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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혜원이 강준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든 듯이 누워 있는 강준을 보니 우울한 기분이 저절로 누그러졌다. 창으로 스며드는 저녁 해가 청결해 보이는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물이 담긴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하얀 시트를 걷어 냈다. 그리고 강준이 입은 잠옷의 단추를 벗겨 냈다. 부지런히 닦아 주지만, 늘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깨끗하게 소독한 가제 수건을 물에 적셨다. 적당히 짜서 톡톡 두드려 보니, 온도가 알맞았다. 이마에서 코, 입술을 조심스럽게 닦아 나갔다. 까슬한 느낌이 드는 턱에 다다르자, 언뜻 웃음이 나왔다.
“벌써 수염이 이렇게나 자랐네.”
강준은 자극을 주면 가끔 반사적으로 움직일 때가 있었다. 눈을 깜빡이거나 입술을 달싹이거나 손을 움칠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혜원은 금방이라고 강준이 깨어날 것만 같아서 가슴이 설레고는 했다.
“오빠, 곧 대학생이 된다는 사실이 어쩐지 믿기지가 않아. 가고 싶은 의대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 참, 그리고 사모님이 통학하라고 차도 사 주셨어. 빨간색 소형찬데, 정말 예뻐. 어제는 운전해서 시내까지 가 봤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몸이 바싹 얼어붙었다니까.”
종알종알, 혼자만의 대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익숙한 대화만큼이나 노련한 손놀림으로 혜원이 그의 팔과 가슴을 부드럽게 닦아 냈다. 그의 몸을 돌린 뒤에 수건을 갈아 더욱 세심하고 꼼꼼하게 문질렀다. 등은 욕창이 생기기 쉬운 부분이라서 더욱 신경 써야 했다.
“운전에 익숙해지면, 오빠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고 싶어. 한 간호사님에게 들었어. 오빠가 유달리 바다를 좋아했다고. 바다는 다음에 가고 대신 이번 겨울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자. 수연이와 함께 가기로 했는데, 오빠도 괜찮지? 스키장에서 실컷 눈 구경도 하고 가까운 식물원에도 다녀오기로 했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
강준의 상체를 모두 닦고 파자마를 벗겨 냈다. 그동안 간호사인 정숙을 도와 가벼운 목욕만을 도왔다. 그러나 최근 서울에 볼일이 잦아진 정숙을 대신하여 혜원이 강준을 돌보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꺼려지고 망설여지던 일이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강준을 돌보다 보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세상을 떠난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는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다시는 허무하게 떠나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의사가 되려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었다.
털이 성성한 다리와 발가락까지 세심하게 닦아 냈다. 수액으로 영양을 공급받는 강준은 살집이 없는 편이지만 그에 비해 키가 크고 뼈대 또한 굵직했다.
선천적으로 희고 깨끗한 피부는 병석에 오래 누워서도 탄력을 잃지 않았다. 정숙과 혜원이 부지런히 닦고 마사지해 준 덕분이었다.
길고 긴 목욕이 끝나갈 무렵,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정숙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런, 힘들 텐데, 기다렸다가 같이 하지.”
깨끗이 손질한 파자마를 갈아입히던 혜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추운 겨울인데도, 혜원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정숙이 안쓰러운 마음에 서둘러 뒷정리를 도왔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혜원이 너는 좀 쉬어라. 아직 저녁도 안 먹었지?”
“천천히 먹을게요.”
“무슨 소리. 식사는 제때 챙겨 먹어야지.”
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않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정숙을 바라보았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저기…… 강준 오빠 동생이라는 분 말이에요.”
“누구? 강혁이?”
강혁이라는 이름에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핥는 듯이 느릿한 시선에 이어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던 눈동자가 떠오르자, 심장에 이어 온몸이 잘게 떨려 왔다.
“별장에서 지내신다는 게 사실이에요?”
“글쎄다. 출퇴근하기에는 먼 거리인데, 불편하지 않을는지.”
혜원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정숙는 오히려 강혁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동생이라는데, 강준 오빠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요. 차갑고 무례하고 냉정해 보이고…….”
혜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평소답지 않은 말투에 정숙이 소리 없이 웃었다.
“강혁이가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구나. 하긴, 처음에는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이지.”
“몇 년 만이라면서 강준 오빠 얼굴은커녕, 안부도 묻지 않고 돌아갔어요. 사모님이 화를 내시는 게 당연해요.”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야. 예전에는 지금처럼 사이가 소원하지 않았거든.”
정숙의 다독이는 말에도 좀처럼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혜원의 기분을 눈치챈 듯이 정숙이 화제를 돌렸다.
“참, 아까 물었던 여행 말이다. 사모님이 괜찮다고 허락하셨어.”
“정말요?”
“장소가 정해지면, 숙소는 깨끗하고 믿을 만한 곳으로 알아보마.”
“강준 오빠와 여행이라니, 정말 꿈만 같아요.”
“네가 정성을 쏟은 덕분이지. 강준이가 깨어나면 누구보다 네게 고마워할 거야.”
“오히려 제가 감사하고 싶은 걸요. 강준 오빠 덕분에 지금껏 마음 놓고 공부하고 원하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잖아요.”
“그래. 앞으로는 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혜원이 까닭 모를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한쪽에 치워 둔 뜨개실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강준의 목에 뜨다 만 목도리를 둘러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하얀 피부에 붉은색이 잘 어울렸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아무렴. 누구 솜씨인데.”
혜원이 만족스러운 듯 방긋 웃었다.
“이번 여행길에서 오빠 목에 둘러 주려면, 서둘러 완성해야 할 텐데…….”
강준의 곁에 자리 잡고 앉은 혜원이 뜨개질을 하려는 듯 털실을 정리했다. 정숙이 그런 혜원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비록 어설픈 솜씨였지만,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짜 놓은 미완의 목도리가 혜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지난 2년, 혜원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정숙은 아이의 수고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환자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얼굴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며 공부 또한 악착스럽게 했다.
세상에 누려야 할 복이, 그리고 노력에 대한 대가가 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아이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불합리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 깊은 잠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강준처럼 말이다.
“……혜원아.”
정숙의 부름에 혜원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에 말이다. 아주 만약에 강준이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숙이 말을 흐렸다. 괜한 말을 꺼냈나 하는 후회가 들었기 때문이다.
“상관없어요.”
혜원의 분명한 대답에 정숙은 할 말을 잊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잘 알아요. 강준 오빠가 깨어나기를 누구보다 바라지만, 평생 깨어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지금처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지금처럼 경과가 좋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정숙에게 강준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혜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에게 한 번 뿐인 삶이었다. 누구도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강준이를 생각하는 네 마음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앞으로는 네 자신도 돌봐야 해. 무조건적인 희생이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희생이라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어요.”
혜원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숙이 그런 혜원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직은 세상을 모르는 나이, 과연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 것인지를, 그 마음이 돌아서는 순간, 겹겹이 쌓아 놓은 시간조차 무거운 짐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하니까, 그리고…….”
“…….”
“언제든 마음은 변할 수 있어.”
정숙의 말에 혜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습게도 오만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강혁이라는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가 강준 오빠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쩌면.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나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아니라고, 지금의 마음이 절대 변할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혜원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왔다. 한때는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곳, 피를 나눈 혈육이었다.
“강준 오빠는 깨어날 거예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혜원이 말했다.
정숙이 방으로 돌아가자, 혜원이 손에 들린 대바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숨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한 방,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강준 오빠.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
“…….”
“내 마음이 변해서 오빠를 떠날 수 있다니, 그게 말이 돼?”
혜원이 강준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저 혼자 중얼거렸다.
“아빠는 늘 술에 취해 있었어. 그리고 눈만 마주치면 손찌검을 했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망 왔어. 하지만 오빠는 다르잖아.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는 게 다 누구 덕인데.”
“…….”
“나는 변하지 않아.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몇 차례의 다짐에도 강준은 대답이 없었다. 닿지 않는 소리가 그저 메아리처럼 고요한 방을 울릴 뿐이었다.
*
회의실을 빠져나온 강혁이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대표이사 선임 건이 통과한 것이 열흘 전이었다. 각 계열사의 재무제표를 확인하고 계열사 각각의 대표를 불러 모았다.
따갑고 매서운 추궁이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섭게 몰아붙이는 강혁의 기세에 회사 내부가 기대와 불안으로 술렁였다.
그러나 외부 사정은 사뭇 달랐다. 곤두박질치던 정한그룹의 주가가 연일 상승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고 진욱과 둘만 남게 되자, 강혁이 넥타이를 풀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위쪽부터 물갈이를 해야 해.”
“숨넘어가겠다. 좀 천천히 하자.”
진욱이 높다랗게 쌓아 놓은 서류 더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강혁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재무제표를 보니 그룹 전체의 대대적인 구조 조정이 필요해 보였다. 모든 것이 투명하지 않고 썩은 그물처럼 엉키고 또 엉켜 있었다.
“참, 어제 청평 갔었다며? 어머니는 만나 뵈었어?”
진욱의 물음에 강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성질 좀 죽여. 그래도 낳아 주신 어머니잖아.”
진욱은 알 리 없지만, 사실 강혁의 성질을 건드리던 것은 어머니, 장 여사가 아니었다.
길고양이처럼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몬드 모양의 눈매가 떠오르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더 우스운 건, 자신의 반응이었다. 비록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몸을 하고 있지만, 채 스물도 되지 않는 나이였다.
혜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사춘기 소년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당분간 청평 별장에서 출퇴근할 생각이야.”
“무슨 소리야? 출퇴근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잖아.”
강혁은 진욱의 말에 적당한 대답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궁색한 변명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해도 저물었는데,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
“어쩐 일이야. 요사이 일에 푹 빠져 지내더니.”
“때로는 기분 전환도 필요한 법이지.”
그저 일에 빠져서 한동안 여자를 멀리한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그 이유가 아니고는 청평에서 출퇴근하려는 자신을 강혁은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혜원이 강준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든 듯이 누워 있는 강준을 보니 우울한 기분이 저절로 누그러졌다. 창으로 스며드는 저녁 해가 청결해 보이는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물이 담긴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하얀 시트를 걷어 냈다. 그리고 강준이 입은 잠옷의 단추를 벗겨 냈다. 부지런히 닦아 주지만, 늘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깨끗하게 소독한 가제 수건을 물에 적셨다. 적당히 짜서 톡톡 두드려 보니, 온도가 알맞았다. 이마에서 코, 입술을 조심스럽게 닦아 나갔다. 까슬한 느낌이 드는 턱에 다다르자, 언뜻 웃음이 나왔다.
“벌써 수염이 이렇게나 자랐네.”
강준은 자극을 주면 가끔 반사적으로 움직일 때가 있었다. 눈을 깜빡이거나 입술을 달싹이거나 손을 움칠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혜원은 금방이라고 강준이 깨어날 것만 같아서 가슴이 설레고는 했다.
“오빠, 곧 대학생이 된다는 사실이 어쩐지 믿기지가 않아. 가고 싶은 의대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거든. 참, 그리고 사모님이 통학하라고 차도 사 주셨어. 빨간색 소형찬데, 정말 예뻐. 어제는 운전해서 시내까지 가 봤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몸이 바싹 얼어붙었다니까.”
종알종알, 혼자만의 대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익숙한 대화만큼이나 노련한 손놀림으로 혜원이 그의 팔과 가슴을 부드럽게 닦아 냈다. 그의 몸을 돌린 뒤에 수건을 갈아 더욱 세심하고 꼼꼼하게 문질렀다. 등은 욕창이 생기기 쉬운 부분이라서 더욱 신경 써야 했다.
“운전에 익숙해지면, 오빠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고 싶어. 한 간호사님에게 들었어. 오빠가 유달리 바다를 좋아했다고. 바다는 다음에 가고 대신 이번 겨울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자. 수연이와 함께 가기로 했는데, 오빠도 괜찮지? 스키장에서 실컷 눈 구경도 하고 가까운 식물원에도 다녀오기로 했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
강준의 상체를 모두 닦고 파자마를 벗겨 냈다. 그동안 간호사인 정숙을 도와 가벼운 목욕만을 도왔다. 그러나 최근 서울에 볼일이 잦아진 정숙을 대신하여 혜원이 강준을 돌보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꺼려지고 망설여지던 일이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강준을 돌보다 보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세상을 떠난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는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다시는 허무하게 떠나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의사가 되려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었다.
털이 성성한 다리와 발가락까지 세심하게 닦아 냈다. 수액으로 영양을 공급받는 강준은 살집이 없는 편이지만 그에 비해 키가 크고 뼈대 또한 굵직했다.
선천적으로 희고 깨끗한 피부는 병석에 오래 누워서도 탄력을 잃지 않았다. 정숙과 혜원이 부지런히 닦고 마사지해 준 덕분이었다.
길고 긴 목욕이 끝나갈 무렵,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정숙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런, 힘들 텐데, 기다렸다가 같이 하지.”
깨끗이 손질한 파자마를 갈아입히던 혜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추운 겨울인데도, 혜원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정숙이 안쓰러운 마음에 서둘러 뒷정리를 도왔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혜원이 너는 좀 쉬어라. 아직 저녁도 안 먹었지?”
“천천히 먹을게요.”
“무슨 소리. 식사는 제때 챙겨 먹어야지.”
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않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정숙을 바라보았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저기…… 강준 오빠 동생이라는 분 말이에요.”
“누구? 강혁이?”
강혁이라는 이름에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핥는 듯이 느릿한 시선에 이어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던 눈동자가 떠오르자, 심장에 이어 온몸이 잘게 떨려 왔다.
“별장에서 지내신다는 게 사실이에요?”
“글쎄다. 출퇴근하기에는 먼 거리인데, 불편하지 않을는지.”
혜원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정숙는 오히려 강혁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동생이라는데, 강준 오빠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요. 차갑고 무례하고 냉정해 보이고…….”
혜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평소답지 않은 말투에 정숙이 소리 없이 웃었다.
“강혁이가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구나. 하긴, 처음에는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이지.”
“몇 년 만이라면서 강준 오빠 얼굴은커녕, 안부도 묻지 않고 돌아갔어요. 사모님이 화를 내시는 게 당연해요.”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야. 예전에는 지금처럼 사이가 소원하지 않았거든.”
정숙의 다독이는 말에도 좀처럼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혜원의 기분을 눈치챈 듯이 정숙이 화제를 돌렸다.
“참, 아까 물었던 여행 말이다. 사모님이 괜찮다고 허락하셨어.”
“정말요?”
“장소가 정해지면, 숙소는 깨끗하고 믿을 만한 곳으로 알아보마.”
“강준 오빠와 여행이라니, 정말 꿈만 같아요.”
“네가 정성을 쏟은 덕분이지. 강준이가 깨어나면 누구보다 네게 고마워할 거야.”
“오히려 제가 감사하고 싶은 걸요. 강준 오빠 덕분에 지금껏 마음 놓고 공부하고 원하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잖아요.”
“그래. 앞으로는 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혜원이 까닭 모를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한쪽에 치워 둔 뜨개실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강준의 목에 뜨다 만 목도리를 둘러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하얀 피부에 붉은색이 잘 어울렸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아무렴. 누구 솜씨인데.”
혜원이 만족스러운 듯 방긋 웃었다.
“이번 여행길에서 오빠 목에 둘러 주려면, 서둘러 완성해야 할 텐데…….”
강준의 곁에 자리 잡고 앉은 혜원이 뜨개질을 하려는 듯 털실을 정리했다. 정숙이 그런 혜원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비록 어설픈 솜씨였지만,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짜 놓은 미완의 목도리가 혜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지난 2년, 혜원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정숙은 아이의 수고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환자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얼굴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며 공부 또한 악착스럽게 했다.
세상에 누려야 할 복이, 그리고 노력에 대한 대가가 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아이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불합리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 깊은 잠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강준처럼 말이다.
“……혜원아.”
정숙의 부름에 혜원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에 말이다. 아주 만약에 강준이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숙이 말을 흐렸다. 괜한 말을 꺼냈나 하는 후회가 들었기 때문이다.
“상관없어요.”
혜원의 분명한 대답에 정숙은 할 말을 잊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잘 알아요. 강준 오빠가 깨어나기를 누구보다 바라지만, 평생 깨어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지금처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지금처럼 경과가 좋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정숙에게 강준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혜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에게 한 번 뿐인 삶이었다. 누구도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강준이를 생각하는 네 마음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앞으로는 네 자신도 돌봐야 해. 무조건적인 희생이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희생이라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어요.”
혜원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숙이 그런 혜원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직은 세상을 모르는 나이, 과연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 것인지를, 그 마음이 돌아서는 순간, 겹겹이 쌓아 놓은 시간조차 무거운 짐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하니까, 그리고…….”
“…….”
“언제든 마음은 변할 수 있어.”
정숙의 말에 혜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습게도 오만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강혁이라는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가 강준 오빠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쩌면.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나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아니라고, 지금의 마음이 절대 변할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혜원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동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왔다. 한때는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곳, 피를 나눈 혈육이었다.
“강준 오빠는 깨어날 거예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혜원이 말했다.
정숙이 방으로 돌아가자, 혜원이 손에 들린 대바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숨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한 방,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강준 오빠.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
“…….”
“내 마음이 변해서 오빠를 떠날 수 있다니, 그게 말이 돼?”
혜원이 강준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저 혼자 중얼거렸다.
“아빠는 늘 술에 취해 있었어. 그리고 눈만 마주치면 손찌검을 했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망 왔어. 하지만 오빠는 다르잖아.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는 게 다 누구 덕인데.”
“…….”
“나는 변하지 않아.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몇 차례의 다짐에도 강준은 대답이 없었다. 닿지 않는 소리가 그저 메아리처럼 고요한 방을 울릴 뿐이었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강혁이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대표이사 선임 건이 통과한 것이 열흘 전이었다. 각 계열사의 재무제표를 확인하고 계열사 각각의 대표를 불러 모았다.
따갑고 매서운 추궁이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섭게 몰아붙이는 강혁의 기세에 회사 내부가 기대와 불안으로 술렁였다.
그러나 외부 사정은 사뭇 달랐다. 곤두박질치던 정한그룹의 주가가 연일 상승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고 진욱과 둘만 남게 되자, 강혁이 넥타이를 풀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위쪽부터 물갈이를 해야 해.”
“숨넘어가겠다. 좀 천천히 하자.”
진욱이 높다랗게 쌓아 놓은 서류 더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강혁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재무제표를 보니 그룹 전체의 대대적인 구조 조정이 필요해 보였다. 모든 것이 투명하지 않고 썩은 그물처럼 엉키고 또 엉켜 있었다.
“참, 어제 청평 갔었다며? 어머니는 만나 뵈었어?”
진욱의 물음에 강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성질 좀 죽여. 그래도 낳아 주신 어머니잖아.”
진욱은 알 리 없지만, 사실 강혁의 성질을 건드리던 것은 어머니, 장 여사가 아니었다.
길고양이처럼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몬드 모양의 눈매가 떠오르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더 우스운 건, 자신의 반응이었다. 비록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몸을 하고 있지만, 채 스물도 되지 않는 나이였다.
혜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사춘기 소년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당분간 청평 별장에서 출퇴근할 생각이야.”
“무슨 소리야? 출퇴근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잖아.”
강혁은 진욱의 말에 적당한 대답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궁색한 변명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해도 저물었는데,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
“어쩐 일이야. 요사이 일에 푹 빠져 지내더니.”
“때로는 기분 전환도 필요한 법이지.”
그저 일에 빠져서 한동안 여자를 멀리한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그 이유가 아니고는 청평에서 출퇴근하려는 자신을 강혁은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