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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장 이상한 것을 주웠다
“이런 거 써 본 적 있어?”
혜림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장의 눈빛이 노골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여 준 것은 편의점에 구비되어 있는 딸기향이 나는 피임 기구였다.
“이거 좋은 냄새도 나는 거야.”
굉장히 불쾌한 가르침. 혜림은 인상을 팍 썼다.
‘내일까지만 하고 그만둔다. 저 변태 진짜!’
편의점으로 출근한 지 6일째. 혜림은 주급만 받고 나면 반드시 저 변태의 면상에 주먹을 날려 주겠노라 생각했다. 여자 아르바이트생만 받는다던 그의 속내를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심지어 사장은 정신이 약간 불안정한 사람인지, 쓰레기통이 가득 찼다며 화를 내거나 가만히 있다가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혜림은 행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몸을 사려야 했고, 결국 오늘에서야 사장이 여자만 뽑는 이유와 다른 곳보다 높은 시급을 주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단 피하자.’
혜림은 굳은 얼굴을 한 채 계산대 밖으로 나왔다.
“뭐 하려고?”
사장의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림은 울컥하고 올라오는 짜증을 꾹꾹 누른 채 매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정리 좀 해 놓고 가려고요.”
“이따가 내가 할 테니까 이리로 와.”
혜림의 등 뒤로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사장의 눈빛이 불쾌하게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나온 거예요.”
“내가? 내가 언제.”
‘짜증 나.’
불끈 쥔 주먹이 가슴께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장의 표정을 보며 속이 메스꺼워짐을 느낀 혜림은 자신을 향해 쏘아 대는 사장의 끈적한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매대 위의 상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툭.
짜증스러움에 손길이 거칠었던 탓일까. 상품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응? 저건 뭐지?’
상품을 줍기 위해 자리에 주저앉은 혜림은 매대 아래로 손보다 조금 더 큰 빨간색 다이어리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포장지도 없이 구석에 박혀 있는 걸 보니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웬 다이어리?’
혜림은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다이어리를 꺼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입으로 훅 하고 불어 보니 붉은 가죽의 질감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다이어리였다.
“혜림 씨. 바닥에 뭐 있어?”
사장이 계산대에서 고개를 빠끔히 내민 채 물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다리를 툭툭 털며 일어난 혜림은 손에 든 다이어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적당한 무게감과 넉넉한 양의 속지가 어서 날 가지라는 모양새로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고, 잠시 뜸을 들이던 혜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누가 버리고 간 건가?’
먼지가 쌓일 정도로 오래 방치된 물건이었다. 주인이 찾으려면 진작 왔을 테니, 버리고 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손님들이 매장의 구석에 쓰레기나 물건 등을 버리고 가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그렇게 주인의 손에 버려진 물건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혜림은 다이어리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여기에 계속 둘 순 없으니 일단 챙기기로 결정했다. 두툼해진 주머니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자 사장이 그녀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쏘아 댔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혜림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은 상품들의 정리를 끝낸 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장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이제 퇴근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혜림은 저녁 먹었냐고 물어 오는 엄마에게 밥상 차리지 말라는 대답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5평 정도의 조그마한 방이지만 혜림에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주머니 속 다이어리를 꺼낸 그녀는 턱을 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다이어리 안에 주인에 대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누가 봐도 탐 날 것 같은 예쁜 다이어리. 오래 방치되어 있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버린 것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러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아.’
혜림은 조심스레 다이어리를 펼쳤다.
‘응? 이게 뭐지?’
사람의 손이 탄 흔적은 없었다. 완전 새 제품으로 보이는 다이어리의 첫 장에는 의외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용 설명서」
‘사용 설명서?’
혜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적혀 있는 글귀들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욕망 다이어리’의 주인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저 해당 페이지의 우측 하단에 있는 칸 안에 반드시 소유자의 이름을 기재해 주시고, 사용하기에 앞서 아래의 주의 사항을 숙지하신 뒤 이용해 주시면 됩니다.
1. 소원의 개수는 3개입니다.
2. 소유자와 작성자가 같아야 합니다.
3. 다이어리의 존재를 타인에게 들켜서는 안 됩니다.
4. 반드시 검정 펜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5. 다이어리가 허가한 소원은 절대 지울 수 없습니다. 신중하게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6. 소원의 내용이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예시: 결혼하게 해 주세요. (X) 내가 OO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 (O)
7. 대가는 소원의 규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혜림의 시선이 소원이라는 글자에 강하게 박혔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고약한 장난이라도 친 것일까. 기분이 나빠진 듯 혜림은 인상을 썼다.
‘누가 이런 질 나쁜 장난을.’
매대 구석에 다이어리가 떨어져 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물건이 처박혀 있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일 아닌가.
‘괜히 가져왔나?’
턱을 괸 손을 풀어 팔짱을 낀 혜림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이어리에 적힌 사용 설명서를 읽었다. 적힌 내용을 보면, 심심했던 누군가가 불특정 다수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 정성스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다. 그럼 그 사람의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적극적인 호응을 해 주는 것이 옳다.
여기까지 결론을 내린 그녀는 서랍 속에서 검정 볼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소원이라……. 진짜 이뤄지면 좋겠네.’
또박또박 이름을 써 내려가는 그녀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한쪽 입꼬리를 씩 하고 올린 그녀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기지개를 켜며 다이어리를 덮은 혜림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다음 날. 편의점으로 출근한 혜림은 오늘이 마지막 근무라는 생각에 의욕 없는 표정으로 계산대 앞에 섰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장의 시선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와 동시에 가까이서 들려오는 사장의 느끼한 숨소리는 오싹한 한기를 불러일으켰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참자…….’
솟구치는 짜증을 깊은 한숨으로 돌린 혜림은 몸을 살짝 돌려 손길을 피했다. 그러곤 계산대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사장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매대 정리하려고?”
“네.”
질문에 짧게 대답한 혜림은 일회용품이 진열되어 있는 매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자마자 상품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던 그녀는 비어 있는 칸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재고가 있나?’
혜림은 상품명을 연거푸 중얼거리며 창고로 향했다.
‘어디 보자.’
혜림은 길게 늘어선 선반을 빼곡히 채운 상품 중에 해당 재고품이 있는지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차근차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고 입구 쪽 선반을 모조리 다 찾았음에도 상품이 나오질 않자 좀 더 구석진 선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스럭.
조용한 창고 안에 비닐 구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을 혜림이 밟은 모양이었다.
‘찾았다.’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그녀는 선반 가장 마지막에 재고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까치발로 조심스레 상자를 꺼내 보니 자신이 찾던 그 물건이 맞았다.
‘이제 이걸 들고 나가서…….’
혜림은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꺅!”
시야 가득 들어오는 낯선 인영에 깜짝 놀란 혜림은 비명을 지르며 상자를 떨어트렸다. 와르르 쏟아져 내린 나무젓가락에 상대도 놀란 듯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혜림 씨 괜찮아?”
“사장님!”
인기척도 없이 뒤따라 창고로 들어온 사장을 발견한 혜림은 저도 모르게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화들짝 놀란 터라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은 페인트도 발라져 있지 않은 맨벽의 서늘한 느낌과 그득하게 들어차 있는 물건들로 꽤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발 아래 밟히는 감촉들마저도 한몫했기에, 그녀가 놀라기에는 꽤 충분한 상황이었다.
“못 찾을까 봐 걱정돼서 따라왔지.”
사장의 말에 혜림이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많이 놀란 모양인지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진짜 놀랐잖아요.”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닌데 미안하네.”
사장은 멋쩍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혜림은 조심스레 눈을 흘긴 뒤 바닥에 떨어진 나무젓가락을 줍기 시작했다.
“근데 혜림 씨.”
“네 사장님.”
“물어볼 게 있는데…….”
평소와는 다른 서늘한 목소리.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꺼림칙한 느낌에 혜림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뭐지. 기분 탓인가?’
워낙 변태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터라 잘못 들었겠지, 라고 생각한 혜림은 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혜림 씨도 나 좋아하는 거 맞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사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든 혜림은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 색욕에 젖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사장이 혜림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그녀는 다가오는 사장을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내가 쳐다보는 게 좋았던 거야. 그렇지?”
‘이…… 이런 변태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장의 움직임은 당장에라도 혜림을 덮칠 기세였다. 그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혜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점점 험악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대답해. 내가 쳐다보는 게 좋았던 거지?”
사장의 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덩달아 혜림의 뒷걸음도 빨라졌다.
탁―
등 뒤로 차가운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막힌 이곳에서 심각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사장님 일단 진정하세요.”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덤덤한 어조로 말한 혜림은 몸을 조여 오는 공포감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난 너무 기뻐.”
코앞까지 다가온 사장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이건 진짜 위험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장은 혜림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잡힌 손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자, 그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으면서 빼긴.”
중년의 아저씨라도 남자다. 여자인 혜림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놔주세요!”
사장은 자신을 향해 언성을 높이는 혜림의 볼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닿은 곳마다 차가운 얼음이 지나가는 오싹한 기분이었고, 그 공포에 혜림의 얼굴은 새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내 것 좀 만져 줘.”
잡힌 혜림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언제 풀었는지 사장의 바지 지퍼는 활짝 열려 있었다.
‘으악!’
혜림은 아랫도리를 만져 달라는 사장의 말에 질겁하며 손을 빼내려 했다. 남은 한 손으로는 사장의 가슴을 밀어 내며 용을 쓰고 있는데, 그 순간 단단하면서 뜨뜻한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아…….”
사장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혜림은 공포에 젖은 눈으로 조심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사장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 있는 자신의 손을 발견했다.
“이…… 이 미친! 아악!”
혜림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손이 썩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비명을 지르자, 눈을 감은 채 희열을 느끼던 사장이 눈을 반쯤 뜬 채 혜림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소리 지르지 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혜림은 그가 뱉은 무슨 짓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두려움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 마음에 드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는 사장의 모습은 색욕에 젖은 사이코패스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모든 곳의 감각이 섬뜩할 만큼 무서웠고, 벌레가 꿈틀거리며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혜림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하아…….”
혜림의 가슴을 마구 주무르며 신음을 흘리던 사장이 갑자기 눈을 번쩍였다.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 이제 못 참을 것 같아.”
#제1장 이상한 것을 주웠다
“이런 거 써 본 적 있어?”
혜림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장의 눈빛이 노골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여 준 것은 편의점에 구비되어 있는 딸기향이 나는 피임 기구였다.
“이거 좋은 냄새도 나는 거야.”
굉장히 불쾌한 가르침. 혜림은 인상을 팍 썼다.
‘내일까지만 하고 그만둔다. 저 변태 진짜!’
편의점으로 출근한 지 6일째. 혜림은 주급만 받고 나면 반드시 저 변태의 면상에 주먹을 날려 주겠노라 생각했다. 여자 아르바이트생만 받는다던 그의 속내를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심지어 사장은 정신이 약간 불안정한 사람인지, 쓰레기통이 가득 찼다며 화를 내거나 가만히 있다가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혜림은 행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몸을 사려야 했고, 결국 오늘에서야 사장이 여자만 뽑는 이유와 다른 곳보다 높은 시급을 주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단 피하자.’
혜림은 굳은 얼굴을 한 채 계산대 밖으로 나왔다.
“뭐 하려고?”
사장의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림은 울컥하고 올라오는 짜증을 꾹꾹 누른 채 매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정리 좀 해 놓고 가려고요.”
“이따가 내가 할 테니까 이리로 와.”
혜림의 등 뒤로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사장의 눈빛이 불쾌하게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나온 거예요.”
“내가? 내가 언제.”
‘짜증 나.’
불끈 쥔 주먹이 가슴께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장의 표정을 보며 속이 메스꺼워짐을 느낀 혜림은 자신을 향해 쏘아 대는 사장의 끈적한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매대 위의 상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툭.
짜증스러움에 손길이 거칠었던 탓일까. 상품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응? 저건 뭐지?’
상품을 줍기 위해 자리에 주저앉은 혜림은 매대 아래로 손보다 조금 더 큰 빨간색 다이어리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포장지도 없이 구석에 박혀 있는 걸 보니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웬 다이어리?’
혜림은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다이어리를 꺼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입으로 훅 하고 불어 보니 붉은 가죽의 질감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다이어리였다.
“혜림 씨. 바닥에 뭐 있어?”
사장이 계산대에서 고개를 빠끔히 내민 채 물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다리를 툭툭 털며 일어난 혜림은 손에 든 다이어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적당한 무게감과 넉넉한 양의 속지가 어서 날 가지라는 모양새로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고, 잠시 뜸을 들이던 혜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누가 버리고 간 건가?’
먼지가 쌓일 정도로 오래 방치된 물건이었다. 주인이 찾으려면 진작 왔을 테니, 버리고 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손님들이 매장의 구석에 쓰레기나 물건 등을 버리고 가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그렇게 주인의 손에 버려진 물건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혜림은 다이어리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여기에 계속 둘 순 없으니 일단 챙기기로 결정했다. 두툼해진 주머니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자 사장이 그녀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쏘아 댔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혜림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은 상품들의 정리를 끝낸 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장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이제 퇴근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혜림은 저녁 먹었냐고 물어 오는 엄마에게 밥상 차리지 말라는 대답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5평 정도의 조그마한 방이지만 혜림에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주머니 속 다이어리를 꺼낸 그녀는 턱을 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다이어리 안에 주인에 대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누가 봐도 탐 날 것 같은 예쁜 다이어리. 오래 방치되어 있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버린 것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러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아.’
혜림은 조심스레 다이어리를 펼쳤다.
‘응? 이게 뭐지?’
사람의 손이 탄 흔적은 없었다. 완전 새 제품으로 보이는 다이어리의 첫 장에는 의외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용 설명서」
‘사용 설명서?’
혜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적혀 있는 글귀들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욕망 다이어리’의 주인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저 해당 페이지의 우측 하단에 있는 칸 안에 반드시 소유자의 이름을 기재해 주시고, 사용하기에 앞서 아래의 주의 사항을 숙지하신 뒤 이용해 주시면 됩니다.
1. 소원의 개수는 3개입니다.
2. 소유자와 작성자가 같아야 합니다.
3. 다이어리의 존재를 타인에게 들켜서는 안 됩니다.
4. 반드시 검정 펜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5. 다이어리가 허가한 소원은 절대 지울 수 없습니다. 신중하게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6. 소원의 내용이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예시: 결혼하게 해 주세요. (X) 내가 OO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 (O)
7. 대가는 소원의 규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혜림의 시선이 소원이라는 글자에 강하게 박혔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고약한 장난이라도 친 것일까. 기분이 나빠진 듯 혜림은 인상을 썼다.
‘누가 이런 질 나쁜 장난을.’
매대 구석에 다이어리가 떨어져 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물건이 처박혀 있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일 아닌가.
‘괜히 가져왔나?’
턱을 괸 손을 풀어 팔짱을 낀 혜림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이어리에 적힌 사용 설명서를 읽었다. 적힌 내용을 보면, 심심했던 누군가가 불특정 다수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 정성스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다. 그럼 그 사람의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적극적인 호응을 해 주는 것이 옳다.
여기까지 결론을 내린 그녀는 서랍 속에서 검정 볼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소원이라……. 진짜 이뤄지면 좋겠네.’
또박또박 이름을 써 내려가는 그녀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한쪽 입꼬리를 씩 하고 올린 그녀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기지개를 켜며 다이어리를 덮은 혜림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다음 날. 편의점으로 출근한 혜림은 오늘이 마지막 근무라는 생각에 의욕 없는 표정으로 계산대 앞에 섰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장의 시선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와 동시에 가까이서 들려오는 사장의 느끼한 숨소리는 오싹한 한기를 불러일으켰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참자…….’
솟구치는 짜증을 깊은 한숨으로 돌린 혜림은 몸을 살짝 돌려 손길을 피했다. 그러곤 계산대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사장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매대 정리하려고?”
“네.”
질문에 짧게 대답한 혜림은 일회용품이 진열되어 있는 매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자마자 상품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던 그녀는 비어 있는 칸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재고가 있나?’
혜림은 상품명을 연거푸 중얼거리며 창고로 향했다.
‘어디 보자.’
혜림은 길게 늘어선 선반을 빼곡히 채운 상품 중에 해당 재고품이 있는지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차근차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고 입구 쪽 선반을 모조리 다 찾았음에도 상품이 나오질 않자 좀 더 구석진 선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스럭.
조용한 창고 안에 비닐 구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을 혜림이 밟은 모양이었다.
‘찾았다.’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그녀는 선반 가장 마지막에 재고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까치발로 조심스레 상자를 꺼내 보니 자신이 찾던 그 물건이 맞았다.
‘이제 이걸 들고 나가서…….’
혜림은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꺅!”
시야 가득 들어오는 낯선 인영에 깜짝 놀란 혜림은 비명을 지르며 상자를 떨어트렸다. 와르르 쏟아져 내린 나무젓가락에 상대도 놀란 듯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혜림 씨 괜찮아?”
“사장님!”
인기척도 없이 뒤따라 창고로 들어온 사장을 발견한 혜림은 저도 모르게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화들짝 놀란 터라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은 페인트도 발라져 있지 않은 맨벽의 서늘한 느낌과 그득하게 들어차 있는 물건들로 꽤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발 아래 밟히는 감촉들마저도 한몫했기에, 그녀가 놀라기에는 꽤 충분한 상황이었다.
“못 찾을까 봐 걱정돼서 따라왔지.”
사장의 말에 혜림이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많이 놀란 모양인지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진짜 놀랐잖아요.”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닌데 미안하네.”
사장은 멋쩍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혜림은 조심스레 눈을 흘긴 뒤 바닥에 떨어진 나무젓가락을 줍기 시작했다.
“근데 혜림 씨.”
“네 사장님.”
“물어볼 게 있는데…….”
평소와는 다른 서늘한 목소리.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꺼림칙한 느낌에 혜림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뭐지. 기분 탓인가?’
워낙 변태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터라 잘못 들었겠지, 라고 생각한 혜림은 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혜림 씨도 나 좋아하는 거 맞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사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든 혜림은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 색욕에 젖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사장이 혜림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그녀는 다가오는 사장을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내가 쳐다보는 게 좋았던 거야. 그렇지?”
‘이…… 이런 변태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장의 움직임은 당장에라도 혜림을 덮칠 기세였다. 그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혜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점점 험악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대답해. 내가 쳐다보는 게 좋았던 거지?”
사장의 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덩달아 혜림의 뒷걸음도 빨라졌다.
탁―
등 뒤로 차가운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막힌 이곳에서 심각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사장님 일단 진정하세요.”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덤덤한 어조로 말한 혜림은 몸을 조여 오는 공포감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난 너무 기뻐.”
코앞까지 다가온 사장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이건 진짜 위험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장은 혜림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잡힌 손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자, 그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으면서 빼긴.”
중년의 아저씨라도 남자다. 여자인 혜림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놔주세요!”
사장은 자신을 향해 언성을 높이는 혜림의 볼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닿은 곳마다 차가운 얼음이 지나가는 오싹한 기분이었고, 그 공포에 혜림의 얼굴은 새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내 것 좀 만져 줘.”
잡힌 혜림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언제 풀었는지 사장의 바지 지퍼는 활짝 열려 있었다.
‘으악!’
혜림은 아랫도리를 만져 달라는 사장의 말에 질겁하며 손을 빼내려 했다. 남은 한 손으로는 사장의 가슴을 밀어 내며 용을 쓰고 있는데, 그 순간 단단하면서 뜨뜻한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아…….”
사장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혜림은 공포에 젖은 눈으로 조심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사장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 있는 자신의 손을 발견했다.
“이…… 이 미친! 아악!”
혜림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손이 썩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비명을 지르자, 눈을 감은 채 희열을 느끼던 사장이 눈을 반쯤 뜬 채 혜림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소리 지르지 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혜림은 그가 뱉은 무슨 짓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두려움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 마음에 드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는 사장의 모습은 색욕에 젖은 사이코패스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모든 곳의 감각이 섬뜩할 만큼 무서웠고, 벌레가 꿈틀거리며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혜림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하아…….”
혜림의 가슴을 마구 주무르며 신음을 흘리던 사장이 갑자기 눈을 번쩍였다.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 이제 못 참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