심 어린 얼굴로 당부를 잊지 않던 화옥이 서울로 돌아갔다. 혜원은 막상 혼자 남게 되니 두렵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 앉지도 못하고 넓은 거실을 서성이고 있을 때, 2층 계단을 내려오던 정 비서가 혜원을 불렀다.
“짐은 별채로 옮겨 두었습니다. 바로 별채로 안내할 테니 따라오세요.”
꼬박꼬박 존대하는 말투가 어색한 기분을 더욱 부추겼다. 앞서가는 정 비서를 따라, 혜원이 걸음을 옮겼다.
저택의 뒷문을 열고 나가자, 좁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폭의 길 양옆으로 높다랗게 솟은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지나가자, 마른 대나무 잎이 푸석이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오다가 보았던 잘 가꾸어진 서양식 정원과 달리, 뒤뜰은 어딘가 폐쇄적이고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얼마를 걸어가니 한옥 형태로 지은 고풍스러운 별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청을 사이에 둔 기역 자 구조의 개량 한옥 앞에 다다르자, 정 비서가 혜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당부할 말이 있으니, 이리 올라오세요.”
전통 한옥과는 달리 대청에 유리를 달아 찬 기운을 차단한 개량 한옥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안방 문을 열고 나오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잘되었네요. 한 간호사님. 사모님께 이야기 들었죠? 혜원 아기씨, 이쪽은 강준 도련님을 돌보는 수간호사입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서로 의지하며 지내시면 됩니다.”
아기씨란 호칭에 놀란 혜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간호사 정숙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정숙은 차분하고 수더분한 인상으로 혜원을 살피는 눈길이 몹시 조심스러워 보였다.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잠시 안으로 들어오세요.”
작은방으로 들어간 세 사람이 둥근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았다.
“한 간호사님. 이곳 별채는 앞으로 강준 도련님과 아기씨만이 머무르게 될 겁니다. 도련님을 돌보는 일은 예전과 다름없지만, 목욕이나 마사지는 아기씨와 함께하도록 하세요. 낮에는 한 간호사님이 곁을 지키고 밤에는 아기씨가 도련님의 곁을 지키면 됩니다. 그리고 주무실 때는…….”
정 비서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는지, 잠시 말을 끓었다.
“한 이불에서 도련님을 꼭 안고 주무셔야 합니다.”
느닷없는 말에 혜원이 낯을 붉혔다. 화옥에게 언질은 받았지만, 막상 귀로 들으니 실감 나는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쩐지 덜컥 겁이 나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환자의 기운을 북돋는 행위라고 들었지만, 낯선 남자와 누워 있는 제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은 한 간호사님이 별채에서 머무르면서 두 분을 살펴 주세요.”
“그러죠.”
말을 아끼는 성품인지, 정숙의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사모님은 여러 일로 바빠서 자주 오시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출퇴근하는 주치의와 집안일을 거드는 분들이 있으니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의하시고요.”
말을 마친 정 비서가 별채 밖으로 사라졌다.
장 여사는 물론 정 비서까지 서울로 올라가자, 혜원이 있는 별채까지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혜원이 한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목욕을 하고 자신의 짐이 있는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꾸린 가방에는 낡은 옷가지와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초라한 짐을 풀다 보니, 제아무리 화려한 옷도 몸에 맞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호화로운 집도 따스한 방도 마치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옷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하게 싫었던 아버지와 머문 단칸방, 하지만 막상 그곳을 떠나오니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들어가도 되니?”
문밖에서 들리는 기척 소리에 혜원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고 정숙이 문지방을 넘었다.
“혜원이라고 불러도 되지?”
“네. 그럼요.”
“강준이를 보러 가기 전에, 잠시 너에게 할 말이 있단다.”
정 비서와 달리 정숙은 혜원을 격식 없이 대했다. 강준이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걸 보니, 오랫동안 그를 알아 온 듯했다. 차분한 시선으로 혜원을 응시하던 정숙이 물었다.
“나이가 열여덟이라고?”
“네.”
“한창 예쁠 나이지만, 듣던 대로 유달리 예쁜 아이구나.”
갑작스러운 칭찬에 혜원이 고개를 숙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들어온 칭찬이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몸이 달라지면서 갈수록 듣기 거북해진 말.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동네 남학생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 친구는 물론 선배까지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끈적한 시선을 느낄 때마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사모님께 네 이야기를 듣고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 역시 강준이가 깨어나기를 누구보다 바라지만, 이런 경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몹시 고민이 되었거든.”
“…….”
“나는 강준이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질긴 인연으로 그 아이를 돌보고 있지만, 아무 인연도 없는 너는 다르겠지. 어린 나이에 많이 힘들 텐데, 정말 괜찮겠니?”
다정한 말만큼이나, 따스한 시선이 돌아왔다.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혜원이 고개를 숙였다.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에요.”
혜원의 다부진 대답에 정숙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린 나이에 이런 결심을 했을 때는 제 나름의 각오가 있었을 것이다.
우려한 것과는 달리, 반듯해 보이는 인상과 또렷한 눈빛을 가진 아이였다. 외모 또한 남달라서 강준이 깨어나기만 한다면 좋은 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긴, 남다른 사정이 있으니 이런 결정을 했겠지. 곁에서 힘껏 도울 테니, 힘들면 언제든지 상의해라.”
“감사합니다.”
짧지만 혜원의 진심 어린 대답에 정숙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강준이가 기다릴 테니, 어서 인사하러 가자.”

*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잠든 듯이 누워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문을 열 때 느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제멋대로 뛰던 심장박동이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단정한 이목구비,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까지 맑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혜원은 처음 강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엄마도 병석에 누운 채,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의식이 없다는 것이 죽음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일까, 강준을 떠올리면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다가와 앉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