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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래층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그 사이사이에 섞여 귓가를 스쳤다. 이영은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갈 때마다 그 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는 걸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도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하기야 그걸 모르고 참석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기대 같은 건 애당초 품은 적도 없다. 그러니 실망할 일도 없는 게 맞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글픈 건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괜한 생각을 하는구나 싶어 고개를 흔들며 하나 남은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더 이상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음악 소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 나누는 소리도 뚝 끊겨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아래층과는 다른 세상인 것처럼 이영이 서 있는 곳은 적막하고 어두웠다. 그녀는 복도 저편을 밝히고 있는 작은 불빛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 불빛은 무엇일까. 그녀는 이곳에 오던 길에 보았던 등대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 등대에서 새어 나온 불빛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뒤를 이었다.

이영은 가만히 바라보던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옆으로 나 있는 창문을 향해 돌아섰다. 어두운 밤하늘, 그 아래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가 보였다. 항구에서 얼마나 멀어진 걸까. 돌아가고 싶어도 바다 한가운데에 있으니 불가능한 일이다. 하기야 제게 돌아갈 곳이 있는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문득 한기를 느끼고는 두 팔을 엇갈려 어깨를 감쌌다. 스물셋. 이제는 저 홀로 살아갈 수도 있을 나이인데, 그러지 못하는 제 처지가 한심했다.

남에게 드러나는 부분을 예민하게 신경 쓰는 그녀의 아버지, 현익은 결코 이영이 저 혼자 독립하여 나가 사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과 한집에서 살아가는 게 그녀에게 얼마나 지옥 같은지, 아마도 그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으리라. 이영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다시금 창밖의 바다 어딘가를 응시했다.

중학생 때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된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그 모든 걸 부정하며 가족의 일원이 되고 사랑받기를 소망했다. 어릴 적부터 저를 냉대하였던 어머니, 한정숙이 왜 그리도 제게 모질고 차갑기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걸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노력하면 좋아지지 않을까.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예뻐해 주지 않을까.

겨우 중학생에 불과했던 이영은 헛된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생모가 따로 있다는 걸 알고 난 이후, 더욱 절박해졌던 것도 같다. 언젠가 그들에게서 내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 간절히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 모든 기대와 바람을 버리게 된 건 그 뒤의 어느 날 밤이었다.

이영은 순간적으로 입술을 꽉 깨물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깊숙이 묻어 두었던 악몽을 기억해 낸 자신을 저주하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한번 떠오른 기억은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 감각이 바로 제 몸을 훑던 이복 오빠의 손길을 연상시켰다.

싫어! 더 이상 생각하지 마!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바람에 단정하게 올렸던 머리가 흐트러지면서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영은 그런 제 모습을 인식하지 못한 듯 파리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거듭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계단 쪽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밀회를 즐기려는 이들인지, 흥분에 젖어 든 신음 소리가 그 사이사이에 섞여 들렸다. 이영은 귓바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황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난처해지겠단 생각이 이어지던 찰나, 그녀의 눈에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이영이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바깥쪽에서 낯 뜨거운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문고리를 꽉 잡은 채 민망함에 달아오른 제 뺨을 다른 손으로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행히 문밖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점차 작아지는 듯싶더니 이내 뚝 끊겨 사라졌다. 그 소리의 주인공들이 복도를 지나서 어느 룸에라도 들어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안도하며 숨을 크게 내쉬다가 이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참석하기 싫은데 억지로 왔더니 별일을 다 겪는구나 싶었다. 이영은 한 번 더 피식 웃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바로 앞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실내가 어두웠다. 그녀는 전등 스위치를 찾기 위해 벽 쪽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스위치가 다른 데에 있는 것인지 손끝에 닿는 것이라고는 그저 차가운 대리석이 전부였다.

뭐, 굳이 전등을 켤 필요는 없으니까.

그녀는 전등 스위치를 찾으려다가 포기하고는 방 안으로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차라리 잘됐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래층에서 있어 봤자 사람들 때문에 피곤하기만 할 테니 말이다.

파티가 끝날 때까지 그냥 이 방에서 쉬고 있으면 되겠어.

이영이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두운 탓에 보이지 않았던 실내가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 저, 죄송합…….”

아무도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선객이 있었나 보다. 달빛이 들어오는 창문 바로 앞에 남자가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 와인 잔이 들려 있는 게 뒤이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술에 취한 남자인가 싶어 이영이 저도 모르게 경계하며 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반대쪽에서 여자의 앓는 듯한 신음이 들렸다.

“아으으…… 흐읏.”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여자의 신음이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이영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뒤이어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어, 마, 말도 안 돼…….”

비릿한 피 냄새가 뒤늦게 코끝을 자극했다. 이영은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지 않아 바들바들 떨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만 달싹이는 입술 사이에서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가쁘게 들이쉬는 숨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이어졌을 뿐.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영은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바로 뒤까지 다가온 이가 그녀를 향해 몸을 숙이기라도 한 것인지 관능적이면서도 서늘한 느낌의 향이 물씬 풍겼다.

“세상에는,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는 하지.”

나직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이영은 제 뒤에 서 있는 남자의 존재에 얼어붙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에 애당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어, 어떻게…….”

이영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기다란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제 뒤에 있는 남자와 비슷한 체구로 보이는 다른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허벅지 위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기대어 앉아 있는 여자. 그 모습만 보면 조금 전에 올라온 남녀처럼 남들 시선을 피해서 밀회를 하러 온 이들인가 하고 여길 수도 있을 테지만, 실상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엄습했다. 코끝을 건드리는 피 냄새 때문이었다.

이영은 불안한 시선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여자의 드레스가 다리 위쪽까지 올라간 터라 하얀 허벅지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이영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 건, 그 뒤쪽에 앉아 그녀의 턱 언저리에서부터 목덜미까지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남자의 손길이었다.

성적인 의도를 품은 기색이 역력한 손길은 너무나 위험해 보였다.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지금 주위에 진동하는 피 냄새가 바로 남자가 어루만지는 여자의 목덜미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이영은 제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잘 알았다. 이 크루즈에 탑승한 이들 중 신원이 불확실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합의에 의해 문란하고 난잡한 밀회를 즐기는 건 몰라도 지금 제 생각처럼 위험한 범죄를 저지를 사람은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떨쳐 내는 게 힘들었다.

“이해하기 힘든 일들도 종종 벌어지고 말이야. 이를테면 ‘뱀파이어’ 같은 존재가 버젓이 활보하고 있다거나.”

등 뒤에 있던 남자가 이영의 생각을 구체화시키듯 대신 말을 꺼냈다. 그녀는 남자의 말에 놀랄 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영의 뒤쪽에 있던 남자가 어느새 다가와 그녀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고정하듯 감싸 쥐었다.

……채, 서원?

제 앞에 있는 남자는 서원이였다. 아까 기석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저를 도와줬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가 왜, 아니, 그가 어떻게 이곳에……. 이영이 저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 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서원이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서 또 보네, 공이영.”

“채 차장님…….”

“또, 차장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네 직장 상사도 아닌데 그런 호칭은 좀 아닌 것 같지 않아?”

웃으며 농담처럼 건네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웃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앞에 펼쳐진 상황이 이영으로 하여금 웃을 수 없게 했다. 그것을 눈치챈 서원이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상황이에요?”

이영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간신히 물었다. 질문을 받은 서원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제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내가 장소를 가려 가면서 섭취하라고 했잖아.”

“누가 이렇게 불쑥 들어올 줄 알았나.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분명히 이 방에 결계를 쳐 놓았는데.”

소파에 있던 남자가 희한하다는 투로 대꾸하더니 이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제 앞에 쪼그려 앉는 남자를 보고 나서야 그 역시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장도준. 서원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는 저를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짓는 도준을 쳐다보다가 다시 서원을 보았다. 서원은 그때까지도 이영의 턱을 감싸 쥐고 있다가 싱긋 웃더니 손을 놓았다. 세게 잡혀 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턱 주변이 얼얼했다. 이영은 한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몸을 뒤로 물리고는 재차 소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소파 위에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어깨가 훤히 드러난 와인색 드레스가 흘러내린 탓에 가슴의 둥그스름한 둔덕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영이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간신히 여자를 향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서원과 도준, 두 사람 모두 막으려 하지 않았다. 이영은 뒤에서 저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꿋꿋하게 걸음을 옮겨 여자의 앞에 섰다.

여자를 내려다본 이영의 시선이 흔들렸다. 주위가 어둡기는 했지만, 서원이나 도준을 알아본 것처럼 여자가 누구인지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기석과 함께 있었던 여자였다.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궁금해할 새도 없이 이영은 다시금 제 눈에 들어온 여자의 모습에 다급히 숨을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목덜미에 나 있는 두 개의 구멍과 그 구멍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였다. 조금 전에 장도준이 애무하듯 어루만졌던 그 자리였다.

커다란 개에 물리기라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스쳤지만, 개에 물렸다고 하기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개를 비롯한 짐승에게 물렸을 경우에 생길 만한 여러 개의 상처와 잇자국이 아닌, 그저 송곳으로 뚫은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구멍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설마 사람을 죽인 거예요?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경악한 이영이 서원과 도준을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저와는 아무런 친분도 없는 여자였다. 아니, 기석과 얽혀 있으니 되레 악연이라 해도 될 법한 사이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무 죄도 없는 여자가 범죄 피해자가 된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진정해. 여자는 멀쩡히 살아 있으니 안심하고. 피를 흘리고 있어서 보기에 좀 그런 것뿐이지, 몸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야. 뭐, 약간의 빈혈 증세는 나타날지 모르지만 아래층 내려가서 스테이크 몇 점만 먹어도 금방 회복될걸? 장도준이 그런 건 적절하게 조절해서 섭취하는 편이거든.”

다그쳐 묻는 이영을 달래며 서원이 도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도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아무렴, 내가 이 나이에 그런 것도 조절 못 할까 봐? 더구나 난 불교 신자라서 살생은 안 한단 말이야. 이것 봐요, 공이영 씨. 이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어날 테니 마음 푹 놓아도 돼요. 지금은 잠시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것뿐이니까.”

이영은 서원과 도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제게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여자가 죽은 건 아니라는 것.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차갑게 식은 제 이마를 손으로 꾹 눌렀다. 놀란 탓에 손끝이 바르르 떨렸지만 애써 덤덤한 척 행세하며 여자를 향해 몸을 숙였다. 다행히 목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말라붙어 있는 걸 보니 출혈이 더 이상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잠들어 있다는 말이 맞는 것인지 호흡 역시 평온한 상태였다.

이영은 여자에게 다른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을 내린 뒤, 그녀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어쨌든 남자들 앞에서 흐트러진 차림새로 자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상냥하기도 하지. 전 약혼자의 여자에게도 친절을 베풀다니.”

웃음기 섞인 서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어느새 그가 바로 옆에 다가왔다. 이영은 황급히 허리를 세우고는 그에게서 멀찍이 비켜서려 했다. 그러나 서원이 먼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도망가려고?”

“저, 이 손 좀…….”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이영은 덤덤한 척 굴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새하얗게 질린 채 서원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바르작거리다 말고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방금 그가 자신에게 한 말을 곱씹기라도 하듯 되새기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서원의 눈이 오롯이 그녀를 담은 채 호를 그리며 휘어져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데.

그녀는 새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 앞에서 바들바들 떨며 두려워하는 제 모습이 우습기라도 했나 보다. 이복형제들이 저를 괴롭히며 즐거워하듯이 말이다. 그것이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불쾌감이 치미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이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제 두려움을 떨쳐 내며 날카롭게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건가요?”

“대답 못 해 줄 이유는 없지. 아니, 굳이 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거 아닌가?”

서원이 입꼬리를 올린 채 선선히 대꾸했다. 이미 너는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잖아, 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에 그녀의 시선이 한차례 요동쳤다.

조금 전 자신이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 되살아났다. 여자의 목에 나 있던 작은 구멍 두 개. 그 구멍에서 흘러나온 핏자국. 그리고 여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도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인…….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마지막 단서가 제 존재를 주장하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두운 와중에도 새하얗게 빛나던, 결코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뾰족하던 송곳니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영은 몇 번이고 실룩이는 입매를 감추며 입술을 짓씹다가 다시 서원을 쳐다보았다. 이성과 논리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답이 입 안에 맴돌았다. 그녀의 그런 상태를 짐작한 듯 서원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대신 대꾸했다.

“그래. 뱀파이어야. 장도준도, 그리고 나도.”

“말도 안 돼. 미쳤어.”

서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영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서원의 뒤쪽에 있던 도준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 이거 재미있네. 안 그러냐, 서원아?”

그는 그때까지도 쪼그려 앉아 있다가 뒤늦게 다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서원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서원은 도준의 물음에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아예 그를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되레 이영에게 시선을 거의 고정하다시피 하였을 뿐.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너무 허황된 얘기라는 거 아시죠? 어린애들도 이런 농담은 유치하다고 안 할…….”

“농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이영이 재차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려는 걸 끊은 뒤, 서원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파르르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억지로 부정하고자 했던 공포가 막을 새도 없이 밀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끌어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속까지 한기가 몰아닥치면서 손끝이 곱아들었다.