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1화



타다닥 타들어가는 모닥불 주위로 세 남녀가 모여 앉아 포만감에 젖은 배를 두들겼다. 정자 아래에 지핀 모닥불 옆으론 그들의 한 끼 식사를 훌륭히 해결해 준 토끼의 잔해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
“…….”
꾸르륵……. 꾸르륵…….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한 세 남녀 주위론 어스름한 달빛을 바라보며 구슬피 우는 자연의 소리만이 들려온다.
불룩 튀어나온 바위 위에 앉아 쉼 없이 울어 대는 개구리의 노랫소리에 어린 소녀의 무거워진 눈은 끔벅끔벅 감겨들었다. 그러나 곧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사라진 모친의 자장가마냥 들려오는 개구리의 노래를 애써 거부한 주지약은 슬며시 옆에 앉은 유원영을 올려다보았다.
“…….”
그녀의 시선이 답을 원하고 있다. 하나의 답을 듣기 전에는 이대로 잠들 수 없다. 어린 소녀는 눈빛으로 말하며 사내를 바라본다.
그것은 맞은편에 앉은 동악사 역시 마찬가지로, 그는 시종일관 춤을 추는 불꽃만을 응시한 채 입을 다문 유원영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시선이 유원영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었다.
악몽 속에 기억된 불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작디작은 불꽃을 바라보며 유원영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말한다.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두 아이는 한 마을에서 똑같은 시간을 보냈으나 그 삶은 결코 똑같을 수 없었습니다. 한 아이는 하루 한 끼 식사를 걱정해야만 하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다른 한 아이는 유복한 가정의 부잣집 외동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하나 없이 자라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의 아이는 부잣집 아이를 언제나 이기고 싶어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는 철없는 호승심이 아이에게 밭을 일구는 호미가 아닌, 생각지도 못한 붓을 들게 하고 생각지도 못한 길을 가게 만든 것입니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는 아마 유원영 자신이리라. 그리고 부잣집 아이는 아마 유원영의 눈에 맺히기 시작한 슬픔의 원인이리라.
진중히 흘러나오는 유원영의 말을 방해치 않기 위해 동악사와 주지약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태도에 유원영 또한 다시 입을 열어 그들이 원하는 이야길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러나 그 호승심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잣집 아이 역시 언제나 자신에게 지기 싫어하는 아이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아 사소한 일에도 둘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꼬마들을 모아 하는 전쟁놀이도 언제나 두 아이가 선두에 나서 편을 갈라 서로를 적대시했으며 고목나무 하나 올라가는 것도 누가 먼저 올라갈지 내기라도 하듯 열을 내며 나무를 기어올랐습니다. 후훗! 하다못해 참외 밭 서리하는 것조차 누가 더 많이 훔치나 경쟁을 하다가 걸려서 다리에 피멍이 들 정도로 혼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추억이었다.
결코 나쁘지 않은 추억이었기에 유원영의 입가로 흐릿한 미소가 걸린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다시금 무거운 이야기가 뒤를 이었다.
“…….”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당에서 공부를 끝낸 두 아이 중 부잣집 아이가 내기를 하자 청하였습니다. 숨바꼭질로 부하를 정하자는 다소 엉뚱한 내기였습니다. 그 내기를 가난한 집안의 아이는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꾀를 내어 자신의 집이 아닌 부잣집 아이의 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마을을 이 잡듯이 뒤져도 절대 찾을 수 없도록 부잣집 아이의 집에 숨어든 아이는 그 아이가 절대 찾지 않을 하인들이나 쓰는 더러운 변소 뒤로 쪼그려 앉아 몸을 숨겼습니다. 해가 저물 때까지…….”
“…….”
“한편 술래가 된 부잣집 아이는 동네 꼬마들을 풀어서 마을을 뒤져도 찾을 수 없자 결국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부잣집 아이의 발걸음이 가까워질 수록 변소 뒤에 숨은 아이는 불안감을 느꼈고 최후의 선택으로 절대 그 아이가 열지 않을 것이라 여기던 변소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가 결국 부잣집 아이는 어두워진 변소 안으로 찾아와 승리감에 젖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습니다. 그저 조용하기만 하던 집안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
고통이 인다.
이야기를 이어 나가면 나갈수록 유원영의 두 눈에는 고통스런 빛만이 찾아든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괴로운 음성이 동악사와 주지약의 귀로 흘러들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습니다. 은빛 갑주를 걸친 괴한들의 난입에 마을에서 가장 화려했던 부잣집 아이의 집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해야만 했습니다. 하나의 비명이 끝나면 곧 또 하나의 비명이 터져 나왔으며 또 다른 비명이 끝나면 다시 또 하나의 비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비명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철컥거리는 갑주 소리와 살려 달라 외쳐 대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왜였을까요? 왜 그들이 부잣집 아이의 집을 찾아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 와 생각하면 알 것도 같습니다. 후훗! 당시 내전이 일던 나라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어느 쪽 군사였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그 아이의 집을 찾아온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
“하나 그들은 말로써 그 아이의 아비를 설득하기보다 힘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허리에 찬 검을 이용해 그들은 단지…….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였을 뿐입니다. 손에 든 검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 죽였을 뿐입니다. 이미 원하는 물자를 얻었음에도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은 보이는 모든 이들을 수중의 검을 이용해 베고 또 베었습니다. 그리고 부잣집 아이는 식솔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그저 숨죽여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 자신이 어느새 더러운 오물 속에 몸을 숨기고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 아이는 그저 나무 틈 사이로 난 구멍을 통해 지옥도로 변한 바깥의 풍경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두렵기는 가난한 집안의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봐야만 했던 어린 소년은 작은 몸을 떨며 그저 지금의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
“…….”
“그때였습니다. 한 사내가 아이들이 숨은 변소를 향해 다가온 것은. 철커덕 철컥덕 일신에 걸친 갑주를 울리며 피 묻은 검을 든 채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은 흡사 흉신악살과도 같았습니다. 그의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가난한 집안의 아이는 더욱더 두려움에 떨며 몸을 움츠려야 했으나 부잣집 아이는 오히려 몸의 떨림이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더 이상 울지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던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돌아보며 미소 지은 것은 그때였습니다. 언제나 보이던 밝은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그 아이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난 엄마, 아빠한테 갈 거라고. 그러니 너도 너희 엄마 아빠한테 돌아가라고.’ 후훗! 우습게도 그 아이가 말하는 엄마, 아빠는 소년이 보는 앞에서 죽은 채 마당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소년 역시 보았음에도 부모를 만나러 가겠다 말하며 또 다른 아이 역시 살아 있는 부모를 만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가 있어 재밌었다’는 말을 전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마치 그날의 악몽이 살아나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듯 유원영의 두 눈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 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동악사는 굳이 그 다음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그 다음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유원영이 말한 소년은 아마도 숨어 있던 변소를 뛰쳐나갔으리라. 그리고 변소에 숨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내의 검에 베였으리라. 자신이 원하던 대로 이미 죽은 부모를 만나기 위해…….
“…….”
“…….”
깊은 침묵만이 감돈다.
유원영이 검을 거부하는 이유를 전해 들은 동악사는 말해 주고 싶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검의 본질은 아니라고.
그러나 동악사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유원영을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가 죽고서야 알았습니다.”
“……?”
문득 서글픈 미소를 그리던 유원영이 다시금 닫혀 있던 입을 연다.
그의 미소 섞인 말에 동악사와 주지약이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나 유원영은 그들이 아닌 불꽃 속으로 떠오른 한 소년만을 바라보았다.
“친구였다는 것을. 비록 단 한 번도 서로를 친구라 인정한 적은 없지만……. 그 아이가 사내의 검에 죽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였다는 걸……. 그 아이가 죽고서야 텅 빈 가슴속에 차오르는 슬픔을 맛보고서야 겨우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
“…….”
“검(劍)이란 무엇입니까?”
서글픈 미소만을 짓던 유원영이 문득 고개를 들어 동악사를 바라보며 묻는다.
입가에 걸린 미소만큼이나 슬픈 눈망울을 보이는 사내의 물음에 동악사는 잠시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동악사는 굳은 눈을 한 채 답을 원하는 유원영을 직시했다.
“검이란 본디 약한 자가 강한 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코자 만든 것이네. 무공 역시 마찬가지라네. 검을 이용하는 검법(劍法)이든 도(刀)를 이용하는 도법(刀法)이든 그 종류가 무엇이 되었든 결코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란 말일세. 약한 이를 지키고 스스로를 단련해 참된 깨달음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검이자, 곧 무공일세.”
“…….”
지금 동악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다른 누가 들었다면 틀림없이 배를 움켜잡고 웃었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그가 내뱉은 말은 그동안 무(武)를 이용해 동악사 자신이 해왔던 행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왜 이런 말까지 해 가며 유원영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유원영이 가진 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안타깝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 마음이 이리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게 하나 정작 유원영 본인은 동악사의 말을 거부했다.
“아니요. 검이란 단지 사람을 죽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무공(武功)은 단지 사람을 죽이는 검을 좀 더 잘 움직이는 법을 가르쳐 줄 뿐. 그것이 제가 직접 보고 겪은 검의 정의이며 또한 그것이 검을 사용하는 법의 정의라 생각합니다.”
“……!”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해 주지 못한다.
쓸쓸히 웃으며 등을 돌리는 사내를 향해 동악사는 차마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 말할 수 없었다.
알기에. 지금 유원영의 뇌리 속엔 어린 시절의 악몽이 떠올라 있다는 걸.
그것을 알기에 동악사로선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검에 의해 죽었다. 그 검에 의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친구마저 죽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어린 나이에 마주해야만 했던 유원영의 뇌리 속엔 검에 대한 반감이 너무도 깊게 박혀 있으리라.
‘그날의 악몽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결코 동생의 손에 검이 들리는 날은 없겠지. 휴우! 어쩔 수 없구나. 다른 일을 알아보는 수밖에…….’
포기란 단어를 떠올리고 만다. 자신과 같은 길을 가 주길 원했으나 결국 갈 수 없게 된 유원영에 대한 아쉬움만을 품은 채 동악사는 점차 자신에게서 멀어져 혼자가 된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틀려요!”
“……?”
“……!”
순간 어둠 속으로 숨어들려는 유원영의 발걸음을 주지약의 외침이 붙잡는다. 더 이상 그가 숨지 못하도록 가능한 큰소리로 외쳐 부른 주지약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유원영을 향해 붉게 상기된 얼굴이 되어 외쳤다.
“아저씨의 생각은 잘못됐어요! 검은, 무공은, 죽이는 것만이, 죽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 말이에요! 검이란……. 그 사람에 따라 다르다 했어요. 어머니께서 검이란 쓰는 자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살검(殺劍)이 될 수도, 사람을 살리는 활검(活劍)이 될 수도 있다 했단 말이에요! 설사 내가 마(魔)에 발을 들였다 해도 내 마음에 정(正)이 살아 있다면 내 검은 마검(魔劍)이 아닌 정검(正劍)이 되어 사람을 살릴 것이라 했단 말이에요…….”
“…….”
‘어째서?’
묻고 싶다.
어째서 우는 것이냐고?
어째서 그리 화를 내며 검에 대한 정의를 바꾸려 하는지 묻고 싶다.
모친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않았던 강한 아이다. 그 아이가 지금 자신이 가진 검에 대한 정의에 반발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울며 외쳐 댄다.
그 외침을 듣고 난 유원영은 소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알지 못할 절망감이 솟구쳐 올라 점차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해 줘요……. 살검만이 다가 아니라고. 어머니가 내게 해 준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말해 줘요. 그렇지 않으면 난, 난…….”
‘그곳에서 언제까지 나로 있을 자신이 없어요.’
차마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한다. 단지 흐려지는 말을 끝으로, 울며 갈망할 뿐이다. 사내의 가슴속에 맺힌 검에 대한 정의만이 전부가 아니라 답해 주기를……. 소녀는 눈물 속에 비쳐진 사내의 흐릿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간절한 마음이 되어 답을 원한다.
그 답을 듣지 않고서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곳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던 소녀 주지약이 작은 손을 이용해 유원영의 다리를 힘주어 움켜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
웃고 있다.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낸 지금. 사내는 내쏘아진 환한 달빛 아래 빙그레 미소 짓고 있다. 그윽한 달빛만큼이나 부드럽게 그려진 미소 속에 유원영은 따스한 말로 소녀의 마음속에 깃들기 시작한 어둠을 걷어 냈다.
“옳다. 너의 말이 옳다. 검이란 쓰는 사람에 따라 살검이 될 수도 활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란다. 네가 앞으로 어디에 가서 어떠한 검을 잡던 그 검을 쓰는 너의 마음에 정이 살아 있다면 네 검은 사람을 살리는 활검이 될 것이다.”
“그렇죠? 어머니가 제게 한 말이 옳은 것이죠?”
“그래, 네 어머니의 말씀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웃는다.
사내의 답에 만족한 소녀의 입가에 역시 쏟아지는 달빛만큼이나 환한 미소가 그려진다.
이슬방울을 머금은 새벽녘의 풀잎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그린 소녀의 모습에 유원영 역시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비록 너의 말이 옳고, 또 네 어머니의 말씀이 옳음을 아나, 난 결코 검을 잡을 수 없단다. 내 검에 대한 나만의 정의는 내가 겪은 아픔의 근원이기에 난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고 있음에도 검을 잡을 수 없는 것이란다. 하지만 넌 다르다. 넌 나와는 다르니 넌 네가 가진 검의 정의로 너만의 검을 잡거라. 알겠느냐?”
“…….”
여전히 사내의 말은 다정하기만 하다. 머리를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만큼이나 다정한 사내의 말에 주지약은 혼란스럽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작 소녀의 마음에 깃든 어둠을 걷어 낸 유원영은 자신의 마음에 깃든 어둠만은 걷어 내지 못한 채 소녀의 답을 마지막으로 웃으며 몸을 돌린다.
“…….”
잠시 혼자 있고픈 유원영이 다시금 어둠 속을 향해 걸어가니 이번만큼은 주지약도 그를 잡지 않았다. 단지 바라만 볼 뿐이다. 사라지는 사내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은 채 작은 반짝임만이 일었다.
‘잊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가 제게 보여 준 미소를 그곳에 간다 해도 잊지 않을게요. 어머니가 해 주신 말과 아저씨가 보여 준 미소만 있다면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생긴다 해도 전 언제까지나 제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항상 도움만 받아서 정말 미안해요.’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언제까지고 유원영만을 바라본다.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주지약은 이윽고 달빛으로도 그를 확인할 수 없자 하나의 결심이 담긴 눈으로 고개를 돌려 동악사를 직시했다.
“윽! 뭐, 뭐냐?”
“…….”
화들짝 놀라고 만다.
가뜩이나 알 수 없는 상황에 그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멍하니 두 남녀를 바라만 보던 동악사는 갑작스레 돌려진 주지약의 시선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움찔하는 동악사의 모습은 우습기까지 했다.
주지약은 웃음보다는 결의에 찬 말로써 다시 한 번 동악사를 당황케 했다.
“아저씨께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엥? 그건 무슨 자다가 마누라 뒷발에 차여 마구간까지 날아가는 소리냐? 꼬마 여우야, 너도 방금 들었지 않느냐? 동생은 무공을 익힐 생각이 없다는 걸 말이다. 비록 네가 아까 한 말이 옳기는 하나 내 동생은 검 자체에 아픔을 가져 검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알아요. 아니까 부탁하는 거예요.”
“허허…….”
점점 더 아리송하기만 하다.
대체 이 영악한 정체불명의 소녀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함께하면 할 수록 알 수 없는 소녀의 말과 행동에 동악사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녀를 주시했다.
주지약은 곧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검이 지금 아저씨의 마음에 깃든 아픔의 근원이라면, 검으로써 그 아픔을 치유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검으로 당한 아픔을 검으로 치유한다? 대체 어떻게 치유한단 말이냐?”
“간단해요. 검에 의해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생긴 아픔이라면 반대로 검을 통해 사람을 살림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거죠.”
“흐음…….”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비록 말은 그럴 듯하나 유원영의 아픔과 주지약이 내놓은 치료법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 차이점을 생각지 않고 그저 단순히 반대로 되돌려 놓으면 된다 말하는 주지약의 의견에 동악사는 속으로 냉소를 흘려보냈다.
‘흥! 역시 아이는 아이로군. 아무리 똑똑해도 고작 아홉 살 코 찔찔대는 아이일 뿐이야. 고작 그런 방법으로 내동생의 아픔이 치유될 것이라 여기다니? 하나 비록 말이 되지 않는 방법이긴 하나 그 목적이야 어떻든 내 동생이 무공을 익힐 수만 있다면야……. 흐흐.’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악선 동악사의 의제가 무공도 모르는 서생이란 점이 마음에 걸려 유원영에게 적극적으로 무인이 될 것을 추천했던 그였다. 그렇기에 지금 주지약의 말이 얼토당토않다는 걸 알면서도 구미가 당기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좋다, 꼬마 여우. 네 말이 옳다고 치자구나. 하지만 문제는 동생에게 어떻게 무공을 익히게 한단 말이냐? 혹 방법이 있느냐?”
“간단해요.”
간단하다.
어려운 문제가 분명하거늘 뭐든지 간단하다 너무 쉽게 말하고 있다.
그 점이 영 못미더워 의심스런 눈초리로 주지약을 응시하니 그녀는 두 눈을 빛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무공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무의 전부라 여기고 있을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니.”
“맞아요. 내기(內氣)가 뭔지, 내공법(內功法)이 뭔지 전혀 모르죠. 그 점을 이용하는 거예요. 우선 아저씨께 무공이 아닌 몸을 건강히 하는 기 수련법이라 하고 내공을 갈고닦게 하세요. 그럼 자연히 자신이 익히는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한 기 수련법이 아님을 아저씨 또한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자신이 익히고 있는 내력의 신묘함을 알게 될 테고 또 호기심이 많은 아저씨이니 분명 흥미를 갖고 그것이 무공임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익히게 될 거예요. 그러다 보면 차츰 검에도…….”
“아니, 뭐야? 그럼 내 동생한테 사기를 치란 말이냐!”
이야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버럭 화부터 낸다.
얼굴 가득 인상을 쓰며 불같이 화를 내는 동악사의 모습은 마치 성난 호랑이와도 같아 어린 주지약으로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금세 무서운 표정을 풀며 히죽 웃어 보인다. 두 눈 가득 장난꾸러기 어린아이마냥 짓궂은 눈빛을 한 동악사는 이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킥킥 웃어 대기 시작했다.
“크크! 재밌겠군, 재밌겠어.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무공 입문(武功入門)이라? 흐흐흐! 아주 재밌겠어……. 차후 자신이 익힌 게 상승의 내공심법이라는 걸 알았을 때 동생의 표정이 기대되는군. 킥킥! 무엇을 먼저 익히게 할까? 나이가 나이니만큼 성취도가 빠른 게 좋을 텐데……. 혈령심공(血令心功)? 아니야, 아니야. 너무 더뎌. 이것보다는 차라리 시음마공(屍陰魔功)이 좋겠군. 꾸준히 시체들의 음기를 뽑아 익히기만 한다면 눈부신 진보를 할 테니 이게 좋겠어.”
“안 돼요! 아저씨를 마인(魔人)으로 만들 생각인가요?”
빽하니 소리를 질러 즐거운 상상에 젖어 있던 동악사를 일깨운다.
그녀의 고성에 동악사는 찌푸린 얼굴이 되어 주지약을 노려보며 호통을 내질렀다.
“갈!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것이냐? 아무튼 이래서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놈들이란……. 쯧쯧! 이것아, 마공이라고 익히면 다 마인이 되는 줄 아느냐? 마공이라는 것도 다 정파 놈들이 자신들과 다른 속성의 성질을 가진 사파의 신공을 질투해 붙인 말이란 말이다. 뭐, 익히는 방법이 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고 중간 중간 고비가 찾아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면 네 말대로 본성이 조금 변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미친놈이 되는 건 아니니 걱정 말거라.”
“안 돼요. 마공만큼은 절대 안 되니 엉뚱한 생각 말아요! 게다가 처음부터 그런 괴이한 수법으로 익히는 마공을 아저씨가 받아들일 리 없잖아요.”
“쳇! 그럼 어떻게 하잔 소리냐? 내가 아는 건 다 이런 것뿐이라고! 네년도 알다시피 내 태생부터가 온갖 마인들이 모인 사천곡이 아니냐? 근데 이런 것 말고 정파 놈들의 고리타분한 내공법을 내 어찌…….”
“……?”
문득 흥분해 외쳐 대던 동악사의 말이 멈춘다.
불시지간 오래된 기억의 파편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필요 없었기에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 동악사는 이내 주지약을 버려둔 채 홀로 사색에 잠겨 들었다.
“그렇지, 그게 있었어. 하지만……. 그건 아닌데……. 그건 내 동생이 익히기엔 너무 보잘것없지 않은가? 그따위 쓰레기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무당파의 태극신공(太極神功)을 훔쳐다가…….”
“뭔데요? 뭔데 그러나요?”
턱을 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동악사의 답답한 모습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약이 입을 열어 묻는다.
그녀의 질문에 슬며시 한쪽 눈을 치켜뜬 동악사는 곧 묘한 눈빛이 되어 주지약을 바라보았다.
“꼬마 여우야, 혹시 너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선유진경(仙喩眞經)이라는 비서(秘書)를.”
“……?”
처음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