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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스타 탄생


장내는 고요했다.
노란 스포트라이트가 동그란 달빛처럼 비추는 무대 위. 띠리링, 가볍게 기타를 퉁기는 희고 가는 손가락에 시선이 집중된다. 넓은 객석을 빽빽이 메운 청중도, 앞자리의 심사위원들도 모두 다.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연분홍 입술 사이로 청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맑은 노랫소리가 달빛 강물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적셨다.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꿈꾸는 듯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객석 쪽으로 무심코 흐르다 문득 한곳에 머물렀다.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머리와 말쑥한 슈트 차림의 남자. 차가운 느낌의 은테 안경 너머 아름답지만 서늘한 눈매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도도하게 그녀의 시선을 받아 낸다.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긴 속눈썹을 살포시 내려 얽힌 시선을 먼저 풀었다. 하얀 뺨이 붉게 물들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그녀의 청순미가 더욱 돋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도 설레었다.
“……Moon river and me.”
마지막 소절이 한숨처럼 잦아들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났지만, 누구 한 사람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라도 크게 쉬면 달빛이 반짝이는 강가에 그녀와 함께 서 있는 이 마법의 순간이 사라질까 봐.
“……네. 마지막 무대, 한루비 양의 ‘Moon River’였습니다.”
낭랑한 음성이 정적을 가르자 화들짝 놀라며 다들 ‘한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났다.
짝짝짝. 그제야 누군가가 손뼉을 쳤다. 박수 소리는 산불처럼 화르르 번져 나갔다.
“한루비! 한루비!”
피켓을 들고 연호하는 팬들과 기립 박수를 치는 청중들로 장내가 들썩였다.
의자에 기타를 내려놓고 일어나 살포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루비의 입가에 보름달 같은 미소가 걸렸다. 행복했다. 마음이 꽉 찬 느낌이랄까.
“와! 지금 이곳, 열기가 대단합니다. 한루비 양. 어때요, 지금 기분이?”
진행을 맡은 유하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로선 이번 오디션 참가 중 가장 만족한 무대였다.
“아……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감사드리고, 또 최선을 다한 무대였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네, 수고하셨습니다, 루비 양. 지금 관객들의 열광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1등도 문제없을 거 같습니다만, 어쨌든 평을 들어 봐야겠죠.”
카메라가 심사위원석을 비추었다. 세 남자와 한 여자. 누구나 알 만한 대한민국 최고의 연예계 인사들이다.
“그럼, 먼저 D&P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현 씨 심사평부터 듣겠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블랙 레인’의 리더였죠.”
예상보다 생방송 시간이 남을 것 같은지 천천히 진행하라는 PD의 사인이 떨어졌다. 화려한 미모에 재치 있는 진행으로 이름을 날리는 유하라답게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적당한 사설을 넣어 시간을 끌었다.
“고등학생 때 제가 ‘블랙 레인’의 팬클럽 회장이었다는 거, 다들 모르셨죠? 그땐 오빠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제가 소속된 기획사 대표님이십니다. 사장니임!”
유하라의 멘트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내내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이던 이현도 피식, 웃고 말았다.
“오늘 한루비 양의 무대가 심상치 않은데, 이현 씨께선 어떻게 보셨습니까?”
“네, 잘 봤습니다. ……본격적인 심사평에 앞서서, 한루비 양한테 질문 하나 할게요.”
깍지 낀 손등 위에 턱을 걸친 이현이 안경 너머로 시선을 맞췄다. 순간, 노래하던 중 그와 눈빛이 얽혔을 때처럼 루비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 나 왜 이러지? 너무 쫄았나?’
“오늘 ‘파이널 5인의 스타’에 들 자신, 있습니까?”
“아…… 그, 글쎄요.”
겉으론 배시시 웃었지만, 속으론 ‘왜 또 나야?’ 따져 묻고 싶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사사건건 트집 잡고 태클을 걸던 유일한 심사위원이 아니던가. 어쨌든 그의 코가 납작해질 멋진 답변을 하고 싶었다.
“솔직히…… 제가 여기까지 올라올 줄 몰랐거든요. 최종 9인의 자리까지 올라온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오늘 무대에 오른 아홉 명 중에서 한루비 양이, 뭐랄까……. 제일 약해요.”
‘헐! 그럼 그렇지. 아주 답정너구나! 그럴 걸 왜 물어? 이 미친놈아!’
루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이현에게 욕을 퍼붓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뭉쳐 있던 체기가 쑥 내려가는 것 같은데 실제로 붙으면 속이 뻥 뚫리겠지? 한번 미친 척해 봐?
‘후, 참자! 참는 자에게 1억이 있나니!’
파이널 스타 5인이 되면 받게 될 상금 1억 원을 떠올리며 루비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미소 띤 입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스타 탄생’을 통해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파이널 스타 5인에 들지 못하더라도 이 자리에 섰던 것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제법 그럴싸하게 받아친 거 같아 흡족해진 루비는 의기양양하게 이현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지만, 착각이겠지.
“네, 알겠습니다. 일단 한루비 양은…… 보기에 참 맑아요. 목소리도 맑고. 성품도 그렇고…… 다 좋은데, 그게 아마추어에겐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프로에겐 단점입니다.”
엥? 이건 또 무슨 궤변인가?
루비는 입이 쩍 벌어졌다.
“가수는 자신만의 색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맑기만 해요. 루비 양은 아무런 색이 없어요. 무색투명이죠.”
“아이참. 우리 예쁜 루비 양, 왜 또 갈궈요? 이현 씨, 마음에 들면 그냥 데이트 신청 해요.”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의 소유자 인혜미가 또 또 시작이라는 뉘앙스로 이현을 나무라자 모두 웃음보가 터졌다.
오디션 프로 ‘스타 탄생’에서 이현은 악역 담당이었다. 본래 알려진 그의 성격대로 출연자 전원에게 까칠하게 굴었지만, 유독 루비에게 더 심했다. 그걸 막아 주는 포지션이 가수 인혜미였고.
‘스타 탄생’의 팬들에겐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실랑이하려나, 기대하고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까칠한 이현답게 나름의 애정 공세가 아니겠느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루비는 죽을 맛이었다.
“다음은 싱어송라이터 정시열 씨. 요즘 엠엔넷 ‘뮤직 스토리’ 진행자로 주가를 올리고 계시죠? 어떠세요, 정시열 씨. 워낙 한루비 양에 대한 편애가 심하기로 유명한데, 오늘 무대도 좋았죠?”
“아하하. 이거 참……. 우리 한루비 양, 오늘도 아주 좋았습니다. 완전 제 스타일이네요. ……아! 작곡가로서 곡을 주고 싶다는 뜻이니 이상한 생각들은 넣어 두세요.”
‘발라드의 제왕’이란 별명이 붙은 정시열이 무엇이든 녹일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로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아까 ‘Moon River’ 부를 때 정말로 오드리 헵번이 환생한 줄 알았어요.”
“아니, 이 남자가. 심사를 해야지 왜 프러포즈를 해?”
영락없이 인혜미가 치고 들어오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졌다.
“루비 양. 저랑 듀엣 한번 해 보실래요? 목소리가 진짜 청아해요. 무공해, 그 뭐 유기농? 천연? 그런 단어가 막 떠올라요.”
정시열은 연신 싱글거리며 나머지 심사평을 마쳤다. 오늘도 그의 평은 초극찬이었다.
“역시, 정시열 씨예요. 사심을 감추지 않으시네요. 심사위원이 아니라 팬클럽에서 나오신 줄 알았어요.”
유하라의 멘트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후우―’
하이힐을 신은 채 심사평을 계속 듣노라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서 이 시간이 휙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1억이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조금만 더 힘내라, 한루비!’

“자, 그럼 모두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습니다. ‘스타 탄생’ 파이널 스타 5인을 발표하겠습니다.”
최고의 인기 아이돌 그룹 ‘화이트 스톰’의 축하 공연이 끝나자 참가자 전원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스타 방송이 주관하고 사성그룹이 후원하는 오디션 ‘스타 탄생’. 여러분께선 지금 그 위대한 탄생의 순간을 함께하시고 계십니다.”
아홉 명의 참가자는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들이대는 생방송 카메라에 손을 흔들었다.
“심사위원 네 명의 점수와 시청자 투표를 합산하여 최종 5인을 선정합니다. 총상금 10억 원! 파이널 5인에 들면 가수 데뷔는 물론이고 오늘 밤 상금 1억 원이 즉시 계좌로 입금됩니다.”
국내 최고 기업 사성그룹이 외국 자본까지 끌어들여 최근 개국한 스타 방송은 막강한 자본금을 바탕으로 오디션 프로에도 물량 공세를 펼쳤다. 그 덕인지 ‘스타 탄생’은 연일 매스컴과 네티즌의 주목을 받으며 시청률이 고공행진 중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누가 파이널 5인에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며느리도 몰라요. 저는 물론이고 심사위원도 모릅니다. 아는 분은 오로지 저분!”
유하라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관객의 시선이 쏠렸다.
“조명 감독님이십니다.”
조명 감독이 스포트라이트를 흔들어 답을 했다.
“자!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파이널 스타 5인, 그 첫 번째 스타는?”
빰빠밤 빠바바밤빠빰―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팡파르가 그침과 동시에 정신없이 무대를 휘젓던 스포트라이트도 어느 한 점에서 멈췄다.
“꺄아악!”
루비의 바로 옆자리. 폭발적인 성량의 소유자 이지연이었다. 그녀의 핵폭탄급 성량에 루비는 오른쪽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참가자 모두 이지연을 안아 주며 축하했다. 이지연은 성량뿐 아니라 감정 표현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으허엉, 어어엉. 감사……합니…… 어어엉, 흐엉.”
이번 대회 최종 우승 후보로 점쳐지는 그녀가 파이널 5인 안에 들 확률은 99.99%. 그런 것치곤 너무 오버액션 아닌가? 우승하면 119 불러야겠네.
‘어쨌든 부럽다, 이지연! 오늘 밤 니 통장에 1억이 입금된다니…….’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스포트라이트가 멈춤과 동시에 비명과 환호와 눈물이 범벅된 세리머니가 이어졌고, 루비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래, 안다. 알아! 내가 여기까지 온 게 기적이란 걸. 하지만 이왕 기적이 일어난 김에 조금 더 큰 기적을 바라면 안 되는 걸까? 난 1억이 꼭 필요한데.
루비는 눈을 꼭 감고 이름을 아는 신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오, 신이시여!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신령님! 에…… 또, 용왕님! 그리고 알라여!’
세상의 모든 신을 부르고 싶었지만, 더는 아는 게 없다.
‘제발 저에게 파이널 5인에 드는 행운을 주소서. 아니, 1억을 내려 주소서!’
쿡.
그때 누군가 옆구리를 찔렀다.
‘아, 왜에?’
이미 접신의 경지에 이르러선지 입이 열리질 않았다. 눈도 잘 떠지질 않고.
“루비야. 야! 한루비!”
여전히 쿡쿡 찌르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건, 노래도 잘하고 춤도 끝내주고 얼굴마저 예쁜 유나 언니.
“한루비! 너야, 너!”
‘나라고?’
번쩍 눈을 떴다.
세상이 온통 새하얘서 루비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 나한테 왜 이러세요?


쿵. 쿵. 쿵.
멀리서 북소리가 들린다.
“아아…… 머리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좁은 원룸의 네모난 천장과 길쭉한 조명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천국은 아닌가 보네?
“……살아 있네, 한루비.”
어젯밤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어휴. 너무 마셨어. 아무리 쫑파티지만.”
파이널 5인을 선정하는 생방송이 끝난 후 참가자와 심사위원, 피디, 진행자 할 것 없이 전원이 참석한 쫑파티에서 다들 부어라 마셔라 끝장을 보자고 달렸다. 합숙 훈련을 하며 미운 정 고운 정 쌓일 대로 쌓인 후보들은 탈락한 4인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결승에 오른 5인을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심사위원들도 사석에선 언니 오빠처럼 막역했고. 분위기 짱 좋았지!
“그래도 그렇지. 주량도 얼마 안 되면서. 미련하게…….”
그녀의 최대 주량은 맥주 1병. 그 이상 먹어 본 적도 없지만, 평소 술을 즐기지도 않았고 마실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끝까지 버티며 무슨 오기로 그리 먹었을까?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우욱!”
루비는 입을 틀어막고 욕실을 향해 달렸다.
울렁이던 속을 뒤집어 확인하고 나자, 메스껍던 게 좀 가라앉은 듯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었다. 루비는 욕실 문 앞에 시체처럼 축 늘어져 다시 눈을 감았다.
쾅. 쾅. 쾅.
“하아. 이젠 뇌까지 울리네?”
힘겹게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봤지만, 뇌는 여전히 쿵. 쾅. 쿵. 쾅. 흔들렸……. 아니, 이건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데? 문 두드리는 소리잖아!
“누, 누구……?”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남의 집 문을 당당히 두드리는 걸까? 설마…… 빚쟁이?
루비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워낙 코딱지만 한 원룸이라 서너 걸음이면 현관이긴 했지만.
문에 코를 박고 렌즈 너머를 살폈다. 짙은 색 슈트, 흰 셔츠, 그리고 은회색 넥타이. 키가 얼마나 큰지 가슴팍만 보인다.
‘빚쟁이치곤 좀 고급스럽네. 근데 아직 남은 빚이 있나?’
순간적으로 놀라 넘겨짚었지만, 빚쟁이는 분명 아닌 거 같다. 있는 거 없는 거 탈탈 털어서 빚은 다 갚았으니. 그럼 집주인 할아버지도 아니고, 가스 검침원도 아니고, 세탁소 아저씨도 아니고. 대체 누가 남의 집 문을 꼭두새벽부터…… 아니, 대낮부터 두드려 대는 걸까? 게다가 저리 멋지게 쫙 빼입고선. 누군가 집을 잘못 찾은 거 아니야?
‘내가 아는 남자 중엔 저렇게 고급스러운 슈트를 입는 남자는 없는데. 이현 말고는…….’
“한루비 씨! 한루비 씨! 안에 없어요?”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
‘헉! 이현이다!’
저 목소리는 이현이 맞다. 생긴 건 얼음 왕자인데 목소리 하난 마시멜로인 남자.
‘그리고 내 원수!’
이현이, 철천지원수인 저놈이 여긴 어떻게 알고? 아니, 주소야 알려면 얼마든지 알아내겠지만, 대체 왜? 니가 여길 왜?
당장 문을 열고 나가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꾹 참고 놈의 행태를 살폈다. 가만 보니 밖에 꽤 오래 서 있었던 거 같다. 간간이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렀던 모양이다. 놈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한눈에 들어오는 간지 철철 슈트 핏.
‘역시 쭉 뻗었어!’
서성거리던 놈이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다. 어디에 전화하려는 거지? 가만, 손에 들린 저건…… 서류봉투?
“……119죠?”
헉! 119는 또 왜?
“아무래도 사람이 쓰러진 거 같습니다. 친구네 집에 왔는데 문을 두드려도,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한 30분쯤 된 거 같습니다.”
뭐? 30분이나?
“네. 안에 있는 건 확실합니다. ……전화도 안 받습니다.”
뭐야! 스토커야?
“그러니까 여기 주소가, 강동구…….”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어 루비는 벌컥, 문을 열어젖히며 고함을 질렀다.
“스톱!”
“어? 한루비!”
이현의 확장된 동공이 제 얼굴에 닿자 루비는 얼결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순간 꿀렁거리는 위가 머리 꼭대기로 쏠리는 기분이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안 오셔도 됩니다. 친구가……. 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평정심을 찾은 이현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지만, 루비의 속은 더없이 시끄러웠다.
“한루비. 너…… 왜 그래?”
“우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