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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비틀거리는 제영이를 꽉 잡아 주면서 스키를 가르쳐 준다. 그러다 내 품 안에 엎어지면 함께 눈밭에 드러눕고 만다. 하늘이 까맣고 별이 빛나며, 찬 공기가 기분 좋게 뺨을 스친다. 그때 내가 일어나기 귀찮아, 하고 말하고, 제영이가 웃는다.
그 얼굴을 보다 결국 못 참고 나는 역시 결혼하자, 하고 멘트를 친다. 그러면서 밤하늘에 폭죽이 아름답게 수를 놓듯 터지고, 반지를…….
내가 생각해도 너무 유치한 설정이긴 한데, 내 로망이다. 스키장에 연인과 함께 와서 즐겁게 놀다가 사랑을 약속하는 그런 거 있잖아. 나는 아직도 모 드라마에서 재벌 3세가 밤하늘에 폭죽 터트리는 장면을 좋다고 생각한단 말이다.
그러나 로망은 로망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폭죽은 준비 못 했고 만약 했더라도 내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계획 중단시켰을 것이다. 제영이가 좋아할지 아닐지도 모르겠고. 물론 반지도 없다. 반지 어디서 사야 하지. 무난하게 다이아몬드가 낫겠지, 몇 캐럿으로 할까…….
그런 망상을 펼치던 중 현실 하나가 더 닥쳐왔다.
“안녕하세요, 저기, 일행 있으세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벤치에 앉아 기다리다 홱 눈을 치켜떴다.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었다. 고글에 마스크, 모자까지 뒤덮고 있었으니 나를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낯선 여자가 말을 건 상대는 한제영이었다.
제영이는 새로 산 스키복을 입고 나오다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여자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182센티 정도의 제영이보다는 훨씬 작았다. 15센티 정도 차이나 보인다. 15센티. 남녀 피지컬의 최적의 차이라 들었다.
최적의 차이라…….
“일행 있습니다.”
“아, 혹시 두 분 같이 오셨나요?”
“네, 왜 그런 걸 물으시죠?”
제영이가 순간 경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내가 있는 쪽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래, 잘한다. 그냥 아예 대답해 주지 말고 이쪽으로 와 버려.
여자가 생긋 웃으며 옆의 일행을 가리켰다.
“아니, 저희도 둘이거든요. 그래서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아뇨.”
단답이었다. 하얀 얼굴에 드러난 건 정말 명백한 불쾌감이었다. 그 정도의 단호함까지 바란 건 아니라서 나도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싫지는 않았다.
여자는 버벅거리다 또 말했다.
“아, 인상이 되게…… 좋으셔서, 잘생기셔서 말 걸어 본 거예요. 절대 다른 의도가 아니라―”
“그러니까 안 됩니다.”
제영이는 단칼에 자르고서 그 여자 앞을 떠났다. 여자들이 ‘뭐야, 기분 나쁘게’ 하고 수군거리며 멀리 가 버리는 게 보였다. 나이스, 엑설런트, 브릴리언트! 폭죽 사 올까? 반지도 같이 사 오는 게 좋겠다.
“선배님, 오래 기다리셨죠.”
내 앞에 다가온 제영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까의 차가운 표정과는 굉장히 상반되는 얼굴이었다.
“아니, 별로. 스키복 잘 어울리네.”
“선배님은 더 심해요. 혹시, 저 없을 때 여자들이 말 걸거나 그러진 않았죠?”
여자들? 마스크 쓰고서 혼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말 걸 리가 있나.
“아니, 없었는데.”
“다행이네요. 마스크 벗지 마세요, 절대.”
제영이가 손가락으로 마스크를 검사라도 하듯 매만졌다. 눈을 내리깐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도 써.”
“……네?”
“마스크, 하라고. 고글 가지곤 안 되겠어. 마스크 써.”
“저는 괜찮은, 아.”
“하라면 해.”
다시 스키용품 숍에서 파는 방한용 마스크를 씌우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곧 우리는 스키를 타러 갔다. 스키, 잘 탔다. 잘 타서 문제였다. 제영이는 운동신경이 좋아서인지 배운 지 얼마 안 되어 어느새 초보 존을 벗어날 실력이 되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로망 첫 부분부터 실패라는 것이다. 잘하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네.
리프트를 타고 가는 동안 잠깐 마스크를 벗은 맑게 예쁜 옆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키스하고 싶다고. 사실을 말하자면 하얀 설경이 펼쳐진 리프트 위에서 키스하는 것도 로망 중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 앞뒤 리프트엔 사람들이 가득 차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고 로망 실현은 이번에도 무참히 실패했다. 젠장. 당장 하고 싶다고. 내 마스크 벗고 입술 박치기를 그냥!
“키스하고 싶다…….”
욕망을 씹고 씹던 끝에, 그만 입 밖으로 소망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리프트 아래 하얀 풍경을 신기한 듯이 내려다보던 제영이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셨어요?”
“아냐.”
“분명 뭐라고 하셨는데…….”
“스키 타고 싶다고. 빨리.”
……스키가 아니라 키스지만, 그냥 글자 배열 순서의 차이일 뿐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절대.
시선을 피하며 앞 리프트에 등 돌리고 앉은 사람만 괜스레 노려보았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털모자와 고글, 방한용 마스크가 열기를 더 가중시키는지도 몰랐다. 나는 마스크를 벗어젖혔다. 고글도 머리 위로 올려 버렸다. 안 그럼 열기에 미쳐서 키스 귀신이 되어 버릴지도 모를 것 같아서였다.
제영이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왜 벗으세―”
그 순간.
“어! 저거 주빈 아니야?!”
반대편에서 내려오던 리프트 탑승객 하나가 손가락질을 유독 크게 하며 소리쳤다. 아니, 무슨 마스크 잠깐 벗었다고 그렇게 알아보시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겁니까…….
“주빈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누가 주빈이야?”
앞사람이 뒤를 돌아보고서는, ‘어, 맞네?’ 하고 확인 사살까지 해 주셨다.
깊은 한숨만 나왔다. 당장 안경 내리고 마스크 착용을 완료했지만, 이미 앞뒤는 물론이고 옆에 앞앞 뒤뒤 리프트까지 무슨 가족오락관 폭탄 전달 게임이라도 하듯 완벽히 전달된 것 같았다. 그놈의 스키, 아니 키스, 아니 뭐가 됐든 내 머릿속이 원인인 것 같다.
“선배님.”
“미안. 내려가서 새벽에 다시 오자.”
“미안해하실 일 아니에요.”
제영이가 몇 번 타기도 전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전적으로 내 불찰이었다. 그놈의 키스에 정신이 팔려선. 나 자신은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제영이가 스키를 못 타게 되는 건 싫었다. 실수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리프트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도망쳤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공포라면 공포였다. 슬로프 윗부분에 서선 제영이에게 말했다.
“제영아.”
“네.”
“밑에서 보자.”
무슨 남극 탐험에 나서는 탐사 대원처럼 비장미가 넘치게 말하고선, 스키를 신은 발을 굴러 슬로프를 타고 내려갔다. 눈이 쓸리는 소리, 사람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스크와 고글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차가운 바람이 열기를 가라앉혔다. 야간 조명 불빛이 부서지는 하얀 언덕을 내려오며 온몸에 느껴지는 속도감이 잠시 복잡한 생각을 잊게 해 주었다.
그러나 속도감이고 뭐고, 내려온 순간부터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려오자마자 스키를 분리해서 들고 리조트 쪽으로 도망쳤다. 신속한 움직임 덕인지 다행히 사람들은 쫓아오지 않았다. 건물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니 곧 제영이가 보였다. 제영이 역시도 스키와 폴까지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미안. 몇 번 못 타고 내려와 버렸네.”
제영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밝게 웃었다.
“아니에요. 재미있었어요.”
“…….”
“풍경도 멋졌고, 스키도 처음 타 보는데 신기했고.”
“그럼 다행이긴 한데…… 이따 새벽에 딴 옷 입고 가자.”
“네, 그러니까 미안하단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녀석이 갑자기 내게 가까이 다가서더니, 나직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새벽에 나갈 수 없게 만들어 주시면 더 좋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허리 부근이 저릿해지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 애인은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만 하는 걸까. 정말 이러면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그날 밤, 내가 슬쩍 상상해 봤던 일 하나를 실현했다. 스키복 안에 아무것도 안 입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내가 생각해도 좀 민망스런 상상이었는데, 제영이가 먼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선 내 위에 올라탔던 것이다.
제영이가 짙은 미소를 머금으며 입 맞춰 오는 걸 보고 다시 생각했다. 이 녀석은 역시 너무 위험하다고. 아까 그 여자들만 봐도 그랬고, 인터뷰 섭외 요청이 온 것만 봐도 그랬다. 아마도 점점 갈수록 더 잘생겨질 거고 점점 갈수록 위험해지겠지.
안 돼. 한제영은 내 거란 말이다…… .
그게 요새 생긴, 사소하다면 사소할 내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 걱정의 부피를 키울 일이 얼마 안 있어 더 생겨나고 말았다.

* * *


신경을 건드린 그 첫 번째.
“와. 정말 제영이 형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럼 다행이네.”
나는 불편한 심경을 전혀 감추지 않고 두 사람이 얘기하는 광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재촬영 날이었다. 최민후가 하차하는 바람에 전에 찍었던 송상옥 부분을 다 들어내야 했는데, 그거야 들어내면 그만이지만 의열단 단원 모두가 모인 아지트 장면은 도저히 없앨 수가 없었다. 결국 일정을 조정해서 아지트 건물에서 선배님들까지 모두 참여해 재촬영하기로 했다.
송상옥 역을 새로 맡게 된 이수하라는 아이돌 출신 배우는 예의 바른 녀석이었다. 선배님들한테 폴더 인사를 하고, 스태프들에게도 하나하나 인사를 건네는 밝은 태도에 촬영장 분위기도 좋아졌다. 게다가 아무래도 제일 어린 데다 부담이 클 법도 한데, 긴장한 내색을 크게 보이지 않고 촬영에 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이수하가 거슬렸다.
별 이유는 없다. 이수하가 제영이에게 말을 걸고, 제영이와 형 동생 사이가 되고, 제영이와 연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 말고는, 별로 불편한 일도 없다.
……왜 저 녀석은 제영이에게 집적거리는 거냐.
키가 조금 작긴 해도, 이수하는 아이돌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걸 알아서 더 울컥했다. 제영이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한 장의 그림 같다며 뒤에서 스태프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유독 잘 들려온다.
왜 나 보이는 데서 둘이 그렇게 사이좋게 서 있냐고.
“휴…… 아까 제 연기 많이 별로였죠.”
“아냐, 이번이 두 번째라며. 나보다 네가 경력이 더 많다니까. 조금 전 장면도 괜찮았어.”
“선배님들께 조언 구하고 싶은데, 괜히 피곤하시게 만드는 것 같아서 못하겠어요. 너무 높으신 선배님들이라. 형이 가르쳐 줘서 다행이에요.”
즉각 벌떡 일어나서 두 사람한테 빠르게 다가가 사이를 갈랐다. 제영이와 이수하를 한 팔에 하나씩 놓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나한테 물어봐요. 얼마든지 답해 줄 테니까.”
“헉. 선배님.”
이수하가 깜짝 놀란 듯 바라보았다.
“알았죠?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 이수하 씨, 오케이?”
“네, 넵.”
“…….”
제영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왜? 입 모양으로 말했더니 대답도 없이 팔에서 빠져나갔다. 이수하랑 얘기하는 거 방해한 게 그렇게 기분 나빴다 이거야? 역시 제영이 너도 젊은 게 좋은 거냐, 그런 거면…….
“선배님, 그럼 이 대사는 어떻게 소화하면 될지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이수하가 여전히 옆에 선 채로 대본을 가리키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내 발등을 찍었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이것저것 조언을 주었다.
이수하가 말한 것은 송상옥의 대사 몇 줄이었다. 송상옥은 비열하면서 찌질한 녀석이니까 이런 식으로 어조를 유지하면 되겠고, 발성은 머리끝으로 내도록 노력하면서 목소리 톤을 올려라.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선배님.”
돌아보니 제영이가 있었다.
“정 감독님이 찾으시네요.”
“어? 왜?”
“같이 오라 하셨어요.”
“그래? 나중에 다시 알려 줄게요.”
“넵!”
이수하를 놔두고 정계수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촬영이 중단된 틈에 뭔가 장비 관리자와 이런저런 얘길 하고 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리스트를 보고 있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무슨 일로 불렀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팔을 살짝 잡아 오는 손길이 있었다.
“선배님.”
“왜.”
“감독님이 안 부르셨어요.”
“…….”
이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미묘한 미소만 짓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더니 단호하게 한 마디 하는 게 어이없었다.
“다른 사람 어깨에 손 올리지 마세요.”
참나.
“너도 다른 사람하고 둘이서만 얘기하지 마.”
“선배님이라고도 불리지 마세요. 저만 부를 거니까.”
“그렇게 따지면 너는 형 소리 듣고 있잖아, 인마. 걔랑 언제 말 놨어?”
우리는 굉장히 의미 없이 옥신각신했다. 스물여섯에도 이런 유치한 다툼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이 먹을수록 점점 유치해져 가는 건가?
당연히 영문을 모를 이수하는 이후로도 우리 둘에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았다. 제영이와의 접촉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나는 답변을 열심히 해 주었다. 그때마다 제영이는 더 열심히 답변해 주었다. 물론 나는 더욱더 열심히 답변해 주었고.
그리하여 이수하는 우리를 정말 좋은 선배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이수하의 팬들까지. 얼마 후 이수하가 속해 있는 아이돌 그룹인 ‘데이즈’ 의 팬들이 주주 팩토리 사무실로 선물을 보내온 걸 보면 그랬다. ‘수하 군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문구가 쓰인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고 한다.
으음…… 꽤나 양심에 찔렸다.

* * *


다음으로 신경에 거슬렸던 건 역시, 인터뷰였다.
목요일에 B 시네뉴스와의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인터뷰이는 나, 그리고 한제영. 모 브랜드의 협찬이 들어와서 그 브랜드의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그런데 인터뷰 장소인 촬영장에 도착한 순간 뭔가 좀 이상했다. 인터뷰를 맡은 기자라면서 어떤 여자가 자길 소개하다가 갑자기 ‘저 기억나세요?’하고 웃으면서 제영이에게 말했던 것이다.
“……네?”
제영이는 그 여자를 모르는 눈치였다.
“예전에, 한 몇 년 전인가. A 시네마 앞에서 예매권 행사 했었잖아요. 그때 한제영 씨가 당첨돼서 제가 직접 건네 드렸었는데.”
“아…….”
“제가 그때 알바를 좀 뛰었거든요, 행사 알바. 하도 잘생기셔서 기억했어요. 제가 사람 얼굴 잘 안 까먹기도 하고.”
기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위험신호가 들리는 것 같다. 삐빅, 위험한 여자입니다. 하는 듯한 경고 메시지가 머릿속에 울렸다.
제영이는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아, 하고 소리를 내며 여자가 내미는 손을 잡고 악수했다.
“정말 몇 년 전 아닌가요? 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저도 그랬어요. 최근에 <십이월 기담> 촬영 현장 사진에서 한제영 씨 보지 않았으면, 완전히 잊고 지냈을 거예요. 그때 주신 예매권으로 영화 잘 봤어요. 제영 씨는 잘 보셨나요?”
“네, 정말 잘 봤죠. 그 예매권이 아니었으면 전 여기 없었을지도 몰라서요.”
“어머, 그 정도예요?”
즐거운 웃음이 터지는 대화―정확히 말하면 여기자만 웃고 있었지만―에서 철저히 소외된 나는 기자와 제영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대화를 종합해 보자면, 이 사람들은 몇 년 전에 A 시네마 앞에서 만나서 예매권을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여자는 제영이를 잘생겼다고 생각했고.
나보다 먼저 알아차렸다니. 나보다 먼저 알았다니.
그게 바로 내가 신경 거슬린 지점이었다.
부루퉁한 심정으로 주머니에 손이나 꽂고 서 있는데, 기자가 돌아서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주빈 씨, 반갑습니다. B 시네뉴스 김선입니다.”
“……네.”
반갑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맞잡았다. 김선이라는 이름의 기자는 능청맞다고 해야 하나, 유쾌해 보이면서도 계략을 꾸밀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악수할 때에도 그녀는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인터뷰 진행 전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틈에 제영이에게 한 마디 속삭였다.
“그러니까 예매권을 줬다는 거지? 전혀 모르는 여자한테.”
“그땐 같이 볼 사람이 없었던 데다 시간도 없었거든요.”
제영이는 정말 별생각 없는 모양이었다. 무심히 답한 녀석은 회색 니트를 위로 훌렁 벗어젖혔다. 이너가 살짝 들려 올라가며 탄탄한 복부가 드러났다가 다시 옷 아래로 숨었다.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순간 울컥 들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저 기자님은 참 고마운 분이에요. 그 예매권이 아니었으면 <서어나무 카페>도 못 봤을 테니까요.”
“…….”
“선배님하고 저, 만나게 해 준 사람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하얀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잠그면서 제영이가 미소 지었다. 그렇기야 하지만, 저 여자가 왠지 너한테 관심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걱정이 돼서 문제라고. 물론 그 말은 깊은 곳에 꾹꾹 묻고 말하진 않았다. 셔츠에 암회색 재킷을 걸친 모습이 정말 환상적이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곧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가볍게 근황부터 시작해서, 영화에 관한 질문과 처음 맡는 주연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지 물음까지 이어졌다. 나에 대한 질문은 저번 인터뷰와 비슷해서 편히 답할 수 있었지만, 제영이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오히려 신경 쓰였다. 예를 들자면—
“연극 <나팔 아래서>, 아동극 <붓바람> 같은 연극 작품이나 기타 영화 단역 외에는 다른 작품 활동이 없었는데요, 어떻게 <십이월 기담>이라는 영화에 참여하게 되셨나요?”
스튜디오 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서, 김선 기자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백삼열이라는 역에 오디션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디션장에서 제 연기를 보시곤 주빈 선배님이 윤성해 역의 대사를 주시면서 한번 해 보라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제영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영문 모르고 열심히 외워서 연기를 하긴 했는데…… 어쩌다 보니, 주연을 맡게 되었네요. 촬영 중반인데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주빈 씨는 어쩌다 윤성해 역의 대사를 해 보라 하시게 됐어요?”
내 취향의 얼굴이라서…… 라고는 말 못하겠다.
“백삼열 역 오디션을 하는데, 정말 이미지가 안 어울렸어요. 그런데 연기는 곧잘 하는 것 같고, 마스크도 윤성해랑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한번 시켰죠. 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정말 호흡이 잘 맞으시나 봐요.”
“아—주 잘 맞죠.”
연기뿐만 아니라 섹스 호흡은 더욱 기가 막히지.
제영이가 내 대답에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래도 말의 속뜻을 파악한 건 아닐까 싶었다.
어찌 됐든 그때 한제영이 아니라 다른 배우를 선택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안 되는 건 사실이다. 연기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인으로서 여기까지 해낼 수 있었다는 것도 대단한 거고. 역시 내 안목은 옳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제영 씨, 첫 촬영은 어땠어요? 무슨 신이었는지 귀띔이라도 해 줄 수 있어요?”
첫 촬영…… 나는 제영이를 바라보았다. 녀석도 나를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첫 촬영, 베드신이었잖아.
그때 생각을 하자마자 그만 웃음이 제대로 터져 버렸다. 바보처럼 얼어서 버벅대다 녀석하고 입 맞추고 만지작거리고 나서야 정신 차렸던 그때 말이다.
“푸흐흐…… 큭큭…….”
“어머, 주빈 씨가 왜 웃음이 터지셨을까요.”
“푸흐, 큭. 아니, 우리 첫 촬영이 정말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사실은 저, 첫 촬영이 좀 중요한 장면이었어요. 영화에선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이었고요. 두 캐릭터 모두 감정이 엄청나게 고조된 상태여서…… 상당히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