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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여름, 시작(1)
눈을 감으면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유난히 뜨거웠던 그해의 여름. 싱그러운 신록의 잎사귀와 눈부신 태양, 흐르는 땀방울 위를 스치던 한 줄기 바람.
뜨거운 여름을 닮은 작은 소우주를 누비던 너.
그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너는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났다.
지구온난화. 그 말을 실감케 하듯, 유난히도 무더운 날씨였다. 고작 6월인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솟아오른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가죽에 달라붙어 있던 끈끈한 살이 작은 마찰을 일으키며 떨어져 나왔다.
얼음 잔에 물을 채워 거실로 돌아오는데,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얇은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극장 뮤지컬의 팸플릿이다. 빠듯한 예산을 온몸으로 보여 주듯 조잡한 디자인과 한눈에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재질. 천천히 손을 뻗어 선홍빛 팸플릿을 집어 든다. 어쩐지 이 녀석도 뜨거운 더위에 지쳐 한껏 흐물흐물해진 것만 같다.
미주는 선 채로 팸플릿을 펼쳐 들고 대강 내용을 훑었다. 한 달 전과는 다르게 ‘롱런 예감’이나 ‘연일 매진 행렬’ 등의 광고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얼음으로 차게 식은 물을 한 모금 삼키며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극단 대표의 인사말과 주연 배우들의 프로필을 훌훌 넘기고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자, 깨알 같은 글씨로 나란히 늘어선 스태프들의 명단이 보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만큼 작은 글씨다.
음악감독 한지원.
팸플릿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는데. 올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울 것 같다.
☆
“그 여자 또 온 거 봤어?”
“아아, A열 15번!”
“확실히 선우 자식 맞지, 그거?”
“역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어!”
에어컨과 선풍기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지만, 무대에서 한바탕 열정을 터뜨린 후의 대기실은 언제나 땀내 섞인 열기로 가득하다. 마지막 무대인사와 퍼포먼스 직전, 배우들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은 5분. 생수병을 통째로 비워 가며 갈증을 달래고 거울 앞에서 재빨리 메이크업과 머리를 점검한다.
“꼭 그 자리에서만 본다니까. A열 15번.”
“우리 그렇게 인기가 없나? 원하는 자리 마음대로 골라서 예매할 만큼 좌석이 남아도는 거야?”
“야야, 무슨 소리! 지금 티켓 매일 매진이구만. 이거 냄새가 난다. 보통 사건이 아니야.”
객석의 끊이지 않는 박수와 함성 소리가 무대 뒤에 마련된 단출한 대기실로 환청처럼 밀려들었다. 그 사이를 신랄하게 파고드는 성량 좋은 목소리들을 애써 무시한 선우는, 조금 전 전신을 에워쌌던 무대 위 쾌감의 잔상에 몸을 떨며 수건을 집어 들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 위로 후끈한 선풍기 바람이 스쳤다.
“그 여자 설마 두 달 치 티켓을 몽땅 사 뒀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꼭 선우 자식 나오는 날뿐이라니까.”
“이런 게 바로 더블캐스팅의 폐해 아니겠냐. 야, 남궁선우!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 여자 대체 누구야? 스토커?”
요란한 분장의 배우들이 선우를 사방에서 에워싸듯 포위한다.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계속되는 추궁에 막 뭐라고 항의하려는 찰나, 스태프의 요란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라스트! 무대인사 준비하세요!”
선우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이 마주친 스태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영문을 알 길이 없는 스태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따라 제 엄지를 세운다. 선우 씨, 파이팅. 입을 벙긋대며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이 좋다 말았네.”
김샜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던 동호를 시작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둘 발을 굴러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 가득 만연한 미소. 그 꽃 같은 웃음 사이로 굶주린 야수처럼 눈을 빛낸다. 하긴. 이 순간만큼은 모두 무대에 굶주린 야수나 다름없다고, 선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 무대를 향한 그 끝없는 욕망은 자신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자자, 그럼 나가 보실까!”
“오늘도 대박이다!”
“선우 넌 이따가 두고 보자!”
줄지어 무대로 뛰쳐나가는 배우들을 바라보며 선우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10분 남짓의 춤과 노래. 이미 본 공연은 끝났지만 이런 마지막의 퍼포먼스는 이미 흥이 오를 대로 올라 절정에 다다른 에너지를 부담 없이 쏟아 내는 축제와도 같은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뮤지컬의 성대하기까지 한 라스트 연출은 특히나 더 선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무대로 통하는 비좁은 통로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틈새로 새어 나오는 강렬한 조명 탓이겠지만,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선우는 늘 황홀한 기분에 젖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고 나를 위한 무대다.
손을 내민 스태프와 요란한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으며 선우 역시 무대 위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보였다.
화려하게 무대 위를 비춰 내는 조명과 음악 소리, 한껏 고조되며 달아오른 객석의 박수와 함성 소리 한가운데.
“왔다, 왔어. 그 여자.”
군무 도중 은근슬쩍 뒤로 다가선 형욱이 선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끄러워.”
“유후.”
휘파람까지 불어 대는 형욱을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른 선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여자를 향했다. 굳이 귀엣말로 전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신경 쓰였다.
오늘은 새하얀 원피스다. 항상 단정하게 모아 묶었던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보드랍게 드리워져 있다. 적당한 길이의 윤기 도는 생머리. 묶지 않는 쪽도 어울린다. 오늘로 벌써 열 번째였다. 선우는 여자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바라보자니 마치 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람인 듯 착각까지 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저 사람, 정말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가? 눈이 마주친 것은 우연일 거라 생각했다. 선우를 향한 시선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상대역을 맡은 동호였다. 대체 누구냐, 그 여자? 평소 눈썰미 좋기로 소문난 대선배가 추궁하자 전 배우가 개떼처럼 달라붙어 선우를 닦달하고 나섰다. 정말로 모른다며 손을 내두르는 선우의 항변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즈음부터 선우 역시 여자를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습관처럼 그 언저리의 좌석을 더듬는 선우의 시선을, 역시 가장 먼저 눈치챈 동호가 대기실에서 원 없이 소문내는 바람에 선배들에게 지갑이 두 번이나 털렸다. 무죄에 삼겹살 턱이라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텀블링을 하며 무대로 튀어나온 선우가 다시 객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자는 언제나처럼 자그마한 입술을 꼭 다문 한결같은 표정이다. 여느 때와 같은 자리의 빨간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무대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박수는커녕 미동조차 없다. 여자가 앉아 있는 공간만이 홀로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만 같다.
‘꼭 그 자리에서만 본다니까.’
‘그 여자 대체 누구야?’
……누구냐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선우는 주먹을 쥔 채 안무에 맞춰 힘껏 점프했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에서 관객들과의 간단한 사진 촬영회가 있었다. 모두 이런 종류의 포토타임에는 익숙한 듯 포즈까지 연출해 가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지만, 선우는 연신 제 발끝 보기에 여념이 없다. 무대 위를 제 안방처럼 헤집고 다니던 배우가 이제 와서 쑥스러움이라도 타는 것이라 여겼는지 여성 관객들이 재미있어 하며 선우 주위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실 배우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이기도 했다.
무대 위라면 얼마든지 광대가 되어 줄 수 있어. 하지만 무대 밖에서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를 팔고 싶진 않아. 뚱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선우를 힐끔 쳐다본 동호는 얼마 전, 선우와 대기실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외모도 실력도 빼어나다. 오랜만에 스타 하나 나겠군, 하고 생각했는데 이건 성격이 영 글러 먹었다. 사교성이 없는 것도, 딱히 모난 성질머리도 아니다. 오히려 능글맞은 구석까지 있어 뵈는 녀석이 저리도 융통성이 없단 말이야. 동호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차다가 카메라를 들고 다가온 여대생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우는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운동화 끝으로 지면을 툭툭 두드렸다. 배우라는 직업은 결국 자신을 상품화해 파는 일이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유의 쇼맨십은 딱 잘라 싫다. 어떤 얼굴로 사람들을 대해야 할지 난감해 죽겠다. 새삼스레 쑥스러움을 타는 것도 아닌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무어라 외칠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것은 외모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연극과 재학 당시, 선배들과 동기들은 항상 선우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곱상하고 잘빠진 그 얼굴로 배곯는 공연 바닥에 남을 리가 없지, 결국 이러다 연예계로 빠질 거 아니겠느냐며 잘난 외모를 흠잡아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오기였다. 외모가 아닌 스스로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춤과 노래로만 평가받고 싶다. 나의 연기로만 사랑받고 싶다. 처음 극단에 들어왔을 무렵에는 신인 주제에 복 터지는 투정한다며 호되게 꾸지람도 들었다.
언제쯤 끝나려나. 연신 터지는 플래시 세례와 십 분째 계속된 억지 미소에 슬슬 경련이 일 무렵, 선우의 시야에 무언가가 보였다.
그 여자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팸플릿을 손에 쥔 채 사람들의 틈새를 헤집고 지나가는 새하얀 원피스의 여자였다.
A열 15번.
“저기, 잠깐만요!”
빼곡하게 늘어선 인파를 헤치며 튀어나가는 선우를 본 동호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아니, 저 자식이 미쳤나.
“야, 남궁선우!”
하늘 같은 선배의 부름도, 웅성대며 동요하는 관객들도 뒤로한 채, 선우는 좁다란 복도를 힘껏 내달렸다.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제 뒤를 쫓는데도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라 여기면서도 마침내, 선우는 여자를 따라잡았다.
“저기요……!”
그렇게 홀린 듯 그 뒤를 따라가 말을 건넨 것은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분명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뮤지컬 좋아해요?”
적어도 선우에겐, 심사숙고 끝에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건넬 만큼 진지한 마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딱히 말을 건넬 이유도 물론 없었다.
“항상 같은 자리죠?”
막상 여자를 붙들고 나니 몹시 난처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가까이에서 본 여자는 생각보다 훨씬 미인이었다. 선우는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무대 위에서 의외로 객석이 잘 보이거든요. 더군다나 그렇게 늘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람이 앉아 있으면, 그러니까 솔직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잖아요.”
음, 음. 잠시 숨을 골랐다.
“……혹시 나 보러 오는 거예요?”
코끝을 문지르며 툭 꺼내 놓은 질문. 여자는 대답 대신 선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그토록 집요하게 얼굴에 와 닿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당혹스러운 느낌에 놀라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린다.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여자의 얼굴은 선이 고왔다. 역시 미인이다. 하얀 피부, 어쩐지 예민해 보이는 입술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쌍꺼풀 없는 또렷한 눈매. 오밀조밀한 얼굴에 건조한 표정이 오히려 매섭다는 인상을 주었다.
1. 여름, 시작(1)
눈을 감으면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유난히 뜨거웠던 그해의 여름. 싱그러운 신록의 잎사귀와 눈부신 태양, 흐르는 땀방울 위를 스치던 한 줄기 바람.
뜨거운 여름을 닮은 작은 소우주를 누비던 너.
그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너는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났다.
지구온난화. 그 말을 실감케 하듯, 유난히도 무더운 날씨였다. 고작 6월인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솟아오른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가죽에 달라붙어 있던 끈끈한 살이 작은 마찰을 일으키며 떨어져 나왔다.
얼음 잔에 물을 채워 거실로 돌아오는데,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얇은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극장 뮤지컬의 팸플릿이다. 빠듯한 예산을 온몸으로 보여 주듯 조잡한 디자인과 한눈에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재질. 천천히 손을 뻗어 선홍빛 팸플릿을 집어 든다. 어쩐지 이 녀석도 뜨거운 더위에 지쳐 한껏 흐물흐물해진 것만 같다.
미주는 선 채로 팸플릿을 펼쳐 들고 대강 내용을 훑었다. 한 달 전과는 다르게 ‘롱런 예감’이나 ‘연일 매진 행렬’ 등의 광고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얼음으로 차게 식은 물을 한 모금 삼키며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극단 대표의 인사말과 주연 배우들의 프로필을 훌훌 넘기고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자, 깨알 같은 글씨로 나란히 늘어선 스태프들의 명단이 보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만큼 작은 글씨다.
음악감독 한지원.
팸플릿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는데. 올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울 것 같다.
☆
“그 여자 또 온 거 봤어?”
“아아, A열 15번!”
“확실히 선우 자식 맞지, 그거?”
“역시!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어!”
에어컨과 선풍기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지만, 무대에서 한바탕 열정을 터뜨린 후의 대기실은 언제나 땀내 섞인 열기로 가득하다. 마지막 무대인사와 퍼포먼스 직전, 배우들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은 5분. 생수병을 통째로 비워 가며 갈증을 달래고 거울 앞에서 재빨리 메이크업과 머리를 점검한다.
“꼭 그 자리에서만 본다니까. A열 15번.”
“우리 그렇게 인기가 없나? 원하는 자리 마음대로 골라서 예매할 만큼 좌석이 남아도는 거야?”
“야야, 무슨 소리! 지금 티켓 매일 매진이구만. 이거 냄새가 난다. 보통 사건이 아니야.”
객석의 끊이지 않는 박수와 함성 소리가 무대 뒤에 마련된 단출한 대기실로 환청처럼 밀려들었다. 그 사이를 신랄하게 파고드는 성량 좋은 목소리들을 애써 무시한 선우는, 조금 전 전신을 에워쌌던 무대 위 쾌감의 잔상에 몸을 떨며 수건을 집어 들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 위로 후끈한 선풍기 바람이 스쳤다.
“그 여자 설마 두 달 치 티켓을 몽땅 사 뒀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꼭 선우 자식 나오는 날뿐이라니까.”
“이런 게 바로 더블캐스팅의 폐해 아니겠냐. 야, 남궁선우!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 여자 대체 누구야? 스토커?”
요란한 분장의 배우들이 선우를 사방에서 에워싸듯 포위한다.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계속되는 추궁에 막 뭐라고 항의하려는 찰나, 스태프의 요란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라스트! 무대인사 준비하세요!”
선우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이 마주친 스태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영문을 알 길이 없는 스태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따라 제 엄지를 세운다. 선우 씨, 파이팅. 입을 벙긋대며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이 좋다 말았네.”
김샜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던 동호를 시작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둘 발을 굴러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 가득 만연한 미소. 그 꽃 같은 웃음 사이로 굶주린 야수처럼 눈을 빛낸다. 하긴. 이 순간만큼은 모두 무대에 굶주린 야수나 다름없다고, 선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 무대를 향한 그 끝없는 욕망은 자신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자자, 그럼 나가 보실까!”
“오늘도 대박이다!”
“선우 넌 이따가 두고 보자!”
줄지어 무대로 뛰쳐나가는 배우들을 바라보며 선우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10분 남짓의 춤과 노래. 이미 본 공연은 끝났지만 이런 마지막의 퍼포먼스는 이미 흥이 오를 대로 올라 절정에 다다른 에너지를 부담 없이 쏟아 내는 축제와도 같은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뮤지컬의 성대하기까지 한 라스트 연출은 특히나 더 선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무대로 통하는 비좁은 통로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틈새로 새어 나오는 강렬한 조명 탓이겠지만,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선우는 늘 황홀한 기분에 젖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고 나를 위한 무대다.
손을 내민 스태프와 요란한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으며 선우 역시 무대 위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보였다.
화려하게 무대 위를 비춰 내는 조명과 음악 소리, 한껏 고조되며 달아오른 객석의 박수와 함성 소리 한가운데.
“왔다, 왔어. 그 여자.”
군무 도중 은근슬쩍 뒤로 다가선 형욱이 선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끄러워.”
“유후.”
휘파람까지 불어 대는 형욱을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른 선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여자를 향했다. 굳이 귀엣말로 전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신경 쓰였다.
오늘은 새하얀 원피스다. 항상 단정하게 모아 묶었던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보드랍게 드리워져 있다. 적당한 길이의 윤기 도는 생머리. 묶지 않는 쪽도 어울린다. 오늘로 벌써 열 번째였다. 선우는 여자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바라보자니 마치 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람인 듯 착각까지 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저 사람, 정말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가? 눈이 마주친 것은 우연일 거라 생각했다. 선우를 향한 시선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상대역을 맡은 동호였다. 대체 누구냐, 그 여자? 평소 눈썰미 좋기로 소문난 대선배가 추궁하자 전 배우가 개떼처럼 달라붙어 선우를 닦달하고 나섰다. 정말로 모른다며 손을 내두르는 선우의 항변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즈음부터 선우 역시 여자를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습관처럼 그 언저리의 좌석을 더듬는 선우의 시선을, 역시 가장 먼저 눈치챈 동호가 대기실에서 원 없이 소문내는 바람에 선배들에게 지갑이 두 번이나 털렸다. 무죄에 삼겹살 턱이라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텀블링을 하며 무대로 튀어나온 선우가 다시 객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자는 언제나처럼 자그마한 입술을 꼭 다문 한결같은 표정이다. 여느 때와 같은 자리의 빨간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무대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박수는커녕 미동조차 없다. 여자가 앉아 있는 공간만이 홀로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만 같다.
‘꼭 그 자리에서만 본다니까.’
‘그 여자 대체 누구야?’
……누구냐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선우는 주먹을 쥔 채 안무에 맞춰 힘껏 점프했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에서 관객들과의 간단한 사진 촬영회가 있었다. 모두 이런 종류의 포토타임에는 익숙한 듯 포즈까지 연출해 가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지만, 선우는 연신 제 발끝 보기에 여념이 없다. 무대 위를 제 안방처럼 헤집고 다니던 배우가 이제 와서 쑥스러움이라도 타는 것이라 여겼는지 여성 관객들이 재미있어 하며 선우 주위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실 배우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이기도 했다.
무대 위라면 얼마든지 광대가 되어 줄 수 있어. 하지만 무대 밖에서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를 팔고 싶진 않아. 뚱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선우를 힐끔 쳐다본 동호는 얼마 전, 선우와 대기실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외모도 실력도 빼어나다. 오랜만에 스타 하나 나겠군, 하고 생각했는데 이건 성격이 영 글러 먹었다. 사교성이 없는 것도, 딱히 모난 성질머리도 아니다. 오히려 능글맞은 구석까지 있어 뵈는 녀석이 저리도 융통성이 없단 말이야. 동호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차다가 카메라를 들고 다가온 여대생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우는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운동화 끝으로 지면을 툭툭 두드렸다. 배우라는 직업은 결국 자신을 상품화해 파는 일이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유의 쇼맨십은 딱 잘라 싫다. 어떤 얼굴로 사람들을 대해야 할지 난감해 죽겠다. 새삼스레 쑥스러움을 타는 것도 아닌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무어라 외칠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것은 외모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연극과 재학 당시, 선배들과 동기들은 항상 선우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곱상하고 잘빠진 그 얼굴로 배곯는 공연 바닥에 남을 리가 없지, 결국 이러다 연예계로 빠질 거 아니겠느냐며 잘난 외모를 흠잡아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오기였다. 외모가 아닌 스스로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춤과 노래로만 평가받고 싶다. 나의 연기로만 사랑받고 싶다. 처음 극단에 들어왔을 무렵에는 신인 주제에 복 터지는 투정한다며 호되게 꾸지람도 들었다.
언제쯤 끝나려나. 연신 터지는 플래시 세례와 십 분째 계속된 억지 미소에 슬슬 경련이 일 무렵, 선우의 시야에 무언가가 보였다.
그 여자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팸플릿을 손에 쥔 채 사람들의 틈새를 헤집고 지나가는 새하얀 원피스의 여자였다.
A열 15번.
“저기, 잠깐만요!”
빼곡하게 늘어선 인파를 헤치며 튀어나가는 선우를 본 동호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아니, 저 자식이 미쳤나.
“야, 남궁선우!”
하늘 같은 선배의 부름도, 웅성대며 동요하는 관객들도 뒤로한 채, 선우는 좁다란 복도를 힘껏 내달렸다.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제 뒤를 쫓는데도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라 여기면서도 마침내, 선우는 여자를 따라잡았다.
“저기요……!”
그렇게 홀린 듯 그 뒤를 따라가 말을 건넨 것은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분명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뮤지컬 좋아해요?”
적어도 선우에겐, 심사숙고 끝에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건넬 만큼 진지한 마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딱히 말을 건넬 이유도 물론 없었다.
“항상 같은 자리죠?”
막상 여자를 붙들고 나니 몹시 난처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가까이에서 본 여자는 생각보다 훨씬 미인이었다. 선우는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무대 위에서 의외로 객석이 잘 보이거든요. 더군다나 그렇게 늘 같은 자리에 같은 사람이 앉아 있으면, 그러니까 솔직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잖아요.”
음, 음. 잠시 숨을 골랐다.
“……혹시 나 보러 오는 거예요?”
코끝을 문지르며 툭 꺼내 놓은 질문. 여자는 대답 대신 선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그토록 집요하게 얼굴에 와 닿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당혹스러운 느낌에 놀라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린다.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여자의 얼굴은 선이 고왔다. 역시 미인이다. 하얀 피부, 어쩐지 예민해 보이는 입술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쌍꺼풀 없는 또렷한 눈매. 오밀조밀한 얼굴에 건조한 표정이 오히려 매섭다는 인상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