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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교수와 M공작의 비밀
1화
1. 시작은 사소했다
“교수님! 교수님!”
“어…….”
오늘은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한창 글이 잘 써지던 참이라 조교의 부름에 흐름이 끊긴 벨라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코끝으로 내려온 안경을 두 번째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벨라가 조교인 안나를 바라봤다.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안나가 제멋대로 들어온 것인지 안나는 이미 교수실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안나는 종종 노크를 잊어버리고 벨라의 방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전적이 있기에 한마디 해 주려 했으나 안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아카데미 최연소 문학 교수.
한 번 받기도 힘들다는 황금 문학상을 세 번이나 받은 벨라였다. 나름 유명인인 벨라는 약속된 이가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하는 일이 매일 앉아서 타자기를 두드리는 일이다 보니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만의 대처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약속 없이 올 수 있는 이들은 서너 명이 다였다. 그들도 벨라가 집필 중이라고 한다면 돌아가거나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혹은 조교인 안나를 들여보내기보다 제가 들어왔을 것이다.
“약속이 있었나?”
벨라가 기지개를 켜며 조교를 향해 물었다. 회색 스웨터와 검은 뿔테 안경. 제멋대로 뻗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벨라가 물었다.
“아니요. 없었는데…… 그게…….”
닫힌 문을 흘깃거리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총장이라도 왔나 싶었지만, 총장이라고 해도 조교가 이렇게까지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데 그래?”
팔을 뒤로 젖힌 채 배꼽이 드러날 때까지 몸을 쭉 늘리던 벨라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교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난 듯했다. 안나에 대한 타박을 나중으로 미루고 눈을 흘겼으나 눈치 따위 없는 안나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결국 벨라는 불편한 심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문가로 다가갔다.
탁.
조교인 안나를 뒤로하고 벨라가 문을 열었다.
“어…….”
역광이라 문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눈을 깜빡였으나 그렇다고 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언뜻 보기에도 키가 커다랗고 몸이 좋은 남자였다. 그때였다.
“벨라 스완 교수님이십니까?”
‘뭐야? 여기 동굴인가?’
무심코 열었던 문을 닫고 싶었지만 벨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깜빡거렸다. 벨라가 한 발 물러나고 남자가 한 발 다가섰다. 그제야 남자의 모습이 벨라의 망막에 비쳐졌다.
“누구시죠?”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결단코 벨라의 기억에 이런 남자는 없었다. 소설을 쓰면서 쓰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남자는 조각상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언젠가 박물관에서 봤던 미의 신이 눈앞에 있었다. 벨라의 시선으로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와 저 작은 얼굴에 어떻게 다 들어갔을까 싶은 커다란 눈과 높은 코 무얼 발랐는지 묻고 싶은 붉은 입술까지. 검은 활자로만 보던 남자 주인공을 현실에서 만난 느낌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정중하게 다시 한번 벨라를 향해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딱 떨어진 정장 차림의 남자는 향기까지 완벽했다.
“부모님이 인류를 위해 큰일을 하셨군요.”
“예?”
남자가 벨라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타베르나에서 물건을 살 때처럼 혹은 박물관에서 벌거벗은 조각상을 봤을 때처럼 벨라가 유심히 남자를 바라봤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사이 남자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큰 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벨라를 내려다보게 된 남자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약속이 되지 않은 손님이지만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그래 저런 존재는 그저 태어나 줘서 감사한 거다. 오랜만의 눈호강에 벨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책상은 온갖 서류와 자료들로 지저분했지만, 가끔 손님이 드나드는 탁자와 소파는 깔끔하고 깨끗했다. 벨라의 집과 별다를 바 없이 사방이 책장으로 꽉 차 있고 책상을 등진 커다란 유리창이 다인 평범한 교수실이었다.
“안나. 나가 봐도 좋아요.”
그때까지 벨라의 뒤에서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던 안나가 정신이 들었는지 움찔했다.
“차를 준비할까요?”
난데없는 안나의 말에 벨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안나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일을 못하기로 소문난 이였다. 계약이 이번 학기까지라 벨라도 별말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손님이 오거나 해도 이렇게 직접 안내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벨라는 뻔히 보이는 안나의 속셈이 안타까웠다. 어떻게 잘나가는 후원자를 하나 물고 싶은 모양인데……. 벨라는 안나의 장단에 맞춰 놀아 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벨라가 있는 교수실과 과사무실은 거리가 꽤 되었다. 차를 준비한다면 나가지 않고 교수실에서 뭉개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차는 괜찮습니다.”
남자는 정중하게 안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손님이신데.”
남자의 거절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안나였다.
“괜찮으니 가 봐도 좋아요.”
벨라가 얼른 말했다.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안나가 느릿하게 교수실을 나섰다.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은 벨라가 한 손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권했다.
“앉으세요.”
벨라는 소파에 앉은 남자를 흘깃거리며 아침에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준비하기 위해 한쪽에 마련해 놓은 탕비실로 향했다. 차를 사양하던 남자는 벨라가 커피를 담아 소파에 올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힐다가 준비해 놓은 손님용 찻잔을 꺼내 커피를 담고 쿠키 상자를 열었던 벨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제 마지막 남아 있는 쿠키를 모두 먹어 버린 게 생각났다. 벨라는 커피만 달랑 들고 남자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벨라가 가져온 커피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맞은편에 앉은 벨라를 내려다봤다. 두 사람 다 앉아 있음에도 참으로 키가 큰 남자였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내민 커피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벨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는 멀뚱히 저를 바라볼 뿐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체 저 잘생겼지만, 기억에 없는 남자가 저를 찾아온 이유가 더 궁금해지는 벨라였다. 벨라가 말이 없자 남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번 ‘편지’ 프로젝트의 기획자라고 들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진중한 목소리였다.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지만, 남자의 표정을 본 벨라는 곧 고개를 저었다. 편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임자가 있는 사람이었다. 벨라는 표정을 가다듬고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만.”
눈앞의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며 벨라가 다시 제 기억을 뒤졌다. 벨라 자신도 제국에서 꽤 유명 인사였다. 황제 폐하를 직접 알현하기도 했고, 제국의 17번째 황녀와 함께 ‘달파란’이라는 예술인의 후원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의 남자는 기억에 없었다.
“클라우디 아카데미의 편지는 모두 교수님이 관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모두는 아닙니다. 클라우디 아카데미가 소수 지향이라고는 하나 전 학년을 모두 제가 관리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제가 최종 책임자이기는 합니다.”
벨라가 조용히 대답했다. 남자의 질문에 벨라의 머릿속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오늘 처음 본 것이 맞았다. 아마도 벨라가 기획한 편지 프로젝트 때문에 저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편지가 잘못 배달되어 귀족 영애가 어디 마구간 지기랑 눈이라도 맞았나 싶어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러지 않아도 제국의 황녀가 수도 귀족이 아니라 지방의 어디 이름 모를 귀족과 약혼식을 해 나라가 떠들썩했다. 물론 그 지방 귀족이 엄청난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지고 있는 남작가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이해를 통해 합의된 결과였고 본인들도 만족했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황녀의 신분을 뛰어넘는 로맨스라며 다들 열광했지만 말이다.
한데 이 남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디 귀족가의 영식이라면 한 번쯤 이야기를 들었을 만한 인물이었다. 저런 얼굴이 여자들의 수다에서 빠질 리 없기 때문이었다.
벨라는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린 뒤 남자를 살폈다. 어디 귀족 영애의 오라버니라든지…… 아니면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끊기기라도 했나?
하지만 아직 제국은 전쟁 중이었다. 끝물이라고는 하지만 전쟁터에 있어야 할 기사가 수도에 올라올 수는 없을 터였다. 아마도…… 벨라 또한 자기 생각에 자신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벨라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말씀드리는 것보다 보시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겠네요.”
남자는 안쪽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핑크색의 봉투를 꺼냈다. 많은 편지가 대량으로 전쟁터로 보내졌다. 황궁에서 보급한 편지와 봉투는 고급이었지만, 편지가 대량으로 보내져 답장을 받았을 때는 구김이 있거나 귀퉁이가 찢어진 편지들이 많았다. 한데 남자가 내민 편지는 다리미질이라도 한 듯 빳빳하게 새것처럼 보였다. 편지 봉투를 자세히 살펴보던 벨라는 저도 모르게 머금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풋!”
“괜찮으십니까?”
“네, 네.”
옆에 있는 티슈를 필요 이상으로 뽑아 입을 가리며 벨라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입만 대고 있을 것을 괜히 한 모금 넘긴 것이 문제였다.
“크크 읍……. 큽.”
벨라가 기침을 할 동안 남자는 커다란 손을 들어 부드럽게 벨라의 등을 토닥였다. 등에 닿은 남자의 손이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닿았다 떨어졌다. 사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의조차 완벽한 남자였다. 처음에 봤던 딱딱한 인상과는 상반된 움직임이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겨우 진정한 벨라가 남자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남자가 어느새 떠 온 물을 벨라에게 내밀었다. 제집처럼 편안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행동에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제 상황에 벨라는 짜증이 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왜 저 남자가 저것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벨라는 남자가 꺼내 놓은 편지 봉투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실 남자가 꺼내 놓은 핑크색의 편지 봉투는 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 편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공통으로 사용한 편지지와 봉투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핑크 편지 봉투에 쓰인 M이라는 글자였다. 분명 저것은 제가 쓴 글자였다. 달리기를 막 끝낸 사람처럼 벨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가 그…….’
“앉으세요.”
벨라의 기침에 주변을 서성이던 남자가 자리에 앉았다. 자세히 벨라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참으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벨라는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는 편지 봉투에 튄 몇 방울의 물방울 자국을 벨라가 보는 앞에서 마법으로 없앴다.
“헉.”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놀람에 벨라가 숨을 들이켰다.
“제겐 소중한 것이라서요.”
“예에…….”
‘소중한 것…….’
남자의 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요. 알고 찾아오셨겠지만, 벨라 스완입니다.”
생각해 보니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의 얼굴에 홀려 누구인지조차 묻지 않았다. 참으로 훌륭한 무기를 가진 남자였다. 저에 대한 소개 없이 용건만 던져 놓은 남자를 생각하니 절로 눈이 뾰족해지는 벨라였다. 예의 있다고 한 것 다 취소.
평점에서 별 한 개를 뺀 벨라가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남자를 바라봤다. 두 개? 아니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벨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안 밀러입니다.”
숙여 있던 벨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남자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 밀러? 벨라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미, 밀러요?”
이 자리에 있다면 누구라도 벨라처럼 목소리가 떨릴 것이다. 아니 벨라 정도 되니 말이라도 나오는 것이었다. 밀러라는 성도 대단한데 하물며 이안이란다.
그가 누구냐.
밀러가는 제국의 5대 공작 가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안은 그 밀러가의 현 공작이었다. 배 나오고 나이 들고 머리 벗겨진 다른 공작들과는 달리 멋지고 잘생기고 돈 많고 게다가 미혼이기까지 한. 전쟁터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어야 하는 이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가 수도에 입성했다면 귀부인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을 것이고 달파란의 고위 귀부인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힐다가 알면 기절하겠군.’
잠시 멍청하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 벨라가 남자의 손에 소중하게 들려 있는 핑크색 편지 봉투를 바라봤다.
‘그래,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
기괴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벨라 자신도 표정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사람을 만나고 상대하는 것에 취약한 벨라였고 중요한 일은 거의 친구인 힐다나 끌로에가 도맡아 해 주고 있었다. 생각처럼 생각을 감추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밀러 공작님…….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저를…… 찾아오셨나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겨우 끝까지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내뱉었다. 제가 듣기에도 남자의 정체를 몰랐을 때와 지금의 목소리가 판이하였다. 안나를 내보낸 일이 백번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이 편지의 주인공을 찾고 싶습니다.”
답지 않게 소중한 것이라도 되듯 편지 봉투를 가슴에 품는 이안을 보며 벨라가 눈을 감았다.
1화
1. 시작은 사소했다
“교수님! 교수님!”
“어…….”
오늘은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한창 글이 잘 써지던 참이라 조교의 부름에 흐름이 끊긴 벨라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코끝으로 내려온 안경을 두 번째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벨라가 조교인 안나를 바라봤다.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안나가 제멋대로 들어온 것인지 안나는 이미 교수실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안나는 종종 노크를 잊어버리고 벨라의 방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전적이 있기에 한마디 해 주려 했으나 안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아카데미 최연소 문학 교수.
한 번 받기도 힘들다는 황금 문학상을 세 번이나 받은 벨라였다. 나름 유명인인 벨라는 약속된 이가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하는 일이 매일 앉아서 타자기를 두드리는 일이다 보니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만의 대처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약속 없이 올 수 있는 이들은 서너 명이 다였다. 그들도 벨라가 집필 중이라고 한다면 돌아가거나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혹은 조교인 안나를 들여보내기보다 제가 들어왔을 것이다.
“약속이 있었나?”
벨라가 기지개를 켜며 조교를 향해 물었다. 회색 스웨터와 검은 뿔테 안경. 제멋대로 뻗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벨라가 물었다.
“아니요. 없었는데…… 그게…….”
닫힌 문을 흘깃거리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총장이라도 왔나 싶었지만, 총장이라고 해도 조교가 이렇게까지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누군데 그래?”
팔을 뒤로 젖힌 채 배꼽이 드러날 때까지 몸을 쭉 늘리던 벨라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교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난 듯했다. 안나에 대한 타박을 나중으로 미루고 눈을 흘겼으나 눈치 따위 없는 안나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결국 벨라는 불편한 심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문가로 다가갔다.
탁.
조교인 안나를 뒤로하고 벨라가 문을 열었다.
“어…….”
역광이라 문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눈을 깜빡였으나 그렇다고 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언뜻 보기에도 키가 커다랗고 몸이 좋은 남자였다. 그때였다.
“벨라 스완 교수님이십니까?”
‘뭐야? 여기 동굴인가?’
무심코 열었던 문을 닫고 싶었지만 벨라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깜빡거렸다. 벨라가 한 발 물러나고 남자가 한 발 다가섰다. 그제야 남자의 모습이 벨라의 망막에 비쳐졌다.
“누구시죠?”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결단코 벨라의 기억에 이런 남자는 없었다. 소설을 쓰면서 쓰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남자는 조각상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언젠가 박물관에서 봤던 미의 신이 눈앞에 있었다. 벨라의 시선으로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와 저 작은 얼굴에 어떻게 다 들어갔을까 싶은 커다란 눈과 높은 코 무얼 발랐는지 묻고 싶은 붉은 입술까지. 검은 활자로만 보던 남자 주인공을 현실에서 만난 느낌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정중하게 다시 한번 벨라를 향해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딱 떨어진 정장 차림의 남자는 향기까지 완벽했다.
“부모님이 인류를 위해 큰일을 하셨군요.”
“예?”
남자가 벨라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타베르나에서 물건을 살 때처럼 혹은 박물관에서 벌거벗은 조각상을 봤을 때처럼 벨라가 유심히 남자를 바라봤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사이 남자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큰 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벨라를 내려다보게 된 남자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약속이 되지 않은 손님이지만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그래 저런 존재는 그저 태어나 줘서 감사한 거다. 오랜만의 눈호강에 벨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책상은 온갖 서류와 자료들로 지저분했지만, 가끔 손님이 드나드는 탁자와 소파는 깔끔하고 깨끗했다. 벨라의 집과 별다를 바 없이 사방이 책장으로 꽉 차 있고 책상을 등진 커다란 유리창이 다인 평범한 교수실이었다.
“안나. 나가 봐도 좋아요.”
그때까지 벨라의 뒤에서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던 안나가 정신이 들었는지 움찔했다.
“차를 준비할까요?”
난데없는 안나의 말에 벨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안나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일을 못하기로 소문난 이였다. 계약이 이번 학기까지라 벨라도 별말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손님이 오거나 해도 이렇게 직접 안내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벨라는 뻔히 보이는 안나의 속셈이 안타까웠다. 어떻게 잘나가는 후원자를 하나 물고 싶은 모양인데……. 벨라는 안나의 장단에 맞춰 놀아 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벨라가 있는 교수실과 과사무실은 거리가 꽤 되었다. 차를 준비한다면 나가지 않고 교수실에서 뭉개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차는 괜찮습니다.”
남자는 정중하게 안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손님이신데.”
남자의 거절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안나였다.
“괜찮으니 가 봐도 좋아요.”
벨라가 얼른 말했다.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안나가 느릿하게 교수실을 나섰다.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은 벨라가 한 손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권했다.
“앉으세요.”
벨라는 소파에 앉은 남자를 흘깃거리며 아침에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준비하기 위해 한쪽에 마련해 놓은 탕비실로 향했다. 차를 사양하던 남자는 벨라가 커피를 담아 소파에 올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힐다가 준비해 놓은 손님용 찻잔을 꺼내 커피를 담고 쿠키 상자를 열었던 벨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제 마지막 남아 있는 쿠키를 모두 먹어 버린 게 생각났다. 벨라는 커피만 달랑 들고 남자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벨라가 가져온 커피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맞은편에 앉은 벨라를 내려다봤다. 두 사람 다 앉아 있음에도 참으로 키가 큰 남자였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내민 커피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벨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는 멀뚱히 저를 바라볼 뿐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체 저 잘생겼지만, 기억에 없는 남자가 저를 찾아온 이유가 더 궁금해지는 벨라였다. 벨라가 말이 없자 남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번 ‘편지’ 프로젝트의 기획자라고 들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진중한 목소리였다.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지만, 남자의 표정을 본 벨라는 곧 고개를 저었다. 편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임자가 있는 사람이었다. 벨라는 표정을 가다듬고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만.”
눈앞의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며 벨라가 다시 제 기억을 뒤졌다. 벨라 자신도 제국에서 꽤 유명 인사였다. 황제 폐하를 직접 알현하기도 했고, 제국의 17번째 황녀와 함께 ‘달파란’이라는 예술인의 후원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의 남자는 기억에 없었다.
“클라우디 아카데미의 편지는 모두 교수님이 관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모두는 아닙니다. 클라우디 아카데미가 소수 지향이라고는 하나 전 학년을 모두 제가 관리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제가 최종 책임자이기는 합니다.”
벨라가 조용히 대답했다. 남자의 질문에 벨라의 머릿속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오늘 처음 본 것이 맞았다. 아마도 벨라가 기획한 편지 프로젝트 때문에 저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편지가 잘못 배달되어 귀족 영애가 어디 마구간 지기랑 눈이라도 맞았나 싶어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러지 않아도 제국의 황녀가 수도 귀족이 아니라 지방의 어디 이름 모를 귀족과 약혼식을 해 나라가 떠들썩했다. 물론 그 지방 귀족이 엄청난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지고 있는 남작가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이해를 통해 합의된 결과였고 본인들도 만족했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황녀의 신분을 뛰어넘는 로맨스라며 다들 열광했지만 말이다.
한데 이 남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디 귀족가의 영식이라면 한 번쯤 이야기를 들었을 만한 인물이었다. 저런 얼굴이 여자들의 수다에서 빠질 리 없기 때문이었다.
벨라는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린 뒤 남자를 살폈다. 어디 귀족 영애의 오라버니라든지…… 아니면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끊기기라도 했나?
하지만 아직 제국은 전쟁 중이었다. 끝물이라고는 하지만 전쟁터에 있어야 할 기사가 수도에 올라올 수는 없을 터였다. 아마도…… 벨라 또한 자기 생각에 자신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벨라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말씀드리는 것보다 보시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겠네요.”
남자는 안쪽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핑크색의 봉투를 꺼냈다. 많은 편지가 대량으로 전쟁터로 보내졌다. 황궁에서 보급한 편지와 봉투는 고급이었지만, 편지가 대량으로 보내져 답장을 받았을 때는 구김이 있거나 귀퉁이가 찢어진 편지들이 많았다. 한데 남자가 내민 편지는 다리미질이라도 한 듯 빳빳하게 새것처럼 보였다. 편지 봉투를 자세히 살펴보던 벨라는 저도 모르게 머금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풋!”
“괜찮으십니까?”
“네, 네.”
옆에 있는 티슈를 필요 이상으로 뽑아 입을 가리며 벨라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입만 대고 있을 것을 괜히 한 모금 넘긴 것이 문제였다.
“크크 읍……. 큽.”
벨라가 기침을 할 동안 남자는 커다란 손을 들어 부드럽게 벨라의 등을 토닥였다. 등에 닿은 남자의 손이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닿았다 떨어졌다. 사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의조차 완벽한 남자였다. 처음에 봤던 딱딱한 인상과는 상반된 움직임이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겨우 진정한 벨라가 남자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남자가 어느새 떠 온 물을 벨라에게 내밀었다. 제집처럼 편안하게 움직이는 남자의 행동에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제 상황에 벨라는 짜증이 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왜 저 남자가 저것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벨라는 남자가 꺼내 놓은 편지 봉투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실 남자가 꺼내 놓은 핑크색의 편지 봉투는 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 편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공통으로 사용한 편지지와 봉투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핑크 편지 봉투에 쓰인 M이라는 글자였다. 분명 저것은 제가 쓴 글자였다. 달리기를 막 끝낸 사람처럼 벨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가 그…….’
“앉으세요.”
벨라의 기침에 주변을 서성이던 남자가 자리에 앉았다. 자세히 벨라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참으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벨라는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는 편지 봉투에 튄 몇 방울의 물방울 자국을 벨라가 보는 앞에서 마법으로 없앴다.
“헉.”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놀람에 벨라가 숨을 들이켰다.
“제겐 소중한 것이라서요.”
“예에…….”
‘소중한 것…….’
남자의 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요. 알고 찾아오셨겠지만, 벨라 스완입니다.”
생각해 보니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의 얼굴에 홀려 누구인지조차 묻지 않았다. 참으로 훌륭한 무기를 가진 남자였다. 저에 대한 소개 없이 용건만 던져 놓은 남자를 생각하니 절로 눈이 뾰족해지는 벨라였다. 예의 있다고 한 것 다 취소.
평점에서 별 한 개를 뺀 벨라가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남자를 바라봤다. 두 개? 아니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벨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안 밀러입니다.”
숙여 있던 벨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남자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 밀러? 벨라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미, 밀러요?”
이 자리에 있다면 누구라도 벨라처럼 목소리가 떨릴 것이다. 아니 벨라 정도 되니 말이라도 나오는 것이었다. 밀러라는 성도 대단한데 하물며 이안이란다.
그가 누구냐.
밀러가는 제국의 5대 공작 가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안은 그 밀러가의 현 공작이었다. 배 나오고 나이 들고 머리 벗겨진 다른 공작들과는 달리 멋지고 잘생기고 돈 많고 게다가 미혼이기까지 한. 전쟁터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어야 하는 이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가 수도에 입성했다면 귀부인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을 것이고 달파란의 고위 귀부인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힐다가 알면 기절하겠군.’
잠시 멍청하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 벨라가 남자의 손에 소중하게 들려 있는 핑크색 편지 봉투를 바라봤다.
‘그래,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
기괴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벨라 자신도 표정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사람을 만나고 상대하는 것에 취약한 벨라였고 중요한 일은 거의 친구인 힐다나 끌로에가 도맡아 해 주고 있었다. 생각처럼 생각을 감추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밀러 공작님…….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저를…… 찾아오셨나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겨우 끝까지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내뱉었다. 제가 듣기에도 남자의 정체를 몰랐을 때와 지금의 목소리가 판이하였다. 안나를 내보낸 일이 백번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이 편지의 주인공을 찾고 싶습니다.”
답지 않게 소중한 것이라도 되듯 편지 봉투를 가슴에 품는 이안을 보며 벨라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