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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유례없는 폭설입니다 1화
1. 12월 31일, 전국이 대체로 흐리겠습니다. (1)
[12월 31일부터 1월 2일까지 교내 전 직원 휴가로 기숙사 폐쇄합니다. 30일 오전 10시까지 열쇠 반납하고 퇴실 완료하세요.]
기숙사 홈페이지에 새로 올라온 공지를 아무 생각 없이 눌렀더니 이번 주까지 짐 싸서 나가라는 글이 새빨간 볼드체로 적혀 있었다. 나는 난데없는 충격에 그만 무언가를 먹고 있단 것도 까먹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으, 혀엉. 왜 먹던 빵을 떨궈요? 드럽게시리.”
“……야, 기숙사 사흘 동안 문 닫는대.”
“연말엔 항상 비운다던데요. 몰랐어요?”
“이번 학기에 기숙사 처음 들어와서 하나도 몰라.”
그러자 2층 침대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던 권주가 불가항력이라는 듯 눈썹을 끌어 올렸다.
“에이, 꼴랑 사흘인데 몸만 잠깐 고향 집에 내려갔다 오면 되죠. 아님 자취방에 얹혀살든가.”
“여기 겨울에 전부 방 빼잖아.”
“아, 맞다.”
근처에 눈꽃 트래킹으로 유명한 산이 있어서 겨울엔 차 타고 놀러 오는 손님 받아야 한다고 오피스텔도 딱 봄부터 겨울 방학 직전까지만 계약하는 동네였다. 게다가 집에 내려가기에는 부모님과 심하게 다퉈서 정말 곤란했다.
요즘 시기에 모텔이나 호텔은 보나마나 터무니없이 비쌀 테고, 새해부터 부모님 다 계시는 고향 친구 집에 가서 자기도 좀…….
“사감한테 사정 말하면 어떻게 안 될까?”
그러자 송권주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손사래를 쳤다.
“형, 사감 성격 완전 꽉 막혔어요. 절대 안 돼요. 여름 방학 때 복도 왁스칠 한다고 딱 하루 폐쇄했었거든요. 그때 전에 같이 살던 룸메가 방 안에만 있으면 안 되냐고 물어봤는데, 도난물품 생기거나 코딱지만 한 사고라도 나면 전부 네 책임이라고 길길이 날뛰더라니까요. 어쨌든 사감 말이 맞긴 하지만……. 암튼 저는 그거 옆에서 보는데, 말로 사람 패는 줄 알았어요. 결국 갈 데 없는 기숙사생들은 전부 학교 체육관에서 꼴딱 밤새웠죠 뭐.”
“겨울이라 체육관에서도 못 잘 거 아냐…….”
“포기해요, 형.”
나름 충고랍시고 해 준 말이겠지만 괜히 약이 올랐다. 저 만주 벌판 같은 이마 한가운데 딱밤을 한 대 날려 주려다 겨우 참았다. 일단은 내 연말 거취가 가장 중요하기에 애꿎은 기숙사 공지만 계속 오르락내리락, 마우스 휠을 움직이며 보고 있을 때였다.
[뭐 하냐. 부대찌개에 쏘주 한잔 땡길래?]
노트북 화면 한구석에 떠오른 메신저가 반짝였다. 이소정이다. 그녀는 내가 제대하고 돌아오자 과 고참이 되어 있던 동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동기님이 열렬히 술 상대를 원하신다 한들 나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혼자 살고 있을 만한 놈이 있는지 주소록을 뒤지느라 바빴다. 내가 계속 무시하니 화가 났는지, 메신저가 계속해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숫자 없어진 거 봤다]
[기숙사에서 좀 나와]
[너구리야]
[누나가 오늘 되게 가고 싶었던 곳 떨어졌거든?]
[오늘 좀 달려야겠으니까]
[10분 안에]
[화문호프로 튀어 와라]
[7시 20분까지]
[안 오면 님 축제 때 여장한 사진 단톡방에 뿌림]
[내 폰카 1600만 화소]
하하, 2000만 화소라도 상관없다. 여장 대회 때 속옷을 안 입은 참가자 때문에 아수라장이던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아무리 카메라가 좋은들 죄다 흔들렸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소정이 발표를 할 때 프리젠테이션 사본이 담긴 USB를 세 개나 챙기고 온라인 클라우드와 수업용 컴퓨터 바탕 화면에 백업까지 해 놓는 매우 꼼꼼한 성격이라는 걸 잠시 깜박하고 있었다.
[난리 나기 전에 찍은 박성현 단독 섹시 댄스 동영상도 있는데]
[동영상]
“야이씨!”
“뭐야, 형 왜 그래요 진짜?”
얼굴에 열이 확 올라서 그만 답지 않게 소리를 질렀다. 여장에 섹시 댄스……. 그날은 평생 다시없을 치욕적인 하루였다. 설마 동영상까지 찍혔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니스커트를 입은 주제에 속옷을 안 입어서 거시기가 덜렁거리던 참가자가 있었다니까? 그 상황에서 동영상을 찍는 게 미친 거 아냐? 생판 모르는 놈 거시기가 네 그 소중한 폰에 저장될지도 모르는데? 변태냐?
[20분까지 갈 테니까 동영상 지워.]
[정확하게는 19분 59초까지인 거 알지?]
온갖 욕이 나오려던 것을 참고 고분고분하게 굴어도 이소정은 아마 지금쯤 웃음꽃을 피우며 단체 메신저 방에 들어가 동영상 탭을 누르고 있을 거다. 나는 책상 위에 널려 있던 잡동사니 중에서 회색 야구 모자를 집어 들었다.
“권주야, 나 술 좀 마시고 올게.”
“나도 가면 안 돼요? 지금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내일 아침에 내려간다며, 잠이나 자.”
“얼마나 마시려고요?”
“그건 모르지……. 씁, 외박 신청 안 했는데.”
“외박 신청까지 할 정도예요?”
누가 화문대 문창과 아니랄까 봐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시겠구만. 아까부터 쭉 침대 밖으로 고개를 빼고 있던 권주는 글러 먹었다고 중얼대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매트리스 위로 몸을 내던졌다. 노란빛이 도는 조명 아래서 풀풀 날리는 먼지를 휘저은 나는 대충 패딩만 겹쳐 입고 체크카드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꺼져 있던 휴대폰을 켜 보니 벌써 3분이 지나 있었다. 문 앞에 이리저리 널린 신발들을 내려다보다 삼선 슬리퍼나 질질 끌고 나가려던 나는 왼쪽 발을 넣고 나서야 밖에 눈이 쌓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름한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 뒤꿈치에 검지를 겨우 욱여넣고서 권주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나중에 점호하러 오면 층장한테 잘 둘러대 줘.”
“그거야 쉽죠. 대신 남은 안주 싸 와요. 과자라도 좀 사다 주든가.”
“알았어, 인마. 내가 술 마시다 쓰러져서 새벽 중에 연락 안 오게나 빌고 있어라.”
“형 네발로 기어 오면 사진 찍어도 돼요?”
평소 같았으면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맘대로 찍으라며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기분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쾅! 본의 아니게 웃풍까지 가세해서 더 세게 닫힌 문고리를 괜히 한번 당겨 본 나는 서둘러 호프집으로 향했다. 기숙사에서 정문까지 걸어서 5분이니 호프집까지는 뛰어가면 시간에 딱 맞을 터였다.
“야, 왔냐? 시간이이…… 와, 너 들어오고 딱 20분 됐네. 아무리 세상만사 무심한 박성현도 섹시 댄스는 좀 버겁나 보다?”
“조용히……. 그리고 너는 무슨 초저녁부터 깡소주야. 안주 안 시켰냐?”
“너 오면 시키려고 했지, 이모! 여기 부대찌개요! 치즈 불닭도 주세요!”
창작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숨 쉬듯이 마셔 댄다는 화문대 문창과. 이소정은 그 안에서도 교수 앞에 마주 앉아 대작이 가능한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그 증거로, 이미 소주 한 병을 반이 훌쩍 넘게 마셨는데도 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면접용 정장에 면접용 올림머리를 한 소정이 내 눈앞에서 폰에 대기시켜 놓은 동영상 첫 화면을 띄우곤 신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옆이 시원하게 터진 빨간 치파오를 입은 내 모습을 차마 보기가 힘들어 패딩을 벗고 앉아 소정이 미리 따라 놓은 소주를 들이켤 뿐이었다.
“너 올 때까지 이거 돌려 보면서 진짜 엄청 웃었어. 같이 볼래?”
“제발 지워 줘, 빨리.”
“박성현, 내가 두말하는 사람으로 보여? 알았어, 알았어.”
자, 여기 봐 봐, 삭제 누른다? 놀리는 투로 손가락을 화면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소정이 끝내 삭제 버튼을 누르고 나자 나는 조금 안도했다. 당장 묵을 곳도 못 찾은 주제에 고작 저런 동영상이 삭제됐다고 기뻐하다니 참 슬픈 일이지만.
“그래서 어디 떨어졌는데?”
“넌 말해도 모를걸. 그냥 작은 출판사야.”
“뭐?”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그만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모름지기 주위의 편집자, 혹은 소설가, 기타 무수한 직장인…… 어쨌든 회사와 계약이라는 걸 해 본 선배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무조건 큰 데가 와따야. 이소정도 아마 같은 말을 수없이 들었을 거다. 그래서 이력서 넣었다는 곳이 당연히 한국 최고, 굴지의 출판사, 뭐 그런 데일 줄 알았다.
“아, 꼴사납게……. 휴지 좀 줘 봐.”
억지로 취해 보려고 소주를 급하게 마셔 댄 소정은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나는 대충 냅킨을 뽑아 건네며, 박봉 인턴 자리 하나 내주지 않아 끝내 이소정을 울려 버린 그 미지의 출판사가 심히 궁금해졌다.
“출판사 이름은?”
“단.”
“단?”
“그래, 사무실은 파주에 코딱지만 하게 있고, 직원 열 명 남짓에, 정직원 돼도 더럽게 박봉이고, 야근 죽어라 시키는 곳 있어.”
“…….”
“그래도 저녁밥은 챙겨 준다?”
저녁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경악스런 근무 환경을 들은 내 얼굴이 웃겼는지 이소정이 콧물을 닦으며 피식거렸다.
“너도 내가 미쳤다고 하게?”
“아니, 네가 스스로 힘들겠다는데 내가 뭘 미쳤다고까지 해.”
“아하하.”
이소정이 매운 소스가 뚝뚝 떨어지는 불닭을 집어 먹으면서 바보처럼 웃었다. 이거 영 맛이 갔구만.
“웃든지 울든지 먹든지 하나만 해.”
“한꺼번에 되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씨…… 아, 성현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작가가 있거든?”
알다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이소정은 어떤 작가의 책을 계기로 이쪽 길을 선택했고, 그 작가가 쓴 책을 작품 별로 초판 한 권, 가방에 한 권, 책장에 한 권, 창고에 한 권…… 어쨌든 경악스러울 정도의 애정을 과시했더랬다.
“근데 그 작가 마지막 유작이 아직 안 나왔는데, 유작 원고를 가진 유일한 곳이 단이라고.”
“와…….”
“거기 사장이랑 작가가 무지 친했다는데, 작년에 암으로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마지막 작품 써서 넘겨주고 중환자실에서, 어엉!”
결국 내면의 뭔가가 터져 버린 건지 이소정이 거의 오열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소정의 이런 불같은 목표 의식과 한결같은 애정을 지금껏 이해하지 못했다. 뭐든지 중간 이상만 하면 만족하는 내게 이소정은 보기만 해도 피곤한 사람이었고, 너무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뭐, 가끔은 그런 열정이 부러울 때도 있고 죽이 잘 맞는 점도 있으니 지금껏 친구 먹고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눈앞에서 펑펑 우는 이 어린양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냥 냅킨을 냅다 뽑아서 눈에 비벼 주면 되는 걸까? 하지만 내가 냅킨을 더 뽑기도 전에 이소정은 알아서 헐떡이는 숨을 정리하곤 말을 이어 나갔다.
“몇 년이 지나도 책을 내 줄 생각을 안 해서, 그럼 아예 직원이 되면 볼 수 있겠지 싶어서 이력서를 찔렀는데!”
“응.”
“공고도 안 낸 우리 회사에 지원해 줘서 정말 고맙지만! 돈이 없어서 사람을 뽑을 생각이 없다잖아! 내가 돈 안 받고 일해도 된다니까 대표님이 뭐라는지 알아? 타지에서 혼자 힘들게 올라온 학생을 그렇게 대할 순 없대! 아, 진짜 성격 더럽게 존내!”
술 때문에 발음이 어눌해진 소정이 하는 말을 듣다 보니 이게 회사 욕인지 칭찬인지, 대표와 소정 둘 중에 어느 쪽이 이상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정리를 하자면 이소정은 좋아하는 작가 유작 원고를 어떻게든 보겠답시고 구인 공고도 내지 않은 작은 출판사에 냅다 찾아가서 돈을 안 줘도 좋으니 노예로 써 달라고……. 이게 뭔 개소리야, 무슨 부모님 세대 자수성가 성공담도 아니고.
“너는 머리를 좀 식힐 필요가…….”
“방금 이게 뭔 개소리냐고 생각했지? 어?”
정말 무서운 애다. 포커페이스, 포커페이스. 내가 진땀을 흘리며 그런 게 아니라고 열심히 발뺌하자 이소정은 한두 번 눈을 흘기더니 이내 졸아들어 새 육수가 필요한 부대찌개에 국자를 갖다 댔다.
“……어쨌든 그랬어. 그나마 제정신으로 끝까지 안 웃고 들어 줄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거 같아서 불렀고, 동영상 멋대로 찍어서 미안하고…….”
그렇게 소주 서너 병을 더 끌어안고 사자 갈기 같은 머리까지 풀어 헤치며 한참을 떠들던 이소정은 어느샌가부터 굳이 안 해도 될 사과까지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걸 보니 할 말이 바닥나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 같았다.
그만 자리를 뜰까 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었다. 주위 테이블은 연말 분위기에 아직도 한참 들떠 있었지만, 이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만 소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소정, 자취방에 데려다줄까?”
“그래, 자취방에서 2차 달리자, 좋다!”
“……정신 좀 차리고 있어 봐.”
일단 계산은 내가 하고 나중에 절반을 받아야겠다. 부디 3만 원이 넘지 않길 기도하며 계산대로 간 나는 5만5천 원이라는,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술 값을 눈물과 함께 치렀다.
테이블로 돌아와 이소정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오른팔을 내 어깨 위로 두르고 다른 손에는 깜찍한 검정 손가방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호프집 출구로 향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어, 성현이랑, 얜 누구…… 소정이네!”
“……안녕하세요.”
겨울 방학이 갓 시작된 연말, 외진 대학교 근처에 제대로 된 술판을 벌일 만한 곳이 고깃집 하나와 호프집 두 개가 전부라는 말은, 혹시나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얌전히 방에 틀어박혀 있으라는 말과 같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사는 내가 누군가를 무작정 싫어한다거나 좋아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지금 막 호프집에 들어온 이 남자, 화문대 문창과 과대는 마주칠 때마다 영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모자를 조금 더 깊이 눌러쓰고 패딩에 얼굴을 묻었다.
“너, 소정이랑 사귀는 사이였어?”
“아뇨.”
“아, 썸?”
“그냥 친구…….”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냐!”
이래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건데.
과대의 별명—미팅 요정이라든가, 소개팅 공장장이라든가—을 들은 솔로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뉘었다. 나처럼 슬금슬금 피하는 쪽과, 과대의 별명을 듣자마자 자기도 소개해 달라고 매달리는, 추위 많이 타는 쪽. 어쨌든 난 짝짓기를 좋아하다 못해 중매쟁이를 자처하는 과대와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충 훑어보니 과대도 이미 다른 데서 한차례 마시고 넘어온 것 같고 굳이 더 대꾸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어깨 위로 축 늘어진 소정의 팔을 추켜올렸다. 그러자 소정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내가 들쳐 메서 그런 게 아니라, 이소정 스스로 고개를 들었다.
“선배! 얘 나한테 그런 관심 하나—도 없거든요! 박성현은 애초에 여자한테 관심이 없…….”
미친. 나는 급히 소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호프집의 술내 나는 왁자지껄함이 뒷말을 집어삼켰기를 빌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너무 늦게 대처했는지 과대가 눈썹 한쪽을 힐끗 올리며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여장 대회 이후로 이렇게 식은땀 난 적이 없는데. 불과 5초가량의 짧은 순간이 몇십 분처럼 느껴졌다. 과대의 입술이 슬로 모션으로 움직인다.
“너어…….”
말할 거면 빨리 말해라, 호모 소리에 충격받은 연기라도 해 보게.
“너도 그 초식남인가 그런 거야? 야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냐. 짚신도 짝이 있다잖아.”
나는 순간 과대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두세 번을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아, 다행이다. 과대의 머릿속에 게이라는 선택지 자체가 없음에 나는 몇 번이고 감사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난데없이 폭탄을 던진 이소정은 남의 속도 모르고 다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점점 늘어져 땅바닥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과대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하, 그럼 먼저 가 볼게요.”
“그래, 혹시 소개팅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소개팅 건이라면 아마 평생 연락할 일이 없겠지만 나는 속으로 좋게 좋게, 둥글게 둥글게를 외치며 과대에게 끝까지 웃는 얼굴을 보여 주고 몸을 틀었다.
“진짜 무겁네…….”
이소정을 부축한 채 호프집의 요란한 문을 열자 시린 겨울 공기가 뺨에 닿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술기운이 단번에 깨는 기분이다. 나는 문득 허리에 두른 손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학, 간지러워.”
“이소정, 너 진작에 술 깼지.”
“으흐흥.”
“이거 완전 미쳤네.”
“아하하, 박성현 사투리 쓴다.”
내 남은 대학 생활을 와장창 부술 뻔했는데도 사자머리는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이럴 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게 최고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 계산할 때까지 조용히 있자 결국 먼저 꼬리를 내린 건 이소정이었다. 수틀리면 또다시 병나발이라도 불 기세로 내 앞을 가로막은 소정이 양팔을 벌려 선 채 애써 혀를 굴리며 말했다.
“과대가 너한테 여자 소개해 준다고 계속 치댔잖아. 네가 좀 봐 줄 만한 얼굴이라 과대가 어떻게든 주변 애들이랑 이어 주려고 눈독 들이고 있던 건 아냐? 주위에 물어보니까 아예 관심 없다고 대놓고 말하면 좀 덜 한댔어. 그래서 난…….”
“그러셨구나. 동기님 친절에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소정이 굳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서까지 도와주려 한 점은 고맙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식은땀 흘린 만큼은 괴로워야 하지 않겠는가. 역지사지 맛보기다, 인마.
“나 진짜 너랑 평생 친구 할 거거든? 사람 좀 믿어 봐라, 박성현아. 다른 친구들한테도 네 얘긴 일절 안 하는데…… 다른 학교 애들이 네 프사 보고 누구냐고 물어도 동기라고만 하지 절대 다른 말 안 해. 전 남친이냐, 교회 오빠냐, 절 동생이냐, 스토킹 하는 상대냐 물어도 아무 말 안 한다고오…….”
이소정이 사자 머리를 털며 선 자리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꽤 절절한 고백이지 않은가. 바싹 말라비틀어진 내 코가 다 찡할 정도다. 그만 부질없는 묵언을 끝내기로 한 나는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 소정의 북슬북슬한 머리에 얹었다.
“다음부턴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미리 말을 해.”
“용서한 거야?”
“평생 친구라며, 아예 불알친구라고 해 줄까?”
그러자 얼굴이 발그레 떠오른 소정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수줍어 보이는 건 덤이었다.
“어…… 고맙긴 한데…… 그래도 내가 아직은 앞날 창창한 아가씨거든. 불알친구는 좀.”
“미안, 좀 과했네.”
“알면 됐다!”
이소정은 깔끔하게 정리된 결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코를 훌쩍대면서도 내 양손에 들린 비닐봉투 중 술병이 가득한 걸 가져가더니 신나게 자취방 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나도 겨우 정리된 하루에 만족……. 아니, 아니다. 내겐 아직 가장 커다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빠르게 걷다 못해 눈 처음 보는 개처럼 뛰어가는 소정의 뒤를 겨우 따라잡은 나는 결국 남은 자존심을 다 털어 내고 비굴한 목소리로 후련하게 외쳤다.
“이소정! 너 자취방 언제 빼?”
“자취방? 언제 빼냐면—”
“뭐? 언제? 언제라고?”
그렇게 미친 듯이 방 언제 빼냐고 묻다가, 몸이 술을 기어코 받아 내지 못한 건지 이소정 자취방 문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잠든 게 내 12월 27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음 날, 짐이라곤 겨우 캐리어 하나와 이불 두 장이 다인 자취방에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나는 간밤의 흐릿한 기억을 겨우 붙잡고 소정에게 방을 언제 빼냐고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제 북실북실한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이소정이 편의점 북엇국을 들이켜더니 다 쉬어 터진 목을 겨우 짜내어 말하는 것이다.
“나…… 오늘 비행기…….”
1. 12월 31일, 전국이 대체로 흐리겠습니다. (1)
[12월 31일부터 1월 2일까지 교내 전 직원 휴가로 기숙사 폐쇄합니다. 30일 오전 10시까지 열쇠 반납하고 퇴실 완료하세요.]
기숙사 홈페이지에 새로 올라온 공지를 아무 생각 없이 눌렀더니 이번 주까지 짐 싸서 나가라는 글이 새빨간 볼드체로 적혀 있었다. 나는 난데없는 충격에 그만 무언가를 먹고 있단 것도 까먹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으, 혀엉. 왜 먹던 빵을 떨궈요? 드럽게시리.”
“……야, 기숙사 사흘 동안 문 닫는대.”
“연말엔 항상 비운다던데요. 몰랐어요?”
“이번 학기에 기숙사 처음 들어와서 하나도 몰라.”
그러자 2층 침대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던 권주가 불가항력이라는 듯 눈썹을 끌어 올렸다.
“에이, 꼴랑 사흘인데 몸만 잠깐 고향 집에 내려갔다 오면 되죠. 아님 자취방에 얹혀살든가.”
“여기 겨울에 전부 방 빼잖아.”
“아, 맞다.”
근처에 눈꽃 트래킹으로 유명한 산이 있어서 겨울엔 차 타고 놀러 오는 손님 받아야 한다고 오피스텔도 딱 봄부터 겨울 방학 직전까지만 계약하는 동네였다. 게다가 집에 내려가기에는 부모님과 심하게 다퉈서 정말 곤란했다.
요즘 시기에 모텔이나 호텔은 보나마나 터무니없이 비쌀 테고, 새해부터 부모님 다 계시는 고향 친구 집에 가서 자기도 좀…….
“사감한테 사정 말하면 어떻게 안 될까?”
그러자 송권주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손사래를 쳤다.
“형, 사감 성격 완전 꽉 막혔어요. 절대 안 돼요. 여름 방학 때 복도 왁스칠 한다고 딱 하루 폐쇄했었거든요. 그때 전에 같이 살던 룸메가 방 안에만 있으면 안 되냐고 물어봤는데, 도난물품 생기거나 코딱지만 한 사고라도 나면 전부 네 책임이라고 길길이 날뛰더라니까요. 어쨌든 사감 말이 맞긴 하지만……. 암튼 저는 그거 옆에서 보는데, 말로 사람 패는 줄 알았어요. 결국 갈 데 없는 기숙사생들은 전부 학교 체육관에서 꼴딱 밤새웠죠 뭐.”
“겨울이라 체육관에서도 못 잘 거 아냐…….”
“포기해요, 형.”
나름 충고랍시고 해 준 말이겠지만 괜히 약이 올랐다. 저 만주 벌판 같은 이마 한가운데 딱밤을 한 대 날려 주려다 겨우 참았다. 일단은 내 연말 거취가 가장 중요하기에 애꿎은 기숙사 공지만 계속 오르락내리락, 마우스 휠을 움직이며 보고 있을 때였다.
[뭐 하냐. 부대찌개에 쏘주 한잔 땡길래?]
노트북 화면 한구석에 떠오른 메신저가 반짝였다. 이소정이다. 그녀는 내가 제대하고 돌아오자 과 고참이 되어 있던 동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동기님이 열렬히 술 상대를 원하신다 한들 나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혼자 살고 있을 만한 놈이 있는지 주소록을 뒤지느라 바빴다. 내가 계속 무시하니 화가 났는지, 메신저가 계속해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숫자 없어진 거 봤다]
[기숙사에서 좀 나와]
[너구리야]
[누나가 오늘 되게 가고 싶었던 곳 떨어졌거든?]
[오늘 좀 달려야겠으니까]
[10분 안에]
[화문호프로 튀어 와라]
[7시 20분까지]
[안 오면 님 축제 때 여장한 사진 단톡방에 뿌림]
[내 폰카 1600만 화소]
하하, 2000만 화소라도 상관없다. 여장 대회 때 속옷을 안 입은 참가자 때문에 아수라장이던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아무리 카메라가 좋은들 죄다 흔들렸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소정이 발표를 할 때 프리젠테이션 사본이 담긴 USB를 세 개나 챙기고 온라인 클라우드와 수업용 컴퓨터 바탕 화면에 백업까지 해 놓는 매우 꼼꼼한 성격이라는 걸 잠시 깜박하고 있었다.
[난리 나기 전에 찍은 박성현 단독 섹시 댄스 동영상도 있는데]
[동영상]
“야이씨!”
“뭐야, 형 왜 그래요 진짜?”
얼굴에 열이 확 올라서 그만 답지 않게 소리를 질렀다. 여장에 섹시 댄스……. 그날은 평생 다시없을 치욕적인 하루였다. 설마 동영상까지 찍혔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니스커트를 입은 주제에 속옷을 안 입어서 거시기가 덜렁거리던 참가자가 있었다니까? 그 상황에서 동영상을 찍는 게 미친 거 아냐? 생판 모르는 놈 거시기가 네 그 소중한 폰에 저장될지도 모르는데? 변태냐?
[20분까지 갈 테니까 동영상 지워.]
[정확하게는 19분 59초까지인 거 알지?]
온갖 욕이 나오려던 것을 참고 고분고분하게 굴어도 이소정은 아마 지금쯤 웃음꽃을 피우며 단체 메신저 방에 들어가 동영상 탭을 누르고 있을 거다. 나는 책상 위에 널려 있던 잡동사니 중에서 회색 야구 모자를 집어 들었다.
“권주야, 나 술 좀 마시고 올게.”
“나도 가면 안 돼요? 지금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내일 아침에 내려간다며, 잠이나 자.”
“얼마나 마시려고요?”
“그건 모르지……. 씁, 외박 신청 안 했는데.”
“외박 신청까지 할 정도예요?”
누가 화문대 문창과 아니랄까 봐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시겠구만. 아까부터 쭉 침대 밖으로 고개를 빼고 있던 권주는 글러 먹었다고 중얼대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매트리스 위로 몸을 내던졌다. 노란빛이 도는 조명 아래서 풀풀 날리는 먼지를 휘저은 나는 대충 패딩만 겹쳐 입고 체크카드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꺼져 있던 휴대폰을 켜 보니 벌써 3분이 지나 있었다. 문 앞에 이리저리 널린 신발들을 내려다보다 삼선 슬리퍼나 질질 끌고 나가려던 나는 왼쪽 발을 넣고 나서야 밖에 눈이 쌓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름한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 뒤꿈치에 검지를 겨우 욱여넣고서 권주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나중에 점호하러 오면 층장한테 잘 둘러대 줘.”
“그거야 쉽죠. 대신 남은 안주 싸 와요. 과자라도 좀 사다 주든가.”
“알았어, 인마. 내가 술 마시다 쓰러져서 새벽 중에 연락 안 오게나 빌고 있어라.”
“형 네발로 기어 오면 사진 찍어도 돼요?”
평소 같았으면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맘대로 찍으라며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기분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쾅! 본의 아니게 웃풍까지 가세해서 더 세게 닫힌 문고리를 괜히 한번 당겨 본 나는 서둘러 호프집으로 향했다. 기숙사에서 정문까지 걸어서 5분이니 호프집까지는 뛰어가면 시간에 딱 맞을 터였다.
“야, 왔냐? 시간이이…… 와, 너 들어오고 딱 20분 됐네. 아무리 세상만사 무심한 박성현도 섹시 댄스는 좀 버겁나 보다?”
“조용히……. 그리고 너는 무슨 초저녁부터 깡소주야. 안주 안 시켰냐?”
“너 오면 시키려고 했지, 이모! 여기 부대찌개요! 치즈 불닭도 주세요!”
창작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숨 쉬듯이 마셔 댄다는 화문대 문창과. 이소정은 그 안에서도 교수 앞에 마주 앉아 대작이 가능한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그 증거로, 이미 소주 한 병을 반이 훌쩍 넘게 마셨는데도 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면접용 정장에 면접용 올림머리를 한 소정이 내 눈앞에서 폰에 대기시켜 놓은 동영상 첫 화면을 띄우곤 신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옆이 시원하게 터진 빨간 치파오를 입은 내 모습을 차마 보기가 힘들어 패딩을 벗고 앉아 소정이 미리 따라 놓은 소주를 들이켤 뿐이었다.
“너 올 때까지 이거 돌려 보면서 진짜 엄청 웃었어. 같이 볼래?”
“제발 지워 줘, 빨리.”
“박성현, 내가 두말하는 사람으로 보여? 알았어, 알았어.”
자, 여기 봐 봐, 삭제 누른다? 놀리는 투로 손가락을 화면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소정이 끝내 삭제 버튼을 누르고 나자 나는 조금 안도했다. 당장 묵을 곳도 못 찾은 주제에 고작 저런 동영상이 삭제됐다고 기뻐하다니 참 슬픈 일이지만.
“그래서 어디 떨어졌는데?”
“넌 말해도 모를걸. 그냥 작은 출판사야.”
“뭐?”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그만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모름지기 주위의 편집자, 혹은 소설가, 기타 무수한 직장인…… 어쨌든 회사와 계약이라는 걸 해 본 선배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무조건 큰 데가 와따야. 이소정도 아마 같은 말을 수없이 들었을 거다. 그래서 이력서 넣었다는 곳이 당연히 한국 최고, 굴지의 출판사, 뭐 그런 데일 줄 알았다.
“아, 꼴사납게……. 휴지 좀 줘 봐.”
억지로 취해 보려고 소주를 급하게 마셔 댄 소정은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나는 대충 냅킨을 뽑아 건네며, 박봉 인턴 자리 하나 내주지 않아 끝내 이소정을 울려 버린 그 미지의 출판사가 심히 궁금해졌다.
“출판사 이름은?”
“단.”
“단?”
“그래, 사무실은 파주에 코딱지만 하게 있고, 직원 열 명 남짓에, 정직원 돼도 더럽게 박봉이고, 야근 죽어라 시키는 곳 있어.”
“…….”
“그래도 저녁밥은 챙겨 준다?”
저녁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경악스런 근무 환경을 들은 내 얼굴이 웃겼는지 이소정이 콧물을 닦으며 피식거렸다.
“너도 내가 미쳤다고 하게?”
“아니, 네가 스스로 힘들겠다는데 내가 뭘 미쳤다고까지 해.”
“아하하.”
이소정이 매운 소스가 뚝뚝 떨어지는 불닭을 집어 먹으면서 바보처럼 웃었다. 이거 영 맛이 갔구만.
“웃든지 울든지 먹든지 하나만 해.”
“한꺼번에 되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씨…… 아, 성현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작가가 있거든?”
알다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이소정은 어떤 작가의 책을 계기로 이쪽 길을 선택했고, 그 작가가 쓴 책을 작품 별로 초판 한 권, 가방에 한 권, 책장에 한 권, 창고에 한 권…… 어쨌든 경악스러울 정도의 애정을 과시했더랬다.
“근데 그 작가 마지막 유작이 아직 안 나왔는데, 유작 원고를 가진 유일한 곳이 단이라고.”
“와…….”
“거기 사장이랑 작가가 무지 친했다는데, 작년에 암으로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마지막 작품 써서 넘겨주고 중환자실에서, 어엉!”
결국 내면의 뭔가가 터져 버린 건지 이소정이 거의 오열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소정의 이런 불같은 목표 의식과 한결같은 애정을 지금껏 이해하지 못했다. 뭐든지 중간 이상만 하면 만족하는 내게 이소정은 보기만 해도 피곤한 사람이었고, 너무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뭐, 가끔은 그런 열정이 부러울 때도 있고 죽이 잘 맞는 점도 있으니 지금껏 친구 먹고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눈앞에서 펑펑 우는 이 어린양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냥 냅킨을 냅다 뽑아서 눈에 비벼 주면 되는 걸까? 하지만 내가 냅킨을 더 뽑기도 전에 이소정은 알아서 헐떡이는 숨을 정리하곤 말을 이어 나갔다.
“몇 년이 지나도 책을 내 줄 생각을 안 해서, 그럼 아예 직원이 되면 볼 수 있겠지 싶어서 이력서를 찔렀는데!”
“응.”
“공고도 안 낸 우리 회사에 지원해 줘서 정말 고맙지만! 돈이 없어서 사람을 뽑을 생각이 없다잖아! 내가 돈 안 받고 일해도 된다니까 대표님이 뭐라는지 알아? 타지에서 혼자 힘들게 올라온 학생을 그렇게 대할 순 없대! 아, 진짜 성격 더럽게 존내!”
술 때문에 발음이 어눌해진 소정이 하는 말을 듣다 보니 이게 회사 욕인지 칭찬인지, 대표와 소정 둘 중에 어느 쪽이 이상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정리를 하자면 이소정은 좋아하는 작가 유작 원고를 어떻게든 보겠답시고 구인 공고도 내지 않은 작은 출판사에 냅다 찾아가서 돈을 안 줘도 좋으니 노예로 써 달라고……. 이게 뭔 개소리야, 무슨 부모님 세대 자수성가 성공담도 아니고.
“너는 머리를 좀 식힐 필요가…….”
“방금 이게 뭔 개소리냐고 생각했지? 어?”
정말 무서운 애다. 포커페이스, 포커페이스. 내가 진땀을 흘리며 그런 게 아니라고 열심히 발뺌하자 이소정은 한두 번 눈을 흘기더니 이내 졸아들어 새 육수가 필요한 부대찌개에 국자를 갖다 댔다.
“……어쨌든 그랬어. 그나마 제정신으로 끝까지 안 웃고 들어 줄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거 같아서 불렀고, 동영상 멋대로 찍어서 미안하고…….”
그렇게 소주 서너 병을 더 끌어안고 사자 갈기 같은 머리까지 풀어 헤치며 한참을 떠들던 이소정은 어느샌가부터 굳이 안 해도 될 사과까지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걸 보니 할 말이 바닥나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 같았다.
그만 자리를 뜰까 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었다. 주위 테이블은 연말 분위기에 아직도 한참 들떠 있었지만, 이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만 소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소정, 자취방에 데려다줄까?”
“그래, 자취방에서 2차 달리자, 좋다!”
“……정신 좀 차리고 있어 봐.”
일단 계산은 내가 하고 나중에 절반을 받아야겠다. 부디 3만 원이 넘지 않길 기도하며 계산대로 간 나는 5만5천 원이라는,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술 값을 눈물과 함께 치렀다.
테이블로 돌아와 이소정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오른팔을 내 어깨 위로 두르고 다른 손에는 깜찍한 검정 손가방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호프집 출구로 향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어, 성현이랑, 얜 누구…… 소정이네!”
“……안녕하세요.”
겨울 방학이 갓 시작된 연말, 외진 대학교 근처에 제대로 된 술판을 벌일 만한 곳이 고깃집 하나와 호프집 두 개가 전부라는 말은, 혹시나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얌전히 방에 틀어박혀 있으라는 말과 같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사는 내가 누군가를 무작정 싫어한다거나 좋아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지금 막 호프집에 들어온 이 남자, 화문대 문창과 과대는 마주칠 때마다 영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모자를 조금 더 깊이 눌러쓰고 패딩에 얼굴을 묻었다.
“너, 소정이랑 사귀는 사이였어?”
“아뇨.”
“아, 썸?”
“그냥 친구…….”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냐!”
이래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건데.
과대의 별명—미팅 요정이라든가, 소개팅 공장장이라든가—을 들은 솔로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뉘었다. 나처럼 슬금슬금 피하는 쪽과, 과대의 별명을 듣자마자 자기도 소개해 달라고 매달리는, 추위 많이 타는 쪽. 어쨌든 난 짝짓기를 좋아하다 못해 중매쟁이를 자처하는 과대와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충 훑어보니 과대도 이미 다른 데서 한차례 마시고 넘어온 것 같고 굳이 더 대꾸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어깨 위로 축 늘어진 소정의 팔을 추켜올렸다. 그러자 소정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내가 들쳐 메서 그런 게 아니라, 이소정 스스로 고개를 들었다.
“선배! 얘 나한테 그런 관심 하나—도 없거든요! 박성현은 애초에 여자한테 관심이 없…….”
미친. 나는 급히 소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호프집의 술내 나는 왁자지껄함이 뒷말을 집어삼켰기를 빌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너무 늦게 대처했는지 과대가 눈썹 한쪽을 힐끗 올리며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여장 대회 이후로 이렇게 식은땀 난 적이 없는데. 불과 5초가량의 짧은 순간이 몇십 분처럼 느껴졌다. 과대의 입술이 슬로 모션으로 움직인다.
“너어…….”
말할 거면 빨리 말해라, 호모 소리에 충격받은 연기라도 해 보게.
“너도 그 초식남인가 그런 거야? 야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냐. 짚신도 짝이 있다잖아.”
나는 순간 과대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두세 번을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아, 다행이다. 과대의 머릿속에 게이라는 선택지 자체가 없음에 나는 몇 번이고 감사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난데없이 폭탄을 던진 이소정은 남의 속도 모르고 다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점점 늘어져 땅바닥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과대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하, 그럼 먼저 가 볼게요.”
“그래, 혹시 소개팅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소개팅 건이라면 아마 평생 연락할 일이 없겠지만 나는 속으로 좋게 좋게, 둥글게 둥글게를 외치며 과대에게 끝까지 웃는 얼굴을 보여 주고 몸을 틀었다.
“진짜 무겁네…….”
이소정을 부축한 채 호프집의 요란한 문을 열자 시린 겨울 공기가 뺨에 닿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술기운이 단번에 깨는 기분이다. 나는 문득 허리에 두른 손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학, 간지러워.”
“이소정, 너 진작에 술 깼지.”
“으흐흥.”
“이거 완전 미쳤네.”
“아하하, 박성현 사투리 쓴다.”
내 남은 대학 생활을 와장창 부술 뻔했는데도 사자머리는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이럴 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게 최고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 계산할 때까지 조용히 있자 결국 먼저 꼬리를 내린 건 이소정이었다. 수틀리면 또다시 병나발이라도 불 기세로 내 앞을 가로막은 소정이 양팔을 벌려 선 채 애써 혀를 굴리며 말했다.
“과대가 너한테 여자 소개해 준다고 계속 치댔잖아. 네가 좀 봐 줄 만한 얼굴이라 과대가 어떻게든 주변 애들이랑 이어 주려고 눈독 들이고 있던 건 아냐? 주위에 물어보니까 아예 관심 없다고 대놓고 말하면 좀 덜 한댔어. 그래서 난…….”
“그러셨구나. 동기님 친절에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소정이 굳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서까지 도와주려 한 점은 고맙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식은땀 흘린 만큼은 괴로워야 하지 않겠는가. 역지사지 맛보기다, 인마.
“나 진짜 너랑 평생 친구 할 거거든? 사람 좀 믿어 봐라, 박성현아. 다른 친구들한테도 네 얘긴 일절 안 하는데…… 다른 학교 애들이 네 프사 보고 누구냐고 물어도 동기라고만 하지 절대 다른 말 안 해. 전 남친이냐, 교회 오빠냐, 절 동생이냐, 스토킹 하는 상대냐 물어도 아무 말 안 한다고오…….”
이소정이 사자 머리를 털며 선 자리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꽤 절절한 고백이지 않은가. 바싹 말라비틀어진 내 코가 다 찡할 정도다. 그만 부질없는 묵언을 끝내기로 한 나는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 소정의 북슬북슬한 머리에 얹었다.
“다음부턴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미리 말을 해.”
“용서한 거야?”
“평생 친구라며, 아예 불알친구라고 해 줄까?”
그러자 얼굴이 발그레 떠오른 소정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수줍어 보이는 건 덤이었다.
“어…… 고맙긴 한데…… 그래도 내가 아직은 앞날 창창한 아가씨거든. 불알친구는 좀.”
“미안, 좀 과했네.”
“알면 됐다!”
이소정은 깔끔하게 정리된 결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코를 훌쩍대면서도 내 양손에 들린 비닐봉투 중 술병이 가득한 걸 가져가더니 신나게 자취방 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나도 겨우 정리된 하루에 만족……. 아니, 아니다. 내겐 아직 가장 커다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빠르게 걷다 못해 눈 처음 보는 개처럼 뛰어가는 소정의 뒤를 겨우 따라잡은 나는 결국 남은 자존심을 다 털어 내고 비굴한 목소리로 후련하게 외쳤다.
“이소정! 너 자취방 언제 빼?”
“자취방? 언제 빼냐면—”
“뭐? 언제? 언제라고?”
그렇게 미친 듯이 방 언제 빼냐고 묻다가, 몸이 술을 기어코 받아 내지 못한 건지 이소정 자취방 문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잠든 게 내 12월 27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음 날, 짐이라곤 겨우 캐리어 하나와 이불 두 장이 다인 자취방에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나는 간밤의 흐릿한 기억을 겨우 붙잡고 소정에게 방을 언제 빼냐고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제 북실북실한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이소정이 편의점 북엇국을 들이켜더니 다 쉬어 터진 목을 겨우 짜내어 말하는 것이다.
“나…… 오늘 비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