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선 본 남자 1권 2화
“혹시 남자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아니면 다른 말 못할 사정이라거나…….”
“야가, 시방 무신 소리를 하는 거여. 사람의 양심을 뭘로 아는 겨. 덕순이는 모르겄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여. 엄청이 잘났디야. 아, 훈남이라니께. 만나 볼 것이지? 너도 시집은 가야 할 거 아녀.”
시집이라…… 가긴 가야지.
가긴 가야 하는데 왜 한숨이 먼저 푹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생각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통장 잔고로 향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더라?
‘일금 이천구백칠십팔 원.’
2,978원.
눈물이 난다. 그렇다, 윤미숙은 돈이 없다. 직장 생활을 자그마치 근 십 년 가까이나 하고 있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가진 것 하나 없는지 개털 신세만 나란히 10년째였다. 그냥 가진 것만 없음 그나마 좀 낫겠는데 마이너스 통장에다 농협에 갚아야 할 돈도 수천이나 남아 있는 신세다. 한마디로, 나이 서른에 가진 건 빚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이 바로 나 윤미숙이라는 소리다.
이런 처지에 결혼?
지나가던 똥개가 비웃을 일이었다. 나도 일단은 염치는 있는 인간이라 이런 꼴로는 절대로 결혼한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온 집안을 탈탈 털어도 썩은 장롱 한쪽 값도 안 나올 만큼 어려운 형편에서는 더더욱. 거기에 더해 나쁜 건 통장 잔고만이 아니었다.
‘나 없으면 아부지 진지는 누가 챙겨 드리지? 미주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다 고3이라고 신경이 만날 곤두서 있는데. 무엇보다 혼수 장만할 돈도 없고. 사과 수확 끝나면 농협에 이자 먼저 넣어야 하니까. 미준이 새 학기 등록금에 내년엔 미주도 대학에 들어가니 입학금도 마련해야 하고. 휴우, 그게 다 얼마지?’
아직 내 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가족들과 앞으로도 꾸준히 들어가야 하는 돈.
생각해 보니 나는 그야말로 나쁜 신붓감의 대표적인 예나 다름없었다. 이런 처지로 결혼을 생각하고 선을 보러 나간다는 건 역시 양심이 없는 짓이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당장 남동생의 등록금도 마련하지 못해 골머리를 딱딱 앓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아, 미준이 등록금! 이달 말까지였나? 깜빡 잊고 있었네. 휴, 그건 또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그래도 미준이가 곧 졸업이라 다행이야. 마지막 학기만 지나면 인턴으로 나가겠지? 그럼 미주 등록금만 해결하면 내년엔 좀 살 만해질까?’
좀 살 만해지면 슬슬 결혼을 생각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좀 살 만해지면 동생들 등록금 대느라 생긴 농협 대출금부터 얼른 갚아야지 결혼은 무슨. 빤한 시골 살림이다 보니 갑자기 목돈이 생길 일도 없어서 결국은 내가 또 죽어라 벌어 갚아야 한다. 한두 해 벌어서 갚아질 돈이 아닌 건 물론이다. 상상만으로도 척추가 휘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안 그래도 점점 더 아래로 처져 가던 어깨가 아예 땅속으로 푹 꺼져 버렸다. 다시 한숨이 쏟아졌다. 시집은 무슨. 이젠 쓴웃음도 안 나온다.
“에이, 역시 관둘래요. 공연히 맘 쓰기 싫어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일단 한 번 만나 보기나 혀.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자리라니께.”
“그래도 싫어요.”
“싫기는. 아, 몰러. 주말에 그 총각이 내려온다고 했으니께 무조건 만나 보는 거여. 나 그만 간다잉.”
“예에? 아, 할매! 할매에!”
흡사 도시락 폭탄을 던지듯 자기 할 말만 쏙 해 놓고 정애 할머니가 번개처럼 일어섰다. 그러곤 누가 잡을세라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사라진다. 쫓아가 봐야 이미 늦었다. 웬 노인네가 발이 저렇게 빠른지 할머니는 벌써 북적거리는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5일장이 서는 날이라 내가 일하는 마을금고 앞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온통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난 몰라.”
코가 쏙 빠진 몰골로 나는 울상을 지었다.
안 그래도 바쁜 철에 공연히 귀찮은 일을 만든 듯해 벌써부터 해일 같은 피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냉정한 이성으로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냥 딱 잘라 내는 건데 그랬다.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처녀로 늙을 예정이라고 소리쳐 버릴걸.
“그냥 나가 보지 그래?”
불쑥! 예고도 없이 옆자리에서 둥근 얼굴이 하나 툭 튀어나왔다.
맞선 소리가 나오는 순간부터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후배 자연이 물 만난 고기처럼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답지 않게 오래 참는다 했다. 침이라도 튄 양 손바닥으로 한쪽 볼을 슥 닦으면서 하는 수 없이 돌아보자 조금 민망한 듯 히죽 웃고는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나가. 무조건 나가라, 언니야. 혹시 알우? 할매 말처럼 진짜로 훈남이 나올지?”
“그럼 더 걱정이지. 잘났다고 얼굴값 할 것 아냐?”
“뭐야, 짜증 나게. 거울이나 보고 얘기해. 언니도 충분히 얼굴값 하게 생겼거든요?”
“난 늙었잖아. 여자는 늙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야. 남자는 예쁜 여자보다 한 살이라도 어린 여자를 더 좋아한다고 하더라.”
“정확히 말하면 어리고 예쁜 여자지. 어쨌거나 언니도 그 남자에 비하면 충분히 어리고 예쁘니까 그딴 흰소리는 그만 넣어 두세요. 선볼 거지?”
“휴우, 안 본다고 한들 들어나 주시겠니?”
어쩌겠나. 정애 할머니는 동네 제일의 쇠고집으로 유명하고, 그 고집쟁이 할머니는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졌는데 말이다. 수북한 전표 다발을 툭툭 두드리며 나는 습관적으로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 이래 봬도 엄청 바쁜 사람인데.
“주말엔 밭에 잠깐 나가 보고 청소랑 밀린 빨래를 할 생각이었는데.”
“아악! 언니야, 제발 아줌마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어째 입만 열면 만날 집안일만 한다고 그래.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내내 하는 일 지겹지도 않아? 아니, 만날 하는 일 하루쯤 안 하면 죽는대? 자자, 한숨 고만 쉬고 그냥 하루 외식한다고 생각하고 나가 봐. 응?”
“외식이라…….”
“잘 버는 남자라니까 밥도 비싼 거 사 주지 않겠수? 그리고 어찌어찌 잘되어서 정말로 시집이라도 가면 더 좋고. 그래야 언니의 고생길도 끝날 것 아니야.”
“얘는, 내가 무슨 고생을 한다고 그래?”
남들도 다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고생이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것도 고생이겠다.
흥, 콧방귀를 날려 주고 나는 슬슬 전표를 뒤적거렸다.
아직 어린 자연이야 결혼하면 바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거야말로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결혼한다고 해서 손끝에 물을 안 묻히고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웬 꿈같은 소리. 아니, 결혼해서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 시장통의 아주머니들은 왜 허구한 날 ‘못 살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단 말인가. 나름 멀쩡해 보이는 남편들을 향해 ‘저 망할 인간을 죽이네, 살리네.’ 소리도 곧잘 하더구먼.
‘휴, 결혼이고 자시고 난 우리 미준이 등록금만 해결되면 엄청 행복하겠다.’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아주 날아다니겠다.
한숨이 다시 길어졌다. 사과를 본격적으로 따려면 아직 한 달 보름은 더 있어야 하는데 등록금은 이달 말까지 넣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달이 월세도 보내 줘야 하고. 그나마도 미준이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비싼 책값이며 제 용돈 정도는 해결하니 다행이었다. 물론 마지막 학기라는 게 제일로 다행이지만 말이다.
‘그래, 이번 가을만 견디면……! 힘내자, 윤미숙.’
다짐과 함께 전표를 살피는 손이 점점 더 빨라졌다.
이걸 다 정산해야 퇴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빨리 정리하고 집에 가 대충 치우고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야 하루 종일 땡볕 아래에서 일하고 돌아올 아버지와 입시 공부에 지친 막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숙 씨!”
흠칫!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송곳처럼 귀를 찔렀다. 돌아보니 고추장 물을 입은 것마냥 시뻘겋게 번뜩이는 외제차 한 대가 마을로 접어드는 길 한복판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것이 어쩌면 그렇게 거만하게 서 있는지 버스가 별다른 항의 한 번 안 해 보고 부러 멀찍이 빙 돌아갔다. 그 차의 운전석에서 양재호가 느긋한 폼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김치 공장 사장 아들은 참 뻔질나게도 찾아온다잉.”
“그거야 꽃이 있으니까 벌이 꼬이는 건 당연한 거 아녀? 근데 볼수록 김치 공장 아들인지 버터 공장 아들인지 구분이 안 가긴 혀.”
“내 말이.”
같이 내린 동네 아주머니들이 곁을 스쳐 가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처녀 총각 연애라도 하는 줄 알고 조금쯤은 놀려 주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나의 속사정은 그런 사소한 연애 감정 따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
‘저 사이코가 왜 또 왔지?’
대체 왜 자꾸 오는지 알 수 없으나 양재호, 그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 잔잔한 나의 속을 확 뒤집어 놓고 사라지는 인생의 빨간 테이프 같은 존재였다. 호환, 마마, 전쟁보다 무섭다는 그 빨간 테이프. 당연히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에 자동 반응처럼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펴고 나는 인정상 고개만 까딱해 보인 다음 미친 듯이 돌아섰다.
훠이, 물러가라, 낮도깨비야.
“어어, 미숙 씨! 미숙 씨!”
만날 외면당하면서도 외면당했다는 사실에 또 충격받은 얼굴로 그가 후다닥 차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곤 앞만 보고 척척 걸어가는 나의 팔뚝을 성급하게 잡아챘다.
“아, 진짜 이러깁니까?”
“……놓으세요.”
“얘기 좀 하자고요.”
“아, 네. 하세요…… 라고 할 줄 알았어요? 그쪽이랑은 할 얘기도 없고 듣고 싶은 말도 없으니까 이 팔 놓고 얼른 갈 길이나 가세요.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엄청 피곤하거든요.”
“혹시 남자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아니면 다른 말 못할 사정이라거나…….”
“야가, 시방 무신 소리를 하는 거여. 사람의 양심을 뭘로 아는 겨. 덕순이는 모르겄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여. 엄청이 잘났디야. 아, 훈남이라니께. 만나 볼 것이지? 너도 시집은 가야 할 거 아녀.”
시집이라…… 가긴 가야지.
가긴 가야 하는데 왜 한숨이 먼저 푹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생각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통장 잔고로 향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더라?
‘일금 이천구백칠십팔 원.’
2,978원.
눈물이 난다. 그렇다, 윤미숙은 돈이 없다. 직장 생활을 자그마치 근 십 년 가까이나 하고 있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가진 것 하나 없는지 개털 신세만 나란히 10년째였다. 그냥 가진 것만 없음 그나마 좀 낫겠는데 마이너스 통장에다 농협에 갚아야 할 돈도 수천이나 남아 있는 신세다. 한마디로, 나이 서른에 가진 건 빚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이 바로 나 윤미숙이라는 소리다.
이런 처지에 결혼?
지나가던 똥개가 비웃을 일이었다. 나도 일단은 염치는 있는 인간이라 이런 꼴로는 절대로 결혼한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온 집안을 탈탈 털어도 썩은 장롱 한쪽 값도 안 나올 만큼 어려운 형편에서는 더더욱. 거기에 더해 나쁜 건 통장 잔고만이 아니었다.
‘나 없으면 아부지 진지는 누가 챙겨 드리지? 미주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다 고3이라고 신경이 만날 곤두서 있는데. 무엇보다 혼수 장만할 돈도 없고. 사과 수확 끝나면 농협에 이자 먼저 넣어야 하니까. 미준이 새 학기 등록금에 내년엔 미주도 대학에 들어가니 입학금도 마련해야 하고. 휴우, 그게 다 얼마지?’
아직 내 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가족들과 앞으로도 꾸준히 들어가야 하는 돈.
생각해 보니 나는 그야말로 나쁜 신붓감의 대표적인 예나 다름없었다. 이런 처지로 결혼을 생각하고 선을 보러 나간다는 건 역시 양심이 없는 짓이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당장 남동생의 등록금도 마련하지 못해 골머리를 딱딱 앓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아, 미준이 등록금! 이달 말까지였나? 깜빡 잊고 있었네. 휴, 그건 또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그래도 미준이가 곧 졸업이라 다행이야. 마지막 학기만 지나면 인턴으로 나가겠지? 그럼 미주 등록금만 해결하면 내년엔 좀 살 만해질까?’
좀 살 만해지면 슬슬 결혼을 생각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좀 살 만해지면 동생들 등록금 대느라 생긴 농협 대출금부터 얼른 갚아야지 결혼은 무슨. 빤한 시골 살림이다 보니 갑자기 목돈이 생길 일도 없어서 결국은 내가 또 죽어라 벌어 갚아야 한다. 한두 해 벌어서 갚아질 돈이 아닌 건 물론이다. 상상만으로도 척추가 휘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안 그래도 점점 더 아래로 처져 가던 어깨가 아예 땅속으로 푹 꺼져 버렸다. 다시 한숨이 쏟아졌다. 시집은 무슨. 이젠 쓴웃음도 안 나온다.
“에이, 역시 관둘래요. 공연히 맘 쓰기 싫어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일단 한 번 만나 보기나 혀.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자리라니께.”
“그래도 싫어요.”
“싫기는. 아, 몰러. 주말에 그 총각이 내려온다고 했으니께 무조건 만나 보는 거여. 나 그만 간다잉.”
“예에? 아, 할매! 할매에!”
흡사 도시락 폭탄을 던지듯 자기 할 말만 쏙 해 놓고 정애 할머니가 번개처럼 일어섰다. 그러곤 누가 잡을세라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사라진다. 쫓아가 봐야 이미 늦었다. 웬 노인네가 발이 저렇게 빠른지 할머니는 벌써 북적거리는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5일장이 서는 날이라 내가 일하는 마을금고 앞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온통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난 몰라.”
코가 쏙 빠진 몰골로 나는 울상을 지었다.
안 그래도 바쁜 철에 공연히 귀찮은 일을 만든 듯해 벌써부터 해일 같은 피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냉정한 이성으로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냥 딱 잘라 내는 건데 그랬다.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처녀로 늙을 예정이라고 소리쳐 버릴걸.
“그냥 나가 보지 그래?”
불쑥! 예고도 없이 옆자리에서 둥근 얼굴이 하나 툭 튀어나왔다.
맞선 소리가 나오는 순간부터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후배 자연이 물 만난 고기처럼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답지 않게 오래 참는다 했다. 침이라도 튄 양 손바닥으로 한쪽 볼을 슥 닦으면서 하는 수 없이 돌아보자 조금 민망한 듯 히죽 웃고는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나가. 무조건 나가라, 언니야. 혹시 알우? 할매 말처럼 진짜로 훈남이 나올지?”
“그럼 더 걱정이지. 잘났다고 얼굴값 할 것 아냐?”
“뭐야, 짜증 나게. 거울이나 보고 얘기해. 언니도 충분히 얼굴값 하게 생겼거든요?”
“난 늙었잖아. 여자는 늙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야. 남자는 예쁜 여자보다 한 살이라도 어린 여자를 더 좋아한다고 하더라.”
“정확히 말하면 어리고 예쁜 여자지. 어쨌거나 언니도 그 남자에 비하면 충분히 어리고 예쁘니까 그딴 흰소리는 그만 넣어 두세요. 선볼 거지?”
“휴우, 안 본다고 한들 들어나 주시겠니?”
어쩌겠나. 정애 할머니는 동네 제일의 쇠고집으로 유명하고, 그 고집쟁이 할머니는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졌는데 말이다. 수북한 전표 다발을 툭툭 두드리며 나는 습관적으로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 이래 봬도 엄청 바쁜 사람인데.
“주말엔 밭에 잠깐 나가 보고 청소랑 밀린 빨래를 할 생각이었는데.”
“아악! 언니야, 제발 아줌마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어째 입만 열면 만날 집안일만 한다고 그래.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내내 하는 일 지겹지도 않아? 아니, 만날 하는 일 하루쯤 안 하면 죽는대? 자자, 한숨 고만 쉬고 그냥 하루 외식한다고 생각하고 나가 봐. 응?”
“외식이라…….”
“잘 버는 남자라니까 밥도 비싼 거 사 주지 않겠수? 그리고 어찌어찌 잘되어서 정말로 시집이라도 가면 더 좋고. 그래야 언니의 고생길도 끝날 것 아니야.”
“얘는, 내가 무슨 고생을 한다고 그래?”
남들도 다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고생이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것도 고생이겠다.
흥, 콧방귀를 날려 주고 나는 슬슬 전표를 뒤적거렸다.
아직 어린 자연이야 결혼하면 바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거야말로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결혼한다고 해서 손끝에 물을 안 묻히고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웬 꿈같은 소리. 아니, 결혼해서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 시장통의 아주머니들은 왜 허구한 날 ‘못 살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단 말인가. 나름 멀쩡해 보이는 남편들을 향해 ‘저 망할 인간을 죽이네, 살리네.’ 소리도 곧잘 하더구먼.
‘휴, 결혼이고 자시고 난 우리 미준이 등록금만 해결되면 엄청 행복하겠다.’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아주 날아다니겠다.
한숨이 다시 길어졌다. 사과를 본격적으로 따려면 아직 한 달 보름은 더 있어야 하는데 등록금은 이달 말까지 넣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달이 월세도 보내 줘야 하고. 그나마도 미준이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비싼 책값이며 제 용돈 정도는 해결하니 다행이었다. 물론 마지막 학기라는 게 제일로 다행이지만 말이다.
‘그래, 이번 가을만 견디면……! 힘내자, 윤미숙.’
다짐과 함께 전표를 살피는 손이 점점 더 빨라졌다.
이걸 다 정산해야 퇴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빨리 정리하고 집에 가 대충 치우고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야 하루 종일 땡볕 아래에서 일하고 돌아올 아버지와 입시 공부에 지친 막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숙 씨!”
흠칫!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송곳처럼 귀를 찔렀다. 돌아보니 고추장 물을 입은 것마냥 시뻘겋게 번뜩이는 외제차 한 대가 마을로 접어드는 길 한복판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것이 어쩌면 그렇게 거만하게 서 있는지 버스가 별다른 항의 한 번 안 해 보고 부러 멀찍이 빙 돌아갔다. 그 차의 운전석에서 양재호가 느긋한 폼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김치 공장 사장 아들은 참 뻔질나게도 찾아온다잉.”
“그거야 꽃이 있으니까 벌이 꼬이는 건 당연한 거 아녀? 근데 볼수록 김치 공장 아들인지 버터 공장 아들인지 구분이 안 가긴 혀.”
“내 말이.”
같이 내린 동네 아주머니들이 곁을 스쳐 가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처녀 총각 연애라도 하는 줄 알고 조금쯤은 놀려 주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나의 속사정은 그런 사소한 연애 감정 따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
‘저 사이코가 왜 또 왔지?’
대체 왜 자꾸 오는지 알 수 없으나 양재호, 그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 잔잔한 나의 속을 확 뒤집어 놓고 사라지는 인생의 빨간 테이프 같은 존재였다. 호환, 마마, 전쟁보다 무섭다는 그 빨간 테이프. 당연히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에 자동 반응처럼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펴고 나는 인정상 고개만 까딱해 보인 다음 미친 듯이 돌아섰다.
훠이, 물러가라, 낮도깨비야.
“어어, 미숙 씨! 미숙 씨!”
만날 외면당하면서도 외면당했다는 사실에 또 충격받은 얼굴로 그가 후다닥 차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곤 앞만 보고 척척 걸어가는 나의 팔뚝을 성급하게 잡아챘다.
“아, 진짜 이러깁니까?”
“……놓으세요.”
“얘기 좀 하자고요.”
“아, 네. 하세요…… 라고 할 줄 알았어요? 그쪽이랑은 할 얘기도 없고 듣고 싶은 말도 없으니까 이 팔 놓고 얼른 갈 길이나 가세요.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엄청 피곤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