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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영어 대화는 “ ”, 한국어 대화는「 」로 표기하였습니다.


1화


사랑한다고 말했다. 쑥스러운 나머지 얼굴까지 붉히면서 간신히 내뱉었다. 날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그날부터 그의 연인이 되었다.

“Hey, B! 오늘도 장난 아닌데? 요즘 만난단 형씨가 좀 거친가?“
쓰레기.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보이는 것은 이런 쓰레기들뿐. 그래, 여기는 그런 곳이다. 꼴리면 구석에 갈 것도 없이 그대로 섹스를 해도 되는, 이 환락가에서도 가장 저질들만 모아 처넣은 게이바.
강간도 서슴없이 자행되는, 이 바닥에서 꽤나 유명한 장소다. 마침 저기 한 명이 걸렸다. 뭣도 모르고 들어온 순진한 게이인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살려 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그 외침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은 하나둘 버클만 풀러 내린다.
닥치고 있었다면 처음 덮친 패거리 한둘만 상대하면 끝났을걸. 저 멍청한 새낀 이제 오랜 기간 병원 신세 좀 져야 할 거다. 저렇게 순진한 얼굴이니까 아마 후장도 헐겁진 않을 터. 하나의 구멍에 좆들이 세 개까지 박혀 들어가면 저 순진한 동양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빨강머릴 모른 척하며 현실감 없는 강간을 감상했다. 또 지루한 하루가 시작됐다.

***


동양인. 단 한 번도 동양 근처에 가 본 적 없는데 난 항상 동양인이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검은 머리와 째진 눈, 누런 피부와 작은 체구를 한 영어 잘하는 동양인.
어딘가를 가서 자기소개를 할 때면 너의 나라가 어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고, 나와 비슷하게 생긴 진짜 동양인들은 다짜고짜 자신의 모국어로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생김새 덕분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나의 인간관계는 극단적으로 좁았다. 친구라고는 딱 한 명, 정말 동양에서 유학 온 재현 김밖에 없었다.
내가 게이임을 자각한 건 하이스쿨(high school) 때였다. 그건 재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 게이야.’
먼저 말을 꺼낸 건 그였다. 내가 커밍아웃 하려던 날이었다. 서양인에 견주어 지지 않을 정도의 덩치를 가진 재현은 내가 저를 혼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는 내 눈빛이 경멸이 아니라 놀라움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그는 마치 살인이라도 하고 온 사람마냥 내 눈치를 살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다 결국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용건만 전했다.
‘나도.’
동양인 주제에 지나치게 큰 재현의 눈이 그제야 날 향했다.
‘너도?’
우리는 그 뒤 한참을 실컷 웃어 댔다. 우리가 웃었던 횟수만큼 우정은 더 깊어졌다. 특히 그는 그래 보였다.
그러고 난 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안는 쪽과 안기는 쪽, 탑과 바텀 중 어디에 속할까? 재현은 덩치가 크니까 탑인가? 나는 덩치가 작으니까 바텀? 대충 외관상 정의를 내리면 이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둘 다 바텀인 것 같았다.
고심 끝에 게이 포르노를 접해 보기로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재현의 집으로 향했다. 일단 휴지 한 통을 옆에 구비해 놓고 컴퓨터를 켜서 게이 영상을 볼 수 있는 사이트를 들어갔다.
‘켜…… 켠다.’
재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영상의 시작을 예고했다.
‘그래.’
내 목소리에서도 못지않게 떨림이 느껴졌다. 딸칵. 우린 평생 그 마우스 소릴 잊지 못할 것이다. 나와 재현은 그날 밤 그 영상에 나왔던 쌔끈한 백인에게 몇 번이고 안기는 꿈을 꿨다. 우린 둘 다 천상 바텀이었다.
며칠 뒤 우린 수소문 끝에 굉장히 고급스런 게이바를 알아냈다. 회원제라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몇 주간 계속 도전했다 실패하길 거듭했다. 그러다가 어느 운 좋은 날, 여느 때처럼 내쫓기던 우리를 보고 귀엽다며 한 남자가 가드에게 회원증을 보여 우릴 데리고 들어가 주었다
클럽은 외관보다 내부가 더 화려했다. 안타깝게도 우릴 입장시켜 준 부자의 친절은 딱 거기까지였다. 나름 멋있어 보이겠답시고 차려입은 게 세탁소에서 빌린 짝퉁 정장이었으니, 이런 얼뜨기들을 옆에 끼고 다니기엔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들어갈수록 우리는 장소에 압도되어 갔다. 여긴 상상한 것보다 훨씬 수준 높은 곳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고급스러워 보였고, 손님은 물론이고 지나다니는 종업원조차 우리보다 기품 있어 보였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재현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입고 있는 재킷 끝자락을 쥐어뜯으며 옆에 서 있는 재현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나가자.’
하지만 재현은 답이 없었다. 못 들었나? 나는 발꿈치를 들어 그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가자니까!’
그래도 반응조차 없었다. 뭐야.
‘나가자고, 멍청아!’
여전히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속삭이자, 재현의 팔이 나를 툭 하고 한번 쳤다.
‘왜?!’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그제야 재현 쪽을 올려다보자 재현의 손가락이 한곳을 가리켰다.
‘저, 저기.’
얘가 또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그를.
우린 그 직후 도망치듯 게이바를 빠져 나와 재현의 집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가 재현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비명과 함께 그곳에서 본 환상적인 남자의 이야길 털어놓기 시작했다.
‘봤어? 너 봤어? 그 사람, 나랑 눈이 마주쳤어!’
‘그래, 봤어. 그 완벽한 블론드 헤어. 진짜 남신같이 생겼더라.’
‘무슨 소리야? 그 남잔 연한 갈색 머리였어.’
같은 사람을 본 줄 알고 꺼낸 말은 조금 어긋나 있었다. 우리가 본 장소에 두 남자가 같이 서 있었고, 우리는 서로 다른 남자를 본 것이다. 나는 앉아 있던 금발의 남자에게, 재현은 그의 옆에 서 있던 연한 갈색 머리의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우린 취향이 겹치지 않아 안심했다는 소릴 하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흥분에 겨워 계집애 같은 짓인 줄도 모르고, 우린 두 손을 맞잡고 수다를 늘어놨다. 어느새 그 남자들은 각각 나와 재현의 연인이 되어 영화에나 나올 법한 멋들어진 일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반한 그 아폴론의 눈길이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단 사실쯤 가뿐히 잊어버렸다.
그 뒤 우린 클럽 앞에서 살다시피 했다.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였다. 몇 십 년 만이라는 한파도 우리의 집념을 꺾진 못했고, 덕분에 우린 다시 한번 그 남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다 하느님도 우릴 보고 감복해 상을 준 건지 뭔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재현이가 매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해 마지않는 연갈색 머리의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온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적당한 각도로 허리 숙인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재현이 종종 입에 담던 한국어. 그제야 난 떠올릴 수 있었다. 두 남자를 처음 본 날, 그들의 눈은 모두 재현을 향해 있었다.

금발의 남자는 레이 로렌조. 유명한 마피아 가문의 일원이었고 연갈색 머리의 남자는 Mr.찬. 그는 레이의 보좌관이자 오른팔이었다. 다정하고 성실한 Mr.찬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한국어도 굉장히 잘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재현은 Mr.찬과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나였다. 재현은 Mr.찬과 데이트를 하면서도 틈틈이 날 도우려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레이가 누굴 보고 있는지. 나와 둘만 있게 하려고 재현이 하는 부탁들을 어떤 심정으로 그가 들어주고 있는지.
그리고 나를 향한 무관심한 눈빛 또한 싫을 만큼 알고 있었다. 그 시린 눈동자는 나에게 아무 감정도 표현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난 좋았다. 바보 같이 그냥 레이 옆에만 있어도 행복했다.
그러다 어느 날, 재현의 부추김에 못 이겨 굳은 결심을 하고 그를 만나 고백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긴 침묵 뒤에 들려오는 건 긍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긍정이라기보단 수긍이었지만 그땐 그렇게 들렸다. 그래서 밝게 웃으며 그의 팔짱을 끼고 구석에서 우릴 지켜보던 재현에게 외쳤다.
‘우리 사귀어!’
재현은 나 못지않게 기뻐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