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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의 로맨스
1화
프롤로그
소은은 빌딩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깨끗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바람에 흐트러졌던 머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가다듬는 손끝이 여실히 떨려 왔다. 어제 새벽에 결심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긴장을 하지 말자고 되새겼는데 입이 버석하게 말라 왔다. 소은은 자신의 약한 정신 상태를 다시 한번 인정해야 했다.
“정소은. 정신 바짝 차리자.”
사람들은 말했다. 왜 그 좋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버리고 적지 않은 나이에 회사에 들어가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소은에게 ‘쥬얼리 디자이너’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 왔던 간절한 꿈이었다. 이제, 그 꿈을 이루어 자유롭고 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남들에게 보여 주기에만 좋은 직업이고 실상 학교는 총성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선생님을 하면서 보람찬 일보다는 상처가 더 많았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은이 고개를 들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빌딩을 바라보았다.
세 번의 도전 끝에 간신히 합격한 쥬얼리 브랜드 ‘Top Queen’은 인터넷 쇼핑몰로 시작하여 5년 만에 다른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무섭게 성장한 회사로, 현재는 쥬얼리 시장에서 막대한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이곳은 소은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직장이요, 꿈의 동산인 곳이었다.
소은은 안내 데스크로 가서 합격 통지서를 보여 주었고 직원의 도움으로 게이트를 지나 승강기에 올라탔다. 여전히 떨리는 마음에 호흡이 꽤 불규칙했다. Top Queen의 사무실이 위치한 14층에 승강기가 멈추고 소은이 내렸다.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엔 조명이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쥬얼리들을 밝히고 있었다. 동화 속을 걷는 기분을 만끽하며 마침내,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연거푸 긴장 어린 숨을 내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막 출근을 했는지 몇몇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소은을 발견하고는 일체 하던 일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정소은이라고 합니다.”
신입 사원치고는 꽤 있어 보이는 나이에 직원들은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누구 하나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는데 뒷문이 열리고 일정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요, 정소은 씨.”
뒤에서 들려오는 말간 여자 목소리에 소은이 등을 돌렸다. 차가운 인상의 여자는 소은의 면접을 봤던 면접관 중 한 명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사, 이유경이에요.”
악수를 청하는 유경을 향해, 소은은 예의 바르게 두 손을 뻗어 잡았다.
“자, 여기 주목.”
유경의 한마디에 직원들이 아예 몸을 제 쪽으로 틀자 가뜩이나 주목받고 있던 소은은 더 큰 부담감을 느꼈다. 선생님 일을 하면서 주목받는 건 익숙해졌다 자부했는데, 이렇게 긴장이 되는 것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정소은 씨다. 신입 사원이지만, 너희들보다 나이가 좀 있으니 모두들 예의를 갖추도록 해.”
유경의 말에 직원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경은 소은과 함께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로 다가가 이름과 직급을 소개해 주었다.
“이리 와요. 자리 안내해 줄게요.”
“네!”
소개를 끝낸 유경을 따라가는 동안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눈빛에 소은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목례로 대신했다.
“여기예요.”
책상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T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책상에 유경의 왼쪽 옆자리라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데리고 가르쳐 줄 게 많을 것 같아서 일부러 내 옆자리로 배치했어요. 괜찮죠?”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저로서는 너무 영광이죠.”
소은의 말에 유경이 흐뭇해하는 미소를 지었다가 얼른 감추었다.
“오늘 대표님은 안 나오세요. 일본으로 출장을 가셨거든요. 모레쯤 오시니까, 그때 인사드려요.”
“네.”
“우리 아이들이 낯가림도 심하고 소극적인 편이라 그렇지, 텃세 같은 건 안 부리는 애들이에요.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네.”
“아차, 이 대리는?”
유경이 자신의 오른쪽 자리, 즉 비어 있는 소은의 앞자리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이 대리님 오늘 본점 다녀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어제저녁에 왔던 컴플레인 손님 때문에요.”
“역시 발 빠른 이 대리야.”
얼핏 바라본 빈자리에 ‘이담호 대리’라고 써져 있는 것이 보였다. 흔하지 않은 이름에 소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 담호는 아니겠지?
물에 젖은 머릿결, 산산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교정에서 언제나 자신을 극심히도 메마른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 아이.
담호를 생각하다가 실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바보. 성이 다르잖아. 그 아인 이담호가 아니라 박담호였잖아…….
잠시나마 담호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지우며 소은은 유경이 건네준 서류를 받았다.
“일단, 일주일 정도는 우리 Top Queen에서 팔고 있는 쥬얼리들의 종류와 가격을 공부하고 홈페이지의 게시판 담당을 좀 해 줬으면 싶어요.”
“네.”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받은 서류와 열심히 비교해 보고 게시판에 질문, 불평을 하는 손님들에게 댓글을 달고 있을 때였다.
“대리님 오셨어요?”
한 여직원의 상냥한 목소리에 소은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대리는 이미 비어 있던 소은의 앞자리에 와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와 익숙한 분위기. 자신만큼이나 확장된 동공 크기.
남자 선생님들조차도 부러워했던 날렵한 턱 선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도톰한 붉은 입술, 작위적이지 않은 오뚝한 콧날과 선명한 인중.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속 쌍꺼풀과 길고 짙게 흐트러진 속눈썹, 부드러운 머릿결의…….
담호.
정말, 소은이 알고 있는 그 아이였다.
“선생님……?”
미세하게 떨려 오는 그의 작은 음성에도 사무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한꺼번에 그들에게로 쏟아졌다. 소은은 사적인 이유로 쏟아진 이목이 반갑지 않았고 제 앞에 있는 담호와의 만남 또한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담호야.”
어색한 감정이 고스란히 목소리에 드러났다. 담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기고선 말없이 소은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예전처럼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을 만큼 까맣고 깊었다. 그럼에도 제게 할 말이 많아 보여 쉽게 피할 수도 없었다.
“뭐야? 이 대리랑 소은 씨랑 아는 사이예요?”
둘 사이에 앉아 있던 유경의 질문에 소은은 그제야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담호의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네. 저 첫 취임했을 때 맡았던 반 학생이었어요.”
“어머나, 예전의 사제지간이 이번엔 직장 선후배 사이로 만난 거야? 사람 인연이라는 거 참 신기하다, 신기해.”
유경은 감탄을 하며 담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두 사람 꽤 오랜만에 만나는 거 같은데, 나가서 커피 한 잔이라도 하고 와.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한 30분 정도?”
“네. 감사합니다, 이사님.”
괜찮다고 말하려던 소은은 바로 들려오는 담호의 목소리에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유경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평범한 사제지간이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묘했다.
“잠깐 나갔다 오죠.”
앞장서 나가 버리는 담호를 따라나섰다. 언제나 자신의 뒤에서 소리 없이 따라오던 아이가 어느새 이만큼 자라,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다는 것이 소은은 씁쓸하면서도 신기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소은은 휴게실 문을 열어 주는 담호를 스쳐 지나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아이를 연상케 하는 희미한 비누향이 났던 담호에게선 더 이상 그 냄새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강한 남자의 냄새, 시트러스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커피 드실 거죠?”
어딘가 모르게 차갑지만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응? 응.”
어른스럽지 못하게 불편한 티를 내고 말았다. 휴게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해 커피 기계가 요란하게 돌아가고 커피가 내려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주변을 채웠다. 두 손에 커피를 든 담호가 곁으로 다가와 한 잔을 소은의 앞에 놓아 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향긋한 아메리카노를 들이마시며 소은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앞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담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매우 궁금했지만 소은은 쉽게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 아이를 보면 잊고 싶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쉽게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던, 그래서 때로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날카롭기만 하던 그 아이가 붉은 눈시울로 제게 진실을 말했던 그날이 아직도 뚜렷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안 믿어도 상관없어요. 선생님만, 그냥 선생님만 저 믿어 주시면 전 그걸로 됐어요.’
담호는 분명 떨고 있었다. 그 아이만큼은 두려움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우둔하고 한심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된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너무 무거워 이제 더는 피해 갈 방법조차 없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담호였다.
“어? 어. 나는 뭐, 그럭저럭. 너는?”
마지막 말은 빼는 것이 더 좋았을걸. 소은은 생각할 틈도 없이 내뱉어진 제 말에 금세 후회를 했다. 담호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띠워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저도 뭐, 그럭저럭…….”
또다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조심성도 없이 유영했다. 이번엔 소은이 용기 내어 먼저 입술을 떼어 냈다.
“넌 크게 변한 게 없다. 키가 좀 크고 어깨만 넓어진 것 같아.”
“선생님은 좀 늙으신 것 같아요.”
예상치도 못한 담호의 반격에 소은이 크게 당황하며 제 얼굴을 감쌌다.
“그렇지? 많이 늙었지? 그럴 만도……. 널 처음 봤을 때 이십 대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삼십 대 중반에 진입했으니.”
환히 웃을 수 없었다. 콕 집어 좀 늙었다고 말하는 담호에게 눈가의 주름을 들킬까 싶어서. 담호가 천천히 제 앞에 놓인 커피 잔을 가져가 입술을 축이고 내려놓았다.
“그래도 여전히…… 예쁘시네요.”
갑작스러운 담호의 말에 당황해서 “응?” 하고 물었지만 다시 한번 대답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예전에도 담호가 했던 예쁘다는 말에 이렇게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분명, 있었다.
“결혼은 하셨어요?”
“아니, 아직.”
“그분하고는 아직도 사귀시는 거예요?”
소은은 자신을 완벽하게 담고 있는 담호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예전에도 담호는 소은의 시선을 절대 피하는 법이 없었다.
“아니. 헤어졌어.”
쓸쓸하게 변해 가는 소은의 표정에 담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죄송해요. 이런 개인적인 질문…… 기분 나쁘셨죠?”
“지나간 일인데, 뭐.”
소은이 낮게 고개를 내저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 순간에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담호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싼 이 무거운 공기를 깨트리고 싶었다.
“근데 의외야, 널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는 줄은 알았는데, 너 원래 자동차에 관심 많았잖아.”
커피 잔을 매만지는 담호의 어깨 너머의 창문으로 다사로운 햇살이 들어와 주변을 밝게 물들였다. 담호의 입꼬리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거잖아요.”
“응?”
“계속 생각했어요. 이쪽 분야에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지 않을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말을 끊은 그가 낮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소은을 마주 봤다. 어느새, 그의 건조했던 눈동자엔 따뜻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 속엔 여린 소년, 담호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요.”
1. 너는 나의 꿈이다
2006년.
봄을 맞이한 교정은 갓 피어난 꽃들로 아름다웠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꽃샘추위 때문에 봄에 대한 그리움으로 절실했는데 이렇게 선뜻 찾아와 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들과 따뜻한 바람을 만끽하며 나부끼는 꽃들을 설레는 눈길로 살피며 소은은 걸음을 재촉했다.
소은이 첫 부임한 학교는 경기도 부근에 있는 남자 고등학교, 유동고등학교였다. 동창생들은 하필이면 처음부터 드센 남자 고등학교에 부임을 하게 되었냐며 안타까워했지만, 소은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내리막길을 걷다가 오르막길을 걷는 것보다는, 오르막길을 걷다가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니까.
이곳에서 힘겹게 경험을 쌓으면 어딜 가든 쉽게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힘찬 발걸음으로 학교로 들어가는 아이들에게 대뜸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이들의 시선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누구야?”
“몰라.”
아차, 나 오늘 첫 등교지.
소은은 아이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멋쩍게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일전에 잠시 들렀다가 간 덕분에 교무실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소은처럼 오늘부터 첫 근무를 하기로 한 다른 선생님들은 벌써 와서 모여 앉아 있었다.
“정 선생님!”
자신의 성 뒤에 붙여지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교생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선생님’은 자신이 아닌 부모님이 간절히 원하던 직업이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뿌듯함이나 자부심 같은 건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나 듣기 좋은 걸 보면 말이다.
“교감 선생님께서 다른 선생님들 소개시켜 주신다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래요.”
“아…….”
이제 동기가 될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은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분명 학창 시절에 겪었던 교무실과 비슷한 분위기인데, 왠지 느낌만은 달랐다.
“자, 모두들 여기 봐요.”
어느새 교무실로 들어온 교감 선생님은 간단하게 선생님들을 인사시키고 각자의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소은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쓱 쓸어 만졌다.
“정소은 선생?”
“안녕하세요!”
소은은 긴장된 몸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가워요, 고연지라고 해요.”
고연지 선생님은 소은이 부담임을 맡은 2학년 7반의 담임으로, 소은의 사수나 다름없었다.
“잘 부탁해요. 나 대신 종종 조회나 종례도 좀 가 주고.”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지금 나랑 반에 좀 올라가 볼까? 애들한테 인사도 할 겸.”
“네! 잠시만요!”
혹시 몰라 챙겨 온 다이어리를 품에 안고 고 선생님을 따라 반으로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갈 때마다 몸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1화
프롤로그
소은은 빌딩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깨끗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바람에 흐트러졌던 머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가다듬는 손끝이 여실히 떨려 왔다. 어제 새벽에 결심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긴장을 하지 말자고 되새겼는데 입이 버석하게 말라 왔다. 소은은 자신의 약한 정신 상태를 다시 한번 인정해야 했다.
“정소은. 정신 바짝 차리자.”
사람들은 말했다. 왜 그 좋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버리고 적지 않은 나이에 회사에 들어가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소은에게 ‘쥬얼리 디자이너’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 왔던 간절한 꿈이었다. 이제, 그 꿈을 이루어 자유롭고 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남들에게 보여 주기에만 좋은 직업이고 실상 학교는 총성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선생님을 하면서 보람찬 일보다는 상처가 더 많았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은이 고개를 들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빌딩을 바라보았다.
세 번의 도전 끝에 간신히 합격한 쥬얼리 브랜드 ‘Top Queen’은 인터넷 쇼핑몰로 시작하여 5년 만에 다른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무섭게 성장한 회사로, 현재는 쥬얼리 시장에서 막대한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이곳은 소은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직장이요, 꿈의 동산인 곳이었다.
소은은 안내 데스크로 가서 합격 통지서를 보여 주었고 직원의 도움으로 게이트를 지나 승강기에 올라탔다. 여전히 떨리는 마음에 호흡이 꽤 불규칙했다. Top Queen의 사무실이 위치한 14층에 승강기가 멈추고 소은이 내렸다.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엔 조명이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쥬얼리들을 밝히고 있었다. 동화 속을 걷는 기분을 만끽하며 마침내,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연거푸 긴장 어린 숨을 내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막 출근을 했는지 몇몇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소은을 발견하고는 일체 하던 일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정소은이라고 합니다.”
신입 사원치고는 꽤 있어 보이는 나이에 직원들은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누구 하나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는데 뒷문이 열리고 일정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요, 정소은 씨.”
뒤에서 들려오는 말간 여자 목소리에 소은이 등을 돌렸다. 차가운 인상의 여자는 소은의 면접을 봤던 면접관 중 한 명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사, 이유경이에요.”
악수를 청하는 유경을 향해, 소은은 예의 바르게 두 손을 뻗어 잡았다.
“자, 여기 주목.”
유경의 한마디에 직원들이 아예 몸을 제 쪽으로 틀자 가뜩이나 주목받고 있던 소은은 더 큰 부담감을 느꼈다. 선생님 일을 하면서 주목받는 건 익숙해졌다 자부했는데, 이렇게 긴장이 되는 것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정소은 씨다. 신입 사원이지만, 너희들보다 나이가 좀 있으니 모두들 예의를 갖추도록 해.”
유경의 말에 직원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경은 소은과 함께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로 다가가 이름과 직급을 소개해 주었다.
“이리 와요. 자리 안내해 줄게요.”
“네!”
소개를 끝낸 유경을 따라가는 동안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눈빛에 소은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목례로 대신했다.
“여기예요.”
책상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T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책상에 유경의 왼쪽 옆자리라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데리고 가르쳐 줄 게 많을 것 같아서 일부러 내 옆자리로 배치했어요. 괜찮죠?”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저로서는 너무 영광이죠.”
소은의 말에 유경이 흐뭇해하는 미소를 지었다가 얼른 감추었다.
“오늘 대표님은 안 나오세요. 일본으로 출장을 가셨거든요. 모레쯤 오시니까, 그때 인사드려요.”
“네.”
“우리 아이들이 낯가림도 심하고 소극적인 편이라 그렇지, 텃세 같은 건 안 부리는 애들이에요.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네.”
“아차, 이 대리는?”
유경이 자신의 오른쪽 자리, 즉 비어 있는 소은의 앞자리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이 대리님 오늘 본점 다녀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어제저녁에 왔던 컴플레인 손님 때문에요.”
“역시 발 빠른 이 대리야.”
얼핏 바라본 빈자리에 ‘이담호 대리’라고 써져 있는 것이 보였다. 흔하지 않은 이름에 소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 담호는 아니겠지?
물에 젖은 머릿결, 산산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교정에서 언제나 자신을 극심히도 메마른 눈동자로 바라보던 그 아이.
담호를 생각하다가 실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바보. 성이 다르잖아. 그 아인 이담호가 아니라 박담호였잖아…….
잠시나마 담호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지우며 소은은 유경이 건네준 서류를 받았다.
“일단, 일주일 정도는 우리 Top Queen에서 팔고 있는 쥬얼리들의 종류와 가격을 공부하고 홈페이지의 게시판 담당을 좀 해 줬으면 싶어요.”
“네.”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받은 서류와 열심히 비교해 보고 게시판에 질문, 불평을 하는 손님들에게 댓글을 달고 있을 때였다.
“대리님 오셨어요?”
한 여직원의 상냥한 목소리에 소은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대리는 이미 비어 있던 소은의 앞자리에 와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와 익숙한 분위기. 자신만큼이나 확장된 동공 크기.
남자 선생님들조차도 부러워했던 날렵한 턱 선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도톰한 붉은 입술, 작위적이지 않은 오뚝한 콧날과 선명한 인중.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속 쌍꺼풀과 길고 짙게 흐트러진 속눈썹, 부드러운 머릿결의…….
담호.
정말, 소은이 알고 있는 그 아이였다.
“선생님……?”
미세하게 떨려 오는 그의 작은 음성에도 사무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한꺼번에 그들에게로 쏟아졌다. 소은은 사적인 이유로 쏟아진 이목이 반갑지 않았고 제 앞에 있는 담호와의 만남 또한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담호야.”
어색한 감정이 고스란히 목소리에 드러났다. 담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기고선 말없이 소은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예전처럼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을 만큼 까맣고 깊었다. 그럼에도 제게 할 말이 많아 보여 쉽게 피할 수도 없었다.
“뭐야? 이 대리랑 소은 씨랑 아는 사이예요?”
둘 사이에 앉아 있던 유경의 질문에 소은은 그제야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담호의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네. 저 첫 취임했을 때 맡았던 반 학생이었어요.”
“어머나, 예전의 사제지간이 이번엔 직장 선후배 사이로 만난 거야? 사람 인연이라는 거 참 신기하다, 신기해.”
유경은 감탄을 하며 담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두 사람 꽤 오랜만에 만나는 거 같은데, 나가서 커피 한 잔이라도 하고 와.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한 30분 정도?”
“네. 감사합니다, 이사님.”
괜찮다고 말하려던 소은은 바로 들려오는 담호의 목소리에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유경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평범한 사제지간이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묘했다.
“잠깐 나갔다 오죠.”
앞장서 나가 버리는 담호를 따라나섰다. 언제나 자신의 뒤에서 소리 없이 따라오던 아이가 어느새 이만큼 자라,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다는 것이 소은은 씁쓸하면서도 신기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소은은 휴게실 문을 열어 주는 담호를 스쳐 지나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아이를 연상케 하는 희미한 비누향이 났던 담호에게선 더 이상 그 냄새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강한 남자의 냄새, 시트러스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커피 드실 거죠?”
어딘가 모르게 차갑지만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응? 응.”
어른스럽지 못하게 불편한 티를 내고 말았다. 휴게실 안은 지나치게 조용해 커피 기계가 요란하게 돌아가고 커피가 내려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주변을 채웠다. 두 손에 커피를 든 담호가 곁으로 다가와 한 잔을 소은의 앞에 놓아 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향긋한 아메리카노를 들이마시며 소은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앞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담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매우 궁금했지만 소은은 쉽게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 아이를 보면 잊고 싶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쉽게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던, 그래서 때로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날카롭기만 하던 그 아이가 붉은 눈시울로 제게 진실을 말했던 그날이 아직도 뚜렷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안 믿어도 상관없어요. 선생님만, 그냥 선생님만 저 믿어 주시면 전 그걸로 됐어요.’
담호는 분명 떨고 있었다. 그 아이만큼은 두려움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우둔하고 한심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된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너무 무거워 이제 더는 피해 갈 방법조차 없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담호였다.
“어? 어. 나는 뭐, 그럭저럭. 너는?”
마지막 말은 빼는 것이 더 좋았을걸. 소은은 생각할 틈도 없이 내뱉어진 제 말에 금세 후회를 했다. 담호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띠워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저도 뭐, 그럭저럭…….”
또다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조심성도 없이 유영했다. 이번엔 소은이 용기 내어 먼저 입술을 떼어 냈다.
“넌 크게 변한 게 없다. 키가 좀 크고 어깨만 넓어진 것 같아.”
“선생님은 좀 늙으신 것 같아요.”
예상치도 못한 담호의 반격에 소은이 크게 당황하며 제 얼굴을 감쌌다.
“그렇지? 많이 늙었지? 그럴 만도……. 널 처음 봤을 때 이십 대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삼십 대 중반에 진입했으니.”
환히 웃을 수 없었다. 콕 집어 좀 늙었다고 말하는 담호에게 눈가의 주름을 들킬까 싶어서. 담호가 천천히 제 앞에 놓인 커피 잔을 가져가 입술을 축이고 내려놓았다.
“그래도 여전히…… 예쁘시네요.”
갑작스러운 담호의 말에 당황해서 “응?” 하고 물었지만 다시 한번 대답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예전에도 담호가 했던 예쁘다는 말에 이렇게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분명, 있었다.
“결혼은 하셨어요?”
“아니, 아직.”
“그분하고는 아직도 사귀시는 거예요?”
소은은 자신을 완벽하게 담고 있는 담호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예전에도 담호는 소은의 시선을 절대 피하는 법이 없었다.
“아니. 헤어졌어.”
쓸쓸하게 변해 가는 소은의 표정에 담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죄송해요. 이런 개인적인 질문…… 기분 나쁘셨죠?”
“지나간 일인데, 뭐.”
소은이 낮게 고개를 내저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 순간에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담호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싼 이 무거운 공기를 깨트리고 싶었다.
“근데 의외야, 널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는 줄은 알았는데, 너 원래 자동차에 관심 많았잖아.”
커피 잔을 매만지는 담호의 어깨 너머의 창문으로 다사로운 햇살이 들어와 주변을 밝게 물들였다. 담호의 입꼬리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거잖아요.”
“응?”
“계속 생각했어요. 이쪽 분야에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지 않을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말을 끊은 그가 낮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소은을 마주 봤다. 어느새, 그의 건조했던 눈동자엔 따뜻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 속엔 여린 소년, 담호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요.”
1. 너는 나의 꿈이다
2006년.
봄을 맞이한 교정은 갓 피어난 꽃들로 아름다웠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꽃샘추위 때문에 봄에 대한 그리움으로 절실했는데 이렇게 선뜻 찾아와 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들과 따뜻한 바람을 만끽하며 나부끼는 꽃들을 설레는 눈길로 살피며 소은은 걸음을 재촉했다.
소은이 첫 부임한 학교는 경기도 부근에 있는 남자 고등학교, 유동고등학교였다. 동창생들은 하필이면 처음부터 드센 남자 고등학교에 부임을 하게 되었냐며 안타까워했지만, 소은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내리막길을 걷다가 오르막길을 걷는 것보다는, 오르막길을 걷다가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니까.
이곳에서 힘겹게 경험을 쌓으면 어딜 가든 쉽게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힘찬 발걸음으로 학교로 들어가는 아이들에게 대뜸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이들의 시선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누구야?”
“몰라.”
아차, 나 오늘 첫 등교지.
소은은 아이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멋쩍게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일전에 잠시 들렀다가 간 덕분에 교무실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소은처럼 오늘부터 첫 근무를 하기로 한 다른 선생님들은 벌써 와서 모여 앉아 있었다.
“정 선생님!”
자신의 성 뒤에 붙여지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교생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선생님’은 자신이 아닌 부모님이 간절히 원하던 직업이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뿌듯함이나 자부심 같은 건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나 듣기 좋은 걸 보면 말이다.
“교감 선생님께서 다른 선생님들 소개시켜 주신다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래요.”
“아…….”
이제 동기가 될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소은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분명 학창 시절에 겪었던 교무실과 비슷한 분위기인데, 왠지 느낌만은 달랐다.
“자, 모두들 여기 봐요.”
어느새 교무실로 들어온 교감 선생님은 간단하게 선생님들을 인사시키고 각자의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소은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쓱 쓸어 만졌다.
“정소은 선생?”
“안녕하세요!”
소은은 긴장된 몸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가워요, 고연지라고 해요.”
고연지 선생님은 소은이 부담임을 맡은 2학년 7반의 담임으로, 소은의 사수나 다름없었다.
“잘 부탁해요. 나 대신 종종 조회나 종례도 좀 가 주고.”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지금 나랑 반에 좀 올라가 볼까? 애들한테 인사도 할 겸.”
“네! 잠시만요!”
혹시 몰라 챙겨 온 다이어리를 품에 안고 고 선생님을 따라 반으로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갈 때마다 몸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