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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한 ‘il primo amore’를 찾는 일은 쉬웠다.
동창회 모임 때문인지 ‘Close’ 푯말이 걸려 있는 레스토랑 안에는 벌써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송시온스럽게 모던하면서도 깔끔했다.
과하지도, 촌스럽지도 않은 레스토랑 안을 바라보는 다미의 입술 밖으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10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다미의 기억 장치에 오류가 생기거나 포맷이 되지 않는 이상 송시온이라는 존재는 평생 원수라는 키워드로 인식되어 반응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다미는 목을 길게 빼서는 연신 안을 살펴보았다. 어디에 있는 건지 시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무의식중에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주최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미는 애써 태연하게 이제 막 도착한 척 팔을 추켜들어 어색한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미야!”
앉아 있던 친구들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정신없이 안부를 묻는 와중에도 그녀의 신경은 온통 시온의 자취를 향해 떠돌았다.
“어? 밖에 비 오네.”
한 친구의 말에 다미의 시선이 창밖으로 옮겨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리지 않던 비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말하는 낭만치고는 꽤 사납게 몰아붙이고 있는 비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공다미.”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뚫고 뒤에서 들려오는 담백하지만 결코 달갑지 않은 목소리에 다미가 잔뜩 경직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다.”
혹여 우연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던, 꿈에서조차 만나고 싶지 않았던 송시온이 눈앞에 서 있었다.
1화
다미는 유난히도 개를 좋아했다.
동네에 떠도는 개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소시지라도 사서 먹여야 적성이 풀렸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소시지를 한 움큼 사서 동네 개들을 찾아 먹이고 같이 뛰어놀았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늦었다!”
오늘이 자신의 2학년 첫 등교 날이란 사실을.
“얘들아, 나 갈게. 내일 아침에 또 봐!”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다미는 급하게 버스에 올라탔다. 등교 시간이 지나서인지 버스는 무서울 정도로 한산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악, 넥타이! 명찰!
목과 가슴 쪽을 더듬거렸다. 또 깜빡했다.
큰일이다. 이번에 걸리면 주말 처벌 확정인데!
이제 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혀라도 콱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멀리서 엎드려뻗친 학생들을 개 패듯이 패고 있는 학주의 모습이 보였다.
차라리 오늘 학교를 가지 말까? 그랬다가는 엄마한테 엄청 맞겠지?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내적 갈등에 혼란스러워하며 재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마침 허둥지둥 뛰어가고 있는 덩치 큰 남학생 둘을 발견한 다미가 최대한 몸을 수그린 채 그들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아이들을 때리느라 정신이 없는 학주와 다른 학생들을 잡고 있는 선도부를 피해 막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나려는 그 순간!
쿵, 하고 머리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선도부와 학주에게 신경이 쏠려 앞을 보지 않고 있던 다미가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어? 넘, 넘어간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손을 누군가가 잡아 준 덕분에 대참사를 피하긴 했지만 하필이면 그 손이 소굴의 출구를 지키고 있던 다른 악마의 것이었다니.
“학교에 놀러 오냐? 상태가 이게 뭐야?”
다그치듯 말한 송시온이 빠르게 덧붙였다.
“넥타이 2점, 명찰 1점.”
송시온은 1학년 때부터 선배들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벌점을 매기기로 유명했다. 물론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유명한 건 아니었지만.
벌점을 적고 있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다미의 귓가로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할 말이라도 있어?”
“나, 너랑 같은 반이야.”
갑자기 이 말이 왜 튀어나온 것일까. 다미는 그에게 왜 이런 말을 뱉었는지도 모른 채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잔뜩 기대한 얼굴로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는 그의 건조한 눈빛만이 다미에게 와 닿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내 말은…….”
“같은 반이니까 좀 봐 달라고?”
염치 때문에 억누르고 있던 본색이 성급하게 터져 나왔음을 다미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 모습이 멋있다기보다는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해 보였다.
“그럼 넌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뭐?”
“널 봐줬다가 내가 학주한테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건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널 봐주면 너도 나한테 뭔가를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그게 우리가 사는 평등 사회의 이치지.”
“원하는 게 뭔데?”
“내가 무엇을 원하든 다 들어주는 것.”
악랄한 그의 제안에 다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싫으면 말고.”
“저기, 나 돈 같은 거 없는데?”
다미의 대답에 시온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돈 안 들고 이상한 일만 아니라면…….”
“그건 내가 장담할게.”
그래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 갈등하고 있을 때 그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학주 이쪽으로 온다. 빨리 결정해 줄래? 한 배에 탈지, 아니면 그냥 바다에 빠질지.”
다미가 힐끔, 뒤를 살폈다. 학주가 성인 남자의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막대기를 공중에서 휙휙 돌리며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급한 마음에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저질러 버렸다.
“한 배에 탈래!”
그 배에 올라타는 순간, 목적지까지 노를 젓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 될 것이라는 끔직한 미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제 무덤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송시온이라는 악마와의 거래는 그렇게 성사되었다.
* * *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시온의 외모는 여전했다. 고등학교 때 사방으로 풍기고 다녔던 묘한 분위기와 티끌하나 없는 피부마저 그대로였다.
지금 제 시야를 채운 그는 어느 누가 보아도 호감이 들 정도로 멋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라고, 공다미.”
아무 말 없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다미를 보며 시온이 다시 한 번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어 말했다.
“나 기억 안 나?”
부정을 하는 것은 곧 거짓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다미는 내키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인지 시온의 구겨진 미간은 제자리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미는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냈다.
“2학년 선도 부장이었잖아, 너.”
2학년 앞에 ‘악랄한’을 붙이려다가 꾹 참았다. 이쯤 기억했으면 됐다 싶어 몸을 돌려 빈자리에 앉으려는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기에 쉽게 입에 올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다미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시온의 입술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내 이름, 잊었어?”
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을 잊는다고 해도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절대 잊을 리 없었다. 너무나 찬란해서 어른이 되면 매일같이 그리워해야 하는 학창 시절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으로 만들어 버린 악마 같은 놈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넌 내게 별 시답지 않은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응. 사실 이름은 기억 안 나. 미안.”
싱거울 정도로 간단한 다미의 대답에 시온의 구겨졌던 미간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의외의 반응에 당황한 건 다미였다.
“그런 것 같더라.”
“뭐?”
“너 원래 머리 나쁘잖아.”
미련 없이 다미를 지나친 시온이 친구들의 곁으로 다가가 들고 있던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도 먹어 봐. 버터 레몬 소스를 곁들인 관자 구이야.”
시온의 말에 친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정말 제대로 고급지다!”
“대박 맛있어! 나 이렇게 비싸고 맛있는 요리 진짜 처음 먹어 봐!”
“저희의 입과 눈을 호강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 셰프님.”
두 손까지 모으며 시온에게 온갖 아부를 떨고 있는 여자 셋은 고등학교 시절 ‘시온 예찬’이라는 이름으로 팬클럽을 운영했던 아이들이었다. 매일 우유와 빵을 바치고 학 천 마리를 접어서 전해 주는 것도 모자라 몰래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던 참 할 일 없었던 아이들.
그녀들의 극성맞은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내저으며 비소를 짓고 있는 다미의 귓가로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테리어 구경하러 왔냐? 와서 빨리 먹어. 식으면 맛없으니까.”
“학교에 놀러 오냐? 상태가 이게 뭐야?”
10년 전, 교문 앞에서 자신을 처음 마주했던 시온이 했던 말이 이명처럼 쟁쟁 울려 퍼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지난날의 잔해에 다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다미야. 거기서 뭐해? 얼른 와서 먹어 봐. 너무 맛있어!”
“어서 와, 다미야!”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들이 해맑게 다미를 향해 손짓했다. 그 사이에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으며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는 시온의 모습이 보였다.
됐어, 내 회비만 생각하자.
다미가 메고 있던 가방과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았다. 포크를 들고 급하게 관자 하나를 쿡, 찍을 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내가 오늘 가게에서 줄 수 있는 건 다 줄게.”
송시온, 너 오늘 죽었어. 레스토랑 문 닫을 생각해. 내가 전부 다 먹어 치울 거니까!
다미가 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눈앞에 있는 음식들을 빠른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다미야, 와인도 마셔 봐. 향이 너무 좋아.”
옆에 있던 친구가 다미의 빈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고마워.”
마침 갈증이 났던 다미가 순식간에 잔을 비우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순간 시온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미 역시 곱지 않은 눈길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자 유난히도 선명한 그의 까만 눈동자가 다미와 빈 와인 잔을 조용히 번갈아 보았다.
“누가 와인을 그렇게 무식하게 마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무식하다는 말과 그 목소리의 주인이 시온이라는 이유로 발끈한 다미가 그에게 말했다.
“한 번도 안 마셔 봐서 그런다, 됐냐?”
“너희 방송국에선 와인도 한 번 안 사 주고 뭘 사 주냐? 그거 얼마나 한다고.”
“우리 팀원이 몇 명인데 와인을 마시겠니?”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온실 속에서 자란 놈한테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다미는 10년 전처럼 열불이 났다.
냉랭해진 분위기에 친구 한 명이 맛있는 고기나 먹으라며 썰어 준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던 다미가 무언가 번뜩 떠올랐는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때까지도 시온의 시선은 다미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 눈빛이 싫었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짙고 깊은, 자신의 행동을 집요하게 쫓던 눈동자가.
“너 근데.”
“…….”
“나 방송국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다미의 질문에 모두의 관심이 시온에게 쏟아졌다. 이런 이목과 관심쯤은 익숙한 시온이 팔짱을 끼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 오기 전에 애들이 말해 줘서 알았어, 왜.”
“아…….”
“그래도 대학 가서는 공부 좀 열심히 했나 봐. 작가까지 하고. 난 네가 커서 과연 뭐 해 먹고 살까 참 심란했었는데.”
딱히 대응할 말이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교 하위권에는 항상 다미가 있었다. 대학도 못 갈 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생님의 말에 3학년 때는 정말 죽어라 공부만 했다. 성적은 눈에 띄게 오르지 않았지만 대학은 갈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속을 긁어 대는 시온을 마주 보고 있자니 다미의 속이 더욱 용암처럼 끓기 시작했다.
“네가 내 걱정을 다 하네.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건가?”
“의외이긴 하지. 우리 방귀 대장 다다미가 작가라니!”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시온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던 다미의 목소리는 한 친구의 말에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다들 방귀 대장이라는 말에 폭소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듣기 싫은 별명에 치를 떨며 다미가 원인 제공자인 시온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녀의 한 서린 눈빛을 눈치챘는지 그는 웃는 둥 마는 둥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여덟 살. 그날 일만 생각하면 열불이 나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다미였다.
그 사건은 자신의 기억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었던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박박 지워 버리고 싶은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다미는 짝사랑 중이었다.
상대는 다른 반 남학생으로 다미와 같은 학원을 다녔고, 시온처럼 선도부였다. 규칙에서 어긋나는 일이라면 조금도 봐주는 것 없이 매의 눈으로 잡아내던 시온과는 다르게 안면이 있는 친구라고 몰래 봐주기도 했던 인정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아이를 좋아할 만한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주말에 처벌 대상으로 벌을 받고 교실에 올라왔던 다미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양호실이었고, 선도부였던 정윤이 곁에 있었다.
동창회 모임 때문인지 ‘Close’ 푯말이 걸려 있는 레스토랑 안에는 벌써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송시온스럽게 모던하면서도 깔끔했다.
과하지도, 촌스럽지도 않은 레스토랑 안을 바라보는 다미의 입술 밖으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10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다미의 기억 장치에 오류가 생기거나 포맷이 되지 않는 이상 송시온이라는 존재는 평생 원수라는 키워드로 인식되어 반응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다미는 목을 길게 빼서는 연신 안을 살펴보았다. 어디에 있는 건지 시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무의식중에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주최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미는 애써 태연하게 이제 막 도착한 척 팔을 추켜들어 어색한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미야!”
앉아 있던 친구들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정신없이 안부를 묻는 와중에도 그녀의 신경은 온통 시온의 자취를 향해 떠돌았다.
“어? 밖에 비 오네.”
한 친구의 말에 다미의 시선이 창밖으로 옮겨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리지 않던 비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말하는 낭만치고는 꽤 사납게 몰아붙이고 있는 비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공다미.”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뚫고 뒤에서 들려오는 담백하지만 결코 달갑지 않은 목소리에 다미가 잔뜩 경직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다.”
혹여 우연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던, 꿈에서조차 만나고 싶지 않았던 송시온이 눈앞에 서 있었다.
1화
다미는 유난히도 개를 좋아했다.
동네에 떠도는 개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소시지라도 사서 먹여야 적성이 풀렸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소시지를 한 움큼 사서 동네 개들을 찾아 먹이고 같이 뛰어놀았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늦었다!”
오늘이 자신의 2학년 첫 등교 날이란 사실을.
“얘들아, 나 갈게. 내일 아침에 또 봐!”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다미는 급하게 버스에 올라탔다. 등교 시간이 지나서인지 버스는 무서울 정도로 한산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악, 넥타이! 명찰!
목과 가슴 쪽을 더듬거렸다. 또 깜빡했다.
큰일이다. 이번에 걸리면 주말 처벌 확정인데!
이제 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혀라도 콱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멀리서 엎드려뻗친 학생들을 개 패듯이 패고 있는 학주의 모습이 보였다.
차라리 오늘 학교를 가지 말까? 그랬다가는 엄마한테 엄청 맞겠지?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내적 갈등에 혼란스러워하며 재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마침 허둥지둥 뛰어가고 있는 덩치 큰 남학생 둘을 발견한 다미가 최대한 몸을 수그린 채 그들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아이들을 때리느라 정신이 없는 학주와 다른 학생들을 잡고 있는 선도부를 피해 막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나려는 그 순간!
쿵, 하고 머리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선도부와 학주에게 신경이 쏠려 앞을 보지 않고 있던 다미가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어? 넘, 넘어간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손을 누군가가 잡아 준 덕분에 대참사를 피하긴 했지만 하필이면 그 손이 소굴의 출구를 지키고 있던 다른 악마의 것이었다니.
“학교에 놀러 오냐? 상태가 이게 뭐야?”
다그치듯 말한 송시온이 빠르게 덧붙였다.
“넥타이 2점, 명찰 1점.”
송시온은 1학년 때부터 선배들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벌점을 매기기로 유명했다. 물론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유명한 건 아니었지만.
벌점을 적고 있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다미의 귓가로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할 말이라도 있어?”
“나, 너랑 같은 반이야.”
갑자기 이 말이 왜 튀어나온 것일까. 다미는 그에게 왜 이런 말을 뱉었는지도 모른 채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잔뜩 기대한 얼굴로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는 그의 건조한 눈빛만이 다미에게 와 닿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내 말은…….”
“같은 반이니까 좀 봐 달라고?”
염치 때문에 억누르고 있던 본색이 성급하게 터져 나왔음을 다미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 모습이 멋있다기보다는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해 보였다.
“그럼 넌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뭐?”
“널 봐줬다가 내가 학주한테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건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널 봐주면 너도 나한테 뭔가를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그게 우리가 사는 평등 사회의 이치지.”
“원하는 게 뭔데?”
“내가 무엇을 원하든 다 들어주는 것.”
악랄한 그의 제안에 다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싫으면 말고.”
“저기, 나 돈 같은 거 없는데?”
다미의 대답에 시온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돈 안 들고 이상한 일만 아니라면…….”
“그건 내가 장담할게.”
그래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 갈등하고 있을 때 그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학주 이쪽으로 온다. 빨리 결정해 줄래? 한 배에 탈지, 아니면 그냥 바다에 빠질지.”
다미가 힐끔, 뒤를 살폈다. 학주가 성인 남자의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막대기를 공중에서 휙휙 돌리며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급한 마음에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저질러 버렸다.
“한 배에 탈래!”
그 배에 올라타는 순간, 목적지까지 노를 젓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 될 것이라는 끔직한 미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제 무덤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송시온이라는 악마와의 거래는 그렇게 성사되었다.
* * *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시온의 외모는 여전했다. 고등학교 때 사방으로 풍기고 다녔던 묘한 분위기와 티끌하나 없는 피부마저 그대로였다.
지금 제 시야를 채운 그는 어느 누가 보아도 호감이 들 정도로 멋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라고, 공다미.”
아무 말 없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다미를 보며 시온이 다시 한 번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어 말했다.
“나 기억 안 나?”
부정을 하는 것은 곧 거짓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다미는 내키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인지 시온의 구겨진 미간은 제자리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미는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냈다.
“2학년 선도 부장이었잖아, 너.”
2학년 앞에 ‘악랄한’을 붙이려다가 꾹 참았다. 이쯤 기억했으면 됐다 싶어 몸을 돌려 빈자리에 앉으려는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기에 쉽게 입에 올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다미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시온의 입술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내 이름, 잊었어?”
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을 잊는다고 해도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절대 잊을 리 없었다. 너무나 찬란해서 어른이 되면 매일같이 그리워해야 하는 학창 시절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으로 만들어 버린 악마 같은 놈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넌 내게 별 시답지 않은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응. 사실 이름은 기억 안 나. 미안.”
싱거울 정도로 간단한 다미의 대답에 시온의 구겨졌던 미간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의외의 반응에 당황한 건 다미였다.
“그런 것 같더라.”
“뭐?”
“너 원래 머리 나쁘잖아.”
미련 없이 다미를 지나친 시온이 친구들의 곁으로 다가가 들고 있던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도 먹어 봐. 버터 레몬 소스를 곁들인 관자 구이야.”
시온의 말에 친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 정말 제대로 고급지다!”
“대박 맛있어! 나 이렇게 비싸고 맛있는 요리 진짜 처음 먹어 봐!”
“저희의 입과 눈을 호강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 셰프님.”
두 손까지 모으며 시온에게 온갖 아부를 떨고 있는 여자 셋은 고등학교 시절 ‘시온 예찬’이라는 이름으로 팬클럽을 운영했던 아이들이었다. 매일 우유와 빵을 바치고 학 천 마리를 접어서 전해 주는 것도 모자라 몰래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던 참 할 일 없었던 아이들.
그녀들의 극성맞은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내저으며 비소를 짓고 있는 다미의 귓가로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테리어 구경하러 왔냐? 와서 빨리 먹어. 식으면 맛없으니까.”
“학교에 놀러 오냐? 상태가 이게 뭐야?”
10년 전, 교문 앞에서 자신을 처음 마주했던 시온이 했던 말이 이명처럼 쟁쟁 울려 퍼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지난날의 잔해에 다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다미야. 거기서 뭐해? 얼른 와서 먹어 봐. 너무 맛있어!”
“어서 와, 다미야!”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들이 해맑게 다미를 향해 손짓했다. 그 사이에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으며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는 시온의 모습이 보였다.
됐어, 내 회비만 생각하자.
다미가 메고 있던 가방과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았다. 포크를 들고 급하게 관자 하나를 쿡, 찍을 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내가 오늘 가게에서 줄 수 있는 건 다 줄게.”
송시온, 너 오늘 죽었어. 레스토랑 문 닫을 생각해. 내가 전부 다 먹어 치울 거니까!
다미가 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눈앞에 있는 음식들을 빠른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다미야, 와인도 마셔 봐. 향이 너무 좋아.”
옆에 있던 친구가 다미의 빈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고마워.”
마침 갈증이 났던 다미가 순식간에 잔을 비우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순간 시온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미 역시 곱지 않은 눈길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자 유난히도 선명한 그의 까만 눈동자가 다미와 빈 와인 잔을 조용히 번갈아 보았다.
“누가 와인을 그렇게 무식하게 마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무식하다는 말과 그 목소리의 주인이 시온이라는 이유로 발끈한 다미가 그에게 말했다.
“한 번도 안 마셔 봐서 그런다, 됐냐?”
“너희 방송국에선 와인도 한 번 안 사 주고 뭘 사 주냐? 그거 얼마나 한다고.”
“우리 팀원이 몇 명인데 와인을 마시겠니?”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온실 속에서 자란 놈한테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다미는 10년 전처럼 열불이 났다.
냉랭해진 분위기에 친구 한 명이 맛있는 고기나 먹으라며 썰어 준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던 다미가 무언가 번뜩 떠올랐는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때까지도 시온의 시선은 다미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 눈빛이 싫었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짙고 깊은, 자신의 행동을 집요하게 쫓던 눈동자가.
“너 근데.”
“…….”
“나 방송국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다미의 질문에 모두의 관심이 시온에게 쏟아졌다. 이런 이목과 관심쯤은 익숙한 시온이 팔짱을 끼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 오기 전에 애들이 말해 줘서 알았어, 왜.”
“아…….”
“그래도 대학 가서는 공부 좀 열심히 했나 봐. 작가까지 하고. 난 네가 커서 과연 뭐 해 먹고 살까 참 심란했었는데.”
딱히 대응할 말이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교 하위권에는 항상 다미가 있었다. 대학도 못 갈 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생님의 말에 3학년 때는 정말 죽어라 공부만 했다. 성적은 눈에 띄게 오르지 않았지만 대학은 갈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속을 긁어 대는 시온을 마주 보고 있자니 다미의 속이 더욱 용암처럼 끓기 시작했다.
“네가 내 걱정을 다 하네.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건가?”
“의외이긴 하지. 우리 방귀 대장 다다미가 작가라니!”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시온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던 다미의 목소리는 한 친구의 말에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다들 방귀 대장이라는 말에 폭소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듣기 싫은 별명에 치를 떨며 다미가 원인 제공자인 시온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녀의 한 서린 눈빛을 눈치챘는지 그는 웃는 둥 마는 둥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여덟 살. 그날 일만 생각하면 열불이 나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다미였다.
그 사건은 자신의 기억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었던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박박 지워 버리고 싶은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다미는 짝사랑 중이었다.
상대는 다른 반 남학생으로 다미와 같은 학원을 다녔고, 시온처럼 선도부였다. 규칙에서 어긋나는 일이라면 조금도 봐주는 것 없이 매의 눈으로 잡아내던 시온과는 다르게 안면이 있는 친구라고 몰래 봐주기도 했던 인정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 아이를 좋아할 만한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주말에 처벌 대상으로 벌을 받고 교실에 올라왔던 다미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양호실이었고, 선도부였던 정윤이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