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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래 이안은 S를 찾으러 온 것이지 벨라 스완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변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그저 이름 대신 S라는 단어를 지칭했을 뿐이다.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벨라는 오랫동안 잠을 설치게 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걱정하지 마. 벨라.”
고양이같이 앙칼진 얼굴의 끌로에가 애교스럽게 소파에 앉아 있는 벨라를 끌어안았다. 힐다도 벨라의 어깨를 두어 번 쳤다.
벨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M의 취향이 S라는 것을…….
***
“안녕하세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커다란 키와 고급 옷감에 감춰진 탄탄한 몸.
땅딸막한 키와 통통한 몸매의 라티오 총장 옆에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벨라는 저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짚었다. 사라졌던 두통이 한꺼번에 밀려와 찌릿한 통증을 선사했다.
‘맙소사!’
“기사 학부에서 강의를 맡아 줄 이안 밀러 교수님이요. 마침 스완 교수님의 옆방을 교수실로 쓰게 되었으니 스완 교수가 밀러 교수님을 잘 좀 도와주세요.”
코끝에 걸친 작은 안경을 추어올리며 라티오 총장이 말했다. 이안 교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고 전쟁터로 끌려갔던 어린 기사들도 수도로 돌아왔다. 학업 중에 전쟁에 뛰어든 기사들이 하나둘 아카데미로 돌아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연애편지로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얼굴을 보며 사랑을 확인할 장으로 아카데미가 제격이라는 황제와 벨라의 주장에 기사들의 빠른 아카데미 복귀가 확정되었다.
얼마 전 라티오 교수가 배를 내밀며 깜짝 놀랄 만한 교수가 아카데미로 부임한다고 하더니……. 그가 이안 밀러였나 보다.
“안, 안녕하세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벨라가 이안이 내민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게 대체 뭔 인사법인가?
허리를 숙이는 벨라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설마 편지의 주인공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니겠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안이 부드럽게 잡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날 그 싹수없게 나간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의심될 정도로 예의 바른 인사였다. 혹여 자신이 이안 밀러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제 머리를 의심하고 있는 벨라였다.
“네…….”
잘난 남자와 잡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벨라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오랫동안 검을 잡은 손은 단단하고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그리고…….
‘남자와 손을 잡은 게 얼마 만이었더라.’
도무지 현실 남자와 종이 남자와의 괴리감에서 헤어나 올 수 없었던 벨라에게 연애는 판타지였다. 한데 판타지가, 남자 주인공이 현실이 되어 제 손을 잡고 있었다. 입만 좀 다물고 있어 주고 엉덩이만 흔들지 않는다면 완벽한 남자였다.
이안과 악수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얼굴을 붉히던 벨라는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아쉽다…….”
“네?”
또다시 터져 나온 벨라의 혼잣말에 이안이 되물었다.
“신경 쓰지 마시게. 스완 교수는 혼자 중얼거리는 게 특기인 사람일세……. 새벽녘 혼자 교정을 거닐며 중얼거리는 스완 교수를 보더라도 놀라지 마시게.”
라티오 총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마치 누가 옆에 있는 것처럼 혼잣말하는 벨라를 두고 한때 아카데미의 교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다. 교정을 거닐며 혼자 중얼거리는 젊은 여자. 아침이라 미처 다 말리지 않고 풀어 놓은 젖은 머리와 아이보리색 원피스는 교정에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돌게 했었다.
라티오 총장의 말에 벨라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한때 아카데미를 강타한 소문의 주인공이 저라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몸이 꼬였다.
“같이 얼굴도 익힐 겸 식사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라티오 총장이 우렁차게 말했다. 처음 이안 밀러 공작이 아카데미의 기사 학부의 수업을 맡겠다고 했을 때 라티오 총장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고라는 자부심답게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최고였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이름을 떨치거나 유명한 학자가 있으면 차별하지 않고 고용한 덕분에 유학생들도 많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 최고의 검사로 일컬어지는 밀러 공작이 최고 학부를 맡아 주겠다니……. 그와 검이라도 한 번 맞대려고 하는 이름난 검사들이 셀 수도 없는데…….
라티오 총장은 두말없이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안 밀러 교수라니 클라우디 아카데미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고의 홍보수단! 걸어 다니는 광고가 굴러들어 오는 것이었다.
“가세.”
라티오 총장이 기세 좋게 두 천재 교수를 양쪽에 대동하고 복도를 거닐었다. 한쪽은 인문학부 최고의 교수 벨라 스완. 한쪽은 제국 최고의 기사이자 부자 공작인 이안 밀러 교수였다. 오늘따라 라티오 총장의 배가 더 나와 보이는 것은 착각이겠지.
벨라는 영혼 없이 끌려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날 이후 이안에게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힐다 또한 밀러가에서 어떤 수상한 움직임도 없다고 전해 주었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인데…….
갑작스럽게 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과부하가 걸린 탓인지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기다란 복도를 끌려가면서 벨라는 라티오 총장 머리 위로 훌쩍 튀어 올라온 이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빌어먹게 빛나고 있었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안 밀러는 제국 최고의 유명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 주인공이 벨라의 옆방을 차지하다니.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라면 저절로 굴러 들어온 호박에 탭댄스라도 추었을 테지만 현실은 아니올시다였다. 게다가 벨라는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안 밀러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고 소수의 사랑도 지향하는 편이었지만, 취향 찾아 삼만 리를 떠나는 공작 앞에 나타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이시여.’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벨라의 눈 위로 손이 왔다 갔다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잠을 잘 못 자서…….”
벨라의 말에 이안이 흔들어 대던 손을 내렸다. 라티오 총장은 두 사람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밥줄을 쥐고 있는 것은 라티오 총장이었다. 지금까지 벨라가 낸 책이며 받은 상을 따지자면 이깟 교수 자리 굳이 시간을 내 머리 아프게 강의할 필요는 없었지만, 다른 아카데미도 아니고 제가 졸업한 클라우디 아카데미였다. 책날개 앞에 쓰인 ‘클라우디 아카데미 교수’라는 타이틀이 책 판매에 얼마간의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후…….”
벨라는 한숨을 내쉰 후 라티오 총장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엉겁결에 점심을 같이하기로 했지만, 오늘 이후로 철저하게 피해 다니면 되는 거였다. 정 안 되면 집필을 핑계로 칩거에 들어가도 문제없었다. 이미 종신 교수직을 받았으니 몇 년 쉰다고 해도 아카데미 측은 이해해 줄 것이다.
“모르겠다…….”
“예?”
‘아! 이놈의 혼잣말.’
“아니에요.”
급하게 고개를 젓고는 총장의 뒤를 따랐다. 도무지 친절한 밀러가 적응되지 않는 벨라였다. 그렇게 저를 박대하고 매몰차게 돌아서던 이안 밀러와 지금 앞에 있는 인물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벨라는 부지런히 걸어 라티오 총장 옆에 섰다. 지금 상황에서 이안 밀러를 피할 방법은 라티오 총장을 방패막이 삼는 것뿐이었다.
“총장님이 사시는 거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점심값이라도 아끼자는 심산으로 벨라가 라티오 총장에게 물었다. 기분이 정말 좋은지 라티오 총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의 카페테리아 중에서도 ‘쿨름’의 질은 밖의 고급 식당만큼이나 좋았다. 그리고 비쌌다.
“어머! 총장님, 어서 오세요.”
쿨름의 관리인이 라티오 총장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을 잡고 대기하고 있던 중년의 여인을 보고 벨라가 실소했다. 돈은 넘치도록 많았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벨라에게 쿨름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다만 주인이라는 저 여자가 낯설었다. 쿨름은 외부의 식당과 연계하여 만든 곳이었고 유명 인사가 자주 드나드는 아카데미인 만큼 고급 식당을 지향했다. 하지만, 벨라가 드나들던 몇 년 동안 주인 여자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벨라가 보기엔 그녀의 목적은 라티오 총장이 아니라 이안 밀러였다. 라티오 총장이 매일 쿨름에서 식사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체 소문이 어디까지 난 거야?”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밖으로 삐져나왔지만, 이안은 벨라의 혼잣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가장 좋은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은 라티오 총장의 뒤를 쫓아가는 벨라의 뒷모습을 이안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쪽입니다. 공작님.”
여주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안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그 호칭은 별로 적절치 않은 것 같군요. 마담.”
차가운 이안의 말에 주인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주인은 젊은 여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농염함을 무기로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수도에서도 소문난 미인이었다. 미망인인 쎄씨는 부들거리는 입술을 겨우 끌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흠.”
이안은 말없이 그녀를 흘깃 바라보고 라티오 총장과 메뉴판을 두고 속닥거리는 벨라에게 향했다.
“나는 A 코스로.”
메뉴판을 보던 라티오 총장이 옆에서 주문을 받으려 대기하고 있는 종업원을 향해 말했다. 이안은 주문을 하는 라티오 총장을 바라보며 벨라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스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자 흠칫 놀란 그녀가 새초롬히 그를 바라봤다. 이안은 싱긋 웃어 보였다.
“밀러 교수님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소.”
총장의 목소리가 떨린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겠지.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안을 바라보는, 라티오 총장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모습은 테아트룸에서 공연 중인 오페라 주인공을 앞에 두고 있는 소년 같았다.
벨라는 메뉴판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내쉬었다. 총장의 식사 초대를 거절할 수 없어서 냉큼 따라오기는 했는데 이안 밀러와 함께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목이 컥컥 막혀 왔다. 과연 삼킬 수나 있을까?
‘교수실에 소화제가 있었나?’
“숙녀부터…….”
이안의 말에 라티오 총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족의 예의가 배어 있는 이안의 모습에 평민 출신의 라티오 총장이 손수건을 꺼냈다. 귀족……. 그들이 말하는 푸른 피의 기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으며 살아온 그들에게는 당연하지만, 개천에서 난 용들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움.
그래서 귀족들은 평민이 커다란 업적을 인정받아 황제에게 작위를 받아도 이런 식의 트집을 잡으며 그들을 깔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른 벨라가 웃으며 말했다.
“에? 아! 저는 총장님과 같은 것으로요. 우리 총장님이 미식가시거든요.”
“그런가요? 그럼 저도 총장님과 같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벨라의 말에 이안도 메뉴판을 접어 종업원에게 건넸다. 친한 이들이었다면, 서로 다른 음식을 시켜 나눠 먹었겠지만, 이안 밀러의 음식에 제 포크를 들이대는 상상을 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론 좋아서였다.
‘엄마를 닮았나 아빠를 닮았나?’
혼자 배시시 웃는 벨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총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안의 입장에선 참으로 이상한 여자였다. 혼자 토라졌다가 제 얼굴을 넋 나간 듯 바라봤다. 이런 여자가 주변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쳤음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은 벨라가 처음이었다.
“총장님이 미식가셨군요. 수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쪽 사정을 잘 모릅니다. 좋은 집 있으면 추천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맛집을 좋아하시는군요.”
이마의 땀을 닦던 라티오 총장이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평민으로서 대단한 자리에 오르고 그의 연구 실적은 누구나 엄지를 추어올리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는 맛집 탐미주의자였다. 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비싼 식당도, 한 그릇에 얼마 하지 않는 국숫집도 맛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다. 벨라는 그런 소탈한 라티오 총장을 존경했다.
두 남자는 시선을 교환하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따지자면 라티오 총장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여기는 직장이었고 벨라와 라티오 총장은 수직 관계였다. 그가 먼저 나서 주문을 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푸른 피의 대표적인 귀족인 이안 밀러의 눈에 거슬렸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그날 이후 벨라가 아른거려 먼저 아카데미의 교수직에 꽂아 달라 황제를 협박한 것도 이안이었다. 전쟁터로 돌아가는 말 위에서도, 사람이 죽어 가는 마지막 전투에서도 그리고 개선문을 지나 수도에 들어설 때도 그는 꽃을 던지며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벨라를 찾고 있었다. 누굴 찾고 있냐는 부관의 물음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안이었다. 이안은 무의식적으로 벨라를 찾고 있었다.
잠시 지난날의 생각에 빠져 있던 이안은 땀을 닦는 라티오 총장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제야 그도 안심되었는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일개 평민으로 제국 최고 아카데미의 수장이 된 자였다. 소문에 의하면 허례허식 없이 평등하게 인재 등용을 한다고 했다. 인품 또한 훌륭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하길 바라는 귀족들은 그래 봤자 너는 평민이다! 라며 조롱했다. 그가 많은 제자와 연구를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귀족들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라티오 총장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바쁘신 분께서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수렴하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라티오 총장이 이안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바로 이런 점이 라티오 총장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는 아무리 어린 이에게도 필요하다면 고개를 숙이고 배움을 청하는 진정한 학자였다. 그리고 아카데미와 그의 학생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자였다. 그래서 누구보다 허리를 많이 숙였다.
그래 이안은 S를 찾으러 온 것이지 벨라 스완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변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그저 이름 대신 S라는 단어를 지칭했을 뿐이다.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벨라는 오랫동안 잠을 설치게 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걱정하지 마. 벨라.”
고양이같이 앙칼진 얼굴의 끌로에가 애교스럽게 소파에 앉아 있는 벨라를 끌어안았다. 힐다도 벨라의 어깨를 두어 번 쳤다.
벨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M의 취향이 S라는 것을…….
***
“안녕하세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커다란 키와 고급 옷감에 감춰진 탄탄한 몸.
땅딸막한 키와 통통한 몸매의 라티오 총장 옆에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벨라는 저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짚었다. 사라졌던 두통이 한꺼번에 밀려와 찌릿한 통증을 선사했다.
‘맙소사!’
“기사 학부에서 강의를 맡아 줄 이안 밀러 교수님이요. 마침 스완 교수님의 옆방을 교수실로 쓰게 되었으니 스완 교수가 밀러 교수님을 잘 좀 도와주세요.”
코끝에 걸친 작은 안경을 추어올리며 라티오 총장이 말했다. 이안 교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고 전쟁터로 끌려갔던 어린 기사들도 수도로 돌아왔다. 학업 중에 전쟁에 뛰어든 기사들이 하나둘 아카데미로 돌아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연애편지로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얼굴을 보며 사랑을 확인할 장으로 아카데미가 제격이라는 황제와 벨라의 주장에 기사들의 빠른 아카데미 복귀가 확정되었다.
얼마 전 라티오 교수가 배를 내밀며 깜짝 놀랄 만한 교수가 아카데미로 부임한다고 하더니……. 그가 이안 밀러였나 보다.
“안, 안녕하세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벨라가 이안이 내민 손을 잡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게 대체 뭔 인사법인가?
허리를 숙이는 벨라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설마 편지의 주인공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니겠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안이 부드럽게 잡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날 그 싹수없게 나간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의심될 정도로 예의 바른 인사였다. 혹여 자신이 이안 밀러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제 머리를 의심하고 있는 벨라였다.
“네…….”
잘난 남자와 잡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벨라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오랫동안 검을 잡은 손은 단단하고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그리고…….
‘남자와 손을 잡은 게 얼마 만이었더라.’
도무지 현실 남자와 종이 남자와의 괴리감에서 헤어나 올 수 없었던 벨라에게 연애는 판타지였다. 한데 판타지가, 남자 주인공이 현실이 되어 제 손을 잡고 있었다. 입만 좀 다물고 있어 주고 엉덩이만 흔들지 않는다면 완벽한 남자였다.
이안과 악수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얼굴을 붉히던 벨라는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아쉽다…….”
“네?”
또다시 터져 나온 벨라의 혼잣말에 이안이 되물었다.
“신경 쓰지 마시게. 스완 교수는 혼자 중얼거리는 게 특기인 사람일세……. 새벽녘 혼자 교정을 거닐며 중얼거리는 스완 교수를 보더라도 놀라지 마시게.”
라티오 총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마치 누가 옆에 있는 것처럼 혼잣말하는 벨라를 두고 한때 아카데미의 교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다. 교정을 거닐며 혼자 중얼거리는 젊은 여자. 아침이라 미처 다 말리지 않고 풀어 놓은 젖은 머리와 아이보리색 원피스는 교정에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돌게 했었다.
라티오 총장의 말에 벨라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한때 아카데미를 강타한 소문의 주인공이 저라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몸이 꼬였다.
“같이 얼굴도 익힐 겸 식사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라티오 총장이 우렁차게 말했다. 처음 이안 밀러 공작이 아카데미의 기사 학부의 수업을 맡겠다고 했을 때 라티오 총장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고라는 자부심답게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최고였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이름을 떨치거나 유명한 학자가 있으면 차별하지 않고 고용한 덕분에 유학생들도 많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 최고의 검사로 일컬어지는 밀러 공작이 최고 학부를 맡아 주겠다니……. 그와 검이라도 한 번 맞대려고 하는 이름난 검사들이 셀 수도 없는데…….
라티오 총장은 두말없이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안 밀러 교수라니 클라우디 아카데미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고의 홍보수단! 걸어 다니는 광고가 굴러들어 오는 것이었다.
“가세.”
라티오 총장이 기세 좋게 두 천재 교수를 양쪽에 대동하고 복도를 거닐었다. 한쪽은 인문학부 최고의 교수 벨라 스완. 한쪽은 제국 최고의 기사이자 부자 공작인 이안 밀러 교수였다. 오늘따라 라티오 총장의 배가 더 나와 보이는 것은 착각이겠지.
벨라는 영혼 없이 끌려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날 이후 이안에게 더 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힐다 또한 밀러가에서 어떤 수상한 움직임도 없다고 전해 주었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인데…….
갑작스럽게 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과부하가 걸린 탓인지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기다란 복도를 끌려가면서 벨라는 라티오 총장 머리 위로 훌쩍 튀어 올라온 이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빌어먹게 빛나고 있었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안 밀러는 제국 최고의 유명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 주인공이 벨라의 옆방을 차지하다니.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라면 저절로 굴러 들어온 호박에 탭댄스라도 추었을 테지만 현실은 아니올시다였다. 게다가 벨라는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안 밀러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고 소수의 사랑도 지향하는 편이었지만, 취향 찾아 삼만 리를 떠나는 공작 앞에 나타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이시여.’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벨라의 눈 위로 손이 왔다 갔다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잠을 잘 못 자서…….”
벨라의 말에 이안이 흔들어 대던 손을 내렸다. 라티오 총장은 두 사람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밥줄을 쥐고 있는 것은 라티오 총장이었다. 지금까지 벨라가 낸 책이며 받은 상을 따지자면 이깟 교수 자리 굳이 시간을 내 머리 아프게 강의할 필요는 없었지만, 다른 아카데미도 아니고 제가 졸업한 클라우디 아카데미였다. 책날개 앞에 쓰인 ‘클라우디 아카데미 교수’라는 타이틀이 책 판매에 얼마간의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후…….”
벨라는 한숨을 내쉰 후 라티오 총장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엉겁결에 점심을 같이하기로 했지만, 오늘 이후로 철저하게 피해 다니면 되는 거였다. 정 안 되면 집필을 핑계로 칩거에 들어가도 문제없었다. 이미 종신 교수직을 받았으니 몇 년 쉰다고 해도 아카데미 측은 이해해 줄 것이다.
“모르겠다…….”
“예?”
‘아! 이놈의 혼잣말.’
“아니에요.”
급하게 고개를 젓고는 총장의 뒤를 따랐다. 도무지 친절한 밀러가 적응되지 않는 벨라였다. 그렇게 저를 박대하고 매몰차게 돌아서던 이안 밀러와 지금 앞에 있는 인물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벨라는 부지런히 걸어 라티오 총장 옆에 섰다. 지금 상황에서 이안 밀러를 피할 방법은 라티오 총장을 방패막이 삼는 것뿐이었다.
“총장님이 사시는 거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점심값이라도 아끼자는 심산으로 벨라가 라티오 총장에게 물었다. 기분이 정말 좋은지 라티오 총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의 카페테리아 중에서도 ‘쿨름’의 질은 밖의 고급 식당만큼이나 좋았다. 그리고 비쌌다.
“어머! 총장님, 어서 오세요.”
쿨름의 관리인이 라티오 총장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을 잡고 대기하고 있던 중년의 여인을 보고 벨라가 실소했다. 돈은 넘치도록 많았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벨라에게 쿨름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다만 주인이라는 저 여자가 낯설었다. 쿨름은 외부의 식당과 연계하여 만든 곳이었고 유명 인사가 자주 드나드는 아카데미인 만큼 고급 식당을 지향했다. 하지만, 벨라가 드나들던 몇 년 동안 주인 여자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벨라가 보기엔 그녀의 목적은 라티오 총장이 아니라 이안 밀러였다. 라티오 총장이 매일 쿨름에서 식사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체 소문이 어디까지 난 거야?”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밖으로 삐져나왔지만, 이안은 벨라의 혼잣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가장 좋은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은 라티오 총장의 뒤를 쫓아가는 벨라의 뒷모습을 이안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쪽입니다. 공작님.”
여주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안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그 호칭은 별로 적절치 않은 것 같군요. 마담.”
차가운 이안의 말에 주인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주인은 젊은 여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농염함을 무기로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수도에서도 소문난 미인이었다. 미망인인 쎄씨는 부들거리는 입술을 겨우 끌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흠.”
이안은 말없이 그녀를 흘깃 바라보고 라티오 총장과 메뉴판을 두고 속닥거리는 벨라에게 향했다.
“나는 A 코스로.”
메뉴판을 보던 라티오 총장이 옆에서 주문을 받으려 대기하고 있는 종업원을 향해 말했다. 이안은 주문을 하는 라티오 총장을 바라보며 벨라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스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자 흠칫 놀란 그녀가 새초롬히 그를 바라봤다. 이안은 싱긋 웃어 보였다.
“밀러 교수님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소.”
총장의 목소리가 떨린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겠지.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안을 바라보는, 라티오 총장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모습은 테아트룸에서 공연 중인 오페라 주인공을 앞에 두고 있는 소년 같았다.
벨라는 메뉴판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내쉬었다. 총장의 식사 초대를 거절할 수 없어서 냉큼 따라오기는 했는데 이안 밀러와 함께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목이 컥컥 막혀 왔다. 과연 삼킬 수나 있을까?
‘교수실에 소화제가 있었나?’
“숙녀부터…….”
이안의 말에 라티오 총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족의 예의가 배어 있는 이안의 모습에 평민 출신의 라티오 총장이 손수건을 꺼냈다. 귀족……. 그들이 말하는 푸른 피의 기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으며 살아온 그들에게는 당연하지만, 개천에서 난 용들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움.
그래서 귀족들은 평민이 커다란 업적을 인정받아 황제에게 작위를 받아도 이런 식의 트집을 잡으며 그들을 깔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른 벨라가 웃으며 말했다.
“에? 아! 저는 총장님과 같은 것으로요. 우리 총장님이 미식가시거든요.”
“그런가요? 그럼 저도 총장님과 같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벨라의 말에 이안도 메뉴판을 접어 종업원에게 건넸다. 친한 이들이었다면, 서로 다른 음식을 시켜 나눠 먹었겠지만, 이안 밀러의 음식에 제 포크를 들이대는 상상을 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론 좋아서였다.
‘엄마를 닮았나 아빠를 닮았나?’
혼자 배시시 웃는 벨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총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안의 입장에선 참으로 이상한 여자였다. 혼자 토라졌다가 제 얼굴을 넋 나간 듯 바라봤다. 이런 여자가 주변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쳤음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은 벨라가 처음이었다.
“총장님이 미식가셨군요. 수도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쪽 사정을 잘 모릅니다. 좋은 집 있으면 추천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맛집을 좋아하시는군요.”
이마의 땀을 닦던 라티오 총장이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평민으로서 대단한 자리에 오르고 그의 연구 실적은 누구나 엄지를 추어올리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는 맛집 탐미주의자였다. 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비싼 식당도, 한 그릇에 얼마 하지 않는 국숫집도 맛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다. 벨라는 그런 소탈한 라티오 총장을 존경했다.
두 남자는 시선을 교환하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따지자면 라티오 총장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여기는 직장이었고 벨라와 라티오 총장은 수직 관계였다. 그가 먼저 나서 주문을 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푸른 피의 대표적인 귀족인 이안 밀러의 눈에 거슬렸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그날 이후 벨라가 아른거려 먼저 아카데미의 교수직에 꽂아 달라 황제를 협박한 것도 이안이었다. 전쟁터로 돌아가는 말 위에서도, 사람이 죽어 가는 마지막 전투에서도 그리고 개선문을 지나 수도에 들어설 때도 그는 꽃을 던지며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벨라를 찾고 있었다. 누굴 찾고 있냐는 부관의 물음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안이었다. 이안은 무의식적으로 벨라를 찾고 있었다.
잠시 지난날의 생각에 빠져 있던 이안은 땀을 닦는 라티오 총장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제야 그도 안심되었는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일개 평민으로 제국 최고 아카데미의 수장이 된 자였다. 소문에 의하면 허례허식 없이 평등하게 인재 등용을 한다고 했다. 인품 또한 훌륭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하길 바라는 귀족들은 그래 봤자 너는 평민이다! 라며 조롱했다. 그가 많은 제자와 연구를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귀족들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라티오 총장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바쁘신 분께서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수렴하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라티오 총장이 이안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바로 이런 점이 라티오 총장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는 아무리 어린 이에게도 필요하다면 고개를 숙이고 배움을 청하는 진정한 학자였다. 그리고 아카데미와 그의 학생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자였다. 그래서 누구보다 허리를 많이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