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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남자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다 ‘텔레파시’라고 하는 것까지 듣고 나는 블랙아웃. 화장실이 급해 일어났을 땐 팬티만 입고 커다란 침대 위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한심한 팬티보다 더 비참한 건 기억도 안 나는 첫 경험이다.’ 절망하며 주위를 둘러봤는데 어제의 남자는 흔적도 없고 클럽에서 진가를 드러내는 브론즈 컬러의 스팽글이 요란한 크롭탑과 홀랑 뒤집어 벗어 놓은 스키니 진, 브라만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이렇게 벗어 놓은 건 분명 내 짓인데?
팬티 바람으로 창가에 갔다. 전면이 통유리여서 멀리 항구도 보였다. 센트럴 한복판에 있구나. 소란했던 도시의 민얼굴을 만날 수 있는 이른 아침,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공기……. 굉장히 날씨가 좋을 하늘이다. 소프트아이스크림같이 명랑한 구름들이 선버스트 옐로에서 세룰리안블루로 변해 가는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는 가운데 침울한 엄마의 얼굴이 스쳤다.
데킬라가 들어가기 전까진 분명 엄마에게 갈 생각이었다. 나와 대판 다투기 전에 엄마는 올해는 나와 둘이서 센트럴의 성모 수태 성당에서 영어로 진행하는 성탄 전야 미사를 드리러 가고 싶다고 하셨다.
한때는 열심히 성당에 나가던 분이긴 했지만 상해로 가면서 종교 생활은 일절 안 하셨는데,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걸까? 나는 무조건 알았다고 그러자고 했다.
엄마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죄책감과 함께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없이 가방을 찾았지만 없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제비족같이 생긴 놈에게 당했구나.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늘 어영부영 지나가던 생일이 외롭지 않아 기뻤다. 경계를 풀고 헤벌쭉 웃는 바보의 얼굴이 플래시백 되었다.
생일인데 샴페인 정도는 마셔 줘야 된다고 하면서 성탄 전야의 클럽에서 겁도 없이 대형 할인점보다 값을 300%는 더 부르는 크뤼그를 한 병 마셨다. 센트럴의 특급 호텔에 있는 지금, 남자는 내 카드로 결제하고 아직 할부가 남은 가방까지 들고 튀었구나.
불효한 죗값을 이렇게 치르는 건가? 자존심이 허락 안 해서 좋은 데 취직한 친구들은 안 만나고 아득바득 수전노처럼 살면 뭐 하나, 이렇게 한 방에 잃어버리는 것을. 이게 다 빤지르르하게 생긴 남자가 나만 기억하는 옛날 영화를 들먹여서 긴장을 놓아 버린 탓이다. 무서울 정도로 인연처럼 다가왔었지…….
마음에서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체념하고 욕실로 갔을 때 도둑맞은 줄 알았던 핸드백이 화장대 위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가방 입구에 크리스마스의 기념품도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제일 꼭대기에 달려 있을 땐 그렇게 빛나 보이던 것이 내 손안에선 보잘것없구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난 시각부터 약 20분 동안 혼자 쇼했던 걸 누가 못 봤으니 망정이지, 비정한 도시에서 오래 살아온 탓이라고 자기변명을 하면서 지갑이 온전히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옹그리고 있던 온몸의 세포가 이제야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목적도 생각났다. 변기에 앉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 굿모닝! 미스 선샤인.
“누구……?”
― 김선달.
“봉이!”
― 씻고 한 시간 뒤에 로비에서 보자.
“왜?”
― 나한테 생일 팔았잖아. 기억 안 나면 지갑 확인해 봐. 사인까지 했어.
에스프레소 컬러 아이라이너로 ‘김선달에게 생일을 팔았음. 위반 시 스무 배 배상하겠음.’이라고 쓴 100달러짜리 홍콩 달러가 진짜로 있었다. 화룡점정으로 유치한 검은 별★을 그려 넣은 사인까지. 아무리 그래도 만 오천 원에 생일을 팔아 버리다니, 남자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다.
― 한 시간 뒤에 데리러 갈게. 준비하고 내려와. 밥부터 먹자.
“아라쓰.”
남자는 거부감 들지 않게 나를 불러냈다. 여자를 잘 다루는 위험한 남자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무시하고 아만다에게서 온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수신함을 열었다.

[저번처럼 상해서 못 먹게 만들지 말고 할머니 반찬은 냉장고에 잘 넣어 놓고 와. 엄마가 미안해.]

어디 가서 말로는 절대로 안 지는 엄마가 먼저 사과했다. 어제 이 시각엔 리무진버스 안에 있었다. 과속 경고음을 무시하고 쌩쌩 달리는 버스 기사 때문에 긴장을 놓을 수 없어 방글라데시에서 온 남자와 나는 안전벨트를 한 번 더 조여 맸었지.
그가 나눠 주는 크림빵을 기분 좋게 나눠 먹었더라면, 휴게소를 무시하고 인천까지 푹 자 버리고 비행기에서 꼿꼿하게 앉아 책이나 읽었더라면 쫑파티에 잠깐 얼굴만 비치고 바로 엄마에게로 갔을 텐데…….
메시지를 받은 지 여덟 시간이나 흘러서야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막둥이 모드로 아양을 떨었다.
“엄마―”
― 일찍도 전화한다.
“뒤풀이가 너무 늦게 끝났어. 아무것도 안 먹고 기다린 건 아니지?”
― 요새는 한 끼만 굶어도 어지러워서 안 돼.
“미사는 갔어?”
― 13년 넘게 안 가다가 성탄절이라고 가려니 뜨끔해서.
“안 민망하게 막둥이가 같이 가 줬어야 했는데. 미안.”
― 뭐 좀 먹었어?
“배고파 죽겠어. 우리 동네 만두 사 갈까? 전에 맛있다고 했잖아.”
― 음식은 여기도 많아.
목소리가 어둡지 않아서 다행이다. 술 냄새 난다고 잔소리할 게 뻔해서 양치를 5분 동안 하고 초스피드로 씻고 호텔을 나왔다.

* * *

어린 시절의 나는 흥을 주체할 수 없어 음악이 나오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을 흔들었다. 박수와 호응을 받으면 흥이 나서 더 신나게 춤췄다. 엄만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는 둘째 딸이 좋아하는 것만 원 없이 하도록 내버려 뒀다.
5학년이 된 첫날, 반 아이들과 인사하고 자리만 정하고 하교하는데 정문 앞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달달한 밀가루 떡볶이를 앞에 두고 엄마는 말했다.
“공부는 안 하기로 했어?”
“엄마 아빠의 좋은 머리는 언니한테만 갔나 봐.”
“시도해 보지도 않고 결론 내리지 마. 우리 뇌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기는지 그 한계는 아직 아무도 몰라. 우주처럼 미개척 분야라고.”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어떤 아줌마가 명함 줬어. 요즘 핸드폰 광고에 나오는 언니 있잖아. 그 언니 소속사 실장님이래. 엄마 모시고 오디션 보러 오라고 했어.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걸려.”
“꿈을 단정 짓기에 열두 살은 너무 어려. 1학기만 공부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네 멋대로 해. 옛말에 공부머리는 엄말 닮는댔어. 내 딸이 공부 못할 리 없잖아?”
정말로 엄마를 닮았다면 바보는 아닐 텐데? 마지막 말에 솔깃했다. 엄마는 아빠와 같은 대학 영문과 동기로 아빠보다 3년 먼저 언론고시에 합격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퇴근 후 아내가 기다리는 가정을 꿈꿨던 아빠의 바람대로 너무 쉽게 꿈을 접어 버렸다.
신혼을 제외하곤 한결같이 사이가 나빴던 부부가 첫아이와 6년 터울로 둘째를 낳은 데에 말들이 많았다. 외할머닌 ‘언론고시 패스한 여자를 살림이나 하도록 앉혀 놓고 바람피운 놈’으로 시작해 언니와 내가 있어도 아빠 욕을 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엄만 언니에게 돈을 쥐여 주면서 나가서 군것질하고 들어오라고 했다.
내겐 시선 한번 안 주고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마치 봐서는 안 될 더러운 걸 봤다는 양 날 쏘아보는 외할머니가 미웠다. 아빠도 나 같은지 외할머니가 오시는 날은 귀신같이 알고 집에 안 들어왔다.
외갓집보다 정도는 약했지만 친가라고 다르지 않았다. 사내 녀석은 ‘현’, 보통은 돌림을 쓰지 않는 계집애들까지 ‘은’ 자 돌림을 썼는데 나만 외자인 ‘별’이다.
연휴의 마지막 저녁, 친정에 온 고모는 조카들을 모아 놓고 용돈을 줬는데 항상 내 차례만 되면 현금이 떨어졌다며 다음에 주겠다고 했다. 해마다 그런 일이 반복됐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매일 밤 그날의 일들을 되감기 해 보았지만 아무리 돌려 봐도 잘못한 게 없었다. 어른이 왜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할까, 절망했다.
어린이의 괴로움을 의논할 상대는 없었다. 늘 공부 때문에 바빴던 언니는 친척 모임이라면 나보다 더 질색했고 명절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전교 1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언니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였다. 명절 따위 달력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제발 이번 설에는 아파서 외갓집에 안 가도 되게 해 주세요.’가 아홉 살 때부터 한결같았던 크리스마스의 소원이었다.
엄마는 저학년 때 보던 교과서로 기초가 전혀 안 잡힌 공부를 잡아 주셨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 난다며 엄마는 나와 함께 공부했다. 수학 같은 경우는 구구단부터 시작했다. 19단까지 외우고 나니 숫자가 조금 보이는 것도 같았다.
형광펜과 볼펜으로 교과서의 삽화 속 인물에다가 화장을 하거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던 수업 시간에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대충대충이 아닌 100점을 목표로 공부했다. 여전히 어른스럽게 꾸미고 춤추고 노래하는 게 좋았지만 공부엔 척을 졌던 나의 변화만이 엄마를 웃게 하니까 참았다.
궁금한 게 생기고 질문도 했다. 선생님에게 칭찬을 듣고부턴 공부에 욕심이 생겼다. 장거리 달리기의 훌륭한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준 엄마 덕분에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단상에 올라가 신입생 대표로 선서를 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상하이의 방송국에서 아빠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의대 본과생이 된 언니만 서울에 남고 엄마와 나는 아빠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가 홍콩에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세계의 금융과 거대 자본이 모이는 홍콩으로 이주했다.

* * *

할매에게 다녀오느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써 버린 나는 12월 26일 혼자서 스튜디오를 지켰다. 스튜디오와 이웃한 갤러리 직원들과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데 차터하우스의 고급 플라워숍에서 보낸 화려한 꽃꽂이 작품이 내 앞으로 도착했다. 이어서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 ‘이’ 한 박자 쉬고 ‘별’. 한국인, 28세.
“……누구세요?”
― 전화 끊고 정확히 한 시간 뒤에 데리러 갔었어.
“아!”
― 기억은 나나 보네.
“혹시 지금 나한테 꽃 보냈어?”
― 마음에 들어?
“돈 좀 썼겠네. 근데 필요 없어. 도로 가져가.”
―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지? 엄연히 계약 위반이야.
“……엄마한테 사과하러 갔었어.”
― 배고픈데 국수나 먹자. 스튜디오 앞으로 갈게.
“그러시든가.”
무방비하게 있다가 여자를 잘 다루는 남자의 수법에 걸려들었다. 정확히 7시, 배달 온 꽃을 안고 로비로 내려갔는데 베이징 클럽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그럴싸한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안엔 어떻게 들어왔어?”
“이래 봬도 신분은 확실한 사람이거든. ID카드 보여 주니까 들여보내 주던데?”
활짝 웃던 그의 시선이 품 안의 꽃병에 꽂혔다.
“집에 가져가기 싫으면 사무실에 도로 올려놓고 와. 줬던 거 뺏을 만큼 쩨쩨하진 않아.”
“엄청 한가한가 보네.”
“너한테 반했을 뿐이지.”
“역시 제비족.”
“난 자연 훈남이라 성형 미인은 취급 안 해. 척 보면 견적 나오거든. 요샌 칼 안 댄 천연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그러고 보니 넌 진짜 별이네.”
“여기 잠깐만 있어 보면 앞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여자들 전부 댁이 말하는 천연이야. 더군다나 화장도 전혀 안 해서 완벽하게 그쪽 스타일.”
마침 엘리베이터가 G층에 섰고 갤러리 직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홍콩 여자들은 한국 여자처럼 정성 들인 화장을 하지 않는다. 습기가 많은 기후 탓도 있지만 내가 아는 홍콩 여자들은 화장에 시간 들이는 걸 아까워하고 자아가 강하다.
갤러리 직원들은 남자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 명은 그만하면 괜찮다는 듯이 승인의 끄덕임을, 어떤 이는 엄지를 척 들어 보이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