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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5화
“아이고, 왔나 봐.”
입구에서 서성이던 마담 할머니의 외침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모자를 쓴 탓에 얼굴보다 막 문턱을 넘어온, 짙은 은회색 슈트에 휘감긴 기다란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바짓단 끝에서 매끈하게 닦인 까만 구두가 햇볕을 받아 반짝 빛을 뿌렸다. 문득 눈이 부신 듯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나는 발끝부터 천천히 더듬어 올라갔다. 남자는 생각보다 다리가 참 길었다. 적어도 키가 작아서 결혼을 못한 건 아니라고 주장하듯 길게 뻗은 두 다리가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서 있었다.
긴 다리 끝에서 역시 슈트에 휘감긴, 늘씬하면서도 단단한 허리 라인이 나타났다.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았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 뱃살이나 지나치게 헐렁해서 천이 남아도는 허접한 모습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옷 위로 드러난 선이 꽤 단단하면서도 날렵해 보이는 것이 몸매 하나는 정말로 미끈하게 잘빠진 사람 같았다. 그 사실에 괜히 감동하며 나는 남몰래 입술을 씹었다. 간신히 식어 가던 얼굴이 도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비즈니스 슈트에 잘 닦인 구두.
‘망해 먹을!’
그가 주름 하나 없는 깔끔한 양복에 새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잠시 잊고 있던 민망함이 다시 해일처럼 밀려왔다. 윤미숙, 이 바보. 원피스 하나 정도는 그냥 남겨 둘걸. 이른 아침부터 뭐하러 그렇게 잔뜩 부지런을 떨어서는…….
‘내가 잘못했소이다. 나를 향해 돌을 던지시오. 너무 힘껏 던지지만 않으면 내 기꺼이 맞아 주겠소.’
갑작스러운 죄책감에 몸이 다 떨렸다.
아무리 싫었어도 그렇지 너무 무성의한 모습으로 나왔다고 예의 따윈 두엄 밭에 버리고 왔냐는 소리를 들을까 봐 벌써부터 간이 조마조마했다. 너무 쪽팔려도 지레 심장마비 같은 건 일으키지 말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울상이 된 얼굴로 오늘따라 더 후줄근하게 보이는 티셔츠를 매만지며 나는 슬그머니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고장 난 스프링 인형처럼 몸이 저절로 벌떡 솟구쳤다.
예상보다 키가 훤칠하게 큰 사람이었던 터라 몸을 일으키고도 모자라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서야 나는 비로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순간 숨이 멎었다.
‘우워어어어억!’
그것은 매우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피할 새도 없이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렸다. 눈을 잔뜩 부릅뜨고 입까지 벌린 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무심코 본 얼굴 하나에 여린 신경줄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동공이 확 열렸다.
시, 심봤다!
저 멀리서 ‘훈남이랴.’ 하던 정애 할머니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정말이다. 정애 할머니의 말이 맞았다. 아니, 오히려 모자라다.
‘훈남’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선명한 이목구비였다.
남자답지만 너무 깨끗해서 잡티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에 숯덩이처럼 새카만 눈썹과 넓고 반듯한 이마, 우뚝 솟은 콧날은 명암이 선명하고, 가늘게 쌍꺼풀 진 긴 눈꺼풀 속에서는 흑단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무심히 빛나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훤한 얼굴이었다.
얼굴에도 품격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이제야 둥실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후줄근한 다방 안이 갑자기 환해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남자의 머리 뒤에서 일렁이는 찬란한 후광을 보았다. 할렐루야!
‘후아, 후아.’
쿵쾅쿵쾅.
미친 듯이 심장이 널을 뛰고 갑자기 호흡곤란도 찾아왔다. 그는 마치 잡지 속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너무 잘생겨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살아생전 그처럼 잘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벌컥거리며 피를 확 토해 내는 심장 때문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고 관자놀이에선 계곡물처럼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잔뜩 긴장한 등줄기를 따라 촉촉한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 어지러워.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시달리며 생각했다.
‘절대로 맞선을 보러 온 사람이 아닐 거야.’
막말로, 저런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이 시골까지 선을 보러 오나.
길바닥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여자들이 파리 꼬이듯 꼬일 텐데 서른셋이나 되도록 장가를 못 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장담하건대 그는 결코 내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 아닌가?”
엄청난 미모와 분위기에 압도당했는지 정애 할머니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 모습까지 보자 진한 안도감과 함께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무지막지한 실망감이 찾아왔다.
아니, 실망이라니? 어차피 차만 마시고 헤어지기로 결심한 주제에 웬 실망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윤미숙. 넌 차여야 돼!’
지나치게 상반된 감정 앞에서 스스로도 갈팡질팡하며 나는 무너지듯 스르르 주저앉았다. 주저앉고 나서야 이 숨 막히는 안도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래, 저 잘생긴 남자가 상대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덕분에 죽었다 깨어나도 그에게 차일 일은 없지 않나.
‘하긴, 윤미숙 팔자에 저런 훈남은 가당치도 않지.’
스스로의 생각에 나는 즉각 수긍했다.
애당초 남자는 나의 이상형과도 아주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대놓고 평범한 남자가 좋았다. 너무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직장,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성격과 평범한 가족을 가진 같은 지역사회 출신의 남자. 평균보다 조금 모자라는 내가 들어가도 전혀 티가 나지 않을 만큼 평범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과 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생각은 길고 시간은 짧았다.
그사이에도 남자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애타는 바람과 달리 그는 긴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와 마침내 내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윤미숙 씨?”
“헉!”
아부지 맙소사!
기겁을 하고 놀라 나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또 펄쩍 뛰어올랐다. 우르르. 난데없이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 들려온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라 발랄하게 찢어지는 그 노랫소리였으니…….
―마주치는 눈빛이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그으은∼ 아아, 사랑인가 봐.
“딸꾹!”
아니, 그 노래는 이제 그만 좀…….
벌써 여섯 번이나 들었는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정쩡하게 마담 할머니를 돌아보자 그녀는 또 어색하게 웃었다.
“전축도 고장 났어야. 뭐가 불만인지 어제부터 자꾸 한 노래 또 하고 또 하고 지랄이네.”
할머니, 그건 고장이 난 게 아니라 그냥 무한 반복 버튼이 눌린 거예요.
어느새 꾹 움켜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난다더니 내가 딱 그랬다. 아, 이놈의 더러운 팔자. 이제 나 윤미숙은 꼼짝없이 저 무섭게 잘생긴 남자와 마주 앉아야만 했다. 스스로 정해 놓은, 그 뻔한 결말을 온몸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저, 점심 아직 안 드셨죠?”
그렇게 내지른 것은 불행하게도 윤미숙 본인이었다.
어지간하면 차나 한 잔 하고 찢어지자고, 시간 아깝게 밥상 놓고 마주 앉지 말자고 다짐했던 일이 무색하게시리 입에선 아주 쉽게도 밥 소리가 나왔다. 아니,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식은땀 뻘뻘 흘려 가며 한참 동안 고민을 한 다음 맘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을 한 후에야 마치 생사대결을 하듯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선 스스로도 놀랄 만큼 엄청나게 당황하고 말았다.
흥분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짧은 순간 뒷수습에 골몰해 보았다. 그러나 거기서 뭐라 더 말할 새도 없이 남자가 먼저 몸을 일으켰고 나는 또 아주 당연한 수순처럼 밥집을 향해 앞장을 서게 되었다. 상황이 거기까지 발전하자 정말로 눈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쓰인다 뿐이지 밥 먹는 일이 뭐 어려울까 마는 일도 일 나름이었다.
‘미숙아, 저런 남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밥을 먹을 생각이니, 넌? 으응? 먹을 때 소리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밥알을 목구멍 너머로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애타는 시선으로 곁에서 느긋한 자세로 걷고 있는 남자를 흘긋거렸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더 잘생겨 보였다. 무엇보다 숱 많은 눈썹과 긴 눈매,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 선이 덮치고 싶을 만큼 아찔하게 다가왔다. 그 섬세한 선 하나만 놓고 봐도 어지간한 귀인의 뺨을 치고 남을 것 같았다.
눈에 띌 만큼 훤칠한 키에 자세도 얼마나 단정하고 반듯한지 무심히 내뻗는 손길 하나조차도 점잖고 우아해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까지만 해도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그 모든 것들을 하찮게 만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분위기까지 가지고 있는 거다. 그것은 그냥 가진 자의 여유 정도가 아닌 위압감, 혹은 카리스마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그래, 그거다.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한 마리의 미끈한 표범.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당당히 맞으면서 끝끝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한 마리 맹수를 상상하며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생긴 건 딱 귀족이요 선비인데 선뜻 다가오는 첫 느낌은 무서울 만큼 야성적인 사람이었다. 그 지극히 상반된 분위기에 힘입어 냉정하고 차가운 카리스마로 주변을 압도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또 다른 의미로 나는 그가 무서워졌다.
“아이고, 왔나 봐.”
입구에서 서성이던 마담 할머니의 외침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모자를 쓴 탓에 얼굴보다 막 문턱을 넘어온, 짙은 은회색 슈트에 휘감긴 기다란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바짓단 끝에서 매끈하게 닦인 까만 구두가 햇볕을 받아 반짝 빛을 뿌렸다. 문득 눈이 부신 듯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나는 발끝부터 천천히 더듬어 올라갔다. 남자는 생각보다 다리가 참 길었다. 적어도 키가 작아서 결혼을 못한 건 아니라고 주장하듯 길게 뻗은 두 다리가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서 있었다.
긴 다리 끝에서 역시 슈트에 휘감긴, 늘씬하면서도 단단한 허리 라인이 나타났다.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았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 뱃살이나 지나치게 헐렁해서 천이 남아도는 허접한 모습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옷 위로 드러난 선이 꽤 단단하면서도 날렵해 보이는 것이 몸매 하나는 정말로 미끈하게 잘빠진 사람 같았다. 그 사실에 괜히 감동하며 나는 남몰래 입술을 씹었다. 간신히 식어 가던 얼굴이 도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비즈니스 슈트에 잘 닦인 구두.
‘망해 먹을!’
그가 주름 하나 없는 깔끔한 양복에 새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잠시 잊고 있던 민망함이 다시 해일처럼 밀려왔다. 윤미숙, 이 바보. 원피스 하나 정도는 그냥 남겨 둘걸. 이른 아침부터 뭐하러 그렇게 잔뜩 부지런을 떨어서는…….
‘내가 잘못했소이다. 나를 향해 돌을 던지시오. 너무 힘껏 던지지만 않으면 내 기꺼이 맞아 주겠소.’
갑작스러운 죄책감에 몸이 다 떨렸다.
아무리 싫었어도 그렇지 너무 무성의한 모습으로 나왔다고 예의 따윈 두엄 밭에 버리고 왔냐는 소리를 들을까 봐 벌써부터 간이 조마조마했다. 너무 쪽팔려도 지레 심장마비 같은 건 일으키지 말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울상이 된 얼굴로 오늘따라 더 후줄근하게 보이는 티셔츠를 매만지며 나는 슬그머니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고장 난 스프링 인형처럼 몸이 저절로 벌떡 솟구쳤다.
예상보다 키가 훤칠하게 큰 사람이었던 터라 몸을 일으키고도 모자라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서야 나는 비로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순간 숨이 멎었다.
‘우워어어어억!’
그것은 매우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피할 새도 없이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렸다. 눈을 잔뜩 부릅뜨고 입까지 벌린 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무심코 본 얼굴 하나에 여린 신경줄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동공이 확 열렸다.
시, 심봤다!
저 멀리서 ‘훈남이랴.’ 하던 정애 할머니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정말이다. 정애 할머니의 말이 맞았다. 아니, 오히려 모자라다.
‘훈남’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선명한 이목구비였다.
남자답지만 너무 깨끗해서 잡티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에 숯덩이처럼 새카만 눈썹과 넓고 반듯한 이마, 우뚝 솟은 콧날은 명암이 선명하고, 가늘게 쌍꺼풀 진 긴 눈꺼풀 속에서는 흑단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무심히 빛나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훤한 얼굴이었다.
얼굴에도 품격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이제야 둥실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후줄근한 다방 안이 갑자기 환해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남자의 머리 뒤에서 일렁이는 찬란한 후광을 보았다. 할렐루야!
‘후아, 후아.’
쿵쾅쿵쾅.
미친 듯이 심장이 널을 뛰고 갑자기 호흡곤란도 찾아왔다. 그는 마치 잡지 속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너무 잘생겨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살아생전 그처럼 잘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벌컥거리며 피를 확 토해 내는 심장 때문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고 관자놀이에선 계곡물처럼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잔뜩 긴장한 등줄기를 따라 촉촉한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 어지러워.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시달리며 생각했다.
‘절대로 맞선을 보러 온 사람이 아닐 거야.’
막말로, 저런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이 시골까지 선을 보러 오나.
길바닥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여자들이 파리 꼬이듯 꼬일 텐데 서른셋이나 되도록 장가를 못 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장담하건대 그는 결코 내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 아닌가?”
엄청난 미모와 분위기에 압도당했는지 정애 할머니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 모습까지 보자 진한 안도감과 함께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무지막지한 실망감이 찾아왔다.
아니, 실망이라니? 어차피 차만 마시고 헤어지기로 결심한 주제에 웬 실망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윤미숙. 넌 차여야 돼!’
지나치게 상반된 감정 앞에서 스스로도 갈팡질팡하며 나는 무너지듯 스르르 주저앉았다. 주저앉고 나서야 이 숨 막히는 안도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래, 저 잘생긴 남자가 상대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덕분에 죽었다 깨어나도 그에게 차일 일은 없지 않나.
‘하긴, 윤미숙 팔자에 저런 훈남은 가당치도 않지.’
스스로의 생각에 나는 즉각 수긍했다.
애당초 남자는 나의 이상형과도 아주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대놓고 평범한 남자가 좋았다. 너무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직장,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성격과 평범한 가족을 가진 같은 지역사회 출신의 남자. 평균보다 조금 모자라는 내가 들어가도 전혀 티가 나지 않을 만큼 평범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과 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생각은 길고 시간은 짧았다.
그사이에도 남자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애타는 바람과 달리 그는 긴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와 마침내 내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윤미숙 씨?”
“헉!”
아부지 맙소사!
기겁을 하고 놀라 나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또 펄쩍 뛰어올랐다. 우르르. 난데없이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 들려온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라 발랄하게 찢어지는 그 노랫소리였으니…….
―마주치는 눈빛이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그으은∼ 아아, 사랑인가 봐.
“딸꾹!”
아니, 그 노래는 이제 그만 좀…….
벌써 여섯 번이나 들었는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정쩡하게 마담 할머니를 돌아보자 그녀는 또 어색하게 웃었다.
“전축도 고장 났어야. 뭐가 불만인지 어제부터 자꾸 한 노래 또 하고 또 하고 지랄이네.”
할머니, 그건 고장이 난 게 아니라 그냥 무한 반복 버튼이 눌린 거예요.
어느새 꾹 움켜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난다더니 내가 딱 그랬다. 아, 이놈의 더러운 팔자. 이제 나 윤미숙은 꼼짝없이 저 무섭게 잘생긴 남자와 마주 앉아야만 했다. 스스로 정해 놓은, 그 뻔한 결말을 온몸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저, 점심 아직 안 드셨죠?”
그렇게 내지른 것은 불행하게도 윤미숙 본인이었다.
어지간하면 차나 한 잔 하고 찢어지자고, 시간 아깝게 밥상 놓고 마주 앉지 말자고 다짐했던 일이 무색하게시리 입에선 아주 쉽게도 밥 소리가 나왔다. 아니,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식은땀 뻘뻘 흘려 가며 한참 동안 고민을 한 다음 맘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을 한 후에야 마치 생사대결을 하듯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선 스스로도 놀랄 만큼 엄청나게 당황하고 말았다.
흥분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짧은 순간 뒷수습에 골몰해 보았다. 그러나 거기서 뭐라 더 말할 새도 없이 남자가 먼저 몸을 일으켰고 나는 또 아주 당연한 수순처럼 밥집을 향해 앞장을 서게 되었다. 상황이 거기까지 발전하자 정말로 눈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쓰인다 뿐이지 밥 먹는 일이 뭐 어려울까 마는 일도 일 나름이었다.
‘미숙아, 저런 남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밥을 먹을 생각이니, 넌? 으응? 먹을 때 소리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밥알을 목구멍 너머로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애타는 시선으로 곁에서 느긋한 자세로 걷고 있는 남자를 흘긋거렸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더 잘생겨 보였다. 무엇보다 숱 많은 눈썹과 긴 눈매,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 선이 덮치고 싶을 만큼 아찔하게 다가왔다. 그 섬세한 선 하나만 놓고 봐도 어지간한 귀인의 뺨을 치고 남을 것 같았다.
눈에 띌 만큼 훤칠한 키에 자세도 얼마나 단정하고 반듯한지 무심히 내뻗는 손길 하나조차도 점잖고 우아해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까지만 해도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그 모든 것들을 하찮게 만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분위기까지 가지고 있는 거다. 그것은 그냥 가진 자의 여유 정도가 아닌 위압감, 혹은 카리스마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그래, 그거다.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한 마리의 미끈한 표범.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당당히 맞으면서 끝끝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한 마리 맹수를 상상하며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생긴 건 딱 귀족이요 선비인데 선뜻 다가오는 첫 느낌은 무서울 만큼 야성적인 사람이었다. 그 지극히 상반된 분위기에 힘입어 냉정하고 차가운 카리스마로 주변을 압도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또 다른 의미로 나는 그가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