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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본 남자 1권 8화
Thank you and good night!
사건사고는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햇살을 받으며 저 먼 지평선 너머로 떠나…… 버리고만 싶었다. 젠장, 쪽팔려 죽겠다. 등을 찌르는 그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게 너무 쪽팔려서 눈물은 물론이고 코피까지 터질 것만 같았다.
차마 뒤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땅바닥만 노려보면서 나는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 보니 급한 김에 대강 끼어 신고 나온 신발이 보였다. 운동화다. 망할 운동화가 오늘따라 더 꼬질꼬질하게 보여서 문득 신경질이 났다. 신발은 안 빨았는데 다른 신발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밭에나 신고 다니는 운동화를 끌고 나온 것일까. 해일 같은 후회와 민망함이 뒤늦게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낡고 지저분한 신발을 그 사람도 봤을까?
“봐, 봤겠지?”
눈매도 멋있고 시력도 좋아 보였으니 확실히 보긴 봤을 거였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걸 보고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촌스럽고 조금 덜떨어진데다 지저분하기까지 한 여자? 아니면 말 많고 많이 먹는 지저분한 여자? 어느 쪽, 어느 방향으로 생각해도 비참해지는 건 변함이 없다.
“쪽팔리게.”
왜 부끄러움은 헤어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찾아오는가. 어째서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쪽팔림의 강도가 더 커지는 것인가.
얼굴 마주하고 앉아 있을 때부터 창피함을 알았다면 나도 그렇게 열심히 추태를 부리지 않았을 텐데. 특히 꼬질꼬질 더럽고 허름한 신발이 말도 못하게 창피해서 나는 속으로 울었다. 그런 나를 질책하듯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사납게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2. 폭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들이 사는 세상(2008) 中―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
잔뜩 성이 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앞통수를 후려쳤다.
어처구니없지만 또 양재호다. 부른 사람도 없고 딱히 볼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는 그 시뻘건 차와 함께 잘도 나타나 나를 향해 또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미숙 씨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글쎄요,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세요?”
“하, 기가 막혀서. 몰라서 묻습니까? 선봤다면서요?”
“그랬어요. 그게 왜요?”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그를 멀뚱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더 기가 막히다 못해 아예 뒷골이 당긴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가 소리쳤다.
“몰라서 묻습니까? 지난번에 내가 분명히 진지하게 사귀자고 했잖아요? 그랬습니까, 안 그랬습니까?”
“그랬죠. 그리고 전 분명히 싫다고 했고요.”
“그 얘긴 그만하죠. 어차피 진심이 아니라는 거 아니까. 비싸게 굴고 싶은 마음은 아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죠. 간을 보는 것도 아니고 선까지 보면서 왜 사람 속을 찔러 봐요?”
“…….”
“사귀자고 하니까 갑자기 내가 우습게 보이기라도 합니까? 바라는 게 있으면 차라리 말을 하란 말입니다. 어차피 선을 본 것도 내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받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아부지, 맙소사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이상한 결론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일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구분도 안 가려고 한다. 왜 사냐건 그냥 웃지요. 대답 대신 나는 그냥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표정을 굳히고 나직하게 말했다.
“양재호 씨, 내가 만만하게 보여요?”
“……?”
“만만하게 보여서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찾아와 찌르고 가는 것 같은데, 나 댁이랑 놀아 줄 만큼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내가 분명히 말했죠? 때려죽여도 댁이랑은 연애 안 한다고.”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나 집안일에 밭일에 금고 일까지 해야 돼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라고 매 순간순간이 피곤해서 연애할 기운도 없다고요. 아니, 시간이 있고 기운이 있어도 당신이랑은 안 놀아요. 왜 그런지 알아요?”
“왜, 왜 그런 겁니까?”
정말로 궁금했는지 그가 민망함도 잊고 냉큼 되물었다.
생긴 것답지 않게 이런 방향으로는 의외로 순순하게 구는 인간이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어이가 없어 나는 또 허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양재호 씨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손에 흙 묻혀 가며 일해 본 적 있어요? 가족은 아니지만 아픈 사람을 걱정하느라 잠을 못 잔 적은요? 실수를 하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은 있어요? 우리 동네 버스 기사가 양재호 씨를 싫어하는 이유는 알아요?”
“버스 기사가 나 싫어합니까?”
저 싫어한다는 소리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그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아직 나 싫다는 사람 못 봤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하긴, 못 봤을 거다. 돈을 물 쓰듯 막 써 주는 물주 앞에서 어떤 멍청한 작자가 감히 ‘나 너 재수 없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그냥 표 안 나게 뒤에서만 손가락질을 해 줄 뿐이겠지.
말을 섞고 나니 공연히 기운만 더 빠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왜 이 더운 날 이런 이상한 남자랑 길 한복판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크흠, 그게 답니까?”
“아니요. 더 많은데 말하기가 귀찮아요. 아무튼지 간에 난 이제껏 양재호 씨처럼 이기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하면 너도 당연히 나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
“나요, 정말로 양재호 씨한테 관심 없어요. 제발 부탁이니까 다시는 이렇게 찾아오지 말아 주세요. 우리 아버지가 걱정하시거든요.”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고서도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귀찮은 일을 덜 수 있다면 까짓 얼마든지 더할 수도 있었다. 미안한 마음 따윈 아예 들지도 않는다. 어차피 내가 아니라도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김치 공장 사장 아들이 이번엔 과수원집 딸을 찍었네 마네 하는 소문을 듣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가슴에 대못 한 번 박는 편이 백배는 더 양호한 일이었다. 그러면 안 그래도 피곤한 인생이 더 피곤해지는 일만은 없을 게 아닌가.
“그만 가 보세요.”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진심으로 멍청하게 서 있는 그를 슥 봐 준 다음 그냥 돌아섰다. 등 뒤에서 미동도 않고 서 있는 그를 느끼면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다 예의 시뻘건 외제차를 발견하고 아주 잠깐 멈추어 서서는 마치 비웃듯 툭 말했다.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에 웬 뚜껑 없는 스포츠카. 그 나이를 먹고도 그러고 다니는 거 엄청 한심해 보이는 거 알아요?”
제발 철 좀 들어라, 인간아.
탁탁한 집안의 3대독자로 태어나 이제껏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아왔다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서울로 원정까지 다니며 논다거나, 시시때때로 여자가 바뀐다거나, 비싼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건 뭐 취향이라고 하니 그렇다고 치자. 취향이면 취향이지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왜 남들 일할 시간에 팽팽 놀고 놀다가 심심하면 찾아와 나를 걸고 넘어져 귀찮게 하느냔 말이다.
“누굴 동네북으로 아나. 왜 심심하면 찾아와서 두드려 대니, 두드려 대길. 하여간에 이래저래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완벽하게 지친 몰골로 나는 낮게 투덜거렸다.
밭일을 하고 온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피곤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등 근육까지 뻐근해서 일이고 뭐고 다 밀어 두고 그냥 눕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물론, 이건 양재호 때문이 아니다. 문제의 맞선, 솜털 끝까지 긴장한 채 보낸 그 세 시간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워서 질질 끌리는 발걸음마다 아까 헤어지고 온 남자의 얼굴이 맴돌았다. 양재호가 아니라 그 선본 남자. 고은후라고 했었다, 그 훈남의 이름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칼처럼 뻗어 올라간 눈썹, 한밤의 바다 같은 깊은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물린 입술 하나까지도 너무 반듯하고 훈훈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볼일이 없다는 게 진심으로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참 잘나긴 했지라.”
새삼스러운 감회에 사로잡혀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잘생긴 남자가 고급 양복을 입고 누런 장판 위에 반듯하게 앉아서 내가 불판에 볶아 준 밥을 먹었다. 내가 가위로 썩썩 잘라 준 싸구려 돼지갈비도 먹었다.
갑자기 고개가 푹 꺾였다.
“윤미숙이, 미쳤었구먼.”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도 못할 만큼 넋이 나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니 환심을 좀 사 보자고 없는 돈에 고기까지 사 먹인 게 아닌가.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쪽팔려 하는 건 또 뭐지? 되돌아볼수록 스스로의 행동이 너무 촌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어차피 촌것이니 촌스러운 것이야 당연한 건데 그 사람이 너무 잘나서 훨씬 더 촌스럽게 보였을까 봐 짜증 난다.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또 나타난 양재호에게 보통 때보다 더 짜증을 부린 것은 주제도 잊고 그 남자에게 강아지처럼 살살거린 스스로가 너무 민망한 탓인 게다.
“잊자. 무조건 잊는 거야. 윤미숙은 오늘 선을 안 봤다. 절대로 안 본 거다. 레드 썬!”
벌겋게 달아오른 두 뺨을 꽉 움켜쥐고 실성한 듯이 중얼거렸다. 훈남을 한 번 본 것으로 나의 운은 다했다. 그러니 이제 필사적으로 잊어야 한다. 얼른 잊고 안구 수준을 도로 영농 총각들에게 맞춰 놓고 또 살아가야지. 기억을 털어 버리듯 머리를 홰홰 털어 내고 다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Thank you and good night!
사건사고는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햇살을 받으며 저 먼 지평선 너머로 떠나…… 버리고만 싶었다. 젠장, 쪽팔려 죽겠다. 등을 찌르는 그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게 너무 쪽팔려서 눈물은 물론이고 코피까지 터질 것만 같았다.
차마 뒤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땅바닥만 노려보면서 나는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 보니 급한 김에 대강 끼어 신고 나온 신발이 보였다. 운동화다. 망할 운동화가 오늘따라 더 꼬질꼬질하게 보여서 문득 신경질이 났다. 신발은 안 빨았는데 다른 신발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밭에나 신고 다니는 운동화를 끌고 나온 것일까. 해일 같은 후회와 민망함이 뒤늦게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낡고 지저분한 신발을 그 사람도 봤을까?
“봐, 봤겠지?”
눈매도 멋있고 시력도 좋아 보였으니 확실히 보긴 봤을 거였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걸 보고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촌스럽고 조금 덜떨어진데다 지저분하기까지 한 여자? 아니면 말 많고 많이 먹는 지저분한 여자? 어느 쪽, 어느 방향으로 생각해도 비참해지는 건 변함이 없다.
“쪽팔리게.”
왜 부끄러움은 헤어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찾아오는가. 어째서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쪽팔림의 강도가 더 커지는 것인가.
얼굴 마주하고 앉아 있을 때부터 창피함을 알았다면 나도 그렇게 열심히 추태를 부리지 않았을 텐데. 특히 꼬질꼬질 더럽고 허름한 신발이 말도 못하게 창피해서 나는 속으로 울었다. 그런 나를 질책하듯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사납게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2. 폭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들이 사는 세상(2008) 中―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
잔뜩 성이 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앞통수를 후려쳤다.
어처구니없지만 또 양재호다. 부른 사람도 없고 딱히 볼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는 그 시뻘건 차와 함께 잘도 나타나 나를 향해 또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미숙 씨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글쎄요,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세요?”
“하, 기가 막혀서. 몰라서 묻습니까? 선봤다면서요?”
“그랬어요. 그게 왜요?”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그를 멀뚱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더 기가 막히다 못해 아예 뒷골이 당긴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가 소리쳤다.
“몰라서 묻습니까? 지난번에 내가 분명히 진지하게 사귀자고 했잖아요? 그랬습니까, 안 그랬습니까?”
“그랬죠. 그리고 전 분명히 싫다고 했고요.”
“그 얘긴 그만하죠. 어차피 진심이 아니라는 거 아니까. 비싸게 굴고 싶은 마음은 아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죠. 간을 보는 것도 아니고 선까지 보면서 왜 사람 속을 찔러 봐요?”
“…….”
“사귀자고 하니까 갑자기 내가 우습게 보이기라도 합니까? 바라는 게 있으면 차라리 말을 하란 말입니다. 어차피 선을 본 것도 내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받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아부지, 맙소사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이상한 결론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일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구분도 안 가려고 한다. 왜 사냐건 그냥 웃지요. 대답 대신 나는 그냥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표정을 굳히고 나직하게 말했다.
“양재호 씨, 내가 만만하게 보여요?”
“……?”
“만만하게 보여서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찾아와 찌르고 가는 것 같은데, 나 댁이랑 놀아 줄 만큼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내가 분명히 말했죠? 때려죽여도 댁이랑은 연애 안 한다고.”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나 집안일에 밭일에 금고 일까지 해야 돼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라고 매 순간순간이 피곤해서 연애할 기운도 없다고요. 아니, 시간이 있고 기운이 있어도 당신이랑은 안 놀아요. 왜 그런지 알아요?”
“왜, 왜 그런 겁니까?”
정말로 궁금했는지 그가 민망함도 잊고 냉큼 되물었다.
생긴 것답지 않게 이런 방향으로는 의외로 순순하게 구는 인간이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어이가 없어 나는 또 허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양재호 씨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손에 흙 묻혀 가며 일해 본 적 있어요? 가족은 아니지만 아픈 사람을 걱정하느라 잠을 못 잔 적은요? 실수를 하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은 있어요? 우리 동네 버스 기사가 양재호 씨를 싫어하는 이유는 알아요?”
“버스 기사가 나 싫어합니까?”
저 싫어한다는 소리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그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아직 나 싫다는 사람 못 봤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하긴, 못 봤을 거다. 돈을 물 쓰듯 막 써 주는 물주 앞에서 어떤 멍청한 작자가 감히 ‘나 너 재수 없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그냥 표 안 나게 뒤에서만 손가락질을 해 줄 뿐이겠지.
말을 섞고 나니 공연히 기운만 더 빠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왜 이 더운 날 이런 이상한 남자랑 길 한복판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크흠, 그게 답니까?”
“아니요. 더 많은데 말하기가 귀찮아요. 아무튼지 간에 난 이제껏 양재호 씨처럼 이기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하면 너도 당연히 나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
“나요, 정말로 양재호 씨한테 관심 없어요. 제발 부탁이니까 다시는 이렇게 찾아오지 말아 주세요. 우리 아버지가 걱정하시거든요.”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고서도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귀찮은 일을 덜 수 있다면 까짓 얼마든지 더할 수도 있었다. 미안한 마음 따윈 아예 들지도 않는다. 어차피 내가 아니라도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김치 공장 사장 아들이 이번엔 과수원집 딸을 찍었네 마네 하는 소문을 듣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가슴에 대못 한 번 박는 편이 백배는 더 양호한 일이었다. 그러면 안 그래도 피곤한 인생이 더 피곤해지는 일만은 없을 게 아닌가.
“그만 가 보세요.”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진심으로 멍청하게 서 있는 그를 슥 봐 준 다음 그냥 돌아섰다. 등 뒤에서 미동도 않고 서 있는 그를 느끼면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다 예의 시뻘건 외제차를 발견하고 아주 잠깐 멈추어 서서는 마치 비웃듯 툭 말했다.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에 웬 뚜껑 없는 스포츠카. 그 나이를 먹고도 그러고 다니는 거 엄청 한심해 보이는 거 알아요?”
제발 철 좀 들어라, 인간아.
탁탁한 집안의 3대독자로 태어나 이제껏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아왔다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서울로 원정까지 다니며 논다거나, 시시때때로 여자가 바뀐다거나, 비싼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건 뭐 취향이라고 하니 그렇다고 치자. 취향이면 취향이지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왜 남들 일할 시간에 팽팽 놀고 놀다가 심심하면 찾아와 나를 걸고 넘어져 귀찮게 하느냔 말이다.
“누굴 동네북으로 아나. 왜 심심하면 찾아와서 두드려 대니, 두드려 대길. 하여간에 이래저래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완벽하게 지친 몰골로 나는 낮게 투덜거렸다.
밭일을 하고 온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피곤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등 근육까지 뻐근해서 일이고 뭐고 다 밀어 두고 그냥 눕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물론, 이건 양재호 때문이 아니다. 문제의 맞선, 솜털 끝까지 긴장한 채 보낸 그 세 시간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워서 질질 끌리는 발걸음마다 아까 헤어지고 온 남자의 얼굴이 맴돌았다. 양재호가 아니라 그 선본 남자. 고은후라고 했었다, 그 훈남의 이름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칼처럼 뻗어 올라간 눈썹, 한밤의 바다 같은 깊은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물린 입술 하나까지도 너무 반듯하고 훈훈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볼일이 없다는 게 진심으로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참 잘나긴 했지라.”
새삼스러운 감회에 사로잡혀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잘생긴 남자가 고급 양복을 입고 누런 장판 위에 반듯하게 앉아서 내가 불판에 볶아 준 밥을 먹었다. 내가 가위로 썩썩 잘라 준 싸구려 돼지갈비도 먹었다.
갑자기 고개가 푹 꺾였다.
“윤미숙이, 미쳤었구먼.”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도 못할 만큼 넋이 나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니 환심을 좀 사 보자고 없는 돈에 고기까지 사 먹인 게 아닌가.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쪽팔려 하는 건 또 뭐지? 되돌아볼수록 스스로의 행동이 너무 촌스럽게 느껴져서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어차피 촌것이니 촌스러운 것이야 당연한 건데 그 사람이 너무 잘나서 훨씬 더 촌스럽게 보였을까 봐 짜증 난다.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또 나타난 양재호에게 보통 때보다 더 짜증을 부린 것은 주제도 잊고 그 남자에게 강아지처럼 살살거린 스스로가 너무 민망한 탓인 게다.
“잊자. 무조건 잊는 거야. 윤미숙은 오늘 선을 안 봤다. 절대로 안 본 거다. 레드 썬!”
벌겋게 달아오른 두 뺨을 꽉 움켜쥐고 실성한 듯이 중얼거렸다. 훈남을 한 번 본 것으로 나의 운은 다했다. 그러니 이제 필사적으로 잊어야 한다. 얼른 잊고 안구 수준을 도로 영농 총각들에게 맞춰 놓고 또 살아가야지. 기억을 털어 버리듯 머리를 홰홰 털어 내고 다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