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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정의 시간 2화
캄캄한 방. 몸을 눕히면 가득 차는 방 안에 주저앉으며 은하는 휴지를 찾았다. 보육원 원장과 선생님들은 고3이 된 은하를 위해 독방을 내어 준 것이라며 후원자들에게 생색을 내곤 했지만, 실상은 은하를 가둔 감옥일 뿐이었다. 언제든 감시할 수 있고, 언제든 가둬 둘 수 있는.
“퉤.”
거칠게 휴지를 뜯은 은하가 휴지 안에 침을 뱉었다. 침과 섞인 피가 덩어리져 나왔다. 휴지를 대충 말아 방 한구석 쓰레기통에 던지곤 바닥에 누웠다. 하얀 먼지가 위로 떠오르다가 이내 그녀의 몸 위를 덮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던 은하의 눈이 점점 감겼다.
* * *
“그래도 선생님한테 말은 해 줬어야지.”
“죄송합니다.”
은하의 담임은 더 이상 말을 잃은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말하지 않는 담임을 보던 은하가 조소했다. 불행을 탓할 수 없으니 그도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은하는 죄지은 사람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가련해 보일 수 있게 눈을 아래로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가만히 보던 담임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다음엔 선생님한테 짧게라도 말해 줘. 선생님이 교과목 선생님들한테 잘 전할 테니까.”
“네.”
“그만 가 봐.”
은하가 허리를 숙이고 뒤로 돌아섰다.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무심코 걷던 그녀는 제 시야로 들어오는 하얀 실내화에 잠시 멈췄다.
“어, 인욱아.”
실내화의 주인을 알아챈 그 순간 누가 등을 민 것처럼 은하가 발을 뗐다.
“수학여행 참가 신청서요.”
“그래. 고마워…… 참, 은하야!”
은하가 비스듬히 돌아섰다.
“어제 그렇게 가는 바람에, 너도 신청서를 내야 하는데.”
“저는…… 그냥 자습이요.”
“안 갈 거니?”
은하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또다시 담임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그래. 그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2층 자습실로 가면 된다.”
“네.”
“그래, 가 봐. 인욱이도.”
“네.”
교무실 문을 먼저 열고 나가는 사람은 은하였다. 복도를 걷던 은하가 손을 들어 제 왼쪽 뺨을 감쌌다. 처음보다 더 선명해진 생채기에 조심히 손을 대던 그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다쳤어?”
은하가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어느새 옆에 나란히 선 인욱이 고개를 내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뺨에 웬 상처야?”
정확히는 그녀의 뺨을 보고 있었다.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응?”
불현듯 다가오는 낯선 손길에 은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왜 그래?”
다가온 손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그대로 멈춰 서 있던 은하가 잠시 멈췄던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야.”
“응?”
“너 정말 바보야?”
날이 선 목소리에도 인욱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며 은하는 짐짓 심각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전교 1등 인욱이 사실은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내가 왜?”
“나 너 싫어해.”
직설적인 말에 인욱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그래.”
“왜?”
은하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싫어한다는 말에 상처를 받기보단 호기심이 어린 그의 얼굴에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왜라니. 마음만 먹으면 그 질문에 백 가지 대답을 해 줄 수도 있었다.
“내가 왜 싫어?”
마치 날 싫어할 리 없다는 것처럼 들려 은하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은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그러나 걷는다고 해서 인욱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차피 둘이 향하는 목적지는 같았으니까.
“혹시, 그냥?”
멈춰선 은하는 한계에 다다른 표정이었다.
“다 널 좋아하니까.”
인욱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래서 싫어.”
은하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뾰족했다.
“됐어?”
얼이 빠진 인욱을 두고 은하가 빠르게 걸었다. 맞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건조했다.
* * *
“활동 2년 만에 얼굴 깐 기념은 어때?”
인욱이 소파에 다리를 뻗고 앉으며 손을 뻗었다.
“인터뷰 좀 해 주실래요, 작가님?”
“사진이나 줘.”
맞은편에 앉으며 투덜거리는 남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T일보의 문화부 기자이기도 한 지환이었다.
지환이 인욱의 손바닥 위에 인화된 사진 한 장을 내려놓았다.
“겨우 찍었다. 너 나오자마자 그냥 나가 버리던데? 나는 못 알아보는 눈치고.”
지환은 퍽 섭섭한 듯 말했다.
“그래도 2학기 땐 하루가 멀다 하고 너를 두고 싸웠는데, 거의 연적이었잖아.”
“징그러운 소리 정성껏 하지 마.”
지환이 카펫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빈정거렸다.
“네 성격이 이렇게 더러워진 걸 박은하가 알아야 하는데.”
“시끄러워.”
투덜대던 지환이 몸을 돌려 인욱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귀신 본 얼굴로 도망가는 걸 보니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들 것 같은데.”
인욱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사진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은하는 그대로였다. 어깨 아래로 똑 떨어졌던 머리가 가슴 아래를 배회할 정도로 길어진 것을 제외하곤. 자꾸만 돌아보게 만들던 눈빛과 계속 입을 맞추고 싶었던 분홍빛 입술. 잠깐 마주친 그 순간에도 몸을 강하게 끌어당기던 진한 눈길까지.
은하는 여전히 은하였다.
“은하는 나한테 안 올 거야.”
은하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던 밤을 기억하듯 인욱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은하는 나한테 안 와.”
스스로를 세뇌하듯 인욱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가 가야지. 가서 무릎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지.”
“그러면 박은하가 받아 줄 것 같아? 난 아니라고 본다.”
“그럼 붙잡아서 꽁꽁 묶을까? 아무 데도 못 가게.”
지환의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났다. 미친놈. 저를 향한 지환의 욕지거리에도 인욱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진 속 은하를 보는 인욱의 시선에 불씨가 피듯 욕망이 일었다.
“박은하.”
9년 전, 은하를 놓쳤던 것은 온전히 자신의 실수였다. 낯선 감정에 맞는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인욱이 은하의 사진을 쥔 채 이젤 앞에 섰다. 두꺼운 집게로 이젤에 사진을 꽂으며 잠시 그 위에 시선을 두었다.
“드디어 보고 그릴 수 있네.”
박은하.
지울 때마다 선명해지던 그 얼굴이 인욱의 앞에 멈췄다.
* * *
특출 난 것 없는 일반 고등학교였지만, 한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면 봄에 흐드러지게 피는 벚나무들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핀 벚나무 길은 등하교하던 학생들이 늘 발을 멈출 정도로 아름다워 저녁이면 외부인도 슬쩍 들어오곤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지 않아 금세 피어난 벚꽃들은 지루한 일상에 작은 활력이 되어 주는 존재였다. 벚꽃이 만개하면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등교해 벚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 사이에는 때때로 선생님들도 있었다.
“우리도 사진 한 장 찍을까?”
인욱은 지환의 제안을 픽 웃어넘겼다. 지환은 그의 어중간한 반응에 3학년이 되면서 받은 꽤 값비싼 카메라를 흔들었다.
“오늘 첫 개시야. 한 장 찍자.”
“됐어.”
“모델 해 준다 생각하고 한 번만 서 봐. 테스트로 찍어 보게.”
지환에게 잡힌 인욱이 막무가내로 끌려가 벚나무 아래 섰다. 지환은 그를 억지로 세워 두고 뒤로 몇 발 물러나 꽤 능숙한 자세로 카메라를 들었다.
“웃으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여기 보기라도 해라.”
인욱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다 꽂은 채로 심드렁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찍는다.”
하나, 둘, 셋. 수를 센 지환이 막 셔터를 누를 때였다. 찰칵하는 소리보다 아주 약간 빠르게, 누군가가 인욱과 지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어어!”
인욱은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간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삼삼오오 모여 벚꽃 아래서 사진을 찍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캄캄한 방. 몸을 눕히면 가득 차는 방 안에 주저앉으며 은하는 휴지를 찾았다. 보육원 원장과 선생님들은 고3이 된 은하를 위해 독방을 내어 준 것이라며 후원자들에게 생색을 내곤 했지만, 실상은 은하를 가둔 감옥일 뿐이었다. 언제든 감시할 수 있고, 언제든 가둬 둘 수 있는.
“퉤.”
거칠게 휴지를 뜯은 은하가 휴지 안에 침을 뱉었다. 침과 섞인 피가 덩어리져 나왔다. 휴지를 대충 말아 방 한구석 쓰레기통에 던지곤 바닥에 누웠다. 하얀 먼지가 위로 떠오르다가 이내 그녀의 몸 위를 덮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던 은하의 눈이 점점 감겼다.
“그래도 선생님한테 말은 해 줬어야지.”
“죄송합니다.”
은하의 담임은 더 이상 말을 잃은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말하지 않는 담임을 보던 은하가 조소했다. 불행을 탓할 수 없으니 그도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은하는 죄지은 사람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가련해 보일 수 있게 눈을 아래로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가만히 보던 담임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다음엔 선생님한테 짧게라도 말해 줘. 선생님이 교과목 선생님들한테 잘 전할 테니까.”
“네.”
“그만 가 봐.”
은하가 허리를 숙이고 뒤로 돌아섰다.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무심코 걷던 그녀는 제 시야로 들어오는 하얀 실내화에 잠시 멈췄다.
“어, 인욱아.”
실내화의 주인을 알아챈 그 순간 누가 등을 민 것처럼 은하가 발을 뗐다.
“수학여행 참가 신청서요.”
“그래. 고마워…… 참, 은하야!”
은하가 비스듬히 돌아섰다.
“어제 그렇게 가는 바람에, 너도 신청서를 내야 하는데.”
“저는…… 그냥 자습이요.”
“안 갈 거니?”
은하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또다시 담임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그래. 그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2층 자습실로 가면 된다.”
“네.”
“그래, 가 봐. 인욱이도.”
“네.”
교무실 문을 먼저 열고 나가는 사람은 은하였다. 복도를 걷던 은하가 손을 들어 제 왼쪽 뺨을 감쌌다. 처음보다 더 선명해진 생채기에 조심히 손을 대던 그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다쳤어?”
은하가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어느새 옆에 나란히 선 인욱이 고개를 내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뺨에 웬 상처야?”
정확히는 그녀의 뺨을 보고 있었다.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응?”
불현듯 다가오는 낯선 손길에 은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마치 순서가 있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왜 그래?”
다가온 손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그대로 멈춰 서 있던 은하가 잠시 멈췄던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야.”
“응?”
“너 정말 바보야?”
날이 선 목소리에도 인욱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며 은하는 짐짓 심각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전교 1등 인욱이 사실은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내가 왜?”
“나 너 싫어해.”
직설적인 말에 인욱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그래.”
“왜?”
은하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싫어한다는 말에 상처를 받기보단 호기심이 어린 그의 얼굴에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왜라니. 마음만 먹으면 그 질문에 백 가지 대답을 해 줄 수도 있었다.
“내가 왜 싫어?”
마치 날 싫어할 리 없다는 것처럼 들려 은하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은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그러나 걷는다고 해서 인욱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차피 둘이 향하는 목적지는 같았으니까.
“혹시, 그냥?”
멈춰선 은하는 한계에 다다른 표정이었다.
“다 널 좋아하니까.”
인욱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래서 싫어.”
은하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뾰족했다.
“됐어?”
얼이 빠진 인욱을 두고 은하가 빠르게 걸었다. 맞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건조했다.
“활동 2년 만에 얼굴 깐 기념은 어때?”
인욱이 소파에 다리를 뻗고 앉으며 손을 뻗었다.
“인터뷰 좀 해 주실래요, 작가님?”
“사진이나 줘.”
맞은편에 앉으며 투덜거리는 남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T일보의 문화부 기자이기도 한 지환이었다.
지환이 인욱의 손바닥 위에 인화된 사진 한 장을 내려놓았다.
“겨우 찍었다. 너 나오자마자 그냥 나가 버리던데? 나는 못 알아보는 눈치고.”
지환은 퍽 섭섭한 듯 말했다.
“그래도 2학기 땐 하루가 멀다 하고 너를 두고 싸웠는데, 거의 연적이었잖아.”
“징그러운 소리 정성껏 하지 마.”
지환이 카펫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빈정거렸다.
“네 성격이 이렇게 더러워진 걸 박은하가 알아야 하는데.”
“시끄러워.”
투덜대던 지환이 몸을 돌려 인욱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귀신 본 얼굴로 도망가는 걸 보니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들 것 같은데.”
인욱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사진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은하는 그대로였다. 어깨 아래로 똑 떨어졌던 머리가 가슴 아래를 배회할 정도로 길어진 것을 제외하곤. 자꾸만 돌아보게 만들던 눈빛과 계속 입을 맞추고 싶었던 분홍빛 입술. 잠깐 마주친 그 순간에도 몸을 강하게 끌어당기던 진한 눈길까지.
은하는 여전히 은하였다.
“은하는 나한테 안 올 거야.”
은하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던 밤을 기억하듯 인욱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은하는 나한테 안 와.”
스스로를 세뇌하듯 인욱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가 가야지. 가서 무릎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지.”
“그러면 박은하가 받아 줄 것 같아? 난 아니라고 본다.”
“그럼 붙잡아서 꽁꽁 묶을까? 아무 데도 못 가게.”
지환의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났다. 미친놈. 저를 향한 지환의 욕지거리에도 인욱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진 속 은하를 보는 인욱의 시선에 불씨가 피듯 욕망이 일었다.
“박은하.”
9년 전, 은하를 놓쳤던 것은 온전히 자신의 실수였다. 낯선 감정에 맞는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인욱이 은하의 사진을 쥔 채 이젤 앞에 섰다. 두꺼운 집게로 이젤에 사진을 꽂으며 잠시 그 위에 시선을 두었다.
“드디어 보고 그릴 수 있네.”
박은하.
지울 때마다 선명해지던 그 얼굴이 인욱의 앞에 멈췄다.
특출 난 것 없는 일반 고등학교였지만, 한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면 봄에 흐드러지게 피는 벚나무들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핀 벚나무 길은 등하교하던 학생들이 늘 발을 멈출 정도로 아름다워 저녁이면 외부인도 슬쩍 들어오곤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지 않아 금세 피어난 벚꽃들은 지루한 일상에 작은 활력이 되어 주는 존재였다. 벚꽃이 만개하면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등교해 벚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 사이에는 때때로 선생님들도 있었다.
“우리도 사진 한 장 찍을까?”
인욱은 지환의 제안을 픽 웃어넘겼다. 지환은 그의 어중간한 반응에 3학년이 되면서 받은 꽤 값비싼 카메라를 흔들었다.
“오늘 첫 개시야. 한 장 찍자.”
“됐어.”
“모델 해 준다 생각하고 한 번만 서 봐. 테스트로 찍어 보게.”
지환에게 잡힌 인욱이 막무가내로 끌려가 벚나무 아래 섰다. 지환은 그를 억지로 세워 두고 뒤로 몇 발 물러나 꽤 능숙한 자세로 카메라를 들었다.
“웃으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여기 보기라도 해라.”
인욱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다 꽂은 채로 심드렁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찍는다.”
하나, 둘, 셋. 수를 센 지환이 막 셔터를 누를 때였다. 찰칵하는 소리보다 아주 약간 빠르게, 누군가가 인욱과 지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어어!”
인욱은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간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삼삼오오 모여 벚꽃 아래서 사진을 찍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가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