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얘…… 효선이야? 효선이…… 맞아?”
“보고도 모르니? 그러게 내가 말했지? 효선이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대학 다닐 때부터 내가 말했잖아. 효선이 걔, 너한테 매번 열등감 폭발하는 애야. 네가 하는 건 걔도 다 하려 들잖아. 네가 둔해서 모른 거고. 걔 아주 작정하고 우리 모임에 들어온 거라는 데에 내 저금통 두 개 몽땅 건다. 불여우 같은 년.”
“효선이가…… 진우가…… 왜…… 어떻게…….”
“진우 이 자식도 이러면 안 되지. 너랑 사귀자고 하면서 얼마나 매달렸니? 효선이 집안 넉넉하고 부모 백 좋은 거 보고 홀라당 발라당 넘어간 거야. 남자 놈들은 다 그래. 효선이 얼굴 붙잡고 있는 진우 손 봐. 절대 얘를 놓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말을 내뱉고 보니 사람 위로하려는 건지 약을 올리려는 건지 저도 헷갈렸는지, 은하는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고 유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유리의 생각은 다른 곳에 맞추어져 있었다. 가슴이 떨렸지만 반대로 평정심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날을 예감한 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내내 한 방향으로만 흐를 수 없다는 것을, 살면서 이미 체득한 바 있다. 무척 잔인한 그 사실 앞에서 아무리 몸을 비틀고 괴로워해 봐야 돌아오는 건 육체의 고달픔과 공허함뿐이다. 그래서 혜진도 한평생 힘들었고, 그걸 지켜본 유리도 늘 불안했다.
하여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철칙을 주었다.
절대 누군가를, 누군가의 마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효선은 또 다른 문제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해 온 오랜 시간이 빛이 바랜 순간이었다. 그 시간 속의 자신, 효선을 믿고 신뢰했던 자신이 몽땅 사라지는 것 같아 참담해졌다.
유리는 손에 쥔 사진들을 바닥으로 흘려보내고 멀거니 시선을 들었다. 그걸 본 은하가 쭈뼛거리다 사진을 모두 주워 담았다.
“유리야. 우선 너랑 나랑 머리를 맞대고 이 사태를…….”
자신의 예술품을 한 장 한 장 챙겨 봉투에 도로 집어넣던 은하는 말을 멈추고 유리를 홱 돌아봤다. 어느새 핸드폰까지 손에 든 유리의 표정이 매우 비장해 보였다. 단축 번호 3번. 효선에게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다.
신호가 이어지는 것을 듣고만 있던 유리는 입 안의 살점을 치아로 잘근잘근 씹으며 연결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효선은 받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이어진 몇 차례의 전화에도 효선과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유리는 저장해 둔 다른 번호를 눌렀다. 그 손길은 무척 성마르면서도 거칠 것이 없었다.
“아주머니. 저 유리예요. 잘 계시죠?”
-. 어머나. 이게 누구야. 유리야! 오랜만이야. 왜 요즘 소식이 뜸해?
10초만 가만둬도 입심이 기승을 부린다는 효선의 수다쟁이 모친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효선과 비슷하다.
-. 엄마는 안녕하시지? 식당에 2년 전에 가보고 한 번을 안 가봤네. 가만, 말 나온 김에 오늘 당장 가볼까? 아직 저녁 안 먹었거든.
“아니에요, 아주머니. 어머니가 좀 편찮으셔서 식당을 다른 분께 넘기셨어요. 요즘 쉬고 계세요.”
굳이 치매로 요양 병원에 들어가셨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병원 측 담당자와 통화하는 모습을 은하에게 들키지만 않았어도 아무도 몰랐을 일이었다.
-. 응? 아니, 어디가 편찮으셔? 가만가만,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그동안 퇴직 때문에 정신이 없었잖니. 네가 이해해 줘. 가만, 네 엄마 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아주머니. 효선이 혹시 집에 없어요? 핸드폰으론 연락이 안 돼서요.”
-. 응? 효선이? 집에 없는데. 그리고 걔 지금 전화 못 받을 거야. 맞선 볼 준비하러 숍에 갔거든.
유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 건 그때부터였다. 유리는 의구심이 든 눈빛으로 물었다.
“맞선……이요?”
-. 아줌마가 효선이 때문에 속이 다 터질 지경이야. 지난주에 글쎄 나한테 할 말 있다며 다가오더니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거야. 뭐 은행에 다니는 시시껄렁한 놈이라나 뭐라나.
은행에 다니는 시시껄렁한 놈. 진우를 말하는 거였다. 효선의 부모에겐 은행 직원도 시시껄렁한 상대일 뿐이었다.
-. 그 말을 효선이 아버지한테 했더니 노발대발하시지 뭐니.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그 따위 남자나 만나고 다니느냐고. 그래서 이번 맞선을 준비한 거야. 믿을 만한 분이 추천해 준 사람인데 어디 무슨 갤러리를 운영한다고. 아! 유리 너도 갤러리에서 일하니 어쩌면 건너건너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구나. 갤러리 이름이 뭐라더라……. 어쨌든 돈도 많고 학벌도 좋고, 뭣보다 시월드가 없을 거래서 냉큼 잡았지.
“효선이가…… 고분고분 맞선을 본대요?”
-. 안 보면 지가 어쩔 거야. 당장 세금을 얼마를 물든 상가 명의 이전 시켜 준 거 토해 내라고 아버지가 난리 치실 텐데.
“몇 시에 어디서 봐요? 기다렸다가 만나려구요. 효선이한테 할 말이 있어요.”
그녀의 귀에 더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효선의 맞선 상대가 어디 어디 갤러리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상가 명의 어쩌구 하는 소리도, 모두 소음처럼 윙윙거릴 뿐이다. 유리는 맞선 장소와 시간을 머릿속에 들이며 차분하게 통화를 끝냈다.
은하가 욕설을 섞어 가며 효선의 맞선에 대해 물었다. 친한 친구의 애인을 뺏어 간 것도 모자라 이 상황에 어떻게 맞선을 볼 생각을 하냐며 효선의 멘탈 여부를 궁금해했다. 하지만 유리에겐 은하의 말소리 역시 소음에 불과했다.
곧이어 유리의 핸드폰에 효선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리와 은하가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전화했었어? 나 지금 맞선 보러 가는 중^^ 남자 조건이 괜찮대. 조건만 보고 만나는 거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엄마가 워낙 좋아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남편 따로, 애인 따로, 두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남편은 내 현금 인출기, 애인은 보험용. ㅋㅋ 나처럼 사는 여자들 꽤 많을걸? 아무튼 나중에 보고할게.]

“어머어머. 이년 당당한 것 좀 봐. 와아,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도 있구나.”
은하는 방방 뛰었지만 유리는 차분하게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흥분하는 것보다 효선을 만나 어떻게 할 건지, 무슨 말을 할 건지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 뒤통수를 조여 오는 이 치욕스러운 배신감을 안고 어떻게 버틸지 걱정부터 해야 했다. 앞뒤 따지고 잴 겨를도 없이, 그녀의 마음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

무형은 약사에게 돈을 지불한 후 봉투를 들고 약국을 나왔다. 우산을 펴든 채 연고와 밴드가 든 봉투 속을 짧게 들여다본 후, 횡단보도를 건넜다. 서두르던 걸음은 커피숍 앞에서 속도를 달리했다. 투명한 전면 유리창 안에 빨간색 스웨터를 입은 그녀가 보인다.
창문으로 빗줄기가 흘러내려 그녀의 실루엣도 흐려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얼굴에 오른 표정만큼은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까 카페에서의 일로 자존심이 참담하게 구겨진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무척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도.
그 역시 당황했던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먼저였다. 머릿속으로 아까 유리와 효선이 주고받은 대화의 조각들이 띄엄띄엄 흘러가고 있었다.
손가락을 감싼 티슈가 붉게 번져드는 것을 본 무형은 재차 걸음을 이었다. 커피숍에 다시 들어온 그는 우산꽂이에 우산을 둔 후 유리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망설일 것 없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니 당혹스러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